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교회 교부이며 아프리카 힙포교회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최고의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런 무식한 사람이요. 무식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지식 중에 가장 어려운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정말 지식 중에서 제일 어려운 건 자기를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고대 철학자로부터 들어왔는데 그런데 그런 자기인식지식중 최고의 지식, 정말 어려운 지식은 내가 부족한 인간이며 죄인인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 은혜중에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 찾아오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참 지식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 어떤지 예수님의 제자 마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마태를 처음 만날 때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지난 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했던 근거지는 갈릴리호수 북쪽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이 가버나움은 큰 무역항이기에 그곳에 상시주둔하는 로마군대가 있었고 세금을 징수하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 중 한 명 세리 마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 직전에 세리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리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가 어떻게 예수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세상에서 죄인으로 불려졌던 사람이 예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 세상에서 큰 죄악으로 멸망과 죽음의 인생으로 살았지만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변화된 제자로 주님의 귀한 사역자로 쓰임받게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마태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받고 진정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첫째는 생계, 직업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인간적 가치관으로 보면 그는 성공했고 출세한 사람입니다. 세리는 흔히 ‘세무사’ 혹은 ‘세리공무원’같이 세금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세무사’나 ‘세금공무원’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유대인들이 꺼리는 직업이었고 사람들에게 ‘눈에 가시’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며 정복전쟁에 필요한 경비와 정복자인 로마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경비가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강력한 세금정책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세금제도는 개인에게 인두세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이나 도시에 일괄적으로 부과했습니다. 그래서 지방정부는 중앙정부가 부과된 세금을 어떻게 만들어 낼까 고민하던 끝에 만들어낸 체제가 바로 세리라는 제도입니다. 마태는 동족의 세금을 착취하여 로마에 바치는 세리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민족 배반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중에 어느 인간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세리들은 모조리 죄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세리라는 직책은 입찰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정부가 화성시에서는 1년에 50억원의 세금을 거두어들이겠다고 정하면 이것을 사람들에게 입찰에 붙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입찰해 낙찰받으면 그 사람이 세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리가 되면 일단 자기돈으로 50억원을 냅니다. 그 후 자기가 입찰한 기간동안에는 얼마를 거두든 말든 세리 재량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청과 공무원, 세리간에 뇌물이 오가며 비리를 공모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50억원을 받았으니 지방에서 시청과 공무원이 돈을 얼마나 더 받아 나눠먹든 상관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리는 세금을 100억원, 200억원을 받아 자기 배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세금을 거둘 때는 인정사정없습니다. 가차없이 어떻게든 받아낼 것을 받아내겠다고 주민을 괴롭힙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지 않났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마태는 분명 성공한 공무원이요 부자입니다. 돈과 권력만 생각하면 부러움을 가질 만한 자이였지만 마태 자신이 생각할 때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앉아서 일하는 이 자리는 나쁜 자리이고 지금 세고 있는 이 돈은 더러운 돈입니다. 자신이 가진 이 직업 자체가 범죄자로 낙인될 일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매국노 짓이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세리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 중 마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마태의 내면을 보시고 장차 성경을 기록할 자질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들이 버린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9절에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지금 메시야라고 칭송받는 예수님이 세관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텐데 이렇게 죄인으로 살면 안되는데’ 하는 영혼의 갈망이 그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7,1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있어야 할 자리, 세상에서 먹고 살 삶의 기반이 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의 부르심을, 예수님의 삶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치료자로, 인정받는 자의 자리를 내주실 분으로, 내 인생의 행복자로 받아드리고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일어나”, 일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결단이요, 새로운 방향으로의 진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도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셨고 이 명령에 마태가 했던 결단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지위를 버렸습니다. 삶에서 자신이 채웠던 모든 잇권, 모든 수익을 포기한 것입니다. 돈이 되면 무조건 했던 일,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찾았던 직업을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적 가치관속에서 가지고 있는 돈이 우선인 가치관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물질만능주의, 물질우선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세리 마태도 과감히 이런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제 세리 마태가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 마태, 마태복음의 기록자 마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주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먹고 살 문제, 내가 가지게 되는 모든 잇권까지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수익과 생계문제까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 둘째는 생활에 예수님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10절,11절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0절에서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집에서 음식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먹는 엄청난 잔치집 분위기의 마태의 집이 바뀌었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모든 돈을 털어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십시오. 10절 하반절입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죄인이라고 기록된 사람들은 창녀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인간취급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바로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창녀들은 육체를 팔고 세리는 정신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되다면 몸을 어떻게 굴려도 상관없다는 사람들과 돈이 된다면 애국심이나 인정같은 것은 상관없다 말하며 정신을 맘대로 굴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신과 몸을 맘대로 굴려 저주받은 죄인들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저주 받은 신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너무 감사했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초대한 손님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세리들과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외면받고 손가락질받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그들은 아웃사이더이고 유대사회에서 그들은 감히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격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은 상종못할 존재로 여겼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그들을 그렇게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 7절을 한 번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전혀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변화되는 것, 전혀 구원을 얻을 것 같지 않던 존재가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잃은 양, 잃은 돈, 잃은 백성을 다시 찾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가 기꺼이 자신의 집을 오픈해서 잔치를 벌이면서 이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주님을 위해 이런 잔치를 열 필요가 있을까?