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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공부하시던 선생님께서 인상 깊게 봤던 영화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봐주셨을 때 이창동 감독 '버닝'이 인상깊었다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인상깊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 이유에 대해서 답을 못 드렸는데요. 예전에 써놓았던 감상문 있어서 까페에 올려봅니다. 이때 한창 지젝을 읽던 때 같은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네요..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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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는 초록 등대불을 보며 데이지를 꿈꿨다. 개츠비에게 그 초록불은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아니라 반드시 현재화할 수 있는 과거 그 자체였다. 다만 상실의 근원인 데이지가 없었다면 그는 초록빛을 응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초록빛을 향한 개츠비의 응시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데이지라는 충족할 수 없는 상실로부터다. 초록빛으로부터 개츠비가 꿈꾸는 데이지와의 재회, 그리고 데이지와의 영원한 사랑은 데이지와의 결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이지의 거절로 인해 환상임이 밝혀진다. 즉 개츠비의 욕망은 오로지 초록빛을 통해 데이지라는 환상을 공회전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해미를 향한 종수의 집착은 해미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해미의 주변을 맴도는 집착이다. 해미와의 만남은 종수가 해미를 해미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해미의 존재 자체를 흐릿하게 한다. 해미의 존재를 방증하는 대상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도리어 해미의 거취를 모호하게 한다. 하루의 어느 특정 시간만 햇빛이 비치는 해미의 자취방은 언제나 그늘져있다.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공간에 널부러진 사물들은 오로지 윤곽으로만 정체를 드러낸다. 그 윤곽들조차도 남산타워에 반사된 햇빛이 비쳐들때만 윤곽으로 드러난다.그늘진 곳에 실루엣으로 남은 해미의 응시가 종수의 가슴에 꽂힌다.
우리는 타자의 응시가 우리에게 닿았다는 확신이 설 때 비로소 존재함을 느낀다. 존재가 가시화되는 순간은 오로지 타자의 응시가 존재에 닿을 때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우리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은 거의 없다(혹은 전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의 관계 속에서 규정됨을 느끼며 이러한 관계 속의 응시 없이 존재함을 스스로 담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린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주체적인 자아로 구성한다. 우리는 우리가 단지 타자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착각이든 아니든, 주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적인 믿음 하에서 주체가 된다. 해미는 이러한 타자의 응시를 끌어들이는 독특한 인물이다. 해미가 타자의 응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타자의 응시이기 때문이다. 즉 해미는 타자의 응시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타자의 응시만이 자신의 존재를 현저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해미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하루에 단 한번 비쳐드는 햇빛은 해미의 자취방을 향한 남산타워의 응시다.
때문에 해미는 타자의 응시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섹스는 그러한 응시를 필요로 하지 않고서도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 양식이다. 사랑은 두 이질적인 것의 결합으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이다. 섹스의 엑스터시는 합일의 순간에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다.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할 필요가 없다. 남산 타워의 응시가 사라져도, 둘은 둘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해미와의 사랑을 통해 해미는 종수에게 가시화된다. 이전의 해미는 단지 해미라는 이름의 낯선 타자일 뿐이다. 보일이가 보일이가 되는 순간은 보이지 않는 보일이를 부르며 빈 밥그릇과 물통을 채울 때가 아니라 보일이라는 부름에 응답한 한 고양이가 품에 안길 때이다. 관심 없던 폐비닐하우스가 가시화되는 것은 그것이 언젠가 불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을 때부터다. 영화는 시종 비가시적인 것들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가시적인 것들이 비가시화되는 순간 또한 해미의 여행 경험을 통해 드러난다. 