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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믿음(눅 17:5-10)
예루살렘에 가면 유명한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적군에 의해 예전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다 폐허가 되고 서쪽 벽만 남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에 와서 성전이 무너진 것을 슬퍼하고 성전 재건을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 통곡의 벽에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통곡의 벽, 틈 사이에 기도문을 써서 꽂아 놓고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웃지못할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체신부인 ‘베제크’에서 통곡의 벽 옆에 팩스를 설치해 놓고 전 세계에 그 번호를 광고한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기도 내용을 팩스로 보내면 수수료를 받고 통곡의 벽에 꽂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기도문을 꽂고 팩스를 보내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을 어떤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상숭배와 같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나의 대한 관심입니다. 여러분,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당이 써 주는 부적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더 소중히 여깁니다.
소위 “용하다.”는 소문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한 번 하기 위해서 지불하는 액수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액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당 앞에서 아무리 진지하고 아무리 거액을 헌금한다 하더라도 그런 행동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와 참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숭배는 내가 주체입니다. 내게있는 돈이나 능력으로 신을 달래고 얼려서 신의 뜻을 돌이켜서 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반면에 참된 신앙은 절대자 하나님을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날마다 내가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우상숭배의 진정한 차이점은 바로 변화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도의 이름으로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나의 돈이나 능력으로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한 믿음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셨고 하나님이 내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내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 깊이 새기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본문 5절입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지금까지 제자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사도들’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갑작스럽게 호칭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담고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는 요청이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복음 전파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후, 주님께 드린 요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들의 사역 현장에서, 그들은 예상치 못한 많은 경우들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고,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능력이요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주님의 대답은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대답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참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참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입니다(5-6절).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주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작지만 큰 믿음을 상징할 때, ‘겨자씨 믿음’이란 표현을 종종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겨자씨가 갖고 있는 생명력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겨자씨는 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생명력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다는 말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산 믿음이 있는가 하면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입니다. 믿음이 살아있지 않으면 믿음을 더할 수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그 믿음이 아무리 커도 절대로 더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커도 죽은 물고기는 잔잔히 흐르는 물에도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거센 물결이라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도 거대한 나무라 할지라도 죽어있다면 점점 말라 결국 어린아이의 발길질에도 쓰러집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절대로 마르지 않고 생명 활동을 해서 결국에는 크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산 믿음은 운동력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있는 믿음이란 영적으로 호흡합니다. 다시말하면 깨어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 드립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운데 감사함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내 영이 살아있다는 것은 내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들이 인격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뿐 만 아니라 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은 믿음을 말합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산 믿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포도나무 원가지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생명이 있는 믿음은 그것이 점점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다 산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가지된 나와 예수님사이에 무언가 가로막고 있으면 그 가지는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양분을 먹을 수가 없기때문에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막힌 것이 없습니까? 막힌 것이 있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쾌락, 명예, 재물, 근심, 허영심, 지식, 자식, 사람,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산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참 믿음은 이미테이션 믿음이 아닙니다. 모양은 그럴 듯한 장식용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붙어 있기만 하면, 믿음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언젠가는 큰 나무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7-9절).
7-9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밭에 가서 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수고하였으니 저녁 준비하지 말고 앉아서 먹으라.” 할 주인은 없습니다. 오히려 온 종일 밭에서 수고한 것은 수고한 것이고, 빨리 저녁 준비를 해서 주인의 시종 들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명하는 대로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9절에서도 “명한 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주님을 절대 신뢰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역시 주님이 원하시는 산이라야 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뽕나무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자꾸만 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은 순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일반적인 명령도 있고 각자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할 때 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에 돌아갔고,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가라고 할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주인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해야지 인정받는 종이지 자기 멋대로 하는 종은 제대로 된 종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로 가라고 할 때 순종했습니다. 만일 가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다른 시냇가로 갔다면 까마귀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부의 집으로 가라고 할 때, 가난한 과부의 집이 아니라 부잣집을 찾아 갔더라면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 기간에 기름병과 가루 통이 마르지 않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와 같이 불순종하면 순종할 때까지 징계하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순종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다 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순종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2)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2)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입니까? 물론 지금 예배의 자리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말씀이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주님의 말씀이 있는 곳인가?
아니라면 돌이켜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과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그 현장에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적이 일상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은 믿음을 더해주는 지름길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입술로만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순종입니다
3. 참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10절).
10절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본문에 보면, 주인이 명한대로 다 순종한 종에게 사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은 자신을 일꾼으로 써 주신 주인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때에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일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그 일을 감당했는데 무엇을 자랑할수 있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만큼 어려운 사역을 한 사도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 수많은 역경을 헤쳐나왔습니다.
(고후 11:23-34)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렇지만 그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자랑할 수 밖에 없다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정말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은 마땅히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공치사하면서 반대급부를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봉사할 때 항상 주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알아주신다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기대하다가 실망합니다.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가운데 이런 교훈이 있습니다.
(마 6:3-6)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칭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행한 것입니다. 저는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그래서 남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안에 그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분들이 많아서 위로가 됩니다. 힘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아주십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게 보상해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선 성도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낮추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내 믿음은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에게 필요한 참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 합니다. 죽은 믿음은 필요없습니다. 믿음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어야 만이 자라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모양만 그럴 듯한 모형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참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바로 순종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겸손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믿음을 더하여 믿음이 큰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