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시기보다 오히려 인조시기가 더 평온했다..
글쎄요..
역사란 만약을 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광해군이 왕좌를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그이후 계속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일시 평온이 내부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 부분을 수술하는 것이 옳지 곪아 터져 버릴 때까지
놔둔다면 몇십년뒤, 몇 백년뒤 더 혼란한 사회가 야기될 수도 있는것 아닐까요??
광해군은 당시 명,청 교체기를 이용해 중립외교를
폄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위치를 굳건히 하려 했습니다...
--> 광해군이 개인적인 감정을 돌출시킨 부분이 딱 두가지가 있습니다.
한개는 명을 제대로 돕지 않은 부분과
또 한개는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일.
명은 시도때도 없이 임해군 어디있느냐고 따져댔고 이때 대북은 결정적 실수를 하게 되는데 임해군은 몸이 약해 왕위에 오를 수 없고, 지금은 아버지의 상을 치루고 있다고 변명합니다. 근데 상식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이 아버지 상을 치룰 순 없거든요. 결국에 이걸 포착하곤 임해군을 직접 만나기 위해 명 사신이 오는데 이때 광해군은 뇌물로 무마시키려 합니다.
결국 뇌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되려 이후 뇌물을 받는게 중국 사신의 일처럼 되버렸습니다. 나쁜 폐단하나가 광해군조때부터 시작된 셈이죠.
아무튼... 광해군은 명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중외교를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건 바로 명과 후금의 병력 비교 입니다.
명은 전국에 100만. 거기에다가 비상시에 징집하는 수단을 발휘한다면 최소한 200만의 병력은 유지가 되는 국가입니다.
근데 후금은 고작 6만입니다.
자.... 내가 당시 조선사람인데 광해군이 명나라 편안들고 후금편 들었다 치십시요.
저라면 당장 데모하고 왕위에서 광해군 물러나라고 했을 겁니다.
이중외교는 순전히 광해군의 개인적임 감정에서 나온것일 뿐 그걸 가지고 위대한 정책이라고 까지 미화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항상 왕위에 올리고 싶어했었던 여인으로... 대북파가 어느정도 바람 집어넣자 광해군은 즉각 폐위시키죠. 물론 대북의 소수 인물은 안된다고 상소를 올리지만 결국에 정치적인 쑈에 불과합니다.
인목대비를 집권당과 왕이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폐위시켰다면 민심이 한꺼번에 이반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치적 쑈를 벌인거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인조는 국제정세를 무시한채 극단적인 반청 외교를 펼치므로써
(여기에는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입장도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그리고 이후 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위치를
점유하기 힘들어지게 합니다...
앞의 님께서는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안정적으로 더 유지시켰다는 데 큰 점수를 주시는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삼전도의 굴욕은 만들지 않아도 되는 사건을 인조의 극단적인 반청외교로
빚어진 문제라고 보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이어진다면 그러한 사건을
막았을 수도 있지요...
--> 후금은 명의 50만 군대를 대패시킵니다.
6만으로 50만을 깨부수는 정말 놀라운 일을 벌이죠.
그리고 나서 청나라가 세워지고 명나라는 멸망 했나요?
아닙니다. 50만이 사라졌어도 50만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태종으로 누르하치가 왕위에 올랐을 뿐이지 여전히 국경선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인조와 광해군은 똑같은 형태의 입장에 놓입니다.
50 vs 6
자... 광해군은 6만을 은근히 도왔는데
인조는 50만을 도왔습니다.
뭐가 상식선에서 제대로 된 판단일까요?
삼전도의 치욕은 청이 건국된 이후의 일인데 명은 반란으로 망했지 청나라의 직접적 공격에 의해 망한건 아닙니다.
자... 뭐가 상식선에서 제대로된 판단일까요?
현재를 예로 들면 대한민국이 이라크 돕겠다고 미국이랑 대판 싸울 준비하는거랑 광해군의 정책과 뭐가 다를까.... 뭐 이런 문제겠죠.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왜란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하루빨리 재건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요?? 백성들을 생각하는 군주라면 전쟁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것 아닐까요??
