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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1
창 35: 1-7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우리 함께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는 복된 시간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해서 '일어나 벧엘
로 올라가라' 하셨습니다. 야곱은 순종하여 온 가족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
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외쳤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
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벧
엘이 어디입니까? 저쪽 화정동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새성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서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
자'고 하는 말씀의 성경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 서두가 어찌했습니까? 도망하는
신세였지 않습니까? 하늘을 지붕 삼고, 돌을 베개하고, 광야의 길에서 노숙할 때 하늘의 별
을 보며, 내리는 이슬을 맞으며 처량하게 누웠습니다. 이러한 야곱, 어쩌면 바로 성도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음생활에는 광야의 길이 있습니다. 고독한 한숨도 있습니다.
주리고, 외롭고, 답답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디로 가던지 내가 너를 지키며,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야곱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깨어
난 야곱이 어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살던 고향 땅에만 계
시는 줄 알았는데, 과연 하나님은 여기에도 계시나이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 그 자리에다
베개한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서원 했
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곳에 성전을 세우겠나이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예배 드리며 십일
조를 드리겠나이다" 세월이 활같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야곱을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매 다시 나타나사 야곱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이젠 네가
서원한 것을 이룰 때가 오지 않았느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
곱은 벧엘로 올라가 새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상을 버리는 일입니다. 왜 우상을 버려야 합
니까? 그곳에 가서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만 섬겨야 했습니
까?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야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도망해 갔던 그곳
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는 일입니
다.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할 때에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지 않습니까?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뇨?" 시인이 물었습니다. 시편 24절 4절에 손이 깨끗한 자, 또 마음이 청
결한 자라 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우리의 행실이 깨끗해야 되고, 마음이 정
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셋째, 의복을 바꿔 입는 일입니다. 지금 야곱 가족들이 입고 의복
이 어떤 의복입니까? 화란에서 입고 온 더러운 의복이요, 세겜 땅에서 행하였던 피가 묻은
의복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돼지 칠 때에 입었던 냄새나는 의복들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려
는 사랑하는 성도들, 먼저 냄새나는 의복부터 벗어야 되지 않습니까? 2003년 새해를 맞아
묵은 해의 의복을 벗어 팽개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새성전에는 상징적인 것들이 여럿 있습
니다. 가령 중요한 것들로는 함께 모은 두 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조감도를 통해서, 현장
을 통해서 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둥그렇게 된 두 기둥이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십자
가, 익두스 등의 상징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째로 성전 전체의 모습인 두 손의
교훈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코자 합니다. 정문에서 바라볼 때 웅장한 새성전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자세히 보십시오. 십자가 밑에 함께 모은 두 손의 모습입니다. 시편 88편 9절.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여기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들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곤란으로 인
하여, 역경으로 인하여, 더러는 질병으로 인하여 눈이 쇠할만큼 어려운 때일지라도 우리 모
두는 주를 향하여 손을 드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어려움
을 당하셨습니까? 곤란을 당하셨습니까? 괴롭고 답답한 일을 만나지 아니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곤고한 손을 꽉 붙잡아 주십니다. 새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릴 때 우리 모두의 빈약한 손, 곤고한 손을 하나님이 꽉 붙잡아 주실 것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번쩍 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새성전의 두 손이 교훈 합니다. 이 두 손이 어떤 손입니까?
첫째, 기도의 손
출애굽기 17장 11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
니" 여기 모세의 손은 기도의 손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리면 아말
렉이 이겼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의 손에 신통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모세
의 손이 요술쟁이 손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기도가 승리의 비결이라는 의미입니다. 손을
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 개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항복한다는 뜻입니다. 전
쟁할 때에 "너희는 완전 포위되었다, 손들고 나오라" 그러면 적군이 손을 번쩍 들고 나오지
않습니까? 마치 손들고 나오는 항복자와 같이, 손을 듣다는 말은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
에서 항복하나이다" 하는 의미란 말입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갈 때 누가 성공하고, 누가 축
복을 받으며, 누가 승리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먼저 항복하는 성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
니다. 둘째, '붙잡아 주소서' 뜻입니다. 마치 조난 당한 자들이 무인도에서 헬리콥터가 올
때에 손을 들고 흔들면서 '구원하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을 번쩍 들고 "예수님, 내
병든 손을 붙잡아 주소서" 해야 될 인생 아닙니까? "내 혈압을 낮추어 주시고, 내 암을 고
쳐주시옵소서"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셋째, 승리를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출전한 선수
가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며 V자를 그려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
까? 우리 모두는 새성전에 입당하기 전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손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손을 들고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믿음으로 기도
해야 합니다. ♬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 하나님 앞에 구원을 요청하는 믿음
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확신을 가지고 찬송하면서 기도해
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나의 가난, 나의 질병, 나의 환란을 도와주옵소서" 눈물이
섞인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질 아니 하십니다. 성전 건
축을 방해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도 우리의 아말렉이 아닙니까? 우리의
적군이 아닙니까? 우리의 사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성전건축을 방
해하는 아말렉을 이기게 하여 주시고, 적군을 물리쳐 주시고, 사탄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호사다마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열심히 기도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강철이었습니까? 놋쇠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 아닙니까? 그
러니 모세의 손이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패합니다. 그러
나 교회는 무엇입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모세의 곁에 하나님이 미리 예배
하셨습니다. 아론과 훌을 동반케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우편에서 하나는 좌편에서 모세
의 손을 붙듦으로 손이 내려가지 아니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오지 않았습니까? 기도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뚫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가난한 자도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도하지 아니하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마
귀를 추방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축복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입니다. 씨 뿌리
지 않은 농부가 어떻게 가을에 추수를 기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
니다. 기도가 우리의 무기요, 기도가 우리의 능력입니다. 없었던 곳에 길 만드는 방편이 아
닙니까? ♬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
둘째, 사랑의 손
부족한 이 사람에게 사랑이 모자란 부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하려고 하면 죄송
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가만히 사랑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
라" 인류 역사에서 사랑의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가장 큰 사랑의 사람이 누구입
니까? 사랑의 사람 테레사, 사랑의 사람 나이팅게일,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특별
히 예수님의 손을 들여다 보십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입니다. 그 사랑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손에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서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몬의 장
모가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어찌했습니까? 마가복음 1장 31절,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어찌했습니까? 마가복음 9장 27절,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한 소녀가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어찌했습니
까? 마태복음 9장 25절,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예수님의
사랑 입지 아니한 인생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이 세상에 태어난 자도 없습니다. 그 사
랑,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
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그리고 말합니다. 적신도 아니다, 위험도 아니
다, 칼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선이 무
엇입니까? 결국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결국 사랑입니다. 평안이 무엇입
니까? 사랑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사랑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성령의 9
가지 열매는 참 제자들이 맺는 열매요, 성자들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열매
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도 사랑이란 말입니다. 비에는 비인이 생기고
무에는 무인이 생깁니다. 우리는 회개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사랑없음
에 대하여 가슴아파하는 신령한 눈물이 회개가 아닙니까? 성도의 참 행위도 사랑이고, 성도
의 참 고백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강조합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사랑이야기가 전
도요, 사랑의 전달이 전도란 말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for himself" 다시 말하면 자
기 자신을 위한 존재란 말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자기 때문이고, 돈을 버는 것도 자기 때문
입니다. 왜 미워합니까?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왜 사랑합니까?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러
나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지 않았습
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살아갈 때에 이웃을 위해서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가슴을 나눌 줄 알아야 합니
다.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런데 행복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러나 더 큰 행복이 있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사랑을 줄 때의 행복입니다.
