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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공격에 대한 욥의 답변
욥기 24:1-4, 18-25
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2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
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1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욥은 모든 소유뿐만 아니라 자녀 10명을 단 하루에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번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났습니다. 이 일은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한 후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 저지른 무서운 악행들입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끔찍한 재앙을 보고 1주일을 욥과 함께 있으면서 서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은 욥과 그 가정에 이런 무서운 재앙을 받을 만한 끔찍한 죄악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욥이 친구들의 위로를 받고 싶어서 “차라리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제 빨리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탄식하자 곧바로 욥을 공격합니다. 즉, 지금은 탄식할 때가 아니라 네가 지은 죄악을 토설하고 회개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토설하고 그 죄악을 회개하고 삶을 고치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베푸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으로 하여금 그가 숨겨 놓은 무서운 죄악들을 낱낱이 토설하게 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복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6-7)
엘리바스의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네가 거지가 되고 열 자녀를 다 잃고 온 몸에 악성 종기가 생겨난 이런 끔찍한 재앙을 당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은 것일세. 무서운 죄가 없다면 이런 일이 있겠는가? 숨긴 죄가 없이 정직하다면 이렇게 자녀들이 죽고 패가망신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어떤 영을 만나서 음성을 들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에게까지도 허물을 찾으신다고 말하였다네. 그러니 하루살이 같이 쉽게 짓눌려 죽을 수 밖에 없는 흙으로 만든 인간이 무서운 죄악을 저지른다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는가?”
그리고 계속 말합니다.
“네가 지은 죄악을 토설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아도 소용이 없을 걸세. 죄악을 숨기고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시겠는가? 네가 천사들 중 누구에게 부르짖더라도 네 말을 들어줄 자가 있겠는가?”(참조, 욥 5:1)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이 넋두리하며 탄식한 것에 대해 욥이 하나님께 분노한 것이라며 몰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공격하는 말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욥을 앞에 두고 빗대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데는 강력한 의도가 있습니다. 즉, 욥이 숨기고 있는 죄악을 토설하게 하여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엘리바스는 그가 죄를 토설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셔서 다시 이 세상의 복락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자, 엘리바스의 말을 5장 2절부터 7절까지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이 태어난 것에 대해 탄식한 것과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을 듣고 그를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욥 5:3).
3절은 70인경의 번역에 따르면, 엘리바스가 경험한 것을 살펴보니 “미련한 자가 잠시 뿌리를 내렸지만 갑자기 그의 집안이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과 5절은 엘리바스가 경험에 근거하여 언급한 3절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그는 그 증거로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4절).
이것은 욥이 순식간에 자녀 10명을 잃은 사건을 빗대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욥 1:18-19).
5절은 욥이 모든 소유를 잃은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욥 5:5).
이 내용은 욥이 하루 사이에 모든 재산을 잃고 쫄딱 망한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욥 1:14-17)
그리고 엘리바스는 욥이 숨긴 죄를 토설하도록 자신의 논리를 강조합니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6-7).
지금 엘리바스의 이 말은 재앙의 원인은 티끌이나 흙이 아니라 인간의 심각한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미련함과 어리석음과 시기와 분노 때문에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악하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반드시 재난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불꽃’을 말합니다. 7절에서 ‘불꽃’은 히브리어로 (버네-레쉐프)인데 그 뜻은 “번개를 던지는 천사들”입니다. 이때 천사들이 던지는 번개를 맞는 사람은 역병과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소위 천벌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동일한 표현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시편 78편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시 78:43, 48-49)
같은 단어가 구약 성경 여러 곳에도 나옵니다.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신 32:22-2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합 3:3-5).
지금 엘리바스가 발설하는 이 모든 내용은 욥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개를 던지는 천사들”을 시키셔서 욥의 가축과 종들을 불로 살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욥이 이 말을 들을 때, 그는 엘리바스가 무엇을 빗대어 말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즉, “욥 너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이렇게 망하였다. 그러니 무슨 죄를 지었는지 토설하고 회개하라”는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압니다.
이제 5장 8절 이하는 엘리바스의 회유입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며 그에게 발생한 재앙들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거나 의탁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숨기고 있는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그의 허접한 신학으로 이렇게 확신한 것입니다.
