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19-21)
“My mother and my brothers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act on it.”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혈연관계보다 믿음으로 맺어진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가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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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임금에 이르러, 중단되었던 예루살렘의 하느님 집이 준공되어 봉헌된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며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을 세우고 하느님을 섬기는 전례를 시작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사명을 드러내시며 혈육의 가족보다 믿음을 실천하는 신앙의 가족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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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가 끝나고 사흘이 되어서야 당신을 찾으신 부모님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며 부모님을 섭섭하게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혈육의 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에 정열을 쏟으시느라 정신이 없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자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은 걱정이 되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어머니를 친척들에게 맡기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셔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도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어야 할 마음을 지니시고,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할 행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늘 어머니를 염려하신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더 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집을 떠나시어 세상 속으로 나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믿으셨기에 아드님이 가시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가족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가족 사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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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사흘 만에 부모를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말씀하셨지요. 오랜 시간 애가 탔을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장차 하느님 일을 할 때 부모라는 혈육의 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고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이런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그 옛날 섭섭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셨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효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육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아들 예수님에게 닥칠 수난과 죽음을 육친의 정으로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모자의 육정에만 매달려 더 큰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가 육정에 매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큰 뜻을 이루는 관계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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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말하기 싫어합니다. ‘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는 답변을 피하려 듭니다. 질문 자체를 피곤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답할 수 있어야 삶이 분명해집니다. 답변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족입니다. 자녀와 배우자와 부모 형제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들이 ‘삶의 중요한 이유’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연만큼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기쁨으로 만드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엉망이라면 ‘주님의 개입’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가족 간의 일치는 주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이들은 계기가 주어지면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좋아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릅니다. 예기치 않은 변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핏 들으면 어머니를 외면하는 말씀인 듯합니다. 하지만 가족을 도외시하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를 어머니와 형제로서 맞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이 건네는 십자가는 언제라도 무겁고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엄마를 부탁해
-박기석 신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 ‘장미묵주’에는 다시 그 시작을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다.”라고 합니다. 엄마를 잃은 지 일주일에서 구 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엄마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엄마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장미묵주를 산 주인공 ‘너’는 성 베드로 성당 안에서 피에타 상을 봅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단아한 모습에 꼼짝없이 얼어버린 주인공 ‘너’는 “어미 됨을 부정당하고도 아들의 주검에 무릎을 내준 여인”을 통해 엄마를 생각하지요. 그리고 성모님께 하고 싶은 말로 소설을 마무리합니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성모님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다.”(요한 19,27) 오늘 복음에서 아들로부터 어미 됨을 부정당하신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 그 아들의 죽음 앞에서야 다시 어미 됨을 인정받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결코 예수님으로부터 어미 됨을 부정당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드님으로 잉태하신 그 순간부터 이미 취하셨던 것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오히려 성모님께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 우리를 부탁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를 잊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더 끈끈하게 묶어놓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묵주기도를 한 번 더 바치고 싶습니다.
먼저 저의 축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특별한 축하 행사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시고 또 많은 선물도 받았답니다. 아마 부족한 제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와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제가 받은 선물 중에서 정말로 감동받은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어린이 미사 전이었습니다. 한 꼬마 아이가 제게 다가오더니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영명축일이시라면서요? 그래서 제가 신부님께 선물을 드리려고요.”
그러면서 어떤 종이 딱지 하나를 줍니다. 그런데 그 폼에서 정말로 아끼고 있는 것을 주는 것임이 느껴졌습니다. 즉, 이 아이는 자신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피카추 딱지를 축일을 맞이한 저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지요. 사실 저는 이 딱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딱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문방구도 가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과 딱지놀이를 해서 이 피카추 딱지를 얻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전혀 필요하지도 또한 관심도 없는 딱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딱지를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선물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카추 딱지는 물질적인 선물이 아닌 아이의 큰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의 선물인 피카추 딱지 한 장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드리는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기도와 선행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기도와 선행이 주님께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기도 한 번 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겠지요. 내가 착한 일 했다고 주님께 어떤 물질적인 것들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기도와 선행이라는 우리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단순히 인간적인 혈연 지연으로 얽혀있는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묶여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주님께 진정한 사랑을 선물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차고 남는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앞서 그 꼬마처럼 자기에게 있어 첫 번째의 것도 주님께라면 봉헌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사랑을 주님께 봉헌하는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은 너 자신을 근사하게 보이려는 싸구려 방법이다.(앨렌 애펠)
부끄러운 모정
-이난호-
1987년 12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부정 투표로 얼룩졌다. 사태는 ‘구로구청 점거’로 이어졌고 그 진압과정에서 내 아들과 동갑인 이 군이 구청 옥상에서 추락, 허리뼈가 으스러졌다.
