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운 시집
누구도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미화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권리의 유무를 무릅쓰고 무수한 문학들은 죽음을 미화했다. 꼭 한 번 만난 일이 있는 한고운의 이름을 지금은 시 몇 편으로 다시 만난다. 그를 만날 길은 그 길 밖에 없다고 한다. 내가 읽은 다섯 편의 그의 시 어디에도 죽음은 서성이지 않는다. 상큼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의 지배자, 샴'(고양이)을 만나고 '발길을 훔쳐가는 해운대 파도'(바다의 식욕)'를 만날 수는 있어도 어두운 영혼의 목소리를 만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득 그가 없다. 그리고 그가 영원 속으로 잠입하기 보름 전에 나의 시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을 청중 앞에서 읽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한다. 그는 덜 익어서 아름다운 영혼이다. 그는 오래 우리 귓가에 울림의 시를 전송하고 있을 것이다
이기철 시인(영남대 명예교수)
한고운 詩 속의 화자(話者)는 늘 관찰자다. 쉽게 정의(定義)하지 않는다. 누가 시간의 행간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나가는 에뜨랑제(etranger)의 시선으로 잠시 머무는 이 지상의 존재들을 살핀다. 그래서 시인의 눈길은 더욱 서늘하고 깊고 날카로워 시적 대상과 일정한 거리감까지 느끼게 한다. 그 대상이 나방이든 고양이든 나무든 사마귀든 고추잠자리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고층유리닦이든간에 영원할 수 없는 피조물들의 한계와 그 숙명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시편들은 지상의 모든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대한 유한자로서 동병상련의 애상과 연민의 눈길로 음각(陰刻)하는 시간의 판화(版畵)다!
김경민 시인
한고운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인 '나'는 이미 한고운의 타인, 즉 '이미 타인' 이었다.
즉, 한고운은 그의 시에서조차 그 '진정한 내적 자아' 인 아니마(anima)로서의 자아와 일치하지 못했는데 일종의 자기보호와 자기과시이기도 한 그것은 이 세상의 그 모든 우상에 대한 부정이며 거부의 몸짓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그의 시 속에서 한고운은 현실에서의 한고운하고는 이미 타인이었기에 그 자기동일성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든다. 천형(天刑)의 시인 한하운은 그 시 속의 시적 화자인 '나' 와 일치하는가?
그것이 고스란히 일치만 한다면 그 모든 시는 그냥 보고서일 뿐이다.
인간의 복잡성, 다양성, 심연 같음을 나타내는 한고운의 그러한 타자화된 자아는 인간에 대한 옹호며 사랑이고 믿음인 동시에 소망이다.
김영승 시인
고인이 된 한고운 문우의 생전 3년간 습작한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큰선생님이신
김경민 선생님이 고운이의 책을 출판 해 주셨습니다. 문우들이 시집 ‘나방, 혹은 공준보행자’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발문에는 이기철 선생님, 김경민 선생님, 김영승선생님, 시해설을 김영승선생님 께서 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