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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시(晉州市) ‘촉석루(矗石樓)Ⅲ‘ 한시(漢詩)편 11.> 총13편 中
촉석루는 진주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탁월한 경관이며,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진주성 안 남강변에 우뚝한 누각이자 진주성의 지휘소로서 진주시 본성동에 소재하며 일명 남장대 혹은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른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하나, 조선 초 하륜(河崙)의 「진주성문기(晋州城文記)」에 따르면, 원래 토성이 있었는데, 고려 우왕 3년(1377) 흙으로 다시 쌓았으나 곧 무너져 우왕 5년에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주위 800보, 높이는 3길, 문은 3개). 이후 조선 세종 때 성의 확대 축성이 이루어졌고, 1461년(세조 7) 새로 돌로 쌓은 진주성은 둘레가 4460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 기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선조 24) 전쟁에 대비하여 영호남에 읍성을 수축하였는데, 이때 낮고 저습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전투에서 확장된 동문 쪽이 집중 공격을 받았고, 계사년(1593) 진주성 함락 때 동남쪽 모퉁이가 무너지면서 함락되었다.
58) 진주 촉석루운[晉州矗石樓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
捲盡珠簾忽碧江 사방 주렴 다 걷으니 푸른 강이 나타나고
水中雲度影先窓 수중에 구름이 흘러 그림자가 먼저 창에 이르네.
臨風倚柱移時立 바람 불어 기둥에 의지해 한참 동안 기대섰는데
眠渚鴛鴦巧作雙 물가에는 원앙이 쌍쌍이 앉아 다정히 졸고나.
寒月流光搖一江 차가운 달빛이 흘러 온 강을 어지럽히고
風生階竹語生窓 바람이 섬돌 대나무에 일더니 창문을 두드리네.
三更露下雲初凍 한밤중에 이슬 내리니 구름이 처음 얼어붙는데
沙渚驚鷗不作雙 모래톱에서 놀란 물새는 짝을 찾지도 못하구나.
59) 진주 촉석루운[晉州矗石樓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風拖紅霞漾碧江 바람은 붉은 노을을 이끌고 푸른 강을 흔드는데
殘花無數撲紗窓 무수히 남은 꽃이 얇은 비단 창을 두드린다.
看來漸覺年華晩 보아하니 한 해가 점점 저물어 감을 깨닫는데
垂柳藏鴉不辨雙 수양버들에 숨은 새는 한 쌍도 구별하지 못하겠네.
60) 진주 촉석루 차운[次晉州矗石樓韻] / 송순(宋純 1493∼1582)
形勝千年擅一區 천년의 형승을 한 구역이 독차지하여
振衣今日快登樓 오늘 옷의 먼지를 털고 유쾌히 누각에 올랐다.
重煙亂岫圍平野 짙은 안개 낀 어지러운 산이 평야를 에워싸고
高壁長林遶遠流 높은 성곽 긴 숲이 두르고 멀리 강이 흐르네.
度竹淸風來款款 대숲을 지나온 맑은 바람이 느릿느릿 불어오니
憑欄豪氣去浮浮 난간에 가득 찬 호기로운 기운이 떠다닌다.
嶺南佳處曾遊遍 영남의 아름다운 곳을 두루 유람하면서
始信湖山說此州 믿고 볼 수 있는 산과 호수는 이 고을이라 말하노라.
61) 진주의 촉석루운에 차하다[次晉州矗石樓韻] / 성현(成俔 1439∼1504)
煙暗高城欲暮時 연기 자욱한 높은 성 저물어가는 때에
登臨倦客獨吟詩 고달픈 나그네 홀로 올라 시를 읊노니
江山勝㮣探無盡 강산의 좋은 경치는 찾고 찾아도 끝이 없고
翰墨淸談老不衰 문필의 고상한 담론은 늙어도 시들지 않네
古渡日斜人去遠 석양 아래 옛 나루엔 사람이 멀리 가고
長林雲捲鳥歸遲 구름 걷힌 긴 숲엔 새가 더디 돌아오누나
愧將篆刻雕蟲手 부끄러워라 조충전각이나 하는 솜씨로
仰和陽春白雪詞 〈양춘〉 〈백설〉의 문장에 우러러 화답하기가
萬指堂中歌管脆 당중의 수많은 이 창가와 음악은 섬세하고
一雙樽外舞衫垂 한 쌍의 술동이 앞엔 춤추는 소매 드리우네
恍然坐我神仙境 어슴푸레 나를 선경에 앉혀놓은 듯해라
閬苑瑤池未必奇 낭원 요지만 반드시 뛰어날 것 없고말고.
