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테살로니카 1서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인 테살로니카는 예로부터 무역과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래서 테살로니카에는 유다교 공동체를 비롯해서 여러 인종들과 종교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가 선교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대다수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가 돌아선 이방인들에 해당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2차 선교 여행 때 실바누스, 티모테오와 함께 테살로니카에 들렀고, 성공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유다인들의 소요 사태로 인하여 급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아쉬운 마음에 바오로는 테살로니카에 다시금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대신 티모테오를 보내서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을 격려합니다. 코린토에 머물던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실라스를 다시 만나 테살로니카 교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에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기쁨과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이것이 테살로니카 1서입니다.
1장 1-10절은 머리말로서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의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에 대한 칭찬이 전해집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테살로니카는 여러 인종과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기 쉬웠습니다. 또한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같은 민족인 유다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야 했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줬던 바오로 사도까지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한 상황이라 어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에서 돌아서지 않았고, 이 소식을 티모테오로부터 전해 들은 바오로 사도는 편지에서 가장 먼저 그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2-3장은 서간의 전반부로서 바오로 사도는 먼저 자신이 테살로니카에 방문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게 된 경위를 말하면서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고, 한 명 한 명을 사랑으로 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의 박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직접 테살로니카를 다시 방문하려고 하였지만 여건히 허락되지 않자 우선 티모테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티모테오로부터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가 굳은 믿음 아래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그때까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흠 없이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4장 1절-5장 22절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여러 지침과 권고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이어갈 것을 당부하면서 불륜을 멀리하고, 서로 속이지 말며,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단순히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먼 훗날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지평 아래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실제로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 13,26)하신 예수님 말씀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승천 이후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년 가량이 지났음에도 아직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몇몇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은 재림에 앞서 죽은 이들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고, 또한 죽은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직접 마주하지 못하기에 훗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데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을 향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4,13 참조).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굳게 간직하고 있다면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때에 대해서도 그날과 시간이 언제인지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항상 빛의 자녀로서 거룩한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상관없이 늘 기쁘게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는 이들에게 재림과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저마다 자신의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서로를 도우라고 당부합니다.
5장 23-28절은 테살로니카 1서의 맺음말로서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서로 같은 믿음 안에서 형제애를 바탕으로 평화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라고 당부합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2) 종말에 대한 성찰(묵시 16,17-21)
하느님께서 세상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외침
일곱 번째 대접은 일곱 번째 나팔과 닮았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여전히 등장한다.(묵시 11,19 참조) 이집트에 내려졌던 다섯 번째 재앙과 역시 닮았다.(탈출 9,22 이하 참조)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집트의 탈출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길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재앙들은 믿음의 길을 촉구하는 하나의 호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되짚었다.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대개 ‘하느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다. “다 이루어졌다.” 이 외침은 단순한 종말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안에 비로소 개입하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하느님이 등장하는 서사들 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 그러니까 천둥, 번개, 요란한 소리, 지진 등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탈출 19,16; 묵시 4,5; 8,5; 11,19 참조)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한다는 믿음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문장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좌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큰 도성’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큰 도성’을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은 은유적 표현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은유를 통해 인간 세상과 그 역사의 불의와 부패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로마와 이방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이기도 하겠고, 내일의 우리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앞에 어느 민족이, 어떤 세상이 지진과 같은 징벌의 대상이 될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적인 태도로 요한 묵시록의 징벌을, 세상의 불의를 살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에게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온전히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자세 말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로마 혹은 그 이전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실재이나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축인 것인 양 이해하면서 마치 특정 세력이 악하므로 그 특정 세력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의로움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놓고 ‘세속’에 따라 살지 말자는 외침을 함부로 남발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이 아니라 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선동가의 아집일 경우가 많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느님 입장에선 당신의 섭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의 공간이다. 교회는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분의 정의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저만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형제적 공동체다.
