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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너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엡 2:1-1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는 씁쓸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질 않으며, 조금 달라진 것 같아보여도 금세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나도 흔하기에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생긴 말입니다.
실제로 범죄자들이 출소하여 사회로 돌아왔을 때
교화되지 않고 다시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는 일이 흔하다는
현직 형사님들의 증언이 많다고 합니다.
모 명문대의 경찰행정학과 어떤 교수님은
살인을 저지른 고등학생 범죄자를 갱생시킨다며 옥중 뒷바라지를 해주고,
석방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출소 후에는 수 백 만원의 생활비까지 지원했지만
그 범죄자는 거금의 사업자금을 대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평생의 은인으로 모셔도 모자랄 그 교수님을
미리 준비한 회칼로 끔찍하게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이라며 거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과 공로가 아니면 구제불능의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갈 2:16-17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닮아서 어떤 상황에서든 화가 아예 나지도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다 용서가 되고,
그 원수들을 위해 중보기도까지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품은 자가 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 목적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단한 노력 끝에 이제 어느 정도 된 것 같다가도
누가 와서 또 건드리거나 과거의 상처가 드러나는 순간
욱하고, 억울하며, 분노가 치미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주차된 내 차를 심하게 긁어놓고 도망만 가도 혈압이 급상승하고,
누군가 일부러 나의 상처를 건드리며 조롱하는 말을 하면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집니다.
‘아, 이 상황이면 내가 화를 좀 내는 게 당연하지.’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분노와 원망과 미움이 일어나며, 사람에 따라서는 살의까지도 품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혈기와 분노와 증오를 의분으로 포장하여 합리화하기도 하는데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 예수님을 닮지 못함,
자기 자신을 ‘그래도 꽤나 괜찮은 사람’ 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남들과는 달리 장성함에 이른 거룩한 사람이기에 남들을 판단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는 문제에 원인이 있습니다.
롬 3:10-20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다 된 줄로, 즉 장성하여 예수님을 온전히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동안 본성과 감정과 기분을 잘 숨기고 지낸 것일 뿐,
화를 억누르면서 살아온 것일 뿐, 그동안 건드리는 자가 없거나 적었던 것일 뿐,
앞에서는 말 못하고 그저 뒤에서 수군수군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을 뿐
다 된 자는 없습니다.
숨기고 지냈든, 한동안 건드리는 자가 없이 평안해서 드러나질 않았든,
사회적 위치와 신분 때문에 가면을 쓰고 자신을 포장하며 살았든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는 말씀이 정확한 진단입니다.
전 7:20
(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아무리 선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앞에 가서 오른쪽 귀싸대기를 올려치면 즉시 본성을 드러내며 전투태세를 갖출 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왼쪽 뺨도 돌려 대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질 않는 것만 봐도
이 부분에 논쟁의 여지란 없습니다.
마 5:39-44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인격적으로 무시하며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깊은 상처를 헤집는 말,
부당한 대우, 억울하게 만드는 일 등
이런 상황들 앞에서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나타내는 자는
우리 중에 존재하질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꾹꾹 참기 때문에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속에서는 천불이 나고, 분노가 치밀고 있으며,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끙끙 앓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찰할 줄 아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전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옥백성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눅 9:23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전 15:31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유일한 방법은 날마다 죽는 겁니다.
매순간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새벽)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를 예수님 생각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잔인하게 죽인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며 회개했을 때만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자신의 더러운 죄들,
그 죄를 자의로 선택하여 범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예수님의 사랑과 공로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이제는 내가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 기억하면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용서 못할 일도 없습니다. 분노할 수도 없습니다.
용서를 못하는 것도, 분노하며 증오하는 것도
결국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으며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확고하게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주신 과거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계속 가지면서
정죄와 자괴감 속에서 괴롭게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저 용서를 받은 자, 즉 임금으로부터 큰 빚을 탕감 받은 자(마 18:23-35)의
마땅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당연하다는 듯이 또 화가 날 것입니다.
‘내가 그 때 시원하게 한마디 해줬어야 했는데 왜 못했지? 아오.’ 하며
잠도 못자고, 원통하고, 짜증나고, 우울해지고,
내가 당한 일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아예 상관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바보같이 당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결국 망가진 마음, 활활 타는 분노의 마음이 됩니다.
요 14:21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런 우리 자신의 모습, 아직도 예수님을 조금도 닮지 못한 마음,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속에서 적용하고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불순종의 모습,
자신의 기분을 철통같이 지키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인식하여
‘나는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구나. 조금도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인정을 하고,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먼저 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정죄와 자괴감 가운데서 완전히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속죄를 통해 받은 자유함 가운데에서
자책하여 쭈그러진 마음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행복을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중요한 점입니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사랑으로 내가 엄청난 죄들을 거저용서 받았다는 사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위치’를 매순간 잊지 아니하여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내 삶의 최우선 지침과 교훈으로 삼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나도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마 5:48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나는 그래도 남들보다는 나은 성장한 자야. 나보다 더 악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그동안 교회 다닌 세월이 얼만데...’ 라며 더러운 본성을 깊이 숨긴 채
자신의 의로움으로 온전한 모습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자신의 실체를 겸손히 깨달아 인정하고,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함, 죄로부터의 해방감 가운데
이제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 인내와 기쁨으로서 순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천지차이입니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에 걸려, 사회적 지위와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노력으로 감정을 억누르면서 살아가기에 겉으로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회칠한 무덤 같아 모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자와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순종과 인내로서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는
겉으로 볼 때는 비슷해 보일 수 있어도 최종열매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도달하는 곳도 천국과 지옥,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과 행위를 다 살펴보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아닌 척 할 수가 없습니다.
