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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인문/사회- 상식 한사모의 hell0님의 글입니다...명,후금(청),조선 광해군의 외교에 대해~~
나도사랑을했으면 추천 0 조회 190 03.12.14 21:33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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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3.12.15 17:05

    첫댓글 동생이나 형을 죽인이유는 정권안정과 반대파 숙청위한과정 임해군은 장자이고 영창군은 적자 이기에 정통성명분에서 광해왕을 압박하는 요인이되고 권력에 야심이 잇는 재야들이 왕자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킬수잇음 이런것은동서고금 어느나라나 마찮가지........

  • 03.12.16 00:59

    인목대비의 폐위에 대한 저의 견해는 위에 글처럼 단순히 광해군의 개인적인 감정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선조대 임해군 대신으로 공빈의 소생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세자 교체를 추진하던 유경영의 축출, 즉위...

  • 03.12.16 00:26

    그때 그의 왕위를 위해 옆에 있었던 이들이 바로 북인계열의 사람들 이었습니다.(이이첨, 정인홍 등) 결국 북인들의 힘을 등에 업게된 광해군은 임해군, 영창대군을 포함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게 됩니다. 단순히 광해군의 왕권위협에 대한 보복행위라기 보다는 당파(북인)들과 결합한 왕권강화의 측면으로 저는 보고

  • 03.12.16 00:29

    있습니다. 후에 인조반정시 서인들의 가장큰 명분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문제삼고 나왔고, 결국 성공을 거두면서, 그 이후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폭군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것으로 봅니다.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말이지요. 광해군 이전과 이후에 기록은 굳이 들추지 않아도 형제와 형제, 아버지와 아들간의

  • 03.12.16 00:41

    살육은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이 비단 동양뿐만이 아닌 서양을 보아도 드러납니다. 결국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와 종친들의 살해및 방관은 왕권강화와 당쟁을 연관지어서 봐야 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었다.'는 억지가 있습니다. 광해군대의 인목대비와 명종대의 문정왕후는 분명히 상황이 다릅니다. 명종은

  • 03.12.16 11:34

    문정왕후의 직계였고, 척신정치에 휘둘렸던 허수아비(제 개인적인 생각) 임금으로 인목대비의 폐위와 관련하여 가져다 붙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 03.12.16 00:53

    마지막으로 사족하나 붙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나도사랑을님 전에 바로사에서 활동하신분 맞는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님이 올린 많은 글들과 그글에 따른 많은 논의를 봤습니다. 결국은 님이 한번도 승리한 적은 없는것 같습니다.

  • 03.12.16 01:02

    결국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역사에 대한 지식과 분명하지 않은 역사바라보기는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님의 다른 시각에서 역사바라보기는 저도 문제삼고 심지 않으나 기존에 나와있는 통설로 인정되는 많은 지식들을

  • 03.12.16 01:01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저도 그렇습니다만..) 정리되지 않은 생각따위의 열거는 좋지 않습니다. 기초없는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공허한 혼자만의 배설에 불과하지요. 나도사랑을님이 그렇지 않다면 아래 반박글과 제 꼬리말에 대한 님의 견해 부탁드립니다. 이상.

  • 04.01.02 01:25

    그 당시의 명이 후금보다 병력이 많아서 광해군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명을 돕기로 했다는 것은 오류라고 봅니다.역사상으로 보면 중국의 역사는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생존을 건 경쟁 이었습니다.대륙이 통일 되거나 걸출한 군주가 나오면 북방을 그들의 표현대로 천자의 광휘를 사방에 뿌린다고 북방을 원정했고

  • 04.01.02 01:28

    그 반대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들의 강한 기마 공격을 받았습니다.한과 흉노의 전투도 그러했고 후한말의 조조의 북방원정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북방 제 민족들도 5호 16국의 통치 뿐 아니라 발해를 멸망시킨 요가 송을 남으로 몰아냈고 금과 원이 그 뒤를 이어서 대륙을 석권 했듯이

  • 04.01.02 01:36

    북방 제민족과 대륙의 생존을 건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륙이 기마에 점령당한것은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들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이 뚥린적 또한 수도 없습니다. 단지 50만과 6만의 비교는 수치상의 개념으로만 본 것 입니다.장성은 또한 한 번 뚥리면 전략상으로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그냥 무용지

  • 04.01.02 01:35

    물일 뿐입니다.지연전 조차 할수 없는 무용지물이지요.전사에서 일자로 된 방어선은 한번 뚥리면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것은 세계대전시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의 무력함에서 알수 있습니다 물론 마지노 선은 독일군이 우회한 것이지만 전략적 거점방어가 아닌 일자 방어는 큰 취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만리

  • 04.01.02 01:49

    장성은 만리나 뻗은 애물단지일 뿐이죠.또한 당시 명이 조선에 원병을 재차 요청했던 것은 조선이 후금에 파병한다는 의심을 한 것도 사실이고 임진년에 원조한 재조지은을 갚으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당시 중원대륙과 만주를 잊는 요하지방의 전략적 거점들을 청 아니 후금이 선점해서 만주에 있던

  • 04.01.02 01:52

    명군이 대륙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서 전원 옥쇄하거나 아니면 포로로 잡힐 수 밖에 없는 실정이자 명 조정에서 그들의 예비 거점으로 조선을 생각했고 자국군의 안전한 후방을 위해서 조선이 후금에 파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만약 조선 역시 명에 드을 돌리고 후금에 원조한다면 만주지역에 있던 명의 관원들

  • 04.01.02 01:55

    과 명군은 전워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명군으로서는 이미 후금의 저지선을 뚥고 자국군에 원병을 하기도 벅찬 실정이었죠.한마디로 중원대륙은 몰라도 광해군 시대에 만주지역은 이미 확실한 후금의 영토로 굳혀 졌고 이를 명의 50만 청의 5만 운운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사지에 빠진 자국군 마져도 명?

  • 04.01.02 01:59

    은 구할 여력이 없었으니까요. 이에 광해군은 그러한 사실을 조선의 역대 왕으로서는 드물게 아마도 왜란이라는 7년여의 전란을 거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첩자들을 통해서 물론 명 조정의 내부까지는 모르겠지만 후금의 군사적 동향과 만주에 있는 명 요동군이 진퇴유곡에 빠져서 본국으로의 길이 끊긴채 전원 포로가

  • 04.01.02 02:01

    될 상황은 알고 있기에 극히 실리주의 노선을 택한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결코 할수 없지만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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