바로 전해, 내가 처음 본 그는 해맑은 웃음 때문인지 대학 2학년인데도 소년 같았다. 그때 이 군의 어머니는 얼마 전 최전방에서 생을 마감한 이 군의 형에 대해 묵상했다.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 그의 집안은 이른바 최고위층과 선이 닿을 만해서 큰아들은 편한 군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본인이 이 검은 묘수를 단호히 거부하고 수순에 따라 배치된 곳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그 올곧은 아들에게 묘수를 부리려 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정을 고백하는 이 군의 어머니가 내 눈엔 초인이었다.
그리고 일 년 뒤, 이 군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아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이 몸과 마음 바쳐 구현하려 했던 것들은 얼마쯤 당겨졌을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셨다. 실행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말씀’은 그 실행으로만 비로소 ‘말씀’일 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수없이 듣고 읽고 묵상하며 끄덕였다. 그러나 그뿐, 나는 데모대에 끼어드는 내 아들에게 제발 앞장서지 말고 어물어물하다가 꽁무니 빼라고 줄기차게 주문하면서도 가책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집 아이들이 내 아이 대신 희생되기를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그랬지만 나는 이 군의 휠체어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님, 이 군의 저 맑은 웃음을 지켜주소서. 그가 희망했던 걸 기억하소서. 그리고 용서하소서.” 내내 이 군의 미소를 피해 눈길을 다른 데 두고 속으로 성호만 긋고 또 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전삼용신부-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단순한 인간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교회가 창조되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이 성령님 안에서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이 모든 창조사업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와 혼인을 하리라는 예언이 창세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 2,24)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와 혼인하게 될 신랑인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는 내용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한 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 인간의 육체를 취함으로써 세상에 오시기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냐?”며 어머니를 떠나십니다. 이는 이미 예고 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에서 예수님은 삼 일 동안 당신을 찾아 헤매던 요셉과 마리아께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시며 미래에 교회에 혼인하기 위해 당신들을 떠나셔야 할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정말 부모에게 매이면 참으로 아내와 혼인하여 한 몸이 될 수 없듯이 저도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참다운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처음으로 걸림돌이 된 것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저에 대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지라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못 꺼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약주를 드시고 기분이 좋으실 때 방에 들어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매우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시다가 새벽에 저를 깨우시더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허락하지 않으셔도 제 뜻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라는 말씀처럼 가족의 뜻이 하느님의 뜻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만이 제가 사제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저의 사제직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말하기를, 제가 보좌신부로 있는 성당에 오셔서 사무실에서 저의 어머니라 하시며, “삼용이, 여기서 말썽 안 피워요?”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인데 말썽 안 피우냐는 어머니의 말씀에 신자 분들이 웃으셨다고 합니다.
위신을 너무 세울 필요도 없지만 이렇게 위신이 일부러 깎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저는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가 있는 성당에 오시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사제가 되면 이제 신자들의 목자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어머니가 성당으로 저를 찾아오시면 마마보이가 되는 것도 같고 신자들 보기에도 좀 그러니 성당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제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내려갈게요.”
