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명상
나는 이렇게 금강경金剛經, Vajrasutra을 읽었다 1
글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1. 번뇌 부숴 지혜 얻는다
먼저 경 이름의 vajra는 벼락,금강석(다이아먼드)의 두 뜻이 있다고 한다. 첫째, 나쁜 마음 곧 번뇌를 벼락같은 에너지로 때린다,바순다,무너버린다는 뜻이다. 둘째,나쁜 마음 부숴버리면 어느새 금강석같이 단단하고 빛나는 슬기(智慧)가 솟아난다는 뜻이다.
경의 원 이름은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Sūtra>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 곧 다이아먼드 같은 단단하고 빛나는 슬기 이루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중심 태고종,조계종에서 소의경전으로 채택하고 선사,강사,교수,법사들과 실제 의식(意識)을 형성하게 하는 중요한 의식(儀式)에서 많이 쓰인다.
사실 대승경전은 전과(全科)같은 종합경이기에 그렇지만 초기경전부터 강조한 상을 부수고 버리라는 가르침을 확장한 것이다. 게다가 이름이 지닌 뜻의 느낌이 매우 강력해서 쓰임이 많다. 게다가 죽은 뒤와 관련이 있는 염라대왕이 좋아한다는 설도 누군가 이야기해서 그렇다.
사실,염라대왕은 욕계 제3천인 야마천의 습합이다. 인도 전설에서 가장 먼저 태어나서 자연스레 가
장 먼저 죽은 이가 하늘 사람이 된 것이다. 땡감 먼저일 수도 있다는 말은 여기서 쓰지 말기로 한다.
2. 부처님을 세 번 돌고 한 쪽으로 앉다 右繞三匝 退坐一面
부처님께 다가가서 부처님 발에 닿게 절하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예절, 인사, 에티켓의 기본은 상대를 공경하는 행동이다. 눈짓, 입짓,몸짓이 모두 그 대상을 공경한다. 눈은 상대를 바로 보지 않고 아래로 뜬다. 살짝 감듯이 하지만 특별한 한 집단은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눈이 끝까지 상대방을 향한다. 군인의 인사 곧 경례다. ‘전투와 작전 실패는 용서
해도 경계 실패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 말이다. 전쟁의 시작과 끝이 경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사람 아닌 동물도 비슷하다. 출발은 상대를 공격해 죽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생의 맹수들도 공격하지 않고 순종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다. 눈은 상대를 피한다. 네 발을 하늘 쪽으로 향하고 누워 상대가 만족하기를 기다린다.
불교의 절은 이마, 양 팔꿈치, 양 무릎 등 다섯 군데를 땅에 대는 오체투지례로써 예를 다한다. 이 자세로는 절대로 상대를 공격할 수 없으니 가장 공경스런 자세다. 그래서 손을 뒤집어 받드는 동작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불교의 부처님 또는 어른 스님을 뵙는 인사가 금강경 등 경전에 나온 것이 부처님 발에 절하고 부처님을 세 번 돌되 오른 쪽으로 돈다. 바라, 작법무를 출 때 요잡바라가 그 동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른 쪽이라기보다는 존경의 표현으로 걷어 내린 오른 쪽 어깨를 부처님 쪽으로 보이며 도는 것이다. 그리고 안부를 묻고 전하고 한 쪽으로 앉는다. 대개 평지에 앉을 때는 온 방향으로 부처님을 마주보고 앉는다. 그래야 편리하게 자리를 정돈할 수 있다. 앉아서 설법을 듣거나 참선을 시작한다.
3. 상相,sanna,frame을 지니지 마라
그(그미)가 지닌 생각(意識)이 그(그미)를 드러내고 규정한다. 그래서 틀에 갇힌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딱딱한(地), 축축한(水), 따순기(火), 가고 서는기(風), 풀은 풀, 꽃은 꽃, 나무는 나무, 벌레, 짐슴, 사람은…그들의 생각이 있다. 전과(全科)가 나오는 까닭이다. 단방(單方)약 나오다 모아지면 복방(複方)이다. 전과, 사람이 복방이다. 사이버그, 책봇 앞에 서는 그 높이의 맘눈(心眼) 밖에 뜨지 못 한다. 그래서 그 정도 상으로 살지 말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는 틀 곧 프레임에 갇히지 말라는 뜻이다. 사이버그, 책봇 앞에서는… 그 높이의 맘눈(心眼)밖에 뜨지 못한다. 그래서 그 정도 상으로 살지 말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는 틀 곧 프레임에 갇히지 말라는 뜻이다. 금강경에서 붓다는 가르친다. 그것도 수보리에게...수보리(須菩提)가 누구인가? 세상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그만의 정체성은 없다는 것 곧 공성(空性,sunnyata)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송받은 제자 아닌가? 정체성(我相, atman)이 있다는 생각 말라. 사람성(人相,pudgala)이 있다는 생각 말라. 어리석음성(衆生相)이 있다는 생각말라. 정체성 지니고 죽어 다시 이었다는 생각(壽者相)을 말라.