이제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말하며 욥의 처지를 더욱 궁지로 몰아갑니다. 즉, 토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욥을 다그칩니다.
“자, 욥 보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가?”
[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욥 5:9-14)
하나님의 일반 섭리에 따르면 욥은 교활한 자이며 간교한 자이고 이에 그의 손은 성공할 수 없으며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였지만 자기 꾀에 빠져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낮에도 어둠을 만나고 대낮에도 밤처럼 더듬는 비참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계속 말합니다. 이런 고난이 욥에게 발생하는 이유는 욥의 악한 죄성을 고쳐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 여기지 말고, 숨겨 놓은 죄악을 토설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이 땅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다시 과거처럼 잘 먹고 건강하게 살도록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벌어진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엄청 사랑하시며 믿고 칭찬하셨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하게 되면서 허락된 고난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로 욥을 회유하며 그가 죄를 토설하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
[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업신여기지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욥 5:17-27)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 엘리바스는 욥의 죄악을 한 가지 추측하여 고발합니다. 그는 간접적으로 욥의 죄악이 착취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15-16절입니다. 그는 한쪽으로는 욥을 빗대어 정죄하고 다른 쪽으로는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욥 5:15-16).
즉, 욥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기 전에 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지만 하나님은 욥의 손에서 가난한 자를 구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하는 자가 스스로 입을 다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해 입을 벌릴 때부터 이미 이러한 추정을 빗대어 언급하였습니다.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욥 4:10-11).
여기서 욥을 빗대어 말한 사자는 파괴적인 성향을 지난 악인과 죄인을 상징하며 특히 사냥감을 입에 물고 목을 빳빳이 세운 사자의 모습처럼 회개할 줄 모르는 악인을 상징합니다. 또한 젊은 사자, 어린 사자, 암사자 등은 욥의 가족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욥의 가족은 뭔가 숨기는 죄악이 있는 악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과 그 가족이 악인들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간섭과 심판에 의해 소유물을 다 잃고 멸망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런 추정은 그가 이미 소발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였음이 소발의 주장에서 드러납니다. 소발의 경우는 추정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욥을 고발합니다. 욥기 20장입니다.
[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
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
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
26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욥 20:1, 4-7, 15-19, 26-29)
아! 어찌 이리도 독하고 무섭고 악하게 말하는지요! 그것도 쫄딱 망한 채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불쌍한 사람 앞에서 이런 저주를 하다니요! 이런 말이 어찌 선량한 주의 백성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엘리바스는 욥에게 세 번의 공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욥이 엘리바스에게 최종적으로 대답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욥은 악인들에게 지금 당장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탄식합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공의로운 심판의 때를 지금 당장 나타내지 않으시는가 그를 아는 자들이 어느 때까지 그 날을 보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가!”
욥은 이 말 한마디로 자신이 얼마나 오해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억울한지를 말하면서 당장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서 쫄딱 망했다고 몰아가는 마당에 욥은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주의 심판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외칩니다. 이러한 탄식은 욥의 양심에 거스르는 어떤 큰 죄악이 없음을 가장 분명하게 입증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나타나지 않아 보이는 부조리들을 고발합니다. 악인이 오히려 번영하고 있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증명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엘리바스의 허접한 신학을 허무는 증거들입니다.
어떤 힘있는 악인은 땅의 경계표를 강제로 옮기면서 더욱 부자가 되고 힘없는 사람들의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어떤 형통하는 악인은 고아의 나귀를 빼앗아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고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냅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은 악한 지배자의 억압 때문에 폭력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약자로 살며 고통 받는 자들의 삶의 스타일이 5-8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늦도록 수고해도 아이들을 먹일 음식을 구하지 못합니다. 목숨을 간신히 연장하기 위하여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이 일을 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먹일 것이 없어 광야에까지 나아가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염려가 없는 날이 없으며 삶의 비참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형통하는 악인의 포도원에서 그 악인들이 먹다 남긴 포도를 따야 하며, 남의 밭에서 곡식을 베어주는 일을 하며 수고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의복이 없어서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야 하고, 추위에도 덮을 것이 없고 심지어 잘 곳도 없고 쉴 곳도 없어 산으로 올라가 바위 틈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바위 뒤에서 추위를 피합니다.