어머니도 이 말씀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사제관에 있는데 핸드폰이 왔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당에 저를 보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쯤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앞으로도 낫겠다싶어 전화로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고 다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찾아오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으로 사제가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려 한 것은 맞지만 이것이 하느님을 뜻을 따르기 위함이지 부모님이 정말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가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성모님을 업신여기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모님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실 때 아버지의 뜻에 “Yes!”하신 것은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의 고통까지 다 받겠다는 의미로 Yes를 하신 것처럼, 성모님의 Yes도 처음부터 구속자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미로 Yes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Yes, "Fiat!"은 예수님 다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가장 완전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셔도 성모님은 기분이 상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 없으니 당신만큼 어머니 될 자격을 지닌 사람도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혈육관계는 하느님을 앎으로써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에 그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이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서 교회와 혼인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났지만 마지막엔 교회를 아버지와 어머니 집에 데려와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하여 신부를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와 살게 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남이 결코 영원한 이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욱 행복한 가정을 위한 일시적인 떠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시적인 이별은 더 풍요로운 가족을 위한 것이니 오히려 부모님께 참으로 효도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했으니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부모를 더 공경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 당신들을 조금은 떠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자녀들을 놓아 주어야합니다. 결국엔 꼭 껴안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효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강성덕 목사 -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늘 나자렛에서 생활하던 예수님이 공적 복음전도의 일을 시작하신 뒤로 그렇게 자주 가족을 만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온 가족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복음 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다. 복음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으며, 그리고 힘든 여행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어떤 사람이 가족이 온 것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사도직은 모든 인간이 본연의 하느님 자녀의 모습, 곧 한 가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이 그리운 가족을 상봉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내 지역사회, 내 종교, 내 나라, 내 민족이라는 장벽 안에 우리를 가두는 때가 많다. 예수께는 아무 장벽이 없었다. 예수님은 죄인들, 이방인들,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그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하신 것이다.
한 아이를 위탁받아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아이가 이 아이의 보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친동생을 챙기는 것보다 더 열성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남다른 기쁨에 잠긴다. 우리 장벽 뒤에 있는 이를 내 가족으로, 다같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웃으로 받든다면 복음 정신에 좀더 일치할 수 있지 않을까?
- 최경용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짤막한 세가지 교훈의 말씀을 연결없이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부터 25절에는 이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 단절어를 설명해 봅니다.
먼저 이 말씀들의 상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명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첫번째 말씀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은 그릇으로 가리워지거나 침상 밑에 들어가 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듯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도 드러내야 할 것이며 때가 되면 밝히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은 당분간 사람들에게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 놓는 등경은 십자가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등불이신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두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나라 정치가들, 공무원들과 재벌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격언이 동서고금에 널리 퍼져있듯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은 없습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전파를 독촉하고 격려하기 위해 다른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6-27; 루카 12,2-3)고요.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어서는 부족합니다. 명백히 드러나게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와 금화의 비유 등으로써 복음서에 여러번 나오는 말씀입니다.(마태 25,29; 루카 19,26 참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리는데에 잘 활용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 큰 일을 하며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도 있고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격언도 있듯이 현재 영적인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더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가진 것마저 종말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연 사람은 더욱 더 그 신비를 잘 깨닫고, 마음을 닫은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 단절어를 통해 예수님의 교훈을 알아듣도록 합시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리는 신자일수록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가족
-최혜영 수녀-
요즘처럼 가족해체 현상이 심각한 때에 예수님께서 혈연가족의 경계를 넘어 신앙가족을 이루어가시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는 대안가족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캐나다로 이주한 초등학교 1학년 여자어린이의 작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가족의 비전을 봅니다. 교회와 가족 간의 연대를 통해 좀 더 건강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가족 모델을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의 엄마나 아빠가 아니어도 돼요. 당신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도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고아도 고아들로 만들어진 가족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 중에서 하나는 피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더 있을 수도 있죠. 그 가족은 그냥 많은 가족 중에서 한 가지예요. … 한 사람하고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가족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어요. 어떤 가족들은 당신이 태어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누군지 상관 없어요. 가족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가족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가족은 모든 사람들한테 있어요. 그래서 당신도 있어야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한테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누가 나의 가족인가?
