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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
작가 ;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
초판 발행 ; 1942
체스이야기···' 줄거리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스무 살 되던 해 첫 시집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을 깊이 탐색하고 인간관계에서의 심리작용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소설을 다수 발표했다.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1942년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기 직전 완성한 ‘체스 이야기’는 비상한 능력으로 체스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첸토비치와 B박사의 체스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 안에서 첸토비치를 만나 그와의 체스 게임에 휘말리게 된다. 냉혹한 첸토비치의 공격에 밀리고 있을 때, B박사가 나타나 조언을 해주고 게임은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이후 B박사를 찾아간 ‘나’는 그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극한의 고독 속에 있을 때 체스 교본을 손에 얻어 체스에 미치도록 빠져들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체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나'는 뉴욕에서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대형 여객선에서 천재적인 체스 챔피언인 '첸토비치'를 만나게 된다. 체스 빼고는 "정신세계와는 완전히 무관한 아웃사이더""무지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인 첸보비치를 향해 '나'는 무한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그가 지닌 특별한 천재성이 절대적으로 아둔한 그의 지적인 상태 어디에 섞여 들어가 있는 것인지 파헤치고 싶어서 그야말로 안달이 난다. 하지만 첸토비치는 그런 자신의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동향인들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는 식의 간단한 테크닉'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나'는 그런 첸보비치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여객선 위에서 체스판을 벌리고, 그 판에 끼게 된 다혈질 매코너의 승부욕 덕택에 마침내 첸토비치를 체스판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첸토비치 대 매코너 일행의 대결은 무례하고 거만한 첸토비치의 승리로 허무하게 끝나지만, 매코너의 의지로 시작된 두 번째 경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미스터리한 신사의 조언으로 게임은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그는 바로 빈 출신의 B박사인데 매코너는 이 사람이 어떻게든 다음 체스판에서 첸토비치를 상대로 싸워주길 원하고, '나'는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B박사'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게 되고, B박사는 자신이 어떻게 체스를 두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보면 액자식 구성이라 불리는 이 B박사의 이야기가 <체스 이야기> 전체의 핵심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B박사는 아버지와 함께 황제 가족 중 몇 사람의 자금을 관리도 위탁 받은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구속된다. 하지만 그는 나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대신 호텔 독방에 갇히게 되는데, 그곳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철저하게 유지되는 곳으로, '완전한 진공상태'로 인해 내부로부터의 압력을 만들어 내고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갇힌 자들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는데, B박사는 활자를 읽고 싶다는 병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어느 날, 우연치 않게 한 권의 책을 손에 넣고 되고, 그 책은 바로 체스 교습서였던 것이다. 후로 B박사는 호텔 감옥에 갇혀 체스 교습서를 탐독하며 교습서에 나와 있던 모든 종류의 체스 게임을 섭렵하고, 결국 분열된 두 개의 자아를 만들어 하나는 하얀 말을, 또 다른 하나는 검은 말을 움직여 하나의 인간이 두 개의 자아를 이용해 체스 게임을 겨루는 광적인 상태로 접어 든다.
실제 체스판을 이용해, 살아 있는 상대와 겨뤄본 적이 없는 B박사는 순수하게 살아 있는 대상과 실제 체스판에서 체스를 두고 싶다는 욕망에 대결에 응하고, 흥미롭게도 호텔 감옥이 '무'의 상태에서 주는 압박감을 비슷한 형태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첸토비치의 술수에 밀려 어리석은 실수로 게임에서 지고 만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첸토비치가 상대가 지칠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기다리게 만드는 것을 자신의 최대 무기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無)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각각 완전한 진공상태, 즉 외부세계로부터 애매모호하게 폐쇄된 각 방에 가둠으로써 채찍과 추위로 인해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45쪽
"첸토비치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와 <어제의 세계>에서 히틀러를 묘사한 대목을 비교해보면, 첸토비치의 심리적 전략과 B박사가 호텔 감방에서 당한 고문방식이 유사하다는 해석은 더더욱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155(해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가 저술한 수많은 평전과 역사서에 가까운 에세이로 더 유명하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던 유명한 <발자크 평전>인데 <발자크 평전>에 대한 리뷰는 다음에 또다른 날을 잡고 해야겠다. 나에게 여전히 미래가 남아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번역을 맡은 김연수 씨가 쓴 해설에서 역사서이자 자전적 에세이인 <어제의 세계>가 작품 해설과 맞물려 여러 번 등장했는데, 국내에서는 지식공작소라는 출판사에서 올해 2월 5일에 곽복록 씨의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아무래도 츠바이크가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데 능한 작가라는 점은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를 테면 천재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에게 '절대고립'이라는 게슈타포의 고문방식의 본질적 유사성(154)이 오버랩 되면서" 이야기가 굉장히 폭넓은 공간을 향해 확장되어 간다.
츠바이크는 1942년 2월 22일,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약물과다 복용으로 생을 마감했다.
<체스 이야기는>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에 남긴 작품으로, 어쩌면 B박사가 '무'의 상태에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겨내고자 만들었던 두 개의 자아로 인해 육체가 분열되는 고통을 느껴야 했던 심정으로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츠바이크가 1922년에 발표한 ‘낯선 여인의 편지’ 또한 열세 살 때부터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해온 여자의 내밀한 고백이 탁월한 작품이다.
