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배우다
<가룟 유다 딜레마>
이진희
1.
정직한 그녀. 내 글을 읽고는 별 반응도 없더니 사부의 <나도요, 나도>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 섭섭하지만 그 차이가 ‘나와 사부의 거리구나’ 또 하나를 배운다.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의 머리와 가슴에 심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한다면 저자는 사명을 다한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컨텐츠, 구조, 관점과 다양한 전달 방법을 사용하여, 사실과 저자가 경험하는 진실 사이 그 어디쯤의 창조적인 영역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글쓰기이고, 사부의 글은 오늘도 그 사명을 완수한다. 역시 칼보다 펜은 강하구나. 설레는 마음으로 나도 나의 펜을 갈아본다.
‘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까?.’ 얼마 전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를 울린 묵상의 대가 김기현 선생이 이번에는 <가룟 유다 딜레마>로 나의 머리를 깨우친다. 대중성과 학문성을 고루 겸비한 이 책은 ‘가룟 유다’와 ‘유다 복음서’가 주는 민감한 신학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부딪치며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기독교의 진수를 드러낸다. 특히 <다빈치 코드>로 시끄러웠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이 책은, 교회 밖의 독자까지 고려하여 신학과 세상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유다의 배신 없이 십자가는 완성될 수 있었을까?’ ‘유다 복음서는 또 무엇인가?' 책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고민해 보았을 배신자 유다에 관한 거의 모든 내용을 부족함 없이 다루고 있다. 내용의 무게감은 있지만, 워낙 명쾌한 그의 글은 어떤 독자라도 차근차근 읽어나간다면 무리 없이 이에 대한 내용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2부로 구성된 책은,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듯 1부에서는 “정경 속에서 유다의 모습을 관찰”하고, 2부에서 정경 밖, 유다 복음서를 통해 유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2.
가장 인상적인 책의 내용은 ‘몸’에 대한 것이다. 유다의 복권을 주장하는 그의 대변자들은 이원론을 근간으로 육체를 부정한다. 특히 유다 복음서를 기록한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세계를 탈출해야 할 사악한 장소로 여긴다. 따라서 예수를 육체로부터 탈출시킨 유다는 영웅이며, 십자가 사건의 주역이 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도 몸을 부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 군데의 성경은 이를 지지하는 듯하다 (요6:63; 롬 8:13).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창조와 성육신,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부활은 일관되게 인간의 육체를 긍정하며, 또 전인적인 구원을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했고(고전 6:19-20), 구원받은 신자의 삶을 “몸으로 예배하는 삶”이라 확신한다(롬12:1).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관은 몸의 부정이 아니라 몸의 변화를 요청한다." 이러한 몸에 대한 강조는 추상적이고 영적인 신앙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가지게 하며, 이 땅을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 아닌 회복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돕는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감동적인 헌신도 바로 몸으로 예배하는 삶을 구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중요성은 기독교 밖에서도 발견된다. 고미숙 선생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에서 ‘앎의 신체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잃어버린 학교 교육을 한탄한다. 정약용 선생은 “내 몸과 마음을 다해” 남을 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효’와 ‘제’를 공부에 바탕에 두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여진다. 몸은 배움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배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몸이 배움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삶과 연결된 공부를 의미하며, 배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영과 육를 통전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육체는 존재들 드러내는 온전한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몸을 살필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 할 수 있다.
기독교도 신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몸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영지주의처럼 몸을 부정해서도, 세속주의처럼 몸을 숭배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인 내 몸으로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삶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이다. 칼 바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영혼을 가진 몸이요, 몸을 가진 영혼”임을 기억해야 한다. 몸을 회복하고, 삶을 회복할 때, 신앙이 신앙이 된다.
3.
내가 발견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예정과 자유의지를 다루는 장이다. 저자는 출애굽기의 ‘바로'를 통해 예정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음을 훌륭하게 증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비그리스도인을 위한 설명은 없다. 저자는 이 장을 시작하며 다시 한번 비그리스도인 독자를 고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성경을 통한 증명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예정과 자유의지가 동시에 사용 되는 것을 설명할 때 믿는 우리에게는 훌륭한 증명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성경이 가진 오류로 인식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신뢰가 없는 대상을 위한 논리적인 접근도 함께 기록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4.
책을 읽으며 책의 내용뿐 아니라 저자가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운다. 성경에서 시작해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그의 모습에서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세상과의 대립 속에서도 거뜬히 존재해 온 그 저력을 보게 된다. 문제 앞에서 믿음이라는 방패로 덮어 버리기보다 정직하게 근원을 보고, 고민하며 답을 찾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그것에 힘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 종말의 시간을 이 땅의 잔존하는 악의 세력과 교회와의 투쟁의 시기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투쟁의 방법은 폭력이 아닌 어린 양의 십자가이다. 그렇다. 희생과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그리고 사부의 글은 이 진실을 항상 잘 반영한다. 칼이 아닌 펜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진리를 나누는 것, 그에게 오늘 또 한 수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