-김덕진-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주고 30년 동안 길러준 어머니를 외면하고, 대신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이를 자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유교적 가족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기 딱 좋은 행동이다. 우리가 ‘가족’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흔히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인자하게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들과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의 그림이다. ‘화목한 가정’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습이 가족의 기준이고 올바른 모습인 것처럼 인식되는 일은 영 불편하다. 이혼이나 사별로 부모 한쪽만 있는 가정이 우리 주위에 매우 흔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기르는 비혼부모 가정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아이를 공개 입양하여 기르는 가정도, 함께 사는 한 부모가 재혼해 ‘피’가 섞이지 않은 부모나 형제 자매들과 살아가는 가정도 있다. 사회가 많이 변화했지만 ‘정상 가정’의 범주를 벗어난 가정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그러한 가정, 가족관계도 아무런 불편 없이 존중받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독하게 고집하는 혈통주의나 가부장적 구조를 깨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예수님이 풀어 나가시던 방식으로 따라 배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을 지키고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가족하고만 살 수 없는 것이 사회이기에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식들에게 먹이고 입히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세상을 위해서도 한번 시작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과 형제 되기
- 유영일 신부 -
우리는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런 사고는 처녀가 애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자기 합리화의 구실은 다 있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평소에 잘해 주다가도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걸리면 부모자식이건 부부사이건 소용이 없고, 법을 위반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대로 처리합니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혈연, 지연에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는, 공동체란 울타리가 있어서 좋긴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감정에 치우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감정이나 파벌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교포사목을 하면서 이 두 사회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나를 기초로 한 이성의 차가운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공동체 사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것이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개인 이기주의냐 집단 이기주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혈육인 어머니와 형제를 무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정을 함께 언급한 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랑에 바탕을 둔 공정으로 보완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될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6,63에서"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육이 없는 생명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고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신 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앞날에 대해 암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형제로 들어 높이십니다. 인간의 지위가 종에서 친구로, 그리고 형제로 상승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됨으로써 신적인 위치로까지 들어 높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코러스의 감동>
-양승국신부-
지난 2004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코러스’를 혹시 보셨나요? 함께 본 형제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수작(秀作)이다’, ‘왕감동이었다’, ‘꼭 우리들 영화’라며 좋아들 하더군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 문제성 많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신 선생님들께서도 꼭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학교가 영화의 무대입니다.
다들 날개 다친 참새같이 불쌍한 아이들뿐입니다. 토요일마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전쟁고아 페피노,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썽을 일으키는 모항주, 돌아갈 곳 없이 쓸쓸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의 학교에 미완성의 악보를 든 마티유가 사감선생으로 부임해옵니다.
기숙학교는 군대가 따로 없습니다. 안 그래도 부모사랑을 못 받아 삐쩍 마른 아이들을 교장은 병사 다루듯이 다룹니다. 잘못한 아이들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밥 먹듯이 아이들을 독방에 가둡니다.
마티유 선생은 출세지향적인 교장, 아이들을 위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 교장, 그래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교장에 온 몸으로 맞섭니다.
마티유 선생은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팽개쳤던 악보를 다시 손에 듭니다. 합창단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줍니다.
주인공인 사감선생 배역을 너무 잘 골랐더군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선생님, 머리가 시원하게 벗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욱 편안한 분위기, 대머리라는 아이들의 놀림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옥 같은 분위기의 기숙학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음울한 학교에 마티유 선생은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서.
잘못한 아이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들 편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음울하던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게 만듭니다.
마티유 선생 한명의 헌신으로 인해 어두웠던 학교 전체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과 희망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학교를 쫓겨나는 마티유 선생, 그러나 교장 선생의 지시로 인해 아이들은 작별인사도 배웅도 못합니다.
어쩔 수 없었던 아이들은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서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 뒤로 날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코러스’를 창공으로 날려 보냅니다.