악한 자들은 심지어 어미 품에 있는 갓난 아이를 빼앗아 갑니다. 그 이유는 그 아이를 데려다가 노예로 팔아먹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젖먹이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부자인 악인들은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로 빼앗아가서 가난한 자들은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닙니다. 그들은 배가 너무나 고파서 남의 곡식 단을 몰래 훔쳐서 베지만 계속 주리게 됩니다. 만일 훔치다 걸리기라도 하면 악인의 발길질과 횡포와 폭력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억울하게 학대 당하는 자들은 담 안에서 기름의 맛도 보지 못한 채 남의 기름을 짜며 물 한잔 마시지 못하면서 술 틀을 밟습니다. 이러한 학대 받는 자들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과 병에 들어 신음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이제 욥이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의를 내버려두시는가? 왜 당장 이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그러면서 욥은 악에 속한 자들의 특징에 대하여 논합니다. 그들은 빛을 배반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대적자들이고 양심을 저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진실과 공의와 정직을 발로 차버린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그들은 계속 불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어갑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들이요,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을 벌레 죽이듯이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행음하며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낮을 싫어하고 밤을 기다리며 얼굴을 감추는 자들입니다. 강도들은 어두움과 친구이니 어두워지는 때가 그들의 아침입니다. 그러나 낮에는 실컷 잠을 잡니다.
이렇듯 사악한 자들이 사회의 도덕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비웃는데도 징벌을 당하지 않은 채 이 땅에서 버젓이 살아가며 심지어 형통합니다.
이렇게 현실적인 부조리를 언급함으로 엘리바스의 ‘이 땅에서의 인과응보’라는 허접한 신학을 무너뜨린 욥은 자신이 믿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본문 18절 이하입니다.
“악인들의 형통은 신속히 지나가고 그들이 착취하여 모아놓은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가져다 줄 것일세. 또한 스올, 곧 지옥이 범죄자를 어느새 재빨리 채갈 것이야. 따라서 악인은 반드시 허망하게 파멸될 것이야.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마저 손사래를 치며 멀리하며 잊고자 할 것이고 오직 지옥에서 나오는 구더기가 그들을 맞이할 것일세. 그런 악인은 어느새 다시는 기억되지 않고 꺾일 것이야.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불행한 여자를 박대하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악인이기에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이러한 강포한 자들을 땅바닥으로 끌어내시고, 심지어 곧바로 죽이기도 하시지. 사실 그들은 안전하게 사는 것 같더라도 언제든지 죽음으로 떨어질 것이며 잠깐 높아졌다가도 잘려 모아진 곡식처럼 천대를 받고 심지어 불에 타게 될 것일세.”
욥의 믿음에 따르면 악인들의 삶은 거품입니다. 그들의 모든 소유는 그들의 죄악의 증거들이요 저주의 증거들입니다. 가뭄과 더위가 흰 눈을 물로 만들고 나아가 그 물마저 마르게 하는 것처럼, 이러한 악한 자들은 그 존재마저 신속히 사라질 것입니다.
현재 그들이 부귀와 권력 가운데 있을 지라도 그들은 순식간에 생명을 잃을 것이요, 그들은 스스로 안전하게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진노의 눈, 심판의 눈이 그들 위에 항상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강해 보일 지라도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요 곡식의 겨같이 잘려 날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인들에게 함께 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이 이르기까지는 현실 속에서 부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욥은 말합니다.
그것이 25절의 의미입니다.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주장)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욥 24:25).
이것이 엘리바스에게 던진 욥의 최종 답변으로서 엘리바스는 더 이상 욥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이는 욥의 주장에 그 어떤 것도 그릇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주장은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한 진실한 묘사가 담겨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로움에 대한 믿음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의 말에 대해 최종 진단을 내리실 때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라 하셨고 또한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욥 42:8)며 거듭 말씀하심으로 욥의 말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사실을 신원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던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과 대화하는 중에 얼마나 무섭고 간교하고 무정하고 잔인한 악인으로 변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상처 받은 자를 조롱하며 멸시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모습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받은 가장 큰 시험은 율법주의에 속하였던 바리새인들로부터 오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간교하고 잔인한 혀로 가장 많은 방해와 도전을 던졌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그들 마음 속의 저의를 이미 파악한 세례 요한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들은 드디어 입을 열어 이유 없이 주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0-11)
예수께서 마귀들을 내어쫓으시며 병을 고쳐 주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가장 악독한 말로 노골적으로 공격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마 9:34).