참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사랑할 수 없어도 사랑
하면서 사는 남은 생애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봉사의 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
로 일하기를 힘쓰라" 여기 손은 일하는 손, 봉사의 손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벧엘
로 올라가라' 하셨습니까?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새성전에 가면 할
일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나, 거기에서나 성도의 봉사는 같습니다. 우선 새
성전 주변에 아파트가 많습니다. 그 주민들에게 전도하는 일이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까? 미
리서 무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근 주민들을 위해서 노인식당을 만들고, 머리를 깍아주는
이발소를 만들고, 노숙자를 위해서 숙박소를 만드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크고 작은 일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 우리에게 있어야 될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당부했습
니다. 첫째, 조용히 일하라. 왜 조용히 일해야 합니까? 일을 하기는 하는데 불평하면서 일
하고, 자랑하면서 일하고, 형제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일하는 성도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은혜를 이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슬이 내릴 때에 시끄럽게 내립니까? 나팔불면
서 내리는 이슬 보았습니까? 이슬은 소리 없이 내립니다. 이슬은 조용히 내립니다. 그러면
서 그 이슬이 초목을 잘 자라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조용히 일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일
을 하되 서로 충돌하지 않게 하라는 뜻이요, 서로 협력하면서 하라는 뜻입니다. 농가에서
쟁기질하는 두 소를 보십시오. 서로 다투지를 아니합니다. 서로 뽐내지를 아니합니다. 8강
에 진출한 축구선수단을 보십시오. 이쪽으로 저쪽으로 자기 자랑하지 않습니다. 서로 협력
해서 면류관을 쓰지 아니했습니까?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웅변이 침묵보다 더 귀한 금이요, 진주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대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
들은 자기를 태우는 촛불처럼, 자기를 땅에 묻는 밀알처럼 봉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
째, 자기의 일을 하라. 왜 자기의 일을 하라 했습니까? 자기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남의 일
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성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해야될 자기 몫의
일이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남편의 일이 있습니다. 남편이 자
기 일 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까? 아내는 아내의 할 일이 있습니
다. 아내가 자기 일을 하지 아니하면 걸레가 방 가운데 놓여 있을 수 있고, 화분의 시들은
꽃잎파리가 그대로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일
이 있습니다. 목사가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를 보지 않았습
니까? 장로와 권사도 마찬가지, 자기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의 할 일을 알지 못함으로 교
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자기 다리 긁어야 할 경우에 남의 다
리 긁어서는 안됩니다. 주인은 주인의 할 일이 있고, 종은 종의 할 일이 있습니다. 찬양대
를 보십시오. 소프라노는 소프라노의 할 일이 있고, 테너는 테너의 할 일이 있습니다. 농부
는 농부의 할 일이 있고, 어부는 어부의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의 일을 해야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양식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먼저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마땅히
자기의 일에 충성하는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손으로 일하기를 힘
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포도원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들
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입니다. 포도원 잘 가꿔야 합니다. 벌레 따야 합니
다. 시들은 이파리 따야 합니다. 조석으로 잘 살피면서 물을 주고 거름을 줘야 합니다. 포
도원 교회가 무럭무럭 성장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4절입니다.
오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주님의 분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면류관
을 만드셨습니까? 빈둥빈둥 놀아 제치는 신사 숙녀가 아닙니다. 손바닥에 굉이가 박히도록
손으로 일하는 농부의 머리에 씌워주실려고 하나님이 면류관을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왜 손
으로 일하라 하셨습니까? 입으로 일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일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실제적으로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봉사는 이론이 아닙니다. 봉사는 실
천입니다. 생활입니다. 우리는 밀레의 만종 그림을 종종 봅니다. 세 가지 신성이 있다고 말
합니다. 예배의 신성, 가정의 신성, 노동의 신성입니다. 농가에서 일손 잠깐 멈추고 저쪽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부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이 밀레의 만종
아닙니까? 이 그림처럼 산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삶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부
자 되고 싶습니까? 부자 되는 비결을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잠언 10장 4절, "손을 게
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 함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갈 준비를 하십시다. 벌써 우리 몸은 여기 있을지라도 마음들
은 그곳에 가 있는 줄로 압니다. 벧엘로 올라가면 먼저 새성전의 두 손이 우리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두 손이 무슨 손입니까? 기도의 손입니다. 사랑의 손입니다. 봉사의 손입니
다. 사랑하는 성도여, 미리서 기도하십시다. 미리서 사랑하십시다. 미리서 봉사하십시다.