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그가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수익을 얻을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마태는 단지 그 마음의 기쁨, 자신을 인정해주고 심지어 제자로 부르시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지금까지 모은 모든 재산을 털어 잔치를 벌이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집을 내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때 우리의 터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 집은 주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리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이익과 내 자신의 명예를 위한 장소가 아닌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된 마태를 보지 못하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세리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었고 그것은 보편적 상식이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이 볼 때 세리들을 로마의 앞잡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반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들은 그들끼리만 모일 수밖에 없었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시받고 조롱받는 철저히 소외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세리의 집에 예수님과 제자가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은 메시야라고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죄인과 같이 어울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삶의 모습이 참 사랑이고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14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친구를 얻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집을 내어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정말 꺼내놓기 힘든 것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서구 유럽문화에서 ‘집을 오픈하여 한 사람을 초대하면 그 때서야 서로가 친구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집을 오픈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나그네가 식사와 잠자리를 부탁할 때 특별한 관계가 아님에도 집을 내어주고 대접하던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또한 집을 오픈하는 것,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식사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해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가 되면서 이제 교회에서 가정심방을 할 때도 집을 오픈하기보다 외부 식당에서 식사대접하는 정도로 집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집을 보여줄 때 느끼게 되는 비교의식속에서 자존심에 대한 상처가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비교의식속에서 청소하고 정리정돈하고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결국 평소와 다른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를 만들고 나서야 집을 오픈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생깁니다. 얼마나 집을 오픈하기 힘든 것인지,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제일 먼저 그냥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인간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이런 잔치, 이런 초대에 더 큰 모함과 더 큰 곤욕을 당할 수 있을텐데도 그는 예수님을 기꺼이 모시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닫혔던 집을 열어 제꼈습니다. 자신의 모든 닫혀있던 것을 열어 그 공간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혹 내 의식속에 이것은 예수님께 드리지 못하고 내 공간, 내 명예, 내 편견으로 가둬놓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제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신 은혜에 감사하며 내 생활을 주님앞에 오픈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셋째는 과거의 이름이나 습관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인 본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1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에 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레위’라는 말은 ‘연합’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하나님과 연합된 인생을 살라고 이름을 지어 줬는데 지금 레위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모습으로 살면서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죄인의 대표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언젠가는 자기 이름처럼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할텐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시고 “나를 따르라”명하시니 지체없이 일어나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마태’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태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이름 ‘맛다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성경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레위’와 ‘마태’로 함께 불려졌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라는 이름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27절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던 레위를 찾아가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마태는 이름도 바뀌며 인생의 목표도 바뀌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모든 가치관마저 바꾸어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되어 이전의 모든 가치관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전의 이름도 없애며 주님이 주신 이름으로 살아가는 마태처럼 저와 여러분의 가치관, 생각,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주님으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태를 부르시는 이 사건에 대해 여러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 선하신 능력자가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12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죄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질병의 문제로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병을 고치려면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사를 찾아가서 병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만나면 기꺼이 그 환자를 치료해 줘야 합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나가야 합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방법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의롭게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며 죄용서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 문제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비난자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9장 1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바래새인처럼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레위처럼 스스로 죄인인 것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일수록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늘 우리 가운데 죄가 있고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왔고 저주와 절망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로 물든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인간, 하나님 나라를 절대 찾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 주시고 구원하러 오신 영적인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인애와 긍휼이 크신 예수님 앞에 나오길 원하는 모든 사람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지며 피흘리시며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결국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고통을 당하시고 인간의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 우리들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또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에서 오셔서 그 온갖 고난과 굴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지신 십자가 앞으로 나가 주님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며 주님의 보혈 은혜로 죄사함 받은 것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살아나게 하신 참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죄에 빠져 살아가면 결국 죽음과 멸망에서 살아가며 저주받은 인생이 됩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한 인생은 절대 형통과 평안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죄의 굴레는 우리의 앞 길을 막고 인생을 방황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엎드리면 어떤 죄든지 용서받습니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면 주님은 그 피로 저와 여러분들을 씻어주십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죄인이기에 저와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을 생각하며 주님앞에 회개하며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