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이 말하는 5·18의 기억과 ‘사자왕 형제의 모험’
2017.05.18 10:09 심혜리 기자
지난해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47)이 지난 2월 3일 노르웨이
오슬로의 ‘노르웨이 문학의 집’에서 열린 문학행사에서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을 말했다.
한강은 특히 아동문학으로서 죽음을 진지하게 다룬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5·18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한강(출처: 창비)
한강은 어릴 적 읽었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통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이 자신의 내면에서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한강은 열살이던 그 여름을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자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던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 여름의 소년들에게
오랫동안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고 있던 것들을 뒤늦게 깨닫고 놀라는 때가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린드그렌의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은 시기가 그런 이상한 혼돈을 주었다.
이 책을 1980년에 읽었다고 최근까지 굳게 믿어 왔는데, 이 강연 원고를 쓰기 위해 개정판을 사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이 한국에서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1983년이었다는 것을.
나의 기억이 틀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번역자의 서문까지 읽고 나서야 내 착각을 인정하게 되었다.
서문에 따르면 번역자 김경희는 1982년 유학생 신분으로 스톡홀름에 머물던 중 당시 일흔네 살이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좋아하던 작가를 처음 만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번역자를 린드그렌은 밝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김경희는 이렇게 그 순간을 묘사한다.
나를 린드그렌 할머니는 마치 친손녀처럼 안아 주었습니다.
겁에 질려 뛰어든 칼을 푸근히 감싸 안던 마티아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린드그렌 할머니는 맑고 다정한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꽤나 멀고도 낯선 나라에서 온 이 유학생에게 웬일인지 아주 가깝고도 낯익은 느낌이 드네요.
그 나라에도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이 있거든 나 대신 얼마든지 들려줘요.”
두 사람이 긴 대화를 나눈 뒤 김경희가 시내 공원 모퉁이의 그 아파트를 나온 것은 저녁 7시였다.
그들의 이 만남은 1982년 1월에 이루어졌고 이듬해 7월 20일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은 바로 그 여름이었다.
1980년이 아니라 1983년의 여름. 아홉 살이 아니라 열두 살의 여름.
비록 연도에는 혼동이 있었지만, 그 계절의 감각만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더운 오후에 이 책을 처음으로 손에 쥐었다. 수유리 언덕배기 집의 조그만 내 방에서,
서늘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세가 불편하게 느껴지면 일어나 앉았다가, 땀이 흐를 만큼 더워지면 다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가며,
마지막 장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못하고 읽어 갔다.
그러니 나에게 남은 의문은 이것들이었다.
왜 나는 그해가 1980년이었다고 철석같이 믿어 왔을까?
1980년과 1983년의 여름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그것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열정으로 나는 이 책에 빠져들었을까?
나는 1970년 11월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80년 1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는데,
문학 교사이자 젊은 소설가였던 아버지가 수도에서 글만 쓰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며
직장을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 검푸른 기와를 올리고 문과 창문에는 유리 대신 하얀 종이가 발라진 정든 한옥을 떠나,
서울 외곽의 수유리 언덕에 있는 양옥집으로 옮겨 갔다.
가족 모두가 새로운 삶에 차츰 적응해 가던 5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 전해인 1979년 10월, 18년 동안의 군부 독재를 이끌었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 그 시기를 틈타 또 한 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마침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사소하고 다소 즉흥적인 이유로 나의 가족이 떠나온 도시, 내가 태어나 유년을 보낸 바로 그곳,
그때까지 그저 작고 평범한 교육 도시였을 뿐인 그곳에서 계엄에 불복종하는 항쟁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 날인 5월 18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 오후 1시, 수많은 시위 군중들이 모인 도청 앞 광장에서 군대는 집단 발포를 했고,
이후 생존을 위해 시민들이 무장하며 ‘광주 공동체’가 태어났다.
짧고 평화로웠던 시민 자치가 이루어지던 도청으로,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되돌아온 것은 5월 27일 새벽이었다.
신군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폭동이자 내란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광주에 친지와 친척, 친구 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 일의 의미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학살이자 항쟁이었던 그 열흘의 시간.
평범한 사람들이 총상자들을 살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서 헌혈을 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나누고,
무고하게 살해된 자들을 위한 장례를 날마다 함께 치르며 버텼던 절대 공동체.
어른들은 우리 남매들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서 절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광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돼.’ 그렇게 그 일은 나에게 영영 숨겨야 할지도 모를 무거운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내가 문득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곧 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 후 이 년이 흐른 1982년, 아버지가 광주에서 사진첩 한 권을 가져왔다.
증언을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만들어 유통시켰던 책이었다. 이때의 기억을 나는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 사진집을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은 이년 뒤 여름이었다.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구했다고 했다. (…)
어른들끼리 사진집을 돌려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198~99면)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서울의 여름, 이상한 열정으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있다.
그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엌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픈 소년 칼에게, 그를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얼마 뒤 집에 불이 나고, 칼을 업고 뛰어내린 요나탄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과연 하얀 새가 되어 창가로 날아온 요나탄이 들려준 말대로,
뒤이어 병으로 숨을 거둔 칼은 낭기열라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들장미 골짜기의 텡일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가 괴물 카틀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사람들을 지배하고 핍박한다.
이웃한 벚나무 골짜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맞서는데,
요나탄은 ‘사자왕’이라는 그곳에서의 별명대로 용감하고 순정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