봉사 할 때에 조용히 하십시다. 봉사할 때에 자기 일부터 하십시다. 봉사할 때에 손으로 일
하기를 힘쓰십시다. 그래서 미리서 축복 받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2
창 35: 1-7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한 시인이 말하기를 "겨울이 오면 봄이 가까웁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겨울이 되고, 눈이 펑펑 내리고, 너무 춥고, 감기로 고생도 하고, 그래서 언제나 봄이 오려나 했지만 벌써 내일 모레가 입춘입니다. 미 리서 꽃 피고 새 우는 봄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더구나 새성전에 입당할 것을 생각 하면 꿈속에서도 감격스럽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오늘도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은 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해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 하시기 전에 앞서 "일어나라" 하셨습 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야곱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요, 일어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 은 먼저 소돔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곳은 죄악된 자리요, 우상 숭배하는 자리이기 때문 입니다. 또 야곱은 세겜에서도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곳은 전쟁과 살인이 있고 피의 냄새가 물씬 풍겼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아, 먼저 일어나라, 그리고 빨리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습니다. 사실, 야곱은 얼마나 교활한 인생이요, 얼마나 속임수가 많 은 욕심쟁이 인생이었습니까? 눈 어두운 아버지까지 속인 야곱입니다. 에서의 장자명분까지 가로챈 야곱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달라졌습니다. 소돔에서 일어났습니다. 세겜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을 데리고 벧엘을 향하여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야곱은 벧엘 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어찌했습니까? 새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 었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 41:14), 지렁이 같은 야곱이 이스 라엘이 되지 않았습니까?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난뱅이 야곱이 부 자 야곱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축복, 우리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새성전에는 상징적인 것이 여럿인 것을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둘째 로 성전 현관의 둥글게 세운 두 기둥의 교훈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전 앞에 기둥 둘을 만 들었으니 고가 삼십 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일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외소 앞에 세웠으니 좌편에 하나요 우편에 하나라 우편 것은 야긴이라 칭하고 좌편 것은 보아스 라 칭하였더라"(대하 3:15-17). 이 말씀에서 세 가지 내용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 놋기둥 "저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왕상 7:15),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할 때 중요한 기둥 둘 을 세우면서 놋기둥으로 세웠습니다. 구리기둥이란 말입니다. 이는 성전 제단이 불변하는 놋제단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놋제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영원토록 변치 않고, 성 전에서 임재 하시는 제단을 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항상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교 회는 음부의 권세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왜 두 기둥을 놋으로 만들었습니까? 교회의 속 성이 놋처럼 불변의 속성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우선 우리의 믿음이 불변합니다. 이랬 다 저랬다 하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까? 바람에 흔들이는 갈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널 수 있 습니까?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변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 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예수를 바라보자는 뜻이 무엇 입니까? 광야에서 모세가 외친 말에서 답을 찾습니다. 불 뱀에 물린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죽게된 형편이었는데, 모세가 어찌했습니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세우고 "바라 만 보라 그리하면 살리라" 했을 때에 바라본 자들이 다 살게 된 내용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구원은 놋뱀되신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세계의 설교가 스펄존이 어느 주일날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설 때에 빈 새장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이 이렇습니 다. "악마가 새장 속에 인간들을 모두 가두고 그 인간들 하나 하나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인간들을 맘대로 할 수가 있다는 뜻으로 새장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 셨습니다. '도대체 인간들을 어찌 할 셈인가?' 악마가 대답했습니다. '인간들 마음속에 시 기와 질투를 넣어 주겠소, 그래서 서로 옥신각신 싸우는 꼴을 좀 보겠소. 재미날 것 같습니 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데리고 놀다가 마지막 날에는 죽게 만들 것이오.' 깜짝 놀란 하나 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 불쌍한 새장 속에 인간들을 몽땅 사겠다. 얼마 주면 되겠 니?' 악마가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이것들을 사서 무엇에 쓰시려 하오, 이것들은 결국 당 신을 배반할 것이오, 그래도 사시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피와 생명을 주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냐, 그렇게 하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악마의 손에 맡겨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악마의 새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신다고 하 는 내용의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신령한 의미에서 놋뱀이십니다. 놋 뱀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만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야만 축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야만 인간답게 살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놋이란 귀한 것, 값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저기 있는 새성전에 놋기둥 둘을 세우고 싶지 않습니까? 내 귀한 것 드려야 합니다. 영국의 고든 장군 일화가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귀한 것 하나 가 있었는데, 영국 정부가 그의 무공을 치하하여 수여한 금메달입니다. 거기에는 그의 전투 기록이 새겨져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가보로 보관해 왔습니다. 그런데 고든 장군이 죽 은 후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금메달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 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장 속에서 찾았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나의 가장 귀한 금메달을 하나님께 바쳤다. 참으로 기쁜 날이다." 알고 보니 성 전 건축을 하던 목사님의 그날 설교제목이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내용이었 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고든 장군은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서 금메달을 성전 건축하는데 바쳤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나의 귀한 것, 소중한 것 하나님 앞에 바쳐 새성전 완공을 기다리는 모두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성전기둥 성전에는 꼭 두 기둥이 필요합니다. "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고가 삼십 오 규빗이 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대하 3:15). 여기 '전 앞에'란 말은 '성전 현 관에'라는 뜻입니다. 교회 가보십시오. 성전 현관에 눈에 띄는 두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왜 성전에 큰 기둥 하나만 해도 될텐데 두 기둥을 세웠습니까? 어떤 건물도 외 기둥으로는 불 안하기 때문이요, 한 기둥으로는 버팀이나 받침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전 기둥이 반드시 쌍기둥이어야 합니다. 전도서 4:9이 교훈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났다 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나 두 사람이면 당하리라 했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 독불장군을 원치 않습니 다. 유아독존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혼자 할 수 없는 것도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협력하면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아론 따로, 훌 따로였다면 어찌 모세가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예 수님께서 전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지 않았습니까? 한 기둥을 남전도회라면, 또 한 기둥은 여전도회일 것이요, 한 기둥을 교역자라 하면, 또 한 기둥은 성도랄 수 있습니다. 피차 협력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한 기 둥은 베드로요, 또 한 기둥은 요한이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합하여 앉은뱅이를 걷게 하 지를 아니했습니까? 한 기둥을 바울이라면, 또 한 기둥은 실라입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하 여 옥중의 이적을 만들어 내지 아니했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두 기둥 되어야 합니다. 두 기둥이 협력해야 되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녀, 두 기둥이 바로 서야 되지 않습니까?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과 학생, 두 기둥이 협력해야 합니 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의 분위기가 어찌합니까? 선생님 따로, 학생들 따로, 참 안되었습니 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사 문제를 보십시다. 주종의 두 기둥이 협력해야 공장이 잘 돌아가지 아니하겠습니까? 교회에는 두 기둥이 필요합니다. 쌍벽을 이루어야 교회가 든 든히 설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말씀과 실천의 기둥이랄 수 있 습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강해야 되고, 은혜가 되고, 능력 되어야 합니다. 그러 나 실천의 기둥이 흔들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 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 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6-27)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외면하지 마십시다. 설교를 통해서 이 시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고 아멘으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 해야 합니까? 듣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실천해야 합니다. "하라" 하셨으 면 그대로, "말라" 하셨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사랑하는 성도여, 성전의 두 기둥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야긴과 보아스 "그 두 기둥을 외소 앞에 세웠으니 좌편에 하나요 우편에 하나라 우편 것은 야긴이라 칭 하고 좌편 것은 보아스라 칭하였더라"(대하 3:17). 솔로몬은 7년을 거쳐서 성전을 건축하 고, 13년 거쳐서 왕궁을 건축했습니다. 성전 현관에 둥근 두 기둥을 세우고 하나는 야긴, 또 하나는 보아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희 성전에도 그리 할 것입니다. 