오다가다 만난 아이들이지만 혈육 이상의 정으로 대하는 마티유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사랑, 보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모든 아이들을 내 친 자식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참 사랑은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변화시킵니다. 참 사랑은 모든 가슴 아픈 사람들을 내 가족, 내 혈육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과 형제 자매되는 법 - 이기양 신부-
예수님이 효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불효자이셨던 것 같습니다. 출생부터도 부모의 뜻은 전혀 개입이 안 되고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 부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소년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며칠씩 찾아 헤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장가를 가서 부모를 모신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모보다 먼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은 불효 중의 불효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효자였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쫓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이렇게 냉랭하고 섭섭하게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불효자이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가정이라는 차원에서는 가장 효자이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부모 곁을 떠났고, 생업까지도 뒤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쫓아오라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떠나온 집과 가족이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있는 고향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그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예수님께서 효자였는지, 불효자였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제인 제가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식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렇게 효자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옆에서 잘 모시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원의를 채워드리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불효자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다 집에 가면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치가 높고 또 많은 부분을 제일 먼저 저와 상의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의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사목자로 있으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맨날 집에만 가 있으면 그것이 바른 효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큰 효도일 것입니다.
저도 이럴진대 예수님은 효자 그 이상인 분이시지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며 요셉 성인 역시 천사의 알림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순응하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성가정의 가족들은 효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식에 대한 존경심을 당연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해서 이 모든 인간적인 인연을 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장 자랑스러운 분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은 섭섭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와 형제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는 말씀은 과거의 말씀만이 아니라 사목자인 제 안에서도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형제가 몇 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형제보다도 신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목자로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목위원들이나 구역장, 반장 또는 단체장들이나 주일학교 교사 등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들과는 저의 육적인 형제 자매보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성당 초등부 교사들은 모두 어머니 교사들입니다. 행사 후 수고했다고 1박 2일로 단합대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15~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남편 없이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가는 것이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이 있기에 남편이 보내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한 형제 자매임을 체험할 수 있었던 단합대회였지요.
예수님의 형제 자매 또 본당 사제의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해 나갈 때 새로운 형제자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봉사 직분에 더욱 성실히 임하고 항상 겸손된 자세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형제 자매이십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는 가족
-상지종신부-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만남의 하나의 장벽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찾아온 예수님의 가족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던 예수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 사이에 자리하여
가족들의 귀한 만남을 방해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야속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나야 한다.
만나게 해 드려야 한다.
혈연을 가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해야만 한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 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의 외침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족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 이 마음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때, 인간적인 것은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장벽이라고 생각했던 그 것
예수님께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
예수님께는 방해꾼이 아니라 한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테두리를 뛰어넘어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을 어머니와 형제로 받아들이셨을 뿐입니다.
복음은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적인 것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혈연 관계만을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를 제약하는 모든 인습적인 관계,
지연, 학연, 계층, 계급.....이 모두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이라는 기준으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기준에 따른 관계에 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관계들을 완성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관념적이 아닌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정의 실현 과정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 교회입니다.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부과된 여러가지 인간적인 제약을 깨뜨려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여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이혼할까요? 말까요?
-노우진신부-
결혼 생활을 15년 가까이 해온
40초반의 엄마와 6개월 정도 1주일에 두세번씩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이 처음에 나를 찾아왔을 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었다.
대화내내 눈물을 흘리며
"이혼할까요? 말까요?와 자살할까요? 말까요?"였다.
사실 그분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혼하고 싶지 않고, 자살하고 싶지 않기에 나를 찾아왔으리라.
그래서 긴기간 동안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이젠 가끔 전화를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 그분은 이혼도 하지 않으셨고
자살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내가 그분께 어떤 일을 행해서라는 말은 아니다.
그분이 이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 생활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외도 등도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15년 넘게 남편과 살아오면서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생활을 끌고 온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해결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기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쌓여온 슬픔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엄마처럼 감정적이 차원만을 생각하기가 쉬운 것같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이 늘 내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곁에 있으면 가슴 설레이고,
상대가 나의 어려움, 슬픔을 함께해주고,
나의 실수를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것이라고 이해가기가 쉬운 것같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바라는 그런 사랑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사랑의 차원,
즉 상대가 자유롭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어린 아이처럼 상대에게 바라기만 하기에
상대를 자유롭도록 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나무뿌리가 되는 것이고, 상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
이라고 말했나보다.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서로에대한 구속력을 갖는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자유로이
자신의 방식대로 훨훨 날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의미로 말이다.