마 23: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음속에는 악독한 것들이 가득하지만
구원을 받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정말로 죄송하고, 감사해서 하나하나 인내하며 순종하다보면
나중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니 자신도 기뻐집니다.
예전이라면 불같이 화를 냈을 일에도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해집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자신의 삶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행복을 원동력 삼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며, 순종의 선순환입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각 사람마다 잘 되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진짜 죽어도 안 될 것만 같은 부분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즉 이마저도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되게 해주셔야 가능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예수님이 정답입니다.
우리가 매일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죽은 사람은 감정이 없고, 자기주장도 없는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롬 6:11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아 잔인하게 죽인 죄인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라는 명백한 사실, 구제불능의 인품,
겉으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꽤나 갖춘듯하여 교회에서는 인정받고 있지만
실상 그 안에는 욕심과 음란과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염려와 교만과 증오가 여전히 깊이 숨겨져 있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즉시 그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 다시 쉽게 죄에 가까워지는,
죄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기분을 가장 사랑하는, 너무나도 쉽게 분노하고 시기 질투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의 교훈과는 전혀 다른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호떡 뒤집듯 쉬우며,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의로워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보혈만으로서 다시 새롭게 될 수 있고,
깨끗해져서 의롭다 해주심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께 매일 감사하고, 매일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
예수님께서 기쁘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도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자.
이런 단계에 접어든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해주심을 받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될 복된 자들입니다.
눅 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매일 자신의 정체와 본성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인정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간구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해주심에 나를 내어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날마다 억지로가 아닌 즐겁게 지면서
순종으로, 순종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해주신 그 협착하다는 길,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좁은 문,
즉 ‘구원의 길’입니다.
‘아~ 이제 나는 다 된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성함,
그 성장의 과정을 다 마친 정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분이로구나.‘
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기에 이 부분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고전 10:12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매일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와 함께 동행해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 드립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며
사랑과 인내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바로
진리란 무엇인지,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예수님은 왜 꼭 와주셔야만 했는지,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란 무엇인지 등의 진리를
비로소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자로서 구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여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음,
겸손한 자기발견과 자신의 실체 인정, 회개와 돌이킴,
예수님의 말씀을 인내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가는 길이며, 이것만이 구원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험난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우리는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 못할 것을 해내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만 할 길, 목표를 먼저 인지하고
우리에게 임해주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주시기를 매일 기도하면서 한 걸음씩 순종하다보면
어느 은혜의 날에 되기 시작할 것이고, 하나 둘 해내다 보면
어느덧 우리를 데리러 와주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바보, 얼간이,
사람들이 흔히 쓰는 속된말, 빙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기쁘게 웃고 계시면 우리는 그걸로 대만족입니다.
누가 어리석은 자고, 누가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자인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증명되는 날,
우리의 모든 억울함이 신원되고, 숨겨진 모든 것들이 다 밝혀지는 영광의 그 날,
우리는 그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 머리 위에 얹어주신 면류관을 벗어 마땅히 받으실만한 예수님께 드리며,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당장 눈앞의 것만 보면서 감정과 기분을 따라 일희일비하고 나서
나중에 또 후회하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버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멀리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십시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진리의성령교회 가족 여러분
사람마다 자신이 겪어온 일들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처럼
저도 제 인생이 많이 씁니다. 그런데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초에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구제가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장본인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여 자신은 그래도 남들보다는 나은 자라고,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꽤나 성장한 의로운 자라고,
다른 흉악한 자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당해주신 거라고,
다시 말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고,
다른 사악한 자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처럼 아프게 못 박히신 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적 교만에 눈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의로움으로는 도저히 의로워질 수가 없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며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날마다 죽는 자의 모습으로 순종할 때에
비로소 구원의 길에 한 발을 내딛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기억하십시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제는 그동안 놓지 못해 뻐대던(버티던) 마음의 힘을 빼고,
겸손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십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질 않습니다.
딤전 1:14-17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새기고 즉시 삶에 적용함으로서
내가 바로 예수님을 처참하게 죽인 대역죄인, 괴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런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와주시어
나를 죽기까지도 사랑해주신 예수님을 늘 기억하고 감사하기에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자의 모습으로 사랑과 인내로서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고,
온전한 순종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
이제 정말로 머지않은 그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믿음의 결국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으로 확정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롬 6:12-2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경훈 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23.08.06. 주일설교
감사와 다짐의 노래
336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1. 여러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그 은혜를 잊었네
2. 죄악에 죽을 인생을 심히 불쌍히 여기사 저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3. 홍포를 입은 구주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저 십자가 높이 달리사 그 아픔을 참았네
4. 미련한 우리 인생은 주의 공로를 모르고 그 쓸쓸한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후렴]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잘 되지는 않습니다만... 오늘도 죽기를 원합니다.
또 내일도 죽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날마다 죽겠습니다.
매일 아침, 일상속에서도 매순간, 나를 죽기까지도 사랑해주신
사랑하는 예수님을 생각하시면서
끝까지 좁고 협착한 구원의 길을 기쁨으로 담대히 걸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