야긴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고, 보아스는 룻의 남편이며 다윗의 증조부입니다. 두 기둥에 이들의 이름 을 붙인 것은 당시 생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 인물보다는 그 이름의 뜻에 의미가 있 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긴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야킨', 그가 세우신다는 뜻입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두 기둥을 보면서 이것은 야긴이고, 저것은 보아스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긴의 기둥을 만지면서 이 성전을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기도했 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하 나님은 메시야 왕국도 세우셨습니다. 벧엘에다 성전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화정동에 우리의 새성전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목자로 세워주시고 또 어떤 분은 장로로, 안수집사로, 권사로 세워주셨습니다. 함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를 통해서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교 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제대로 구현되어져야 합 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야긴입니다. 사탄이 세운 교회가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란 뜻입니다. 새성전 시대를 맞은 우리 교회는 광주는 물론 한국, 아니, 아시아 와 세계를 향한 야긴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보아스가 무엇 입니까? 히브리어로 '뽀아스',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 편 보아스의 기둥을 만지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했을 것입 니다. 성전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결코 사람이 아닙니다. 성전을 세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 십니까?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물론 우 리 모두는 힘이 없습니다. 상한 갈대인생이고, 꺼져가는 심지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 음이 무엇입니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교회 가 무엇입니까? 보아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음부의 권세가 펼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는 죄인을 향하여 양심의 돌을 던질 수가 없고, 일곱 귀신 들린 자는 항복할 수밖에 없으 며, 스스로 의롭다 한 바리새인은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르 드개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분이요, 물에 빠진 요나 인생을 물고기를 통해서라도 구출하신 분이요, 주린 엘리야 인생을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두 개의 기둥이 무 엇입니까?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 다. 여기 불기둥을 야긴이라 하면, 구름기둥은 보아스입니다. 야긴은 아론의 손이라면, 보 아스는 훌의 손일 것입니다. 우편 기둥을 여호수아라 하면, 좌편 기둥은 갈렙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여, 새성전에 가서 우리 모두가 야긴같은, 그리고 보아스같은 기둥의 사명을 감당 하십시다. 새성전에 가서 봉사자 되고 싶습니까? 기둥 같은 봉사자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렇다면 기둥의 세 가지 특성을 교훈 삼으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둥은 견고해야 합니다. 비뚤어진 기둥은 기둥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강해야, 심지가 굳어야 교회의 기 둥 같은 봉사자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이야기입니다. 상원위원에 출마했습니 다. 그러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두문불출했습니다.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창가에 우두거니 섰습니다. 마침 벽돌공이 벽돌 하나, 하나를 쌓아 올리더니 마침 내는 콘크리트로 바르고 조금 후에는 완벽한 담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때에 처칠 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리는 벽돌공과 같다. 인생 여정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다시 정치에 뛰어들어 마침내 수상직에 올랐다는 일화입니다. 낙망한 성도가 있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 왜 그렇습니까? 때가 있기 때문이요, 때가 이르면 거두기 때문입 니다. 둘째, 기둥은 바로 서야 합니다. 바로 서야 기둥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정 직이야말로 성도가 바로 서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정직하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 앞 에 바로 설 수 있습니까? 링컨은 국민들에게 찬사만 받지 아니했습니다. 때로는 매력 없는 사람, 무식한 놈, 독선주의자 등의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대응하지 아니했습니 다. 그럴 때마다 대신 밤늦도록 밀실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링컨은 지위가 높은지라 뇌물의 유혹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불의한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 직은 최선의 정책이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정직성은 성경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의 직무실 에는 다음 성구의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 셋째, 기둥은 밑에 서야 합니다. 건물의 중간에 서고, 지붕 위에 올라앉은 기둥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의 기둥 같은 봉사자들은 맨 밑바닥에 서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보통사람 이 되어 겸허한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마다 성도들은 밑에 서기를 원치 않습 니다. 윗자리에 앉고 싶어하고, 사람을 밟고서라도 높이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웅변보다, 정치보다, 학자보다, 신자되기를 원합니다. 신자 중에도 겸허한 신자되기를 원합 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밑에 서는 곳이 교회요, 배 밑 중에서 노를 저어 그 배가 잘 달리도록 하는 곳이 교회란 말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사랑하는 성도여, 새성전의 기둥 같은 봉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 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더 많은 축복들을 함께 누리실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3
창 35: 1-7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여기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창
세기 28장 12절, 최초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13절, 최초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
약을 받은 곳입니다. 14절, 최초로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 받은 곳입니다. 벧엘은 최
초로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했던 곳입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창 28:12). 다시 말하면 벧엘에 성전을 세우겠나이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향하여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습니다. 야곱은 서원한대로 벧엘로
올라가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성전에는 상징적인 것들이 여럿 있다고 지난 주일에도 증거했
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성전 예배당 문들에 새긴 알파와 오메가의 교훈을 묵상하면서 교
훈을 받고자 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
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3-14). 새성전에 가보면 본당, 곧 예배당에 들어가는 문들이
여럿입니다. 문마다 두짝 문으로 되어있습니다. 한쪽 문에 알파라고 새기고, 또 한쪽 문에
다 오메가라고 새겼습니다. 여기 알파와 오메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
본래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 24자중 두 글자입니다. 알파는 맨 처음 글자요, 오
메가는 맨 마지막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알파와 오메가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다른 이름으
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기록이 세 번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6),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1:13).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기록된 성경 그대
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처음과 나중이란 말이요, 또 시작과 끝이란 말이기도 합니다.
왜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까? 첫째, 존재면에서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예수
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예수님은 시종(始終)에 여일
(如一)하신 분이요, 처음과 나중이시고, 시작과 끝이신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
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
는 말입니다. 둘째, 역사면에서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시작과 끝이 되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말합니다. 더러는
의역해서 'His story'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라는 뜻이요, 예수님
의 역사란 뜻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신데, 역사의 시작도 예수님, 나중도 예수님
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기원도 되시고, 우주의 종국도 되십니다.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성전 건축의 알파는 예수님이시고,
오메가는 예수님이십니다. 새성전을 시작케 하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새성전을
아름답게 완공시키실 분이 누구냐, 역시 예수님이시란 말입니다. 셋째, 구원면에서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죄에서 구속하신 분도 예
수님이시고, 사망에서 생명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마침내 천국까지 인도하실 분도 예
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구원의 알파도, 구원의 오메가도 예수님이신
것, 생각하면 우리 주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은 알
파와 오메가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선 알파와 오메가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시종여일한 알파와 오메가 믿음이기를 원하
십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고자 하느냐" 전
에는 달음박질 믿음으로 산 성도가 지금은 거북이 걸음 믿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
로를 향해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알파의 사랑만
있고 오메가의 사랑이 없는 성도, 더러 있습니다. 성도의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이어
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랑, 신부의 경우를 보십시다. 처음에는 불같이 사랑합니다. 영원토
록 사랑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점점 식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에베
소 교회 성도를 향하여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의 봉사를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지난날에 봉사 잘한 성도 많습니다. 정말 교회의 일
군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봉사하고 있습니까? 직분을 받을 때는 열심으로 했습니
다. 그러나 오메가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 역시 스스로를 향해서 한 번 물어야 할 것입니
다.
