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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고 죽는 것은 크게 보면 그냥 하나의 자연현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태어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물질들이 모여서 몸을 형성하는 과정은 대부분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로 생명이 태어난 후에 자라나는 모습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인연을 다해서 목숨을 마칠 때는 그 해체되는 과정을 눈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죽음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슬픔을 달랠 수가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수정란이 점점 자라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그 형상이 자라서 어린아이가 되고, 성인이 되고, 늙고 병들어서 죽고, 그 시신이 점점 해체되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그 영상을 빠른 속도로 돌려서 생애의 전 과정을 1분 만에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요? 무수히 많은 사람과 무수히 많은 생명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듯이, 물이 얼었다가 녹듯이, 흙으로 빚은 소상(小像)이 만들어졌다가 부서지듯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에 크게 애착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크고 넓게 볼 수 있다면 슬퍼할 것도 없고, 괴로워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에 사는 우리는 그렇게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잠시 만난 인연과 헤어질 때에도 집착해서 아쉬움을 느끼고, 때로는 그 아쉬움이 너무 커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시는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는 죽음 앞에 설 때는 그 아쉬움이 너무나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죽음 앞에서 슬픔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처님과 같은 성인들은 존재의 실상을 넓고 크게 여실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성인들은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을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자연의 한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실상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우리의 마음은 슬픔에 젖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죽은 뒤에 가는 좋은 세상이 있다’ 하는 내생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좋은 세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의 헤어짐은 아쉽지만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게 사실이냐?’,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냐?’ 하며 이런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병이 났을 때 우리는 약을 먹습니다. 약의 성분을 다 알고 먹는 사람은 이 약을 먹고 왜 낫는지를 알지만, 우리들 대다수는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그것이 약인 줄 알지, 그 약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병이 낫는지를 알고 약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자동차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고장 나면 고칠 줄을 몰라도, 누구나 다 운전을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에게 자동차가 움직이는 원리를 아는지, 고장 나면 고칠 줄 아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를 잘 몰라도 죽은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믿음은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 위안을 통해서 우리는 커다란 슬픔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인간의 슬픔을 달래는 의식은 특정 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인간이 사는 집단 어디에서나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인간은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농경 사회가 되면서 한 곳에 정착해서 살 수 있게 되었고,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계급도 발생하고 종교도 발생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유적 몇 군데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은 흔적도 없고, 같이 모여 산 주거의 흔적도 없는데, 신전과 같은 종교 의식을 행한 거대한 건축물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달리 종교 의식이 먼저 있었고, 그 종교 의식을 하기 위해 건축물들을 만들려다 보니까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한 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된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앞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류 문명이 먼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종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어쩌면 종교가 먼저 시작되고 그로 인해 인류 문명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인지가 발달하면서 좋은 점은 그 경험을 기억해서 쌓을 수 있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좋지 않은 점은 그 기억으로 인해 집착이 생기고, 슬픔과 괴로움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석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 대다수가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 얘기들이 횡행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다 보니까 사후 세계나 윤회와 같은 종교적 믿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는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문명의 하나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죽으면 그곳으로 간다고 하는 믿음으로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 가족도 죽으면 그곳으로 간다고 하는 믿음으로 이별의 슬픔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가 하늘나라에 있다고 믿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장례 의식이 생겨났고, 사후 세계가 저 깊은 지하에 있다고 믿으면 그에 맞게 장례를 치르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죽으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었던 곳에서는 시신을 화장해서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빨리 환생할 수 있도록 하는 장례 절차를 만들었습니다. 사후 세계가 저 바다 밑에 있다고 믿은 곳에서는 수장을 하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사후 세계를 그리는 방식에 따라 여러 장례 문화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왜 부처님의 가르침에 사후 세계에 대한 얘기가 없을까요?