[주1] 조충전각(雕蟲篆刻) : 벌레 모양이나 새기고 전서를 조각한다는 뜻으로, 전하여 마치 벌레 모양이나 전서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이나 꾸미는 잗단 기예(技藝)를 비유한다.
[주2] 양춘(陽春) 백설(白雪) : 옛날 초(楚)나라의 두 가곡(歌曲) 이름인데, 이 가곡은 곡조가 매우 고상하여 창화(唱和)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는 데서 전하여 아주 뛰어난 시가(詩歌)를 뜻한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영중에서 노래하는 나그네가 있어 맨 처음 〈하리곡〉, 〈파인곡〉을 노래하자, 국중에서 그것을 이어 창화하는 자가 수천 인이었고, 〈양아곡〉, 〈해로곡〉을 노래하자, 국중에서 그것을 이어 창화하는 자는 수백 인이었고, 〈양춘곡〉, 〈백설곡〉을 노래하자, 국중에서 그것을 이어 노래하는 자는 수십 인에 불과했으니,……이는 곧 곡조가 고상할수록 창화하는 자가 더욱 적기 때문이다.〔客有歌于郢中者 其始曰下里巴人 國中屬而和者數千人 其爲陽阿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不過數十人……是其曲彌高 其和彌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3] 낭원 요지(閬苑瑤池) : 낭원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낭풍전(閬風巓)이란 산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바로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하며, 요지 역시 서왕모가 거주하던 곤륜산의 선경을 가리킨다.
62) 촉석루[矗石樓] /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1303~1374)
登臨偏憶舊遊時 누대에 올라서니 생각은 예전에 와 놀던 일
强答江山更覓詩 강산에 대한 인사로 시를 지으려네
國豈無賢戡世亂 난세를 평정할 인재 나라에 어이 없으리
酒能撩我感年衰 술에 휘감기니 나도 이제 늙었구나
境淸易使塵蹤絶 맑디맑은 이 지경에 속진이 어이 얼씬
席闊何妨舞手垂 넓은 자리는 춤추기에도 아주 좋고
點筆謾成春草句 붓을 들어 시를 쓰니 춘초구를 얻었네
停杯且唱竹枝詞 잔 멈추고 들으련다 죽지사를 불러라
妓從坐促爲歡密 자리에 가득한 기생들은 바싹 앉아 정답고
人與時偕欲去遲 사람들은 시절과 함께 얼른 가지 않으려네
此地高懷眞不世 이 땅의 높은 회포가 진정 속세 아니니
적성(천태산(天台山) 입구)과 현포(곤륜산에 있는 신원의 동산)보다도 기특하다 하리라
赤城玄圃未全奇 적성과 현포보다도 기특하다 하리라
● 호정(浩亭) 하륜(河崙)의 <촉석루기>에 “이 누대의 이름이 뜻하는 것은 담암(淡庵) 백선생(白先生)이 ‘강 가운데 돌이 우뚝우뚝 솟아 있기 때문에 촉석루라고 했다’라고 하였으니 곧 촉석루는 담암공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두 번째는 안상헌(安常軒)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장원을 한 사람이다‘하였으므로 이 누각의 이름을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불렀다.(按河浩亭崙矗石樓記云 名樓之義則淡庵白先生曰 江之中有石矗矗然 故曰矗石 始于淡庵公而再成於安常軒 皆壯元也 故又有壯元之名)
<경남 진주시(晉州市) ‘촉석루(矗石樓)Ⅳ‘ 한시(漢詩)편 12.> 총13편 中695
촉석루는 원래 용두사(龍頭寺)라는 절의 누문(樓門)이었는데 고려 고종 28년 진주 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누각으로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규모가 크고 건물이 아름다우며 주변 풍경도 절경이어서 처음부터 명루(名樓)로 꼽혔다. 즉 경복궁 경회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불리고, 부벽루와 밀양의 영남루, 삼척의 죽서루와 함께 ‘한국의 4대 누각’, 영남루와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남도의 3대 누각’, 영남루와 안동 영호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각’ 등으로 꼽히고 있다. 그 이름에 대해서는 하륜이 〈촉석루기〉에서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의 기문을 인용해 “강 가운데 돌이 쫑긋쫑긋 나와 있어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하고 촉석루를 짓고 중수한 이들이 다 과거에 장원(壯元)한 사람들이어서 ‘장원루’라는 별칭도 있다고 전한다. 이후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지휘소로 남장대(南將臺)라는 이름을 겸했고 과거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진주 기생들이 논개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도 활용했다.