둘째, 성전의 문이신 예수님
외부에서 새성전에 오신 손님 중에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떤 문이지요?" 물었을
경우입니다. 우리 모두는 "알파와 오메가 문입니다" 답해야 할 것입니다. 왜 예배당 문마다
알파와 오메가를 새겼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의 문이요, 예배당의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
라서 예배당에 들어선 성도는 누구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
당은 사람을 만나는 곳이라기보다 예수님을 만나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님을 만나야 구원을 얻고,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곳이 예배당이란 말입니다. "내
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
리라"(요 10:9). 여기 꼴이 무엇입니까? 철학이 아니고, 과학이 아니고, 정치도, 경제도 아
닙니다. 양이 푸른 초장에서 얻는 생명의 양식을 뜻합니다. 하늘의 만나요, 메추라기요, 곧
하나님의 말씀이 꼴입니다. 예배당에서 꼴 얻는 양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 못사는 약한 동물입니다. 추위도 못 참고, 더위도 못 참는 양입니다. 더더
구나 사나운 짐승은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되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나는 양
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배당에서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 목자입니까? 알파와 오메
가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린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라 와서 식탁에 차린 꼴을 먹으라
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인생의 심령들을 향하여 노크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
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 찬송을 부르면서도 아직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 성도가 있습니다. ♬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찬송을 하면서도 여전히 내 뜻대로 사는 성도가 없지 않아 있습니
다. 생각하면 양처럼 곁길 가는 인생입니다. 양은 본능대로 사는 동물입니다. 좌우를 살필
줄 모릅니다. 앞에 있는 풀만 보고 갑니다. 그러다 구덩이에 빠지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잃
은 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만 보고 따라갑니다. 향락만 보
고, 재물만, 정욕만 보고 따라 가다가 큰 죄의 구덩이에 풍덩 빠질 때가 있습니다. 왜 성전
건축을 합니까? 성전은 구원의 전당이기 때문입니다. 지옥 갔던 인생을 새성전으로 가득 채
우기 위해서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전도자로 세우셨습니까? 날마다 지옥으로 떨어지
는 인생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문에 들어오면서 주일마다 읽습니다. "전
도하셨습니까?" 그런데 저마다 심령이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내게 묻
는 말로 받지를 않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역별로 전도목표를 세우고, 개인별로
전도할 수도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전도하셨습니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성전의 문, 예수님을 통과하도록 하십시다.
셋째, 천국의 문이신 예수님
도망하던 야곱이 가련한 신세인데, 허허벌판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고 잠을 잡니다. 잠을
잘 때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야곱아, 야곱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야곱이 어찌했습니까?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
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그리고 야곱은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이
란 말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황막한 광야가 변하여 하나님의 집이 된 것입니다. 여
기 하늘의 문이 무엇입니까? 천국의 문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천국의 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천국의 문이시란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천국의 문입
니까? 구원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하지 않았습니까? 천국으로 가게 하는 분
은 오직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
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여기 들어가는 성이 무엇입니까?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곧 천국입니
다. 우리는 천국의 문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
리는 천국의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고, 실제의 이야기임을 믿습니다. 어제 정규오원로목사님
의 둘째 아들 정명연목사님이 5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장례예배를 수원 아주
대학병원에서 치렀습니다. ♬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 찬송을 부르
면서 목이 메었습니다. 인생은 참 허무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날이 오늘밤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마침내 천국갈 것을 소망으로 품고 있습니
다. 그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찬송가 가사가 말합니다. 기화요초가 만발한 곳입니다. ♬
저 기화요초의 향기는 바람에 불려 오는데 ♬ 흰 옷을 입은 무리들 천사와 노래합니다. 이
런 곳이 천국입니다. 거기서 성도들은 무궁 세계를 길이 살게 될 것입니다. ♬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 저 생명 시냇가에 길이 살겠네, 그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황금보석으
로 꾸민 곳입니다. 너무도 좋은 것, 너무도 많은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 있는 것 생략하
고 천국에 없는 것,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천국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
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까? 배고픔의 눈물, 집없음의 눈물, 질고의
눈물, 절망의 눈물, 이별의 눈물, 죽음의 눈물,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윗은 눈물로 침
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
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천국에는 눈물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눈물 없는 곳이 천
국입니다. 또 천국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편안히 쉴 곳 아주
없네 ♬ 정말 괴로움뿐입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답답하고
가슴아프고 괴로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애통하는 것이
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아예 질병이 없는 곳입니다. 혈압으로 넘
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위장병이 없습니다. 두통이, 위암이, 간암이 없습니다. 감기도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도적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깡패가 없습니다. 전쟁이 없고, 홍
수가 없는 곳이 천국이요, 악한 짐승도 없습니다. ♬ 거기 악한 짐승 없느니 두려울 것 없
겠네 ♬ 천국은 아름답기만 한 곳이요, 깨끗한 곳이요, 순수한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는 흑막이 없기 때문이요, 천국에는 권모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배반이,
배신이, 오해, 이해타산이 없습니다. 얼마나 그리운 곳이 천국입니까? 그러니까 믿음 있는
성도는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지 않습니까? 믿음 있는 성도이면 누구나 빨
리 가고 싶어하는 곳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 조건이 하나 있습니
다. 천국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누가 천국의 문입니까?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이 천국
의 문입니다. 계 21장에 보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동서남북 각각 3개씩 12문이 있다고 했
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천국 문만 통과하면 어디에서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
다. 천국 문만 통과하면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 어느 곳에서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천
국이란 말이요, 아프리카, 구라파, 동남아, 북극지방, 어느 곳에서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것
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꼭 기억할 것 있습니다. 그 문마다 알파와 오메가가 있음을 기억해
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문은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입니
다. 구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천국가게 하신 분도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떠난 믿음
가짜입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재물 가지고는 못 갑니다. 명예,
학문, 물질로도 안 됩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
두는 바울인생입니다. 감옥 같은 세상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
원을 얻으리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의 문을 통과하고 우리로 하여금, 많은 죽어
가는 영혼들이 천국의 문을 통과하게 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4
창 35: 1-7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왜 야곱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고 했습니까? 이유는 둘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하
나님께서 야곱을 향해서 일어나 벧엘로 나가서 단을 쌓으라 명령하셨습니다. 사실 야곱은
세겜을 곧장 떠나야 했습니다. 왜 세겜을 떠나야 했습니까? 우선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한 치욕스러운 곳이 세겜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야곱의 아들 시므
온과 레위가 세겜의 남자들을 살해한 피비린내 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물질을 강탈한 범죄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자녀들이 세겜
에서 6계명, 7계명, 8계명을 범한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하여 "야곱아, 일
어나라, 세겜을 떠나라, 그리고 속히 벧엘로 올라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새성전
건축의 서약 때문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던 때 노숙하게 되었는데, 꿈속에
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셨습니다. 너무 감격한 야곱,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면을
둘러보면서 야곱이 한 말이 있습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창
28:17).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의 성전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벧엘이라고 이름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서약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곳에다 새성전을 건
축하겠나이다".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분부를 듣자마자 지체없이 순종했습니다. 본문 3
절, 거기서 내가 단을 쌓으리라 그리고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앞
