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3대첩의 하나인 구주대첩의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대한 진실과 사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밝힌다
거란의 1차 침공(993년) 때 활약한 고려의 서희는 담판의 대가로,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자, 서희가 담판을 벌여 소손녕을 설득해서 물러가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말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과연 가능할까? 거란의 2차 침공(1010년)시 고려는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현종은 항전을 불사한다. 그는 대체 왜 이런 결심을 했던 것일까? 거란이 총 일곱 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이유는 무엇이며, 당시의 국제정세는 어떠했을까? 구주대첩(1018~1019)에서 고려의 승리를 이끈 사람은 강감찬 한 명이었을까?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긴 전쟁에 대해 품어볼 만한 의문은 이렇듯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책은 바로 이 의문에 주목하여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리고 진실한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쓰였다.
예지황후 소작 - 승천황태후 혹은 소태후라고도 불리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거란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고려 성종 - 고려의 정치체제를 선진화시켰으며 소손녕의 침공을 막아내고 서희와 더불어 고려의 방어 전략을 만들었다. 한국의 선비 1호, 유교 문화의 기틀을 만들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역사는 사실상 고려의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양규의 활약 때문이었다. 양규는 곽주를 탈환해내었으며, 거란군이 회군할 때는 한 달 동안 일곱 번 싸워 수많은 거란군을 주살했고, 3만에 달하는 고려인 포로를 구해냈다.
구주대첩에서 고려군의 피해는 겨우 173명이 전사한 것에 그쳤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소배압은 겨우 도망쳐서 거란으로 돌아갔다. 패전소식을 들은 거란 황제 야율융서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 소배압을 꾸짖었다.
구주대첩으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종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거란황제 야율융서는 구주대첩 직후, 바로 군대를 조직하여 고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23년 거란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침략했지만 또다시 패하고 말았고 이 이후에 드디어 거란군의 대규모 침공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소규모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