촉석루는 초건 이후 8차례의 중수와 재건을 거쳤는데 임진왜란과 6·25 전쟁 시에는 완전히 소실되었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전면과 남강 쪽 후면에 촉석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누 안쪽에는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과 ‘남장대’라 쓰인 대자(大字) 현판이 걸려 있다. 고려 이후 여러 선비의 시와 기문이 새겨진 현판도 걸려 있다. 정면 5칸인 촉석루의 가로 방향에는 모두 6개의 기둥이 서 있다. 그 처음과 끝 기둥에는 주련이 두 장 붙어 있어 8행의 율시 한 편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63) 진주 촉석루 판상에 차운[次晋州矗石樓板上韻] / 오횡묵(吳宖默 1834~1906)
雄鎭南州是矗營 남녘 고을의 웅장한 진지(陣地) 바로 촉영(경상우병영),
一堂高出晋陽城 진양성의 한 건물 한결 높구나.
無雙將帥登頗牧 장수는 파목(頗牧) 과도 견줄 만하고
苐一江山冠蜀荊 제일의 강산에 아름다운 촉형(蜀荊)의 땅이었다.
夜冷淸霜凝豐戟 차가운 밤 맑은 서리가 무성히 엉기고
時平白日照竿㫌 태평한 시절 흰 태양이 긴 깃발에 비춘다.
繞欄流水橫弓樣 난간을 두른 강물이 활모양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데
猶向旄頭學射精 여전히 대장 깃발 향해 훌륭한 활쏘기를 배우네.
[주] 파목(頗牧) : 금중 파목(禁中頗牧)의 준말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조정의 시종신(侍從臣)을 뜻하는 말이다. 파목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병칭한 말인데, 당 선종(唐宣宗) 때 한림학사 필함(畢諴)이 강족(羌族)을 격파할 대책을 상세히 올리자, 황제가 “우리 조정의 시종신 중에 염파와 이목 같은 명장이 있을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孰謂頗牧在吾禁署]” 하고, 필함을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해서 공을 세우게 했던 고사가 있다.
64) 촉석루[矗石樓] / 신유한(申維翰 1681~1752)
晋陽城外水東流 진양성 바깥 강물은 동으로 흐르고
叢竹芳蘭綠映洲 울창한 대숲 아름다운 풀은 모래섬에 푸르다.
天地報君三壯士 이 세상엔 충성 다한 삼장사가 있고
江山留客一高樓 강산엔 손을 머물게 하는 높은 누각 있구나.
歌屛日照潛蛟舞 따뜻한 날 병풍 치고 노래하니 잠자던 교룡이 춤추고
劒幕霜侵宿鷺愁 병영 막사에 서리 내리니 졸던 가마우지 걱정스럽네.
南望斗邊無戰氣 남으로 북두성 바라보니 전쟁 기운은 없고
將壇茄鼓半春遊 장군단에 피리 북소리 봄을 맞아 노닌다네.
● 임진왜란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시절이라 진주성을 한껏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은근한 근심이 애처로이 스미어 있다. 함련에 나오는 삼장사는 진주성 2차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패전하고 남강 물에 몸을 던진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최경회(崔慶會) 세 장수를 말하는 것이다.