장서서 갈 때에 아마 깃발을 흔들면서 기쁨으로 소망을 품고 벧엘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때
에 본문 5절,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도 성전 건축을 방
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요, 세겜 사람들 그 누구도 야곱의 진군을 추격해 온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본문 5절, 하나님께서 세겜사람들을 두렵게 했기 때문
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간섭하셨기 때문이요, 야곱의 진군을 도와주
셨기 때문이요, 원수의 방해를 막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이 무엇입니까? 떠날 곳을
떠나는 생활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에 주저 앉아있으면 어찌 하나
님께서 그를 복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곳이 돼지 치는 우리라고 하면 얼른 떠나야 하고,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면 빨리 떠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신 주님을 향한 발걸음이
어야 할 것입니다. 벧엘을 향하여 진군할 때 야곱은 소망찬 발걸음으로 진군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이 어찌했습니까? 그가 서약한 대로, 또 하나님의 분부대로 벧엘에 성전을 건축
하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엘벧엘이라는 말은 벧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8월이 되면 야곱이 벧엘의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새성전의 하나님을 찬송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축복의 시간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성전에는 상징적인 것들이 여럿임을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로 성전 별동, 교육관의 정면에 새긴 익두스( )의 교훈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익두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는 기독교의 상징적인 유일한 마크입니다. "저는 그리
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명찰과도 같습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5-18). 새
성전에 가보면 동양적인 맘모스 성전이 서있고 그 곁에 별동이 있습니다. 주로 유년주교에
서 노년주교까지 사용하는 교육관인데,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유치원과 오백명 이상이 동시
에 식사할 수 있는 넓은 식당이 있습니다. 이 익두스가 새성전에 들어가면 교육관 정면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 때문에 카타콤 속에서
살고, 그리고 죽으면 묻고, 그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카타콤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지하
매장지요, 예배드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이탈리아, 수리아, 알렉산드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지금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현재 가장 큰 것으로는 로마에 있는데 큰 카타콤들이
35개나 있다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은둔하여 사는 은신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카타콤 밖으로 나와 서로 신분을 알릴 필요가 있을 때에는 땅바닥에 재빨리 물고기 형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물고기 형상은 거기 의미가 있는 것 아니고 헬라어로 물고기를 익두스라
고 부르는데 물고기 형상 속에 새겨져 있는 글자에 의미가 있습니다. 다섯 헬라어의 머리글
자입니다. 처음 두 글자중 이오타( )는 예수님을 뜻하고, 키( )는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다
시 말하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
시야라는 의미인데, 본래는 기름 붓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구약시대에 기름 부음 받은 신분
셋이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의
미인 것입니다. 두 번째 두 글자중 떼카( )는 데오스 곧 하나님이란 뜻이요, 입시론( )은
휘오스 곧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란 의미입니
다. 세 번째 마지막 글자는 시그마( )인데 소테리아스를 뜻합니다. 곧 구세주라고 하는 의
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리시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예수님이 만인의 구
세주가 된다'는 의미가 익두스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익두스의 교훈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익두스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성전의 기초
새성전 설립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누구입니까? 물론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주님이
십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새성전의 설립자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설계자요, 건축자
입니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
18). 새성전의 설립자는 예수님인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새성전의 기초가 됩니다. 왜 음부의 권세가 넘어뜨리지 못합니까? 예수님께서 새성전의 기
초가 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를 못합니까? 예수님이 성전에 좌정
하고 계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성전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속성,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옵나이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거룩한 공
회를 'one holy catholic"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 속에 세 가지 속성이 소개되
어 있습니다. 하나는 유일성입니다. 1972년에 미국 달라스 시에서 굉장히 큰 집회가 있었습
니다. 그때에 표어가 손가락 하나를 들면서 'one way'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온
교회는, 온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하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왜 지상에 많은 교회가 있습니
까?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가 여럿인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하나인데 가지는 여럿인 것과
같습니다. 머리가 아픈데 왜 발에다 침을 놓습니까? 머리와 발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성전
은 여럿입니다. 군데군데 성전이 있습니다. 뉴욕에도, 부산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들은
통합니다. 어떻게 통합니까? 한 분 예수님으로 통합니다. 예수님이 성전마다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유일성입니다. 두 번째는 거룩성입니다. 성전이 무엇이냐고 물
으면, 유일한 답이 있습니다. 거룩한 곳이 성전이란 말입니다. 성전은 신령한 의미에서 천
국의 모형이요,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이, 거룩한 교회가 욕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비만 받을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 자체는 그럴 수가 없습니
다. 다만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성전이신 주님이 욕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
다. 우리 모두는 한결같이 사람을 보고 교회 다녀서는 안됩니다. 그리하면 낭패를 당하고,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누구를 보고 교회를 다녀야 합니까? 성전의 기초가 되는 오직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만 사모하면서 교회생활을 해야 할 것입
니다. 행여라도 '이 놈의 교회가'란 표현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표현은 예수님께 욕
돌리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출입하는 그 백성들을
성도,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는 교회의 거룩성을 보존해야 합
니다.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거룩성을 보존해야 합니다. 말도 조심해야 하고, 행실도 진
리여야 합니다. 사람은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요, 성전의 기초
란 뜻입니다. 세 번째는 보편성입니다. 'catholic'이란 말이 그 의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똑같은 지체란 말입니다. 손도 지체이지만 발도 지체란 말입니다. 눈도 지체
이지만 귀도 지체란 말입니다. 교회를 보십시오. 남녀가 있습니다. 노소가 있습니다. 참으
로 조심, 조심해야 될 곳이 교회입니다. 무식한 사람도 있지만, 굉장히 유식한 사람들도 있
습니다.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시장이 오셔도, 국회위원이 오셔도 별석
이 없습니다. 사장과 수위가 같은 자리에 앉는 곳이 교회입니다. 익두스 예수님이 누구십니
까? 성전의 반석되신 예수님이십니다. 반석 하면 기억되는 곳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형편이 되었을 때에 모세가 어찌 했습니까? 지팡이로
반석을 때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성도들의 반석에서 생수 나
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 시간에도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주님이여, 내 믿음의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옵소서". 내 기도의 반석에서, 내 봉사의 반석에서 생수가 쿨쿨 솟구쳐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성전의 중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께서 가이샤
랴 빌립보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물으신 것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더
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세
상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이 모양으로 답합
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더러는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례요한의 종교가 아닙니다. 엘리야의 종교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종교가 아니
요, 선지자 중의 하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
구라 하느냐" 이 시간도 우리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정답을 지닌 성도에게 복이 될 것입니
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 여기에 믿음의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저도 묻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답할 것입
니다. 정답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본문에 의하면 누락됐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은 살
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며, 그 누가 나의 슬픔 알까 ♬,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의 괴
로움을 아시고, 나의 슬픔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들으시
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전의 중심이 누구입니까? 익두스가 설명하고 있는 대로,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대로 그리
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우리의 모든 방법
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 방법이어야 합니다. 세상 방법으로는 안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아들, 예수 방법이어야 합니다. 율법주의, 좋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이어야 합니다.