하느님은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신다’(묵시 16,19 참조)는 문장 역시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이미 확고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예컨대 모든 섬과 산이 자취를 감출 만큼 결정적이다.(묵시16,20)
교회가 세상 속 하느님의 정의를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권태로운 타협이나 눈치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고, 저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기대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세상이라는 곳은 견고한 시스템과 복잡한 사상들이 얽혀 있는 곳이라 어느 하나도 쉬이 돌아서거나 변화되긴 힘들다. 21절에 엄청난 우박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박의 무게가 한 탈렌트인데, 26~36kg의 무게다. 이 무게는 로마군이 쏘아 올린 투석기에 담긴 돌의 무게와 일치한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할 때 쏘아 올린 그 투석기의 돌이 한 예다. 유다 사회는 로마의 그러한 군사적 행동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는 때 여전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박이라는 재앙을 로마 군대의 투석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재앙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사람들의 모독이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므로 사람들의 죄악이 그만큼 독하고 무겁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엔 성급하다. 큰 도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우박이 매섭게 이 땅 위에 떨어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 익숙해져 있고, 익숙한 만큼 변화를 싫어한다.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도 온 나라가 갑론을박의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요한 묵시록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특정 불의나 구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이어지는 17장부터 바빌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그것은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었고, 로마가 유독 잘못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뜻을 반한다고 여긴 하나의 ‘해석’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익숙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익숙해서 다른 것과 낯선 것에 귀와 마음을 닫고 있는 일들 말이다. 가까이는 내 이익을 위해, 멀리는 거대 담론을 무턱대고 수용한 무지하고 성급한 사상들을 위해 타인과 그의 다름을 무작정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완고한가, 유연한가. 요한 묵시록이 끝나기 전에, 우린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94) 신자가 되어 가치있는 삶을 산 노예 오네시모스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베르디(Giuseppe Verdi)의 초기 오페라 <나부코(Nabucco)>에 나오는 유명한 합창곡이다. 나부코는 구약성경의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가리키며, 이 합창은 유다인들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노역을 하며 잃어버린 조국 예루살렘을 그리워해 부르는 노래다.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이 노역 중 부르는 이 장면은 오페라의 압권으로 꼽힌다.
노예란 자유 없이 주인의 지배 아래 놓인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뜻하며, 본래 경멸적 의미가 담긴 단어다. 다만 유다 사회에서 유다인 노예의 법적 지위는 외국 노예와 크게 달랐다. 특히 유다인 노예는 대개 6년이 지나면 아무런 보상 없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탈출 21,2 참조) ‘히브리인 노예를 산 사람은 상전을 산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노예는 인권을 기대하기 어려운 힘없는 존재였고, 주인에게 노예는 재산이자 생사여탈권의 대상이었다.
‘유익하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오네시모스는 콜로새 필레몬의 집에서 일하던 노예였다. 당시 노예들은 대개 전쟁 포로나 노예상에게 팔려 온 사람들이었고, 노예제도는 고대사회의 산업 활동을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오네시모스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 자라면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견디기 어려웠고 노예 신분을 벗어나길 갈망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주인 필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었고, 사도 바오로를 통해 가족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집을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줄 만큼 신앙에 열정적이었다. 바오로와도 친구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오네시모스는 마침내 주인에게서 도망쳤다. 그 시대에는 도망 노예가 주인의 물건을 훔치거나 가족을 해치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오네시모스는 주인의 재산을 훔친 뒤, 당시 세상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향했다. 그는 로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로마에 있던 오네시모스는 감옥에 수감 중이던 바오로를 운명처럼 만나 그의 말에 깊이 감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인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하자고 권했다. 오네시모스는 이에 훌륭히 협력하며 바오로를 도왔다.
오네시모스의 사정을 들은 바오로는 편지를 써 주며 필레몬에게 돌아가라고 권했다. 필레몬은 편지를 손에 들고 돌아온 오네시모스를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맞이했다. 신앙을 통해 오네시모스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과거에는 어둡고 쓸모없어 도망치고만 싶던 삶이었지만, 이제는 참으로 ‘쓸모 있고 유익한’ 인생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넘치는 세상이다.