시기적절한 국제정세를 살펴 새로운 강대국에 의해 재편될 국제질서에 있어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우세한 위치에 놓으려 한 광해군과,,,
소중화의식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반청외교로 이미 예견된 국제질서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만 인조...
과연 어느쪽을 자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느쪽의 정책이 더 조선의
미래를 위한 것일까요??
--> 명은 결코 외침에 망한게 아닙니다. 내부가 무너져 망한겁니다.
내부가 무너지기 이전에 명이 망한다는 생각은 당시에 아무도 안했습니다.
50만군대가 처음에 깨질땐 대포를 들고 말탄 기마병 상대하다가 망한거고
또
50만이 다시 투입되어 싸울땐 공성전을 펼쳐서 청나라 군대가 공격도 못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대포무서워 나가지도 못하는 청이 당시에 명을 무너뜨리고 대국으로 자라날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조선의 정책은 오히려 인조가 옳았습니다. 광해군은 개인 감정 주체 못하고 망한셈이죠.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항이 되고 난후, 발빠르게 근대화가
일어나지 못했던 이유도 지배층들의 국제정세를 읽는 눈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당시 조선내부에서도 상당할 정도로 경제나 사회가
변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배층들의 사고와 인식은 변화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리고 광해군을 '피'를 좋아하는 군주라 말하셨는데....
인조반정자체가 상당한 '피'를 불러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쉬움이 남는것은...
조정에서의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다른 당파를 포용하지 못하고... 타 당에 대해선 극단적인 정책을 편
대북의 정책에 대해선 저도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 대국에 발맞춰 국제정세에 순응하는게 광해군 - 인조시기엔 명과 연합하는것이었습니다. 청은 대국이 아니었고 대국으로 성장할 배경과 물적 자원은 열약했습니다.
가능성 1%가 100%가 된건 순전히 명나라 내부의 반란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이 대국에 순응하는건 어디까지나 중화에 의한 사대지 오랑캐 청에 대한 사대가 아닙니다.
조선인들은 항상 문화적으로 우리 나라야 말로 중화라고 꾸준히 생각해 왔었습니다.
소중화사상인데, 이미 오랑캐 청이 중화를 지배했으니 중화는 이제 조선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중심이 이젠 조선이라는 겁니다.
이건 당시 지배층은 물론 민간 유생들까지도 공통된 점이었습니다.
인조가 아니더라도 어떤 왕이어도 청나라에 의한 삼전도의 치욕은 겪었을 가능성이야 다분합니다.
조선의 왕 그 누구도 청나라를 중화라 인정한적 없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외교적으로 마찰이 일어나고 청에 조공을 시작할때도 오랑캐에게 힘이 없어 굴복한 것일뿐 결국 세상의 중심은 바로 "조선"이라고 꾸준히 생각해왔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었습니다.
결코 패배주의에 휩싸인채 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국에 무조건 순응하는게 능사라고 무조건 대국에 순순히 응한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지 오랑캐가 대국되었다고 대국이니 사대하자 이게 아닌겁니다.
단순한 개인감정이었다면 후금에 붙었겠죠.
개인감정에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 대놓고 후금에 붙었다면 조정 대신을 비롯한 외교적 역한관계에서의 조선의 입장은 난처해집니다.
존명사대에 대한 입장이 거의 확실한 조정대신들한테 후금이랑 동맹맺자는 식은 오랑캐와 손을 잡자는 의미로 조선 사대부는 99% 반대할 일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명을 돕지않았다... 그 선으로 이해를 해야할 문제입니다.
광해군이라는 책을 쓴 한명기에 의하면 광해군의 외교목표는
"명에게 지켜야할 지본적인 예의는 지킨다. 그러나 조선의 존망여부까지
걸어야 할 요구는 거부한다. 후금이 오랑캐임은 분명하지만
일단 그들을 다독거려 침략을 막는다.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평화에 시간동안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실력을 기른다."는 것으로 광해군이 단순히
개인감정으로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광해군의 국경지방에 정보수집으로 명과 후금에 관한 나름의
판단(농민봉기과 조정의 분란으로 인한 명의 약화)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리고 뒤이은 명의 파병요청은 대국인 명으로서도 조선에 도움을 받을 정도로
군사를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명의 모문룡의 폐해 역시 막아냄으로써 무조건적으로 명을 도움으로써
입었을 백성들의 피해를 막아냈던 것입니다
--> 명이 양호에게 후금의 정복을 명령하면서 조선엔 임진왜란 당시에 10만의 군대로 조선을 구원해준 사실을 들먹이며 파병을 요구합니다.