자연에서 가장 강력한 응시를 내뿜는 태양의 응시가 사라질 때, 곧 노을이 지고 푸른색, 나아가 보랏빛으로 하늘이 물들 때 존재에 드리워지는 어둠은 존재를 비가시화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필연적으로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어떤 응시 없이 존재는 자립하지 못한다. 홀로 아프리카 여행을 해미는 자신을 응시해줄(함께 관계할) 타자 없는 낯선 타지에서 유일한 응시가 사라졌을 때, 자기 자신 또한 응시의 부재와 함께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것들은 언제부터 비가시적이었는가? 종수의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앓던 분노조절장애(정식 진단명이 아니다.)는 분노의 발현이 낳은 상해를 통해서만 가시화된다. 그 근원인 병리 자체는 비가시적이다. 가시화되는 방식은 언제나 비가시적이었던 것을 폭력적으로 규정한다. 분노조절장애는 오로지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이라는 표현이나 징역 1년 6개월이라는 형벌의 수치로만 가시화된다. 이 때 존재 자체가 가진 풍부함은 박탈당한다. 벤에게 해미는 단지 흥미로운 존재로 가시화되며 해미의 내면의 외로움은 자그만 조약돌이라는 장난으로만 가시화된다. 모호하고 흐릿한 것들을 어떻게든 밝혀내려는 숱한 시도들은 단지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흔적이 증명하는 것은 비가시적인 것들의 가시화가 존재 자체가 품은 풍부함을 얼마간(혹은 대부분) 박탈했다는 사실이다. 폭력적으로 가시화된 존재는 구경거리가 된다. 타자 자체를 이해하려는 진심어린 시도가 부재한 가시화는 비가시적인 것들의 가시화 과정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벤의 하품은 해미를 이해하려는 진심어린 시도가 부재함을 의미한다. 가장 소외된, 그렇기 때문에 지독한 외로움을 앓는 해미에겐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자리마저도 응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사랑에 빠진 자의 실수는 사랑하는 대상이 나와 같아야 한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대상을 가시화하는 유일한 응시가 오로지 자신의 응시여야 한다는 폭력과 동의어이다. 해미를 사랑하는 종수는 자신의 응시만이 해미의 존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이라고 간주한다. 사랑은 가장 퇴화된 수준의 동일시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사랑은 두 응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체가 된 해미의 몸짓을 본 종수는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시선만이 당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체인 해미의 몸짓을 벤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당해내지 못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미를 규정한다. "남자 앞에서 쉽게 옷을 벗는 건 창녀나 하는 짓이야." 해미에 대한 종수의 규정은 자신만이 해미를 규정할 수 있다는 사랑의 선언이자 사랑으로 눈먼 시선이 질투로 점철된 사랑의 대상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되었다.
종수는 오로지 시선을 당해내는 존재일 뿐이다. 그는 오로지 타자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다. 종수에게 남겨진 자유는 그에게 던져진 시선을 취사선택하는 것 뿐이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자 하진 않는다. 다시 말해, 스스로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정체성은 단지 그가 글을 쓰려고 한다는 욕망 뿐이며 그 욕망도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흐릿해진다. 종수를 향한 해미의 시선은 종수만이 해미에게 있어 어떤 경우라도 해미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지만, 바로 그러한 시선 때문에 종수는 해미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런 종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자각하는 계기는 해미의 행적이 요원해진 시점부터다. 해미의 실종과 더불어 벤의 고백, 즉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내밀한 고백을 들은 시점부터 종수는 스스로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부터 종수는 종수에게 있어 가장 선명해지며 그 스스로 적극적인 시선을 대상들에게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비닐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미의 존재가 가장 선명해지는 것은 해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보일이는 보이는 것이 되어야 했으며(그것이 해미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단서이기 때문에), 해미의 거짓말(어릴 적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그를 발견했다는 기억)은 사실이어야만 한다. 누구도 없다고 하는 우물의 존재를 유일하게 증언해주는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는 어머니의 증언("해미의 집 근처에 마른 우물이 있었다.")이야말로 해미의 기억이 거짓이 아님을 밝혀주는 진술이기 때문이다(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의 진술이야말로 가장 신빙성이 떨어지는 진술이다.) 해미가 해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해미라고 불리는 인물이 해미여야하기 때문에 해미라고 믿는 것 뿐이다. 종수에 대한 해미의 과거 경험담은 종수의 기억 속에 없다. 