모두 다른 이름을 써서 다르게 느껴져서 혼선을 빚는다. 이○○, 김○○, 박○○이라 달리 부른다 해서 그 가운데 하나라도 사람 아닌 이 있는가? 한국인, 동양인 아닌 이 있는가? 이 넷은 각기 달라보여도 같은 뜻이다. 설명을 더 보태보자. 정체성(我相)이 있다고 잘못 생각해서 윤회한다. 사람성(人相)이 있다고 잘못 생각해서 사람으로 어리석게 태어난다. 중생의식(衆生相)은 설명할 필요 없겠지? ‘군인의식, 경찰의식’.. 처럼 이름이 곧 내용이다. 중생이라 다시 태어나 숨(壽)이 붙어있는 이라는 의식 곧 태어난 의식 자체가 중생의식이다. 이 넷이 있으면 보살(菩薩, bodhisattva)일 수 없다. 보살 단계 거치지 않고 붓다로 건너 뛸 수 없음은 두 말 할 필요 없다.
4. 토대를 어디에 두나?
머물지 말라應無所住
이제까지 나의 생에서 가장 슬기로운 때는 언제일까? 이제, 바로, 지금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지식,경험이 높으니 슬기롭다. 그럼 남아있는 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때는 언제일까? 이제, 바로, 지금이다.
지식, 경험이 낮으니 어리석다. 그렇다면 머무른 마음은 언제, 어떤 마음일까? 머무른 마음은 어느 시점까지의 지식, 경험으로 판단하는 버릇을 말한다. 다른 말로 선입견(先入見), 편견(偏見)이라 할 수 있다.
선입견, 편견이 없으면 슬기롭다. 실제로는 제대로 알아야 곧 깨달아야 슬기롭지만 머무름 없이 낸마음 곧 생각은 슬기롭다. 그래서 토대를 어디에 두고 그 마음을 슬기롭고 어울리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가지기 마련이고 제자나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게 된다. 그 물음의 답이 바로 유명한 금강경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머물지 말고 생각하라, 끊임없이 생각하라는 말이다. 사실은 머물 수가 없다. 머무른 마음은 어느 때, 어느 곳의 마음이라...머물지 말라는것이다. 머문 마음은 선입견, 편견일 수밖에 없다.
5.어떻게 베풀어야 하나?
나누다와 베풀다는 말이 있다. 높낮이 수평으로 보면 나누고,층하가 있게 보면 베푼다고 느낀다. 금강경의 주제 곧 상(相)을 없애서 상이 없는 상태로 베풀라고 한다. 상을 없애는 것을 넓게 편 이야기가 법에 머물지 말라(不住法)고 나온다. 이어서라기보다 함께 묶여나오는 이야기에 색, 성, 향, 미, 촉의 감각의 대상이 지각의 대상인 법과 함께 하라고 한다.
우리가 느껴아는(感知) 과정을 살펴보면 눈, 귀, 코,혀, 살갗, 마음(意)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알게된다. 눈, 귀, 코, 혀, 살갗,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아는 것이 아니라 눈, 귀, 코, 혀, 살갗, 마음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살갗을 몸이라고 통칭했고, 아는 대상을 법이라 하고 아는 작용하는 기관을 마음이라 했는데 과정과 지닌 뜻이 여럿이다 보니 이해하기가 어렵다.
법은 마음으로 지각하는 현상이고 그 속에서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마음은 심(心, citta), 의(意,mano), 식(識, Viññāṇa)의 세 가지로 써왔는데 생각, 마음, 앎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몸 전체 또는 일부 살들의 가장자리를 살갗이라 하고 어떤 것들을 느끼기 앞서 닿는다는 표현으로 쓴다. 몸(身)으로 쓰기에 좀 가르기 어렵다.
주제로 돌아가서 보자. 나누든 베풀든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받는 이도 좋고 주는 이도 좋다. 여기서는 주는 이에 관련된 이야기다. 주는 이가 좋으려면 상에 매이지 말아야 하고 그것은 눈귀코혀살갗마음으로 물질느낌, 소리, 냄새, 맛, 닿음, 현상(법칙)에 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감각이라고 표현하기보다 감, 지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까닭이다.
이렇게 매이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나, 사람, 뭇삶, 돌이삶숨(輪廻壽)이라는 중생의식을 없애고 나누고 베푸는 대상이 곧 나라는 감,지각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머묾 없이 베풀게 된다. 이웃종교의 시각으로 본다면 모두가 형제자매 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삶은 머물지 않는다(妙行無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