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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출애굽기 제1강
학대받는 백성을 번성하게 하신 하나님
말씀 / 출애굽기 1:1-22
요절 / 출애굽기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봄학기 새롭게 출애굽기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애굽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역사를 통해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함과 훈련 속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애굽으로 내려온 70명의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는가를 말해줍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지도자 모세를 세우시고 출애굽시키시는 구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출애굽기의 시작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 중에 야곱(이스라엘)의 가족이 애굽에 이주한 기록입니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아들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나옵니다. 그중에 요셉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대가족은 기근으로 인한 굶주림을 피해 애굽에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은 아버지의 특별한 편애를 받았습니다. 배다른 요셉의 형들은 이런 요셉을 시기해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순식간에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어떤 환경에서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주인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의 유혹에 안 넘어가고자 믿음 중심을 지키다가 오히려 사모님을 희롱한 것으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자꾸만 꼬이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무도 해몽하지 못했던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해 내면서 한순간에 애굽의 2인자 총리에까지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그 동안의 형들의 죄를 용서하고 기근의 때에 가족들을 모두 애굽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들은 요셉 덕에 넓은 목초지가 있어 목축업을 하기 좋고 농사 짓기에 옥토인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해 살기 시작합니다. 애굽으로 이렇게 이주한 이후, 시간이 흘러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요셉 때부터 3백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 시간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면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해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애굽의 고센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하는 인큐베이터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고센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또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서 힘닿는 데까지 자식을 낳았습니다. 각 집안마다 자식들로 북적북적했습니다. 급속도로 자손들이 불어나 300여 년 만에 장정만 60만 명, 당시 숫자에 포함하지 않았던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200만 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나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 당시에 세계 인구가 대략 1억 7,0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때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 인구는 60억 명이 넘습니다. 2,000여 년 시간 동안 30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300여 년 만에 10,000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70명의 가족이 큰민족이 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또 하늘의 뭇별과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대로 수 많은 자손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매 이 민족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는 복의 통로로 쓰고자 하십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보내는 통로로 쓰임 받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약속을 온전히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가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아래 크게 번성하고 큰 민족을 이루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십시오.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로운 왕이 세워져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있을 때 왕은 요셉의 공로를 알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일어난 왕은 요셉을 알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요셉이 애굽에 어떤 은혜와 영향력을 끼쳤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요셉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게 된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쓰려고 하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단순히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에게 있어 또 애굽에게 있어 큰 위협일 뿐이었습니다. 위협적인 존재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습니다. 낳고 낳고의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나 적군들과 연합해 애굽과 싸우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더이상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새 왕은 감독들을 세워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왕을 위해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고센 땅에서 평안히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왕을 위해 국고성 건축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흙을 짓이기고 벽돌을 굽는 육체 노동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자유 백성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왕은 이렇게 학대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학대를 받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줄어들까요?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고 그런 노동이 끝이 없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 소망을 잃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낳아 잘 키울 수 있고 잘 먹일 수 있고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자녀들을 많이 낳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학대받고 정말 피곤한 인생이라면 기력도 쇠하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고 자녀들도 많이 낳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그런데 어찌된 일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쉬지 못하도록 더욱 혹독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채찍으로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강인한 생명력이 모든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당시 애굽 왕의 파워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섭게 번성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력은 어떤 방법으로도 약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세력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는 아무리 짓밟아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을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견고해져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 갑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하고, 성도들은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박해는 고통스럽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박해를 받아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곳곳에 믿는 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곳,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는 어떤 방해와 장애물이 있더라도 번성하여 퍼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 차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갈수록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잘못이 크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잘 드러나지 않고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인본주의, 물질주의, 세상 쾌락 등에 깊이 사로잡혀 복음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이 팽배합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갈수록 기독교는 쇠퇴할 것이라고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력을 담고 있는 복음은 아무리 세상이 척박할지라도, 복음을 막는 장벽이 아무리 높고 두텁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세상 속으로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가지고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인 사회 환경만을 바라보기보다 세상 속에서 구원 역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고된 노동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줄지 않자,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씨를 말리고자 하는 잔인한 방법을 씁니다. 왕은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라 하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애굽 왕은 그들에게 “히브리 여인을 위해 해산을 도울 때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라는 천인공노할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을까요?
당시 애굽 왕은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산파는 전문 직종으로 상당한 지위를 누렸다고 합니다.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면 산파 면허증도 박탈당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을 빼앗기는 것을 둘째치고라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애굽 왕의 명령대로 사내아이가 태어나는 족족 죽인다면 과연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떻게 될까요? 여자만 남게 될 것이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줄어들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애굽에 흡수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학대를 받아도 더욱 번성하고 강해졌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닥친 최대 위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때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고 계실까요?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산파들은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경외했습니다. 산파들은 눈에 보이는 애굽 왕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애굽 왕보다도 영혼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아기들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뜻이 대립될 때 가장 확실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신자들의 사는 이유이고, 신자들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신앙인들은 목숨의 위협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흥망성쇠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지켜주시면 그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축복하신다면 누구도 우리 인생을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파들처럼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드세 보이고 내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망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인생,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는 인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인생의 주관자요, 세상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주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번성하고 매우 강해져만 갑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저자인 모세는 그 많은 사람 중 다른 사람보다도 ‘십브라(아름다움)’와 ‘부아(영화)’라는 산파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어둠 속에서 신앙의 빛을 밝힌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진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그들 외에도 그들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믿음의 산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남은 자들처럼 그 시대에 하나님이 남겨두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왕이 아무리 권세가 막강하다고 한들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왕은 어찌하든 이스라엘 자손들의 씨를 말리고자,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자 머리를 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는 당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바로의 지혜가 대단해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그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금새 전세를 역전시켜 버립니다. 왕은 명령 한마디의 권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씨를 말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아이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번성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흥왕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애굽 왕은 물러섰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억제하고자 했던 계략이 좌절되자, 왕은 직접 나서서 극약 처방을 내립니다. 모든 백성에게 명령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고 딸을 낳으면 살려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물에 빠져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300여 년 동안 정착해 번영을 이루던 애굽의 고센 땅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죽음의 땅이 되게 생겼습니다.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와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보면 말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왕에게 이렇게까지 학대받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을 것도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학대는 학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 왕의 완악한 학대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이 이야기는 2장에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또 애굽 왕의 완악한 학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2장 23-2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절망과 고난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만일 이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안정되게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다 보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과연 잘 살아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소망 두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삶을 과연 그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학대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준비시켜 그들을 인도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위기와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이 보금자리를 떠나 비행할 수 있도록 날개를 너풀거리며 새끼 독수리들이 있는 둥지를 헤집어 놓는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고난과 고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인간과 사회와 세상의 죄악 때문에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연단하심 가운데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나, 당해 봐라!’ 이런 심보로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는 분명 않을 것입니다. 고난이 주어지더라도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도 의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고난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들게 기도하게 됩니다. 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진정으로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를 섬기며 살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금 정립하게 해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아니면 고난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주관자이십니다. 또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택한 자들의 인생을 섬세하게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현실 속에 주어진 고난과 고통, 아픔들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하심 가운데서 반전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