단지 해미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려니 하는 것이다. 해미가 성형 수술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미는 오직 종수에게 해미여야 한다. 해미가 맹목의 대상이 된 이상, 종수는 해미의 존재를 확인할 때까지 해미라는 환상이든 실제든 해미라고 불린 무엇을 한없이 공회전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해미의 존재가 가장 확실해지는 것은 해미의 죽음을 확신해지는 순간부터다. 어떤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부름에 응답하고, 벤의 화장실 수납칸에서 해미의 시계(이 시계는 해미와 종수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계기다.)를 발견함으로서 종수는 해미의 죽음을 확신한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의 부재는 단지 해미의 존재를 방증하는 두 단서로 인해 확실해진 심증으로 대체된다. 해미의 존재를 모호하게 하고 흐릿하게 만들던 것들은 해미의 실종과 함께 해미의 존재를 가장 선명히 하는 단서로 전도된다. 단지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의 개연성에 불과했던 벤의 살인은 필연이 된다. 해미를 향한 벤의 관심에 내밀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종수의 의심은 심증이 굳어짐과 함께 확신이 된다. 하지만 이 의심의 근원은 벤이 아니라, 공항에서의 벤과의 만남 순간부터 종수의 마음에 스스로 불지핀 무엇에 기인한 것이다. 해미를 향한 종수의 맹목, 그것이 의심의 근원이다. 때문에 해미를 둘러싼 메타포들은 해미를 향한 종수의 맹목으로부터 살인을 증명하는 분명한 명제로 탈바꿈한다.
한 개인의 내밀한 구석엔 무엇이 있는가? 벤에겐 무심한 대상에게서 수집한 악세사리가 있었고 종수에겐 잘 갈린 칼날들이 있었다. 벤의 죽음은 벤에게 내려진 결말이 아니라 종수의 비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학대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어머니가 십수년만에 찾아와 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금전 오백만이다. 세상이 수수께끼라는 것과 즐기는 것이라는 판단의 차이는 누군가는 개츠비로 태어날 수 있었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에 얼마간 근거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세상이 수수께끼라는 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수수께끼인 자신에게 선명한 응시를 던져준 해미의 실종(죽음이 아니다)은 종수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실종인 것이다. 그가 감내할 수 없었던 건 해미의 죽음이 아니라 해미라는 분명한 어떤 응시의 상실이다. 하지만 해미의 응시라는 것조차 근원적인 상실을 공회전하는, 충족할 수 없는 욕망에 불과하다. 벤은 단지 부와 자신의 매력으로 숱한 여자를 만나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영화가 서사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메타포의 미로 속에 관객을 몰아넣는 건 그 속에서 길을 찾아보라는 도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인식 자체가 메타포의 안개 속에서 분명한 응시를 획득하려는 처절한 노력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감독이 던져준 메타포를 분명한 응시로 어떻게든 간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그런, 불분명함을 헤매이며 분명한 응시로 사랑하는 사람을 획득하고 세상의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시도의 연속인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당신이 의존하는 응시는, 당신의 것인가? 종수가 매몰된 응시는 해미가 던져준 응시이다. 우리는 우리의 응시가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할 때 바로 폭력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종수에게 던져진 짐은 떠나간 어머니, 징역이 예고된 아버지, 불분명한 미래, 외로움 등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짐을 짊어진 채 세상을 지친,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한민국의 개츠비는 초록빛을 바라보되 현실의 데이지를 바라보지 못한 채 충족할 수 없는 과거의 데이지만을 공회전하는 모든 응시를 짊어진 개츠비들이다. 그것이야말로 환상이고 가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 개츠비의 응시는 데이지에 대한 순수하고 위대한 사랑이 아니라 초록빛을 바라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처절한 생존술이다. 우리의 응시는 누군가 던져준 응시이자 그것을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응시다. 누가 그런 환상을 던져줬는가? 무엇이 그런 가상을 종용하는가? 욕망하는 존재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응시는 언제나 병리적이다. 벤, 종수, 해미라는 인물들은 한국 사회의 병든 응시들의 자회상이다. 감독은 인물들이 스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쇼트를 넣지 않았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다. 병든 자들의 응시를 던져받은 관객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는 우리의 병든 응시를 자각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