그들은 종종 예수님께 주의 제자들에 대해 고발하곤 하였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선을 행함에도 그들에게 정죄 받았습니다. 이는 그들은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 12:2).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그들은 안식일 논쟁에서 할 말을 잃자, 놀랍게도 곧바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더라”(마 12:14).
그들은 항상 자기들이 만든 인간의 전통을 성경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1-2).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함과 완고함과 하나님께 거역하는 정신을 아시고 공개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누룩이라 부르며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
6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
12 …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 16:6, 12)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덫에 빠뜨려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고 간교한 질문도 던지곤 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 예수께 … 말하되 선생님이여 …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마 22:15-17)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시고 그들의 사악함을 드러내시며 답변하셨습니다.
[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 22:18-22)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간사한 마음 중심을 아시기에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시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것을 공언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그리고 마침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은 군중을 동요시켜 로마 총독 빌라도를 협박함으로 우리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성공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찾아와 온갖 조롱과 멸시와 도전의 말을 던졌습니다.
[
67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들 및 산헤드린의 모든 공회원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마 26:67-68)
특히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의 조롱과 악행은 더욱 심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을 조롱하고 비방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그가 십자가의 고통 당함을 당연시 여겼습니다.
[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욕하더라).
](마 27:27-31, 39-43)
심지어 평생 가장 무섭고 더러운 삶을 살아온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강도들마저도 예수님과 십자가에 같이 달려있는 상태에서 주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
더욱 슬픈 것은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마저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주 예수님을 떠났습니다(참조, 마 26:31; 요 16:32). 그들 중에는 심지어 예수님을 입맞춤과 함께 은 30세 팔아 먹은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세상에서 잘 나갈 때는 함께 했지만 그가 쫄딱 망하자 가룟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신한 것처럼 욥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이때 그들이 욥을 저버리는 정당한 근거로 삼은 것이 소위 율법주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용주의에 물들어 자기 영광과 유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립니다. 결혼 언약도 실용주의에 따라 낙서장처럼 쉽게 내다 버리고 이혼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기보다는 자기 세력 확장과 이 세상의 영광 을 위해 주의 이름을 이용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저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만일 믿음 때문에 사회적인 박해나 손실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신앙을 저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욥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욥의 주장처럼 이 세상에서는 ‘이 땅에서의 인과응보’ 원칙과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원칙이 맞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종 신자들은 믿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욥처럼 억울한 고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부당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가 우리의 믿음이 연단되며 시험을 이기고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복된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예수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보고 사도의 권면처럼 억울한 고난 가운데 더욱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욥처럼 ‘인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19-25)
그리고 히브리서 사도 역시 이유 없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 신자들에게 간곡하게 권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사도 요한 역시 같은 권면을 합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환난과 수치와 고난을 당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요 가족이요 백성으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여러 오해와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박해를 받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며 복이며 영광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 10-12).
바울 사도 역시 동일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욥기에서 왜 욥과 엘리바스 및 그의 두 친구와의 대화가 장장 4장부터 31장까지 스물 여덟 장이 할애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조롱 당하신 고통을 욥의 고통을 통해 헤아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욥의 답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그 이유는 말로 다 표현 못할 오해를 받으며 당하는 욥의 억울함과 고통이 제 마음속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 주 예수님의 삶과, 특히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6시간을 살펴보는데 예수님의 아픔이 와 닿으며 더욱 주께 감사하며 눈물 흘릴 수 있었습니다.
아! 참으로 욥기는 고난 당한 자들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욥과 그의 세 친구와의 싸움이 성경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과 한 마음이 되어 울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마귀의 간교한 속삭임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욱 그리스도께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항상 자라나야 합니다.
[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사랑안에서참된것을하여범사에그에게까지자랄지라그는머리니곧그리스도라
](엡 4:13-15)
오늘도 이 귀한 말씀과 함께 우리 모두가 더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주께 기쁨을 드리고 또한 믿음으로 충성하고 인내함으로 영광스럽고 온전한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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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