민본주의 좋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이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오직 예수주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
들이십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 주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으로 나타나 주셨습니다.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
함이라 (사 53: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피를 쏟으신 것은
바로 내 죄때문이란 말입니다. 김집사의 죄때문이요, 박권사의 죄 때문이요,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란 말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나는 죄
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해야 할 우리 모두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
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예
수님은 무덤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
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달력에 보면 부활주일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
도여, 이 부활신앙 가지고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다.
셋째, 성전의 목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셨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요나를 세우셨습니까? 예수님 때
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을 전도자로, 무엇 때문에 베드로를 전도자로 세웠습니까? 오직
예수 때문입니다. 왜 성전을 건축해야만 합니까? 예수님을 전파하되, 세계를 향하여 전파하
기 위함입니다. 왜 나 같은 죄인을 세우고, 왜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를 세우셨습니까? 예
수 전파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예수님 전파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힌다고 모든 것 포기했습니까? 옥중에서도 예수 전파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적이 생
겨나기도 했습니다. 어느 아파트 성도가 눈물로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죽어 시체로 운반되어 나아갈 때에 생각을 했습니다. '저 친구 지옥에 갈까,
천국에 갈까' 하나님 믿지 않고 죽었으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가슴을 치
면서 '내 탓이다, 내 탓이다, 저 친구가 지옥 가는 것은 내 탓이다'. 한 호실 간격밖에 없
는데 한번도 '예수 믿으세요', 전도하지 못했던 것을 가슴아프게 눈물로 참회했다는 이야기
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 전도대를 통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전도폭발을 통해서 최선
의 몸부림을 합니다. 새신자반에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합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전파
때문입니다. 새성전 건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
전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행 3장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의 이야기
가 있습니다. "한푼 줍쇼", 구걸을 했습니다. 물론 돈 한푼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 앉은
뱅이가 무엇으로 일어났습니까? 언제 일어나는 이적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전했을 때입니
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
라"했을 때에 이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익두스가 설명한대로 소
테리아스, 구세주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전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외쳤습니
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새성전에 가면 본당 좌석
이 3,500석이 넘습니다. 어떻게 자리를 메울까 염려가 되지를 아니합니까? 그러나 비가 오
기 전에는 우산을 펴지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 미리서 우산을 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염려는 마치 안개와 같습니다. 크게 보이는 것이 안개입니다. 그러나 그 지
역 안개를 다 축소해 보면 물 한 컵 되지를 아니합니다. 염려는 가슴을 찢는다는 의미를 지
닙니다. 일부러 가슴을 찢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네 모
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 염려를 맡긴다는 말은 도롱테를 굴리듯이 염려를 예수님께 굴려버
리라는 뜻입니다. 언덕 위에서 도롱테를 굴려버린다면 다시는 도롱테가 위로 올라오지 아니
할 것입니다. 내가 맡긴 모든 염려, 우리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새성
전을 어떻게 채울까 염려하지 말고, 대신 기도하십시다. 대신 전도하십시다. 대신 익두스의
참뜻을 공부하십시다. 익두스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
까?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는 ♬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전파하는, 그래서 영
적으로, 육적으로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5
창 35: 1-7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 했습니까? 벧엘에 십자가 있는 성
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벧엘에 십자가 있는 성전을 계획했습니까? 형 에서를 피하
여 도망하던 때, 꿈속에서 십자가 있는 성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
락하고"(창 28:12). 여기 사닥다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꿈에서 깬 야곱이 어찌했습니까?
17절,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습니다. 또 22절, 그가 베개하고 잤
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겠나이다'
고 서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일어나 벧엘로 가자고 외친 것입
니다. 새성전에 있는 상징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성전꼭대기에
우뚝 세운 십자가의 교훈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새성전에 가면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있
습니다. 성전 맨 꼭대기에 우뚝 세운 십자가입니다. 밤에는 더욱 아름답기만 합니다. 광섬
유로 빛을 발하는데, 흰색, 빨간색, 녹색 등이 돌아가면서 빛을 발합니다. 새성전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종교입니다. 성전마다 맨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서양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 동양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
자가가 성전 맨 꼭대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또 읽어보면 구약도 십자가요, 신약도 십자가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
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여기 장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여기 놋뱀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서 장대를 세우
고 놋뱀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쳐다만 보라 살리라"를 외치라고 하신 것입
니다. 모세는 그대로 했습니다. 놋뱀을 만들고 높은 장대에 그것을 달고 "쳐다만 보라 살리
라"고 백성들을 향해서 외쳤을 때에 쳐다본 사람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고집 센, 불
신앙의 사람들은 쳐다보지 아니함으로 다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 내용을 요한은 이
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
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쳐다만
보라 살리라" 종교입니다. 또 신약이 무엇입니까? 역시 십자가입니다. 사복음서가 중추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분이
십니다. 이 시간 새성전의 십자가가 주는 교훈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
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
을 것이니라"(마 16:24). 성도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 이렇게
이름 붙이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어떠한 십자가입니까?
첫째, 고난의 십자가
기독교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고난의 종교라고 표현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
님의 생애가 이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는 집도 많고, 여관도 많았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은 짐승이 자는 외양간에서 나셨습니다. 낳자마자 헤롯왕이 죽이려 하매,
애굽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가정에서 무려 30년 동안 손바닥에 굉이가 박
히도록 노동을 했습니다. 공생애 3년동안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눌린 자,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마침내 시기와 모함, 질투, 그리고 누명을 쓰고서 십자가에 못 박
혀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불운한 주님이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뒤에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고난 당한 성도 있습니까?