65)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 / 남효온(南孝溫 1454∼1492)
樓壓大江面 누각이 큰 강 수면 제압하니
奇觀甲海東 기이한 경관 해동에 으뜸일세
登臨一瓢水 올라서 마시는 한 잔 물
冷與禪僧同 차갑기가 선승과 같도다
66) 진주 촉석루[晉州矗石樓] / 각안(覺岸 1820∼1896)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營南江水向東流 병영의 남쪽 강물은 동쪽을 향해 흐르고
矗石穹窿影落洲 활처럼 길게 굽은 곳에 촉석루 그림자가 물가에 드리웠네.
嶺湖勝境知何處 영호남 명승지 어드멘지 아느뇨?
郡國名區見此樓 우리나라 고을의 이름난 구역에서 이 누각을 보누나.
歌聲高出龍兒舞 노랫소리 빼어난 용아(龍兒)가 춤추고
將氣超浮海耇愁 바닷가 늙은이 근심이 바람타고 둥실 떠다니네.
晉陽一域人民樂 진양의 한 지경에서 인민이 즐거워하니
更把餘懷竟日遊 남은 회포 부여잡고 진종일 노닐고나.
67) 진주 촉석루(晉州矗石樓) / 정을보(鄭乙輔 1285~1355)
黃鶴名樓彼一時 저 황학루가 어찌 혼자 으스대리
崔君好事偶留詩 최군이 수다스러워 우연히 시에 머물렀지
登臨景物無增損 올라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는데
題詠風儀有盛衰 편액의 글 품격은 성쇠가 보이누나
玉斝高飛江月出 옥 술잔을 높이 드니 강달이 솟아나고
珠簾半捲嶺雲垂 주렴을 반쯤 걷으니 영에 구름 드리웠네
倚欄回首乾坤小 난간서 고개 돌리매 천지가 작아 뵈니
方信吾州特地奇 알리라 우리 골 경치 특별히 기이한 줄
[주] 최군(崔君) : 당 나라 시인 최호(崔顥). 그가 황학루에 올라 명작시를 써 걸었다.
68) 촉석루에서 고적을 회상하며[矗石懹古] 3월이었다. 누각이 진주 병마영(兵馬營)에 있는데 임진년 난리 때 세 장사가 이곳에서 순절하였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蠻海東瞻日月多 동쪽의 왜놈 바다 노려본 지 얼마런고
朱樓迢遞枕山阿 붉은 누각 아스라이 산허리를 베고 있네
花潭舊照佳人舞 연꽃 못은 지난날 미인의 춤 비추었고
畫棟長留壯士歌 단청한 기둥 이제껏 장사의 노래 남았다오
戰地春風回艸木 전쟁터의 봄바람 초목 끝에 감돌고
荒城夜雨漲煙波 낡은 성의 밤비에 강 물결이 불어난다
只今遺廟英靈在 오늘날 남은 사당 영령이 서려 있어
銀燭三更酹酒過 촛불 켜고 삼경 밤 술 올리고 지나가네
69) 진주 촉석루[晉州矗石樓] / 면재(勉齋) 정을보(鄭乙輔 1285~1355)
黃鶴名樓彼一時 저 황학루가 어찌 혼자 으스대리
崔君好事偶留詩 최군이 수다스러워 우연히 시에 머물렀지
登臨景物無增損 올라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는데
題詠風儀有盛衰 편액의 글 품격은 성쇠가 보이누나
玉斝高飛江月出 옥 술잔을 높이 드니 강달이 솟아나고
珠簾半捲嶺雲垂 주렴을 반쯤 걷으니 영에 구름 드리웠네
倚欄回首乾坤小 난간서 고개 돌리매 천지가 작아 뵈니
方信吾州特地奇 알리라 우리 골 경치 특별히 기이한 줄
[주] 최군(崔君) : 당 나라 시인 최호(崔顥). 그가 황학루에 올라 명작시를 써 걸었다.
<경남 진주시(晉州市) ‘촉석루(矗石樓)Ⅴ‘ 한시(漢詩)편 13.> 총13편 中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에 의하면,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진주)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촉석성(矗石城) 주 남쪽 1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가 4천 3백 59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70) 진주 촉석루[晉州矗石樓] 희롱삼아 허헌지 운에 차하다(戲次許獻之韻) / 조위(曺偉 1454∼1503) 1483~1485년 함양군수 재직 時.