명분적인 면에서 보자면 명에겐 큰 은혜를 조선이 입은건 사실이죠.
그럼에도 파병을 이핑계 저핑계로 미루다가 양호가 도저히 못참고 단 1만이라도 보내라고 하니 광해군이 그제서야 파병을 하게 됩니다.
여기엔 명에 퍼져있는소문이 또한 한 작용을 하게 되었는데 명에는 조선이 후금을 도와 명을 치려하니 조선에 사람을 보내 조선왕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일어나려는 상태였죠.
그러니 그때선 도저히 파병을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었죠.
명한테 조선의 원군이 없어도 50만은 있습니다. 여태 그냥 50만 50만 했는데 정확히 하면 46만인데 46만이 47만이 되건 6만이 7만이 되건 전력상 큰 차이는 없겠죠.
명의 파병요구는 실질적으로 병력에 도움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겁니다.
명은 당시 실질적인 중국대륙의 천자였고,
후금은 이제 막 생성된 초기단계에 불과한 국가입니다...
벌써 국가의 크기차이가 바위와 계란의 차이인데
군사수의 차이는 당연하죠...
병력의 차이는 군사수로만 따질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명은 임진왜란시 조선원정으로 군사력도 약해지고
국내사정이 혼란했던 때입니다...
반면 후금의 '팔기군'이라는 군사조직은.. 수는 적지만
정예부대였습니다....(이후 '팔기군'의 군사력은 후금의
성장에 상당한 공헌을 했습니다..)
--> 명나라도 당나라 이래 모병제를 실시하며 어느 정도 군사의 질을 역대 중원왕조보단 단단히 해왔습니다.
이건 참고사항일 뿐이고...
아무튼간 50만에 6만이 밀려 진출 못한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것도 50만을 한차례 격파했음에도 말이죠.
네.. 명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죠....
명의 조선원정이후 북방을 지키고 있던 군사력이 빠지면서
후금의 성장을 도왔고,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스스로 멸망하자
후금의 중원 정복을 쉽게 했죠...
하지만 탄탄하던 명이 갑자기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건 아니었습니다..
장거정의 개혁이 있기 전부터 북로남왜라 불리는 이민족의
침입과 당쟁으로 국내사정은 혼란스러웠고, 장거정의 개혁도 그가 죽고나자
조선출병, 농민반란, 당쟁으로 흐지부지해지고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이러한 명내부의 혼란은 '대제국의 쇠약'으로 진단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당시 명의 내부분열과는 달리 '팔기군'을 중심으로 내부적으로 결집이 잘
이루어졌던 후금의 성장에 광해군은 주의를 기울였던 거죠..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광해군은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히 진단했고 거기에 대응해 국제외교를 이끌어나갔다고 볼 수 있죠.. 반면 아무리 군사수가 우세하다고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이미 기울어지고 만 명에 원조를 한
(그것도 청을 완전 배제한 채..)
인조는 명의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인가요???
--> 청의 가능성이 뭐였나요?
50만에 겁먹어 진출하지 못하는것?
그러나 50만의 군대가 지기 이전에 이미 광해군은 이중외교를 했습니다.
따져보십시요.
청이 무슨 가능성이 있길래 조선의 원조를 받아야 하는지.
말탄 기마병 6만이 아무리 강력해도 성에 의지해 대포 쾅쾅 쏴대는 50만을 쉽게 이기리란 보장은 결코 없었습니다.
결국에 팔기군도 50만의 군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인조반정은 1623년에 일어난것으로 명이 망하기 이전에 이미 인조반정은 일어나 이자성이 뭔짓을 하건 당시엔 미래의 일일 뿐입니다.
명은 당시에도 동아시아 최강이었습니다.