[성경 입문] (15) 필사 ①
한글날이면 종종 들리는 말 가운데 하나는 ‘한글과 한국어는 다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어, 한국말은 한반도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말하며, 한글은 그 한국어를 시각화해서 표현하기 위해 고안해 낸 문자 체계를 가리킵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대전환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말이 일회적이고 휘발성이 강한 반면, 문자는 그 말을 저장하고 전파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 시청각 정보를 녹음이나 녹화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저장, 공유할 수 있게 만들어 준 현대의 전자 혁명 이전, 글은 생각과 말을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문자를 쓰고 읽는 과정을 통해 다른 이와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한 공동체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글들은 중요한 전승의 매개체가 되었고,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권위있는 기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문자화된 ‘보편적 기준’도 물리적 한계를 지녔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서들이 낡고, 훼손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된 글자는 희미해지고, 글자를 담고 있는 소재 역시 낡고 닳아서, 오래될수록 식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정보의 보관과 소통의 도구로서의 기능에도 유효기간이 있었던 셈입니다. 돌이나 금속, 도기에 새겨 넣은 문자들은 훨씬 오래 지속되지만, 파피루스나 양피지, 섬유와 같은 고대의 소재들뿐 아니라 현대에도 가장 널리 통용되는 종이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담고 있는 재료들은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떨어집니다. 대신에 펜이나 붓에 잉크나 먹물을 묻혀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정이나 철필로 돌이나 쇠에 새기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필사본의 재료는 점차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변화하는데 처음에는 두루마리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오늘날 책의 모양인 낱장을 겹쳐 묶은 코덱스(codex) 형태가 보편화됩니다.
유효기간이 지나 문서로서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기록들은 보다 선명한 기록으로 옮겨 보존할 필요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입니다. 글을 담는 재료는 새것이어야 하지만 글의 내용은 옛 것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글에 담긴 권위가 훼손됩니다. 그 권위를 만들어낸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 축적된 공동체의 신앙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경우 코덱스 형태 이전,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은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붙들고 왼손으로 펼쳐 읽습니다. 근동의 문자들은 대체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글의 진행 방향도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해갑니다. 보통 한번 읽을 때 40-50cm 정도의 넓이로 펼쳐 읽게 되는데 그렇게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대략 10-12cm 넓이의 3단 기록이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두루마리의 높이는 30-40cm로 위아래에 3-4cm 정도의 여백을 제외하면 대략 한 단에 35-45행 정도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하나의 문학 작품은 하나의 두루마리에 기록되었는데 쿰란의 대이사야서 두루마리의 경우 7.34m의 길이에 이사야서 전체의 내용이 필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작품들은 여러 두루마리로 나누어 기록하기도 합니다. 토라(율법서)가 다섯 권으로 구분되는 이유도 하나의 두루마리로 사용하기에는 효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하는 대목을 찾아 읽으려면 오른손으로 돌려 감아가며 왼손으로 펼쳐야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다 보면 그만큼 잘 마모되어 자주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25년 11월 2일(다해)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입문] (16) 필사 ②
문자의 사용은 의미의 전달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여전히 문자와 문서의 주된 쓰임은 이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을 수행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문장과 문서는 그것으로 표현된 ‘말’을 재생함으로써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극복합니다.
무선 통신이 없던 시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을 상상해 봅시다. 이때 ‘갑’과 ‘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절차가 진행됩니다. 갑은 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문자로 변환해서 기록하여 송달하고, 을은 갑이 보낸 문서에 쓰인 정보를 읽어내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을은 갑이 자기 앞에서 말을 건넬 때와 마찬가지로 갑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글은 말과는 달라서 동시에 양방향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단점을 지니지만,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잘못 듣거나 오해를 살만한 ‘말’(청각정보)을 통한 소통의 한계를 ‘글’(시각정보)로써 상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든 공적 소통은 대체로 문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의사결정과 실행에 대한 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말을 통한 소통의 경우,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성량, 소리의 고저장단 등 음성 신호가 지닌 다양한 특성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반면, 문자는 훨씬 밋밋합니다. 그래서, 자칫 오독을 하게 되는 경우 말로써 전달할 때와는 사뭇 다른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기억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자 정보인 글은 시간의 장벽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릿해지게 마련이지만 글로 적어둔 정보는 그러한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글이 지닌 여러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있습니다. 문장부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표, 쉼표, 따옴표, 느낌표, 물음표 등등의 문장부호 덕분에 독자는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생생하게 재현하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역시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됩니다. 띄어쓰기나 줄 바꿈, 혹은 같은 줄 안에서의 긴 여백 등은 소통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페이지 전체의 여백 역시 독자의 독서흐름을 돕는 중요한 구성요소입니다. 여백이 좁거나 없으면 그만큼 독자는 독서에 어려움을 격게 됩니다.