夢驂鸞鶴過塵區 꿈속에서 난새와 학이 티끌세상을 지나가다
飛到菁川十二樓 진주목의 열두 누각으로 날아가 앉네.
花壓雕欄紅影透 꽃을 눌러 새긴 난간에 붉은 그림자 투영되고
竹搖晴浪翠紋流 대나무 흔드는 맑은 물결은 푸른 무늬 흐르는 듯.
緗簾風動佩聲遠 담황색 주렴이 바람에 흔들리고 패옥소리 길어지니
寶篆煙消香霧浮 향로에 연기 사라지고 물안개 향기 풍기네
追憶使華春睡處 사신이 봄잠을 자며 머물렀던 곳을 추억해보니
還如杜牧在楊州 양주에 사는 두목(杜牧)같은 한량일까 두렵구나.
[주1] 두목지(杜牧之 803~853) : 두목지라는 인물의 본명은 두목(杜牧)으로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당나라 후반(晩唐)을 화려하게 장식한 시인이다. 두목지는 풍류에만 능한 것이 아니고 시인이자 대단한 풍채를 지닌 멋장이었다. 그가 양주(楊州)에서 변변치 않은 벼슬아치로 있을 때, 술집이 있는 저자거리를 지날라치면 그를 유혹하려는 여인들이 모두 나와 귤을 던졌다는 일화(醉過楊州橘滿車)가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주2] 양주(楊州) : 양주는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한 고도로 중국에서는 옛부터 一楊二益 즉 제일이 양주요 두번째가 익주라 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다. 따라서 기녀(妓女)도 많았는데, 여기 진주는 고려 조선시대 영남에서 가장 기녀가 많았던 곳이라 이를 언급한 것이다. 그래서 옛 중국인들은 양주에 관리로 가는 것을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71) 촉석루를 지나며 느끼는 바가 있어[過矗石樓有感] / 김창집(金昌集 1648∼1722)
保障從來說晉陽 여태껏 진양은 잘 보장 된 지역이라 말했는데
百年形勝控南荒 백 년의 빼어난 경치가 위급해 남녘땅이 황폐해 졌다네.
樓臨絶壁闌干迥 절벽에 임한 누각에서 난간이 홀로 가로막아
城帶深江睥睨長 성을 빙 두른 깊은 강을 오랫동안 흘겨본다.
忠節飽聞三壯士 삼장사의 충절 익히 들었는데 또한
義聲多說一佳娘 의로운 한 아름다운 여인의 일을 늘어놓는구나.
停舟指點當時迹 당시의 자취를 말하며 정박한 배를 가리키는데
自是騷人感國殤 시인과 문사는 자연스레 나라의 상흔을 생각한다.
72) 촉석루에 올라 옛 사람을 만나다 / 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 1354~1440)
興廢相尋直待今 흥망이 돌고 돌아 지금을 기다렸나
層巓高閣半空臨 층암절벽 높은 다락 반공에 다다랐네
山從野外連還斷 들판 건너 산줄기는 이어졌다 끊어지고
江到樓前闊復深 누각 앞에 이른 강은 넓어지고 깊어지네
白雪陽春仙妓唱 백설양춘은 선기녀의 노래요
光風霽月使君心 광풍제월은 사군의 심사로다
當時古事無人識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사람 없는데
倦客歸來空獨吟 고달픈 손 돌아와 속절없이 읊조리네
73) 촉석루 판상 시[矗石樓板上詩] / 강대수(姜大遂 1591~1658) 1541년 진주목사.
戰場無恙只名區 전장에서 별 탈 없기 오직 이 곳 명구런가
人世虧成百尺樓 무너지고 다시 세운 백 척의 다락이라.
納納乾坤遙峀立 천지에 휩싸 안겨 먼 산은 솟아 있고
溶溶今古大江流 고금에 넘실넘실 큰 강은 흐르네.
船橫官渡隨緣在 나루터 가장자리 배는 가로 놓여 있고
鷗占烟波得意浮 연파에 흡족한 듯 갈매기 떠다니네.
景物有餘佳況少 경물은 괜찮은데 좋은 일은 적으니
詩情寥落晉康州 진양이라 강주는 시정도 쓸쓸해라.