청이 최강이란 증거는 없지만 명이 최강이란 증거는 상비군 100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인목대비, 영창대군, 임해군 문제는 도덕적으로 따진다면 분명 패륜아적인 행동이었지만 이 행동하나로 광해군의 군주자질을 따진다는 것은 잘못이죠..(광해군이 적통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왕위 보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왕권강화를 위한 하나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 영창대군 임해군 등을 어떻게 한건 왕권강화적인 측면에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명분 중에서도 빠져있는 부분이구요.
허나, 아무리 왕권을 강화시킨다고 해도 동양 역사의 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까지 폐위시킨 경우는 없습니다.
조선역대 역사상 왕비가 아주 펄펄 날아다닌 적은 명종대 딱 한번 뿐으로 광해군은 특별히 왕비를 왕권 강화상 폐위시킬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로지 개인적인 감정이 발동해 폐위시켰을 뿐 다른 이유는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고려조의 광종, 조선조의 태종등의 공신 숙청, 외척 숙청은 강력한 왕권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이면서, 광해군의 영창대군, 임해군 사사와 인목대비 유폐문제는 광해군의 군주 자질문제로 평가되는 이유는 뭔가요??
광종과 태종이 죽인 이는 한다리 건너의 외척이고 광해군이 죽인 이는 한피를 나눈 동생과 형이어서 그런가요?? 군주의 자질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리더쉽'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나라를 이끌어가는데 사사로운 감정이 많이 낀게 문제라는 겁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인목대비는 왜 폐위당해야 하는지 역사적으로 따져봐도 전혀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사대주의, 패배주의라는 말로 평가하진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광해군이 당시 취한 중립외교는 청에 대한 사대를 똣하는게 아니고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빠르게 인식하고 거기에 맞춰 대응함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를 국제외교의 중심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오히려 인조의 선택으로 인해 조선은 청과의 관계에는 형제국에서 부자국으로
변화하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문제의 요지는 청에대한 사대를 인정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청에 대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인조의 반청정책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사대를 해야한것 아니냐.. 가 아닌가 합니다..
-->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갔는데요? 50만의 군대가 청에 패배하기도 이전에 이미 이중외교는 벌어졌습니다.
50만하고 6만하고 싸우는데 6만을 은근히 도운거죠.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1449년인가? 1549년인가 몽골의 침략을 명이 받는데 당시엔 황제가 포로가 되기까지 합니다. 적어도 이런 급진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야 어찌 당시에 50만이 6만한테 질 생각을 했겠습니까. 명은 이미 몽골의 침략을 받아 황제가 포로가 된적을 경험한 국가로 청의 봉기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봤겠죠.
결국 무식한 작전을 써서 패했긴 하지만 영리하게도 공성전을 펼쳐 청이 더이상 세력 확장에 실패하죠.
이중외교는 암만 봐도 개인감정에 의해 이루어진겁니다.
결코 위대한 외교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인목대비의 폐위에 대한 저의 견해는 위에 글처럼 단순히 광해군의 개인적인 감정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선조대 임해군 대신으로 공빈의 소생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세자 교체를 추진하던 유경영의 축출, 즉위...