성경 기록의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문자, 문장, 문서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문서일수록 덜 정교한 체계를 갖추어서 해독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반면에 후대에 필사된 기록일수록 좀 더 발전된 기록 체계를 통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한 흔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주된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기록의 경우 본래 존재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 존재했던(때로 자음이면서도 모음의 장단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 자음들이 있습니다) 모음체계가 고안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마소라 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이러한 기록 체계에는 모음기호뿐 아니라 띄어 읽거나 붙여 읽을 단어들의 조합, 문장 기호나 강세 표시 등, 보다 생생하게 ‘글’로 쓰인 정보를 ‘소리’ 정보인 “하느님의 말씀”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전승 전달자들의 노력이 배어 있습니다. 신약의 필사본들 역시 소문자 체계나 띄어쓰기, 문장 기호 등등 시대를 거듭하며 새롭게 고안된 변화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희망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라는 말씀으로 “희망의 순례자” 정기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품을 찾아가는 순례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1년에 세 번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파스카 축제와 주간절(오순절), 초막절입니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 맞갖은 횟수로 예루살렘 성전의 주님께 올라가 충실한 신앙심을 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순례에는 더 원초적이고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옛 성전은 우리에게 유토피아처럼 되어버린 에덴 동산을 상징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에덴 동산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 주시는 장소지만 죄 없고 정결한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고, 커룹이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창세 3,24) 하였듯, 성전의 지성소에 모셔진 계약 궤에도 커룹이 있었습니다. 곧 원조들이 에덴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커룹들이 입구를 지켰듯, 지성소에서는 커룹이 상징적으로 백성의 접근을 제한하는 구실을 한 것입니다. 더구나 창세 2,13에 따르면, 에덴에서 흘러나온 네 개의 강 가운데 하나가 기혼인데, 기혼은 예루살렘에 자리한 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성전산 바로 아래 자리해 있어, 에덴 동산의 기혼 강을 떠올려줍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나마 예루살렘 성전에서 에덴 동산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에덴 동산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순간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진 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이 허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성전은 파괴되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지만, 그 상징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듯 ‘예수님께서 곧 성전’(요한 2,20)이시며, 우리 역시 ‘성령을 모신 성전’(1코린 3,16)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희년은 땅과 가산을 잃고 자기 자신까지 팔아버린 백성이 모든 것을 되찾고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우리의 숨이 기원한 주님의 품입니다(창세 2,7). 게다가 옛 백성은 주님의 현존을 성전 순례에서 구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바치신 한 번의 제사로 성전이 우리 안에 들어온 뒤로 우리의 순례길은 예루살렘이 아닌 각자의 일상에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여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희년도 보람있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성경에서 희년을 보다] 만물의 영장이 행하는 공정과 정의
희년의 기본 정신은 ‘공정과 정의 실현’에 있습니다. 사실 공정과 정의 실현은 성경 곳곳에서 언급되듯이, 우선 임금이 지닌 직분입니다(2사무 8,15; 1열왕 10,9 등). 성경에서 공정과 정의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거창할 것 같지만, 실은 매우 단순합니다. 바로 타자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지 않는 것, 특히 수탈당하기 쉬운 약자를 착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유다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신탁을 전달하였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고 착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마라”(예레 22,3). 공정과 정의는 위기에 처한 이의 상황을 개선해 주는 일. 착취자를 처벌하고 제거하는 일도 포함합니다(시편 72,2.4; 이사 11,4 등). 말하자면, 공정과 정의는 ‘약자 보호’와 관련된 덕목으로써,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이 수탈 · 착취당한 약자를 구해 주시듯(탈출 22,26; 시편 146,7-9 등) 지상의 임금도 피지배 계층에게 그렇게 하여 창조 질서 유지를 돕고 이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피조물 세상에서 임금과 같은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2
장 7절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맨 처음 지으신 생명체가 인간입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때 인간에게만 당신의 숨을 직접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만물의 영장임을 표시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밝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다.’는 26-27절이 그것이며, 28절에서는 타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하느님의 축복도 받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직분이 공정과 정의 실현이듯, 이는 우리가 세상의 피조물들을 제 것처럼 여겨 남용하라고 지배자로 세우신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도 사람은 한낱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밝혀 겸손을 배우게 합니다. 시편 104편에서는 인간을 세상의 중심이 아닌 대자연의 일부로 묘사하여, 타 피조물들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강조합니다. 곧 이 시편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피조물 세상에서 임금과 같지만,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모습처럼 지어진 대로 주님을 본받아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더 편하고 부유한 삶을 도모하기 위해 수탈당하기 쉬운 타 피조물들의 몫이나 생존권을 쉽게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104편에서 암시하듯, 세상의 피조물들은 우리 인간에게 단순히 먹을거리나 도구가 아닌 우리와 공존하도록 더불어 창조된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겪는 극심한 기후 변화는 자신의 몫을 빼앗긴 생태계가 신음하는 결과일 것입니다.