그럼 불교에서는 사후 세계를 어떻게 그릴까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는 사후 세계라는 얘기가 없습니다. 왜 부처님의 가르침에 사후 세계에 대한 얘기가 없을까요? 그분은 깨달음을 얻어서 이 세상을 크고 넓게 보셨습니다. 삶과 죽음을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성이 없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사후 세계에 대해 질문하면 침묵하셨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려면 눈을 크게 뜨고 깨닫는 게 중요하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하고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다 깨닫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수행자 집단에서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죽음의 문제는 그대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승가에서도 기존에 있었던 사후 세계에 대한 많은 의식 가운데서 그래도 부작용이 적은, 즉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의식을 제외하고는 풍속에 맞게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도 ‘그냥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들의 풍속에 맡겨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를 다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 대로 어리석음에 눈을 뜨고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 자체가 필요 없는 경지로 가는 거죠. 둘째, 그러나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헤어짐의 슬픔을 위로하는 종교 의식을 함께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깨달음을 얘기하면 종교 의식을 부정하려 하고, 종교 의식을 얘기하면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인가?’ 하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수행자는 뭘 먹고 뭘 입고 어디에서 자든 의식주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존경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것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다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남이 어떻게 나를 대하든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그렇게 깨닫기 전까지는 어떻습니까? 음식을 먹을 때 맛없는 것보다는 맛있는 게 낫고, 나무 밑보다는 집에서 자는 게 낫잖아요? 사람들이 나를 박대하는 것보다는 따듯하게 대해주는 게 좋잖아요? 이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천도재도 이를 감안하여 두려움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짧은 법문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좀 더 나은 곳에 가시라고 기원해 주는 종교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을 통한 해탈이지만, 지금 못 깨우친 현실을 반영하여 우선 좋은 곳에 가서 계시다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 천도재 의식의 중심 내용입니다.
천도재를 구성하는 세 가지 내용
그래서 천도재에는 세 가지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도 다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서 나온 것 같아요. 우리가 남을 때리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해서 벌을 받아야 할 때, 벌을 좀 면하려면 첫 번째로 변상을 해야 합니다. 옛날부터 뭔가 잘못하면 재물로 변상을 했잖아요. 그래서 첫째,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에게 손해를 끼쳤는지 하나하나 따져서 베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면서 알게 모르게 너무나 많은 이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덕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 것을 빼앗거나 이익을 봤으면 또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연결 고리를 따라 내려가면 결국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니 제일 가난한 사람한테 베풀면 이것이 바로 빚을 갚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제일 가난한 사람이 배고픈 사람이었습니다. 먹지를 못하면 그것보다 더 가난한 게 없죠. 그래서 천도재를 지낼 때는 음식을 많이 마련해서 주로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었습니다. 베풀 때 그 사람의 죄가 탕감이 됩니다.
그러나 변상을 해야 할 때 ‘얼마 필요해? 한 3백만 원 변상하면 됐지?’ 이렇게 변상만 하면 모든 게 다 되는 것처럼 행동하면 상대가 기분이 나빠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둘째, 본인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 해요. 오늘날 한일 관계도 일본이 ‘너희에게 피해 보상금을 줬잖아’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과거사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렇게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서 법문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법문이 있어야 합니다. 꼭 스님이 법문을 안 해도 재를 지내면서 여러분이 독송하는 경전 내용 속에 인생이 무엇인지 깨우치도록 하는 내용이 다 들어있어요. 그렇게 해서 참회를 해야 합니다.
셋째,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어떡해야 할까요?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운 보살이 바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입니다. 이런 보살들한테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겁니다. ‘당신이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다고 하니까 내가 그 고통을 받지 않도록 도와 주시오’ 하고 원력 보살에게 기도하는 것이죠. 주로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보살이 지장보살이므로 지장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망자를 위한 불교의 천도 의식은 주로 정토삼부경에 근거해서 생겨났습니다. 49재를 지내고 왕생극락을 비는 것은 정토삼부경에 근거한 정토종의 천도 의식인데, 이것을 모든 종파에서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탁 깨우쳐서 ‘나는 태어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다’ 이런 분은 여기서 기도를 안 하고 나가셔도 돼요. (웃음) 그렇지 않고 아직도 마음속에 어리석음과 집착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이런 천도재 의식을 통해서 마음의 짐을 좀 덜 수가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영가를 위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영가께서 살아생전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것이다’, ‘이것이 옳다’ 하고 집착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으며, 감촉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이 경계에서 그 어떤 것으로 나라 할 것입니까? 그 어떤 것으로 내 것이라고 할 것입니까? 그 어떤 것을 두고 내가 옳다고 할 것입니까?
영가시여! 어떤 것이 영가의 본래면목입니까?
만약 영가께서 지금에 이르러 이 법사의 질문에 쾌활하게 답할 수 있다면, 영가가 과거 생애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술을 먹고 취하는 등 갖가지 악행을 하며 계율을 어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아서 아무런 죄업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즉시 육도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 열반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사의 질문에 머뭇거림이 있고, 답답함과 불안함이 있어 도무지 알 수 없다면, 살아생전에 아무리 방생과 보시를 많이 하고 청정하게 살며 진실을 말하고 지혜롭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해탈 열반을 성취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영가께서는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영식을 오롯이 하여 이 법사의 질문에 다시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영가시여! 어떤 것이 영가의 본래면목입니까?
이제 사랑하는 마음이든 미워하는 마음이든 다 내려놓으시고, 이 모든 것을 불에 태우듯이 없애고, 가벼운 마음으로 저 좋은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훨훨 날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