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 시인의 시집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약력
이화우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200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하닥』, 『동해남부선』이 있다.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E-mail: hopensun@daum.net
시인의 말
많은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가령,
꽃이 지고 난 나무나 풀들의 말을 간과한,
시간의 형체라든가······
내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안다.
만지고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
세상을 산다.
2024년 10월
이화우
사막, 그 뜻
너로부터 시작했던 걸음은 여기까지
동침했던 문맹과 침묵을 키우는 사이
젖었던 모래 사이로 주문들이 살아나네
어느덧 커져가는 무화의 무두질은
그림자로 빠져나간 껍질 잃은 물의 통증
부재를 끌어당기며 흔들리는 물의 갈기
투명한 응시의 무게 교접 없이 벗어나는
겉돌던 내부의 까닭 없는 불가능이
난해한 웅얼거림에 끌려가고 없었네
금령총
그런가, 말을 타고 시종이 인도하다
방울 깊이 흔들어 차사를 달래며
두렵던 빗장을 열고 그만 나선 부신 길
그림자 내던지고 다다른 이 먼 곳
깃털로 나부끼던 소리도 탈골되어
두터운 결구로 생긴 화두 같은 금붙이들
애미가 애비가 지체 높은 이사금이
껴묻힌 별 하나를 산통 끝에 내어주듯
캄캄한 슬픔 안에서 애가 타던 애장터
파두
고주파 안에서만 떨고 간 저 음역은
기록 없던 마음이 스며 번진 생의 지문
가늘고 오래 일그러진 무딘 칼의 본능이다
먼저 간 일이나 그렇지 않은 이유도
녹빛을 잇대며 영혼을 맞추는 일
어느 날 태몽 사이로 가끔 드는 비처럼
대치 중인 차가움이 쏟아지는 비문 위에
꼭 한번 물이 든 내 피를 덜어낸다
마지막 호흡을 멈춘 심장을 누가 친다
미래는 미래를
묵은 달력 한 장을 넘기다, 잠깐이다
몸은 벌써 여기에서 미래처럼 앉았는데
숫자는 다시 태어나 점점이 걸어간다
형제같이, 순간에 나눈 피도 아닐 텐데
키만 자꾸 웃자라 0과 1의 반복이다
반복은 두꺼운 껍질을 갉아먹고 상실한다
그림자를 지워가며 녹고 있는 오늘에게
머지않은 기억들은 태연히 적어둔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다 마른 과거 같다
난도
품속에 품지 않는 칼날은 거두었다
깊이 든 문자의 근원에서 멀리 나와
마지막 맹세의 끈도 풀어서 거두었다
애써, 보지 못한 검은 눈을 쓰다듬고
종족의 피를 받아 행성을 두드린다
경편도 배음을 찾아 맑은 길을 건넌다
해설
고전적 깊이와 발효의 문양
정수자(시인)
이화우는 이화우인가, 하고 보면 이화우는 이화우梨花가 아니다. 이화우는 이화우라는 이름으로 시조를 쓰는 지금 이곳의 시인이다. ' 새롭게 일깨우는 시인의 다시 이름에 말맛을 얹어본다. 이화우는 볼수록 아름다운 아우라를 풍기는 조어다. 봄이면 꽃비의 운치에 잠시 기대보는 도처의 호명이 난만하다. 그런 이화우를, 그것도 할아버지의 작명으로 받아든 이화우는 이름의 운명을 어떻게 메고 왔을까. 볼수록 이름에 따라다녔을 무게가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컸을 법하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표현인 이화우. 이화우는 조선 부안 땅의 매창 덕에 우리네 고전을 오늘의 풍류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비 머금은 봄날 홍취가 도도해지면 너도나도 읊조리는 명편으로 소환된다. 배꽃이 산자락이나 들녘에 하얗게 흩날릴제면 사람들 마음에도 이화우가 갈피갈피 날리는 것이다. 매창이 아니었으면, 아니 절창의 시조가 아니었으면, 훗날 배꽃을 그리 높이 즐기진 못했으리라. 시 한 편, 시어 하나가 얼마나 오래도록 그리움의 서정을 부르고 살리는지 새삼 돌아보게 한다. 그런 이름의 이화우 시인이 시조를 쓰는 것은 당연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화우에 겹쳐지는 고전적 미감을 그가 어찌 되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려나 이화우 운운 흩날리는 단상들은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더 그윽이 만날 수 있다. 고전적 소양과 취향이 이화우 특유의 묵향 같은 격조로 발화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