유명 소설가 R는 발신인이 나와 있지 않은 낯선 필체의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고 호기심에 이끌려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R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여인이 쓴 것으로, 여인은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도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 자신의 삶과 R를 향한 평생의 사랑을 편지에 담아낸 것이다.
원제: ‘체스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Schachnovelle Brief einer Unbekannten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1881~1942)
발표: 1941년, 1922년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
슈테판 츠바이크(독일어: Stefan Zweig, 1881년 11월 28일 ~ 1942년 2월 22일)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저널리스트·극작가·전기작가이다. 빈에서 태어났으며[1], 나치가 정권을 잡자 브라질로 망명하였다가, 마지막 작품인 《발자크》를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페트로폴리스에서 젊은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형식적 완성미가 풍부하고,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응용하여 쓴 우수한 단편 소설들이 많다. 유럽 문화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고, 대표작으로 《감정의 혼란》(1926)이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직물 공장 대표인 아버지 모리츠 츠바이크와 유대계 은행가 가문 출신인 어머니 이다 브레타우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시집 《은(銀)의 현(絃)》(1901)을 통하여 등단하였고,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1904년 23세 되던 해 「이폴리트 테느의 철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학업에 있어서 종교적 요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 《책벌레 멘델》에서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는 등 자신의 유대교적 신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수필 작품들이 시오니즘을 선도하는 테오도어 헤르츨이 운영하는 《신 자유신문》(Neue Freie Presse)에 실리기는 하였지만, 츠바이크는 헤르츨의 유대적 민족주의(시오니즘)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또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체코의 작가 에곤 호스토프스키와 친했다. 호스토프스키는 츠바이크와의 관계를 ‘먼 친척되는 사이’라고 묘사하곤 했는데[2], 몇몇 매체는 그들의 사이를 사촌이라고 표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애국주의적 정서가 확대되었는데, 이때 츠바이크뿐만 아니라 마르틴 부버, 헤르만 코엔과 같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계 유대인들도 지지의 의사를 내비쳤고, 이러한 정서는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3]. 츠바이크는 비록 이에 동조하기는 하였지만,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거부하였고, 대신 국방부 기록 보관소에서 근무하였다. 하지만 곧 그는 19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그의 친구 로맹 롤랑과 함께 평화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츠바이크는 인생 전반에 걸쳐서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유럽의 통합을 지지했다. 이후 롤랑처럼 츠바이크 또한 수많은 전기문을 썼는데, 《에라스무스 평전》이 대표작이다.
1934년 츠바이크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힘을 떨치자 이를 피해 아내 프리데리케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피신하였다. 1940년 나치 군대가 프랑스를 거쳐 서유럽으로 빠르게 진군하자 츠바이크 부부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옮겼고, 같은 해 8월 20일 다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위성 도시인 페트로폴리스로 옮겼다[4]. 편협한 사고와 권위주의 그리고 나치즘에 의해 그의 우울증은 깊어져만 갔고, 인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감을 느낀 츠바이크는 그의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노트에 적었다. 결국 츠바이크 부부는 1942년 2월 23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그들의 집에서 손을 잡고 죽은 채 발견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최고 유명 작가였다. 또한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친구이기도 했다[7]. 그는 특히 미국, 남미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 유명했다. 하지만 영국 출판계에서는 무시당했는데[8], 이는 곧 미주에서의 명성이 하락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몇몇 유명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 시작했다[9].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혹자는 그의 문체가 가볍고, 피상적이라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하며, 혹자는 그의 휴머니즘과 간결하지만 설득력 있는 문체가 유럽의 전통에 더욱 더 매료되게 한다며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츠바이크의 유명 작품으로 중편 소설인 《체스》(1922), 《아모크》(1922),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1922)와 소설인 《감정의 혼란》(1926), 《연민》(1939) 그리고 전기문인 《에라무스 평전》(1934), 《메리 스튜어트》(1935), 《바다의 정복자: 마젤란 이야기》(1938)가 있다. 한 때, 츠바이크는 반(反) 독일 감정이 확대되자 자신의 이름인 슈테판 츠바이크를 영어로 그대로 번역한 스테픈 브랜치(Stephen Branch)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1932)는 1938년 헐리우드 영화로 제작되었다.
츠바이크는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슈트라우스에게 오페라 《말없는 여자》(Die schweigsame Frau)의 대본을 제공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1935년 6월 24일 드레스덴에서 자신의 첫 작품을 선보일 때, 프로그램에서 츠바이크의 이름을 삭제하라는 나치 정권의 요구에 반항한 것으로 유명한데[10], 그 결과 원래 오페라에 참석하기로 했던 요제프 괴벨스가 오지 않았고 이후 공연 또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아야했다. 1937년 츠바이크는 요제프 그레고르와 오페라 《대프니》(Daphne)의 대본을 공동 제작하여 슈트라우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형식적인 완성미가 있다. 친구인 프로이트 심리학을 응용하여 쓴 단편들이 큰 호응을 받았다. 유럽 문화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작으로 ‘감정의 혼란’을 꼽는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애국주의 정서가 널리 퍼졌다. 그도 애국주의에는 동조했으나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후방 지원 부서에서 일했다.)
첫댓글 선생님
슈테판 츠바이크 작가와 사상에 대해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문학방에 오면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는 자유함을
누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