이런 사랑의 두가지 차원을 모두 실현하려 애쓸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와있는 대로
주변 사람들, 즉 사랑을 실천하려 애쓰는 모든 사람들을
나의 부모,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벽을 열며
지금 온 몸이 마구 쑤십니다. 아마도 어제 일을 특별히 더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네요. 사실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 오늘 제3회 순교자 현양 대회가 열리거든요. 따라서 그 준비를 위해서 어제는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혀있고, 자고 일어난 지금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쑤시네요.
평소에 저는 스스로 일을 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례객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제 방 청소는 잘 하지 않지만 성지 청소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예초기로 풀을 베는 것은 물론, 각종 삽질에 곡괭이질까지 안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따라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성지에서 열린다고 해도 제가 준비할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요? 왜 이렇게 부족한 부분이 많던 지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현양대회 준비를 위해서 일을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지요. 평소에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해야 할 일보다는 스스로의 만족을 느끼는 일만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만약 이렇게 미진한 부분들을 평소에 조금씩 고쳐나갔더라면, 지금처럼 현양대회 준비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요. 중요한 일은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편한 일만을 하려 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구분을 지으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던 경우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이 구분을 짓나요? 내 편, 네 편.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그러한 구분으로 인해서 정작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한정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직접 말을 합니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즉, 어머니와 형제는 특별하다고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족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분리시키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로 엮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분을 짓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면서 한정짓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지금 구분 짓고, 한정짓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까지도 구분 지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분해서 차별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안에" 머물러야...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범주에 넣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이다. 복음의 같은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도 보도하고 있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그런데 이 병행대목들의 배치(配置)가 루가복음과는 다르다. 마르코복음은 이 대목을 전하기에 앞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3,21)고 함으로써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가 미쳤다는 말은 예수께서 혹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마태 12,24; 마르 3,22)
루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범주에 넣기 위해서 루가가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보도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11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되는 것이다.(15.1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가족관계는 이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가족관계는 혈통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나자렛에서 온 예수의 형제들은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모님은 예외이다. 성모님은 벌써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찍이 예수를 눈으로 보았으나(4,20), 예수의 실체를 보지 못한(4,22-23) 사람들이 아니던가?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밖에"(20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다. 보려는 사람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참 가족>(루가 8,19-21)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오늘 복음은 바로 말씀을 정성껏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까지 변화될 수 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혈연관계로 맺은 이들을 당신의 가족이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가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 관계만으로는 안되고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에수님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찾는 열성과 원의"가 있어야 한다. 루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사용한 동사는 "찾다."와"보다."라는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은 갈망과 원의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원의가 있는가? 모든 영성은 이 원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원의는 점 점 더 깊어지고 성숙되어 예수님의 가족으로 될 때까지 성숙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그들은 흡족하리니."(마태5,6)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배고픔과 목마름만이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하고 예수님을 찾게 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복음 묵상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이는 복음 묵상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인이라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만이 예수님의 가족으로까지 승화 될 수 있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분들과의 형제 자매들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의 어머니요 형제들로 바뀌어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의 위치는 밖에 서 있었다.
밖은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늘 밖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더 깊이 더 가까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밖에 서 있는 자세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하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잉태하고 말씀을 낳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성모님이시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낳으신 분이 아니시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천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낳으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을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때 형제가 될 수 있다. 즉 같은 일을 하는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제는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라 다 같이 하느님의 생명을 낳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가 6,35)가 되어 모두 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행은 항상 들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에서 이루워 진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는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고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우리가 말씀을 잘 들으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아서"(18절)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종한 것이다.
한 마디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8절)는 말씀으로 시작한 8장의 결론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말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성모님이시다. 루가가 제시한 마리아의 모습을 요약해보면
첫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이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첫 번째 자세를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걸음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1,45)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임을 선언하고 그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받아들인 말씀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가꾸고 노력하고 돌봄으로서 말씀이 점차적으로 꽃이 피도록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세 번째.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20) 아이를 잉태한 엄마는 태아의 양육을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항상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작업" 즉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네 번째.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51) 성모님의 마음에는 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빛을 받는다. 즉 좋은 땅이다. 즉 마리아의 삶은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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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