그때 그의 왕위를 위해 옆에 있었던 이들이 바로 북인계열의 사람들 이었습니다.(이이첨, 정인홍 등) 결국 북인들의 힘을 등에 업게된 광해군은 임해군, 영창대군을 포함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게 됩니다. 단순히 광해군의 왕권위협에 대한 보복행위라기 보다는 당파(북인)들과 결합한 왕권강화의 측면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후에 인조반정시 서인들의 가장큰 명분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문제삼고 나왔고, 결국 성공을 거두면서, 그 이후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폭군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것으로 봅니다.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말이지요. 광해군 이전과 이후에 기록은 굳이 들추지 않아도 형제와 형제, 아버지와 아들간의
살육은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이 비단 동양뿐만이 아닌 서양을 보아도 드러납니다. 결국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와 종친들의 살해및 방관은 왕권강화와 당쟁을 연관지어서 봐야 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었다.'는 억지가 있습니다. 광해군대의 인목대비와 명종대의 문정왕후는 분명히 상황이 다릅니다. 명종은
그 당시의 명이 후금보다 병력이 많아서 광해군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명을 돕기로 했다는 것은 오류라고 봅니다.역사상으로 보면 중국의 역사는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생존을 건 경쟁 이었습니다.대륙이 통일 되거나 걸출한 군주가 나오면 북방을 그들의 표현대로 천자의 광휘를 사방에 뿌린다고 북방을 원정했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들의 강한 기마 공격을 받았습니다.한과 흉노의 전투도 그러했고 후한말의 조조의 북방원정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북방 제 민족들도 5호 16국의 통치 뿐 아니라 발해를 멸망시킨 요가 송을 남으로 몰아냈고 금과 원이 그 뒤를 이어서 대륙을 석권 했듯이
북방 제민족과 대륙의 생존을 건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륙이 기마에 점령당한것은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들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이 뚥린적 또한 수도 없습니다. 단지 50만과 6만의 비교는 수치상의 개념으로만 본 것 입니다.장성은 또한 한 번 뚥리면 전략상으로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그냥 무용지
물일 뿐입니다.지연전 조차 할수 없는 무용지물이지요.전사에서 일자로 된 방어선은 한번 뚥리면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것은 세계대전시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의 무력함에서 알수 있습니다 물론 마지노 선은 독일군이 우회한 것이지만 전략적 거점방어가 아닌 일자 방어는 큰 취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만리
장성은 만리나 뻗은 애물단지일 뿐이죠.또한 당시 명이 조선에 원병을 재차 요청했던 것은 조선이 후금에 파병한다는 의심을 한 것도 사실이고 임진년에 원조한 재조지은을 갚으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당시 중원대륙과 만주를 잊는 요하지방의 전략적 거점들을 청 아니 후금이 선점해서 만주에 있던
명군이 대륙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서 전원 옥쇄하거나 아니면 포로로 잡힐 수 밖에 없는 실정이자 명 조정에서 그들의 예비 거점으로 조선을 생각했고 자국군의 안전한 후방을 위해서 조선이 후금에 파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만약 조선 역시 명에 드을 돌리고 후금에 원조한다면 만주지역에 있던 명의 관원들
과 명군은 전워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명군으로서는 이미 후금의 저지선을 뚥고 자국군에 원병을 하기도 벅찬 실정이었죠.한마디로 중원대륙은 몰라도 광해군 시대에 만주지역은 이미 확실한 후금의 영토로 굳혀 졌고 이를 명의 50만 청의 5만 운운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사지에 빠진 자국군 마져도 명?
은 구할 여력이 없었으니까요. 이에 광해군은 그러한 사실을 조선의 역대 왕으로서는 드물게 아마도 왜란이라는 7년여의 전란을 거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첩자들을 통해서 물론 명 조정의 내부까지는 모르겠지만 후금의 군사적 동향과 만주에 있는 명 요동군이 진퇴유곡에 빠져서 본국으로의 길이 끊긴채 전원 포로가
첫댓글 동생이나 형을 죽인이유는 정권안정과 반대파 숙청위한과정 임해군은 장자이고 영창군은 적자 이기에 정통성명분에서 광해왕을 압박하는 요인이되고 권력에 야심이 잇는 재야들이 왕자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킬수잇음 이런것은동서고금 어느나라나 마찮가지........
인목대비의 폐위에 대한 저의 견해는 위에 글처럼 단순히 광해군의 개인적인 감정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선조대 임해군 대신으로 공빈의 소생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세자 교체를 추진하던 유경영의 축출, 즉위...