74) 촉석루 판상 시[矗石樓板上詩] / 정문부(鄭文孚 1565~1624)
龍歲兵焚捲八區 임진년 전화(戰火)가 팔도를 휩쓸 적에
魚殃最慘此城樓 무고한 재앙 이 성루에 가장 처참하였어라.
石非可轉仍成矗 굴릴 수도 없는 돌 이내 촉석 이루었고
江亦何心自在流 강은 또한 무슨 맘에 절로절로 흐르는가.
起廢神將人共力 폐허를 일으킴에 신과 사람 힘 모으고
凌虛天與地同浮 허공을 능지르니 천지가 함께 떴네.
須知幕府經營手 모름지기 알리라 막부의 경영 솜씨
壯麗非徒鎭一州 한 고을만 장려하게 진압할 뿐 아님을
75) 촉석루 판상 시[矗石樓板上詩] / 하진(河溍 1597~1658)
滿目兵塵暗九區 병진이 눈에 가득 온 세상이 어두운데
一聲長笛獨憑樓 긴 피리 한 소리에 홀로 다락 기대었네.
孤城返照紅將斂 외딴 성에 낙조도 붉은 빛을 거두고
近市晴嵐翠欲浮 저자엔 개인 남기 푸른 기운 떠 있네.
富貴百年雲北去 평생의 부귀영화 구름처럼 떠가고
廢興千古水東流 천고의 흥폐는 물과 같이 흘러가네.
當時冠盖今蕭索 당시의 고관대작 이제는 적막한데
誰道人才半在州 그 누가 인재의 반이 진주에 있다던가.
76) 월정화(月精花) / 이유원(李裕元 1814~1888)
晉陽妓女月精華 진주의 기생 월정화는
鍾愛三生魏氏家 위제만에게 사랑 듬뿍 받았네.
能使糟堂恚而死 조강지처를 화나서 죽게 하였으니
官人狂惑邑人嗟 벼슬아친 미혹되고 고을 사람은 슬퍼했네.
월정화는 진주(晉州)의 유명한 기생인데, 사록(司錄) 위제만(魏齊萬)이 그녀에게 빠져서 자기 부인으로 하여금 화병으로 죽게 하였으므로 고을 사람이 이를 슬퍼하여 이 노래를 지어서 풍자하였다.
77) 진주 촉석루 지경에 네 글자 차운하여[次晉州矗石樓區字四韻] 감사 류이현에게[寄柳監司(而見)] / 권호문(權好文 1532∼1587)
矗矗江巖似豆區 삐죽삐죽 솟은 강가 바위가 두구(豆區)처럼 제멋대로인데
千年絶境起仙樓 천년의 절경은 신선의 누각에서 비롯되었다.
龍頭南展雙崖削 용의 머리가 남쪽으로 나가다가 양 벼랑을 깎았고
燕尾西分二水流 제비의 꼬리가 서쪽에서 나뉘듯 두 물줄기 흘렀다네.
高眺不須山屐著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나막신 신을 필요치 않고
危臨便勝海槎浮 아슬아슬 뛰어난 경치 속에 뗏목 타고 떠다니네.
東風杖銊憑瓊檻 동풍에 도끼 부여잡고 옥난간에 의지하는데
應是開襟隘九州 응당 가슴을 열기에는 구주(九州)가 좁아라.
[주1] 두구(豆區) : 두구치수(豆區錙銖)는 양을 헤아리는 단위로, 제(齊) 나라에 두량이 네 종류가 있는데 두ㆍ구ㆍ부ㆍ종(豆區釜鍾)이니, 4승이 1두가 되고 4두는 1구가 되며 4구는 1부가 되고 10부는 1종이 된다. 그런데 진씨는 곡식을 대출할 때에 모두 1할을 더 가첨하여 집에 있는 두량으로써 대출하고 공가의 두량으로써 거둬들이니, 물이 아래로 흐르듯 백성들이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주2] 장월(杖銊) : 예전에, 살생권의 상징으로 주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이르던 말. 부월, 금부, 황월이라고도 한다. 출정하는 대장이나 특별한 임무를 띤 군관에게 왕이 정벌과 중형의 뜻으로 주었다. 금·은빛 칠을 해 의장으로 쓰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