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寄)라는 것은 부쳐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오는 것과 가는 것이 일정하지 않음을 말한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참으로 없는 것인가? 태어나기 전의 상태에서 본다면 원래 없는 것이고, 태어난 뒤의 모습으로 보면 오롯이 있는 것이며, 죽고 나면 다시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있음과 없음 그 사이에 부쳐 있는 꼴이다. 우(禹) 임금이 “삶은 부쳐 사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가는 것[生寄也 死歸也]”이라고 했듯이, 삶이란 나의 소유가 아니요, 하늘과 땅이 잠시 몸뚱이를 맡겨놓은 것일 뿐이다.
상촌 신흠(1566~1628)의 ‘부쳐 사는 집’(寄齋記, ‘상촌집’에서)
‘기(寄)’라는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위탁한다’ ‘의지한다’라는 뜻으로 나와 있다. 자주 쓰이는 용례에는 어디에 붙어 산다는 뜻의 기생(寄生), 누구에게 붙어 먹는다는 의미의 기식(寄食) 등이 있다. 인간이 땅과의 관계를 말할 때, ‘기’라는 글자가 딱 어울린다.
‘장자’에는 인간의 간지(奸智)가 어떻게 대지의 순박함을 훼손하는지 잘 보여주는 우화가 나온다. 남쪽 바다의 임금 숙(숙)과 북쪽 바다의 임금 홀(忽)이 중앙 땅에 사는 임금 혼돈(渾沌)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처럼 혼돈에게 일곱개의 구멍(七竅)을 뚫어주었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건설 추진은 ‘혼돈이 칠규로 죽었다’는 장자의 우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명박 정부는 숙과 홀이 혼돈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의(善意)에서 출발하고 있을지 모른다. 운송 수단 확충, 관광자원 개발, 일자리 창출, 심지어 ‘환경보호’까지 기치로 내걸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강과 들, 산에 칠규가 아닌 칠백, 칠천의 구멍을 뚫었을 때 신음하게 될 한반도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출처:경향닷컴 글 조운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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