그때 그의 왕위를 위해 옆에 있었던 이들이 바로 북인계열의 사람들 이었습니다.(이이첨, 정인홍 등) 결국 북인들의 힘을 등에 업게된 광해군은 임해군, 영창대군을 포함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게 됩니다. 단순히 광해군의 왕권위협에 대한 보복행위라기 보다는 당파(북인)들과 결합한 왕권강화의 측면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후에 인조반정시 서인들의 가장큰 명분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문제삼고 나왔고, 결국 성공을 거두면서, 그 이후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폭군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것으로 봅니다.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말이지요. 광해군 이전과 이후에 기록은 굳이 들추지 않아도 형제와 형제, 아버지와 아들간의
살육은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이 비단 동양뿐만이 아닌 서양을 보아도 드러납니다. 결국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와 종친들의 살해및 방관은 왕권강화와 당쟁을 연관지어서 봐야 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었다.'는 억지가 있습니다. 광해군대의 인목대비와 명종대의 문정왕후는 분명히 상황이 다릅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직계였고, 척신정치에 휘둘렸던 허수아비(제 개인적인 생각) 임금으로 인목대비의 폐위와 관련하여 가져다 붙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족하나 붙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나도사랑을님 전에 바로사에서 활동하신분 맞는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님이 올린 많은 글들과 그글에 따른 많은 논의를 봤습니다. 결국은 님이 한번도 승리한 적은 없는것 같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역사에 대한 지식과 분명하지 않은 역사바라보기는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님의 다른 시각에서 역사바라보기는 저도 문제삼고 심지 않으나 기존에 나와있는 통설로 인정되는 많은 지식들을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저도 그렇습니다만..) 정리되지 않은 생각따위의 열거는 좋지 않습니다. 기초없는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공허한 혼자만의 배설에 불과하지요. 나도사랑을님이 그렇지 않다면 아래 반박글과 제 꼬리말에 대한 님의 견해 부탁드립니다. 이상.
그 당시의 명이 후금보다 병력이 많아서 광해군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명을 돕기로 했다는 것은 오류라고 봅니다.역사상으로 보면 중국의 역사는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생존을 건 경쟁 이었습니다.대륙이 통일 되거나 걸출한 군주가 나오면 북방을 그들의 표현대로 천자의 광휘를 사방에 뿌린다고 북방을 원정했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들의 강한 기마 공격을 받았습니다.한과 흉노의 전투도 그러했고 후한말의 조조의 북방원정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북방 제 민족들도 5호 16국의 통치 뿐 아니라 발해를 멸망시킨 요가 송을 남으로 몰아냈고 금과 원이 그 뒤를 이어서 대륙을 석권 했듯이
북방 제민족과 대륙의 생존을 건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륙이 기마에 점령당한것은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들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이 뚥린적 또한 수도 없습니다. 단지 50만과 6만의 비교는 수치상의 개념으로만 본 것 입니다.장성은 또한 한 번 뚥리면 전략상으로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그냥 무용지
물일 뿐입니다.지연전 조차 할수 없는 무용지물이지요.전사에서 일자로 된 방어선은 한번 뚥리면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것은 세계대전시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의 무력함에서 알수 있습니다 물론 마지노 선은 독일군이 우회한 것이지만 전략적 거점방어가 아닌 일자 방어는 큰 취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만리
장성은 만리나 뻗은 애물단지일 뿐이죠.또한 당시 명이 조선에 원병을 재차 요청했던 것은 조선이 후금에 파병한다는 의심을 한 것도 사실이고 임진년에 원조한 재조지은을 갚으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당시 중원대륙과 만주를 잊는 요하지방의 전략적 거점들을 청 아니 후금이 선점해서 만주에 있던
명군이 대륙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서 전원 옥쇄하거나 아니면 포로로 잡힐 수 밖에 없는 실정이자 명 조정에서 그들의 예비 거점으로 조선을 생각했고 자국군의 안전한 후방을 위해서 조선이 후금에 파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만약 조선 역시 명에 드을 돌리고 후금에 원조한다면 만주지역에 있던 명의 관원들
과 명군은 전워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명군으로서는 이미 후금의 저지선을 뚥고 자국군에 원병을 하기도 벅찬 실정이었죠.한마디로 중원대륙은 몰라도 광해군 시대에 만주지역은 이미 확실한 후금의 영토로 굳혀 졌고 이를 명의 50만 청의 5만 운운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사지에 빠진 자국군 마져도 명?
은 구할 여력이 없었으니까요. 이에 광해군은 그러한 사실을 조선의 역대 왕으로서는 드물게 아마도 왜란이라는 7년여의 전란을 거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첩자들을 통해서 물론 명 조정의 내부까지는 모르겠지만 후금의 군사적 동향과 만주에 있는 명 요동군이 진퇴유곡에 빠져서 본국으로의 길이 끊긴채 전원 포로가
될 상황은 알고 있기에 극히 실리주의 노선을 택한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결코 할수 없지만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