올해 희년을 지내며, 우리는 과연 서로에게 본래의 몫을 돌려주어야 하는 희년의 정신을 타 피조물들에게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 다시 보기] 사탄, 악마 그리고 마귀
성경을 읽을 때, 자주 마주치게 되는 단어들 가운데, 우리 신앙생활을 방해하거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신앙인을 유혹하여 악으로 빠트리게 하거나, 우리의 삶을 못 쓰게 망가트리는 것들, 구체적으로 “사탄”, “악마” 그리고 “마귀”에 대해 살펴서, 그 개념을 밝혀 보고자 합니다.
- “사탄(Σαταν)”: 신의 뜻에 반대하는 자
사탄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34번 나옵니다. 마태오 3번, 마르코 5번, 루카 5번, 요한 1번 그리고 묵시록 8번 그리고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서간들에서 12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번수로 본다면 복음서들에서 많이 나오는 편이고, 단일 성경으로는 묵시록에서 제일 많이 나옵니다. 그 단어의 뜻이나 개념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언급된 구절들과 그 전후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작업의 순서일 것입니다.
그 결과 “사탄(Σαταν)”이라는 말은 성서 희랍어에서 사용되기는 하지만 원래 희랍어(=헬라어; =그리스말)가 아니고 히브리말 구약성서에서 온 말입니다. 즉 희랍어 사탄(Σαταν)은 히브리어 사탄( )의 음역이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신의 뜻을 반대하거나 반항하는 그 어떤 것으로,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짐승이나, 예를 들면 뱀이나 용, 그리고 형태나 형체를 갖추지 않았지만, 궁극적인 것은 하느님의 선의를 거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실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 하시는데, 이 말씀의 뜻은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그 말이 주님의 뜻을, 즉 주님의 수난 계획을 반대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 “악마(διαβολο 디아볼로스)”: 악으로 이끄는 자, 또는 악으로 유혹하는 자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모두 35번 나오는데, 특히 한 것은 마르코에서는 한 번도 아니 나오고, 마태오 6번, 루카 5번, 요한 3번 그리고 묵시록에서 4번입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로 διαβολο (디아볼로스)인데, 문법적으로 보면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즉 “적대하는”, “비방하는”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정관사 “그”를 붙여서, 명사로 만들어서, 우리말로는 “악마”(惡魔)로 영어로는 Devil, 독어로는 Teufe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나가 유혹을 받으셨는데, 그 유혹자가 “악마”(ο διαβολο )였다는 것입니다(마태 4,1.12); 루카 4,2.13). 악마는 신의 뜻을 적대시하거나 비방하며, 인간을 악으로 빠지게 하는 유혹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 “마귀(δαιμονιον 다이모니온)”: 사람을 영육으로 괴롭히는 자
사탄이나 악마보다 상대적으로 많이(55번) 나오는 단어이며, 마르코(11번)와 루카(21번)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이한 것은 “마귀”라는 이 단어는 명사이지만 “마귀들리다”(δαιμονιζομαι다이모니조마이)라는 동사도 자주(13번) 나오며, 주로 마태오(6번)와 마르코(4번), 그리고 루카와 요한은 1번입니다. 우리말로는 마귀(魔鬼), 영어와 독어로는 Demon, Daemon으로. 사람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픈 것은, 주로 “마귀가 들려서” 그렇다고 서술합니다(마태 4,24; 마르 5,15). 마귀도 역시 신의 뜻을 거슬러 우리를 괴롭히는 자를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