낭패를 당한 성도 있습니까? 낙망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길잡
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무엇입니까? 도리어 영광, 영광, 영광입니다. 고진감래
란 속담이 있고, '폭풍우 지난 뒤 맑은 날씨'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시인 괴테는 말하기를
"눈물 섞인 빵을 먹지 아니하고는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 했고 철학자 니체도 말하기를 "피
로 쓴 글이 아니면 인생을 흐느끼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
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
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 50:15). 내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나와 멀리 계시는 주님, 아니십니다. 바로 내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말
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왜 성도끼리 반목하고 질시합니까? 고난의 십자
가를 피부로 체험하지 않기 때문이요, 내 믿음생활의 발자취에 고난의 십자가가 없기 때문
입니다. 언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뚜벅뚜벅 겟세마네를
향할 때입니다. 소가 멍에를 벗어버리면 자유를 얻은 것 같지만 그 발걸음이 도살장행임을
어찌 하리요, 내가 십자가에 죽어버리면 누가 뭐라 해도 틀리지 않지 않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고난, 나의 고난 되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 무엇입니까?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이는 고난의 절정이요, 절망하는 주님
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인생의 죄악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목마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으로는 두 마디입니다. 영어 성경도 "I'm thirsty", 두 마디입니다. 그러나 헬라
어 성경은 단어 하나입니다. '딥소', 물론 '내가 목마르다'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입이 불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지금 내 입에 불
이 불타고 있다고 절규하신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주님의 고난을 보인 말씀입니다. 왜
내가 목마르다고 했습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첫째,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22:15, 시 69:21, 예수님께서 목마르실 것을 벌써 예언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면 예언의 모든 말씀이 부도로 끝날 것 아닙니까? 목마른 중에 주님이
이 말씀하심으로 성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고통을 알게 하시려고 그리 하
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이 고통은 인간의 어떤 생리적인 표현으로도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이나 매달리셨고, 창에 허리 상한 것,
손발에 못이 박힌 것 그 상태가 붓기를 시작하고, 아프고, 육중한 몸인지라 살이 찢어지고,
동맥이 끊어지고 피가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이 고통. 고통 당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예수님
의 이 고통을 알고 있을 때에 '내 고통 별 것 아니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셋째,
우리로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다 목마른 실존입니다. 돈을 모아봐도 목마
르고, 쾌락을 누려봐도 목마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금당, 옥당에 누워도 괴로운 것이
인생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평안을 누리라 그리고 모든 고통을 내게 맡기라" 믿음생활이 무엇입
니까? 신령한 의미에서 고난의 생활입니다. 아스팔트 걷는 생활, 뗏목 타고 휘파람불며 가
는 생활도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땀이 있어야 합니다. 겟세마네의 걸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생활은 십자가 지고 가는 생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떤 십자가입니까?
둘째, 사랑의 십자가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마 27:32). 우리는 사람 생각으로 어떠한 사건들을 풀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몬은 재수 없는, 운이 나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기분 나쁜 날, 운이 나쁜
날이었음을 부인치 못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억지로라도 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십자가는 바로 시몬을 사랑하사 지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십자가는 억
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그리하면 은혜가 됩니다. 믿음이 생겨납니다. 축복이 깃들게 됩니
다. 예수님은 간밤에 밤잠을 설쳤을 것입니다. 신문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을 생각하면서 고난의 잔을 마셨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정신적으
로 지쳤을 때에 구레네 시몬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그 십자가를 졌습니다. 성경
엔 없지만 아마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시몬, 고맙네. 그대에게 복이 있으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시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고 예루살렘이
온 것 아닙니다. 유월절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여행 왔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시몬의 여행목적을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 있습니다. 그의 계획이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걸음이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를 향하는 발걸음
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행목적과는 거리가 멀게 된 것입니다. 아마 시몬은 훗날 예수 믿
고 새사람 되었을 것입니다. 성품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지고, 지옥갈뻔 했다가
천국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시몬인생을 구원시키시려고 세상에 오셨
습니다. 억지방법이라도 통해서 죄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고기 잡고 있던 베
드로를 억지로 불러서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셨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를 억지
로 끌어내어 제자 삼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만 했습니까? ♬ 나 같은 죄인
♬,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 무엇입니까? 사랑의 덩어리입니다. 사랑의 절정입니다. 사랑의 상징, 하면 십자
가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맞을 매를 대신 맞으시고, 우리의 질고를 대신 감당
하시고, 내가 져야 될 십자가를 주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주
달려죽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음성, 들
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십니다. 나 같은 것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나 같은 것을 기억하십니다. 나 같은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나 같은 것을 보호하시고, 지
켜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이 지신 십자가, 나도 지고 갑니까? 우리
함께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시다. 또 어떤 십자가입니까?
셋째, 자기의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4), 다른 십자가 아니고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물
론 이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 견딜 수 없는 아픔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누
구의 십자가입니까?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성도로서 감당하고자 할 때에 어려움들이 더러
있습니다. 눈물 있고, 괴로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바로 자기의 십자가인 것을 잊
지 말아야 합니다. ♬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 내 몫의 십자가, 누가 져야
한단 말입니까? 내가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질 때에 날마다 져야 합니다. "날마다 제 십자
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하루도 건너뛰어서는 안됩니다. 월요일도, 화요
일도, 주일만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성도입니다. 자기의 십자가, 외면
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보면 남편의 십자가,
남편이 지지 않으면 누가 집니까? 아내의 십자가, 아내가 지지 않으면 누가 집니까? 부모의
십자가, 자녀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십자
가, 성가대원의 십자가 있습니다. 집사님의 십자가, 권사님의 십자가, 장로님의 십자가가
있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십시다.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어
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를 왕좌에서 내리는 일이기 때문이요,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후퇴시키고, 자기를 완전히
없는 것처럼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포기해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
다. 자기 부인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중심의 사고, 자기 중심의 행동을 버리고, 예
수님 중심의 사고, 예수님 중심의 행동을 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바울에게서 이 믿음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
느니라"(갈 5:24).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까?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이 예수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많이 읽
다보니 눈이 흐려졌다던가, 기도를 너무 하다보니 무릎이 약하여 졌다던가, 예수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또 말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게 여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명예, 권
세, 재물까지도 배설물로 여기는 바울의 믿음, 우리가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합니
까?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님만 따라 가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예수님
만 따라가야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어떠합니까? 첫째, 욕심을 따라갑니다. 자기 욕심 따
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표준에 맞지 아니하면 다 그릇된 일이란 것이요,
잘못된 일이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생활하다보면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행실이
더러워집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도 망신을 당하게 됩니
다. 둘째, 세상풍속을 따라갑니다. 세상풍속이 무엇입니까? 마치 안데르센 동화집에서 나오
는 분홍신과 같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음직합니다. 그러나 신으면 미쳐서 돌아가는 것이 분
홍신입니다. 셋째, 우상을 따라갑니다. 우상을 따라가는 사람은 대개 마귀를 따라가기 일수
입니다. 결혼을 하려면, 상대방이 무슨 띠냐고 묻고, 사주를 보면서, 궁합이 맞니, 안 맞니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세상을 따라가지 마십니다. 믿는 성도는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 예수 따라 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믿음 있는 성도는 예수님을 좇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을 좇는다
는 말은 예수님을 흉내낸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
치 어린 양이 목자를 따르듯이, 맹인이 지도자를 믿고 따르듯이 말입니다. 사탄을 따르면은
그가 지옥 불에 떨어질 때, 함께 떨어질 것이요, 세상의 권세와 재물을 따라가면 그것들이
불탈 때에 함께 불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따라가면 예수님과 함께 영상동락을 누리
게 될 것 아닙니까? 주기철목사님 이야기입니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에 평양 감옥에서
옥사하셨습니다. 바로 전날밤 오종모사모께서 면회를 갔을 때,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그리고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목사님은 주님을 위해서 차디찬 감옥에
서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마시지 못한 채 옥사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목사님이 친히 작사한
영문 밖의 길 5절을 소개합니다. "십자가의 고개턱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리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 가오리". 사랑하는 성도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시다.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
시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시다. 그래서 남은 생애를 살아갈 때 내 뜻대로 살지 아니
하고 주님 뜻대로 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