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수통’ 이훈규 전 검사장의 검찰 秘史
1997년 5월15일 대검찰청 11층 특별조사실. 상기된 표정의 김현철씨가 주임검사인 중수부 3과장의 방에 들어섰다. “검찰 체면도 있고 언론 눈도 있으니 48시간은 조사받아야겠지요?” “그건 조사해봐야 알겠죠. 뭐 시간 정해 조사할 것까지야….” “들어오기 전에 아버님과 통화했는데, 조사 잘 받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당신한테는 아버님이지만, 국민에게는 대통령이오. 공무원으로서 듣기 거북하니 그런 표현은 삼가주십시오.” 이훈규(李勳圭·55) 전 인천지검장이 털어놓은 김현철 사건 수사비화의 일부다. 이 전 검사장은 검찰 재직 시절 특수통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수부 검사의 필수 코스에 해당되는 대검 중앙수사부 과장과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지냈다(중수부 3과장 및 1과장, 서울지검 특수1부장). 비(非)서울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검찰의 황태자’로 불리는 법무부 검찰 1과장에 오른 기록도 남겼다. 1997년 현직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를 구속한 것은 그의 검찰 인생의 정점이었다. 당시 주임검사이던 그의 활약상은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1999년 7월엔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사건의 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아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특별수사본부가 대검 공안부를 압수수색한 것은 전설로 남아 있다. 그해 9월엔 청와대의 강력한 제동에도 ‘바이코리아’ 신화의 주인공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구속했다. ‘항명’의 후유증은 컸다. 지방으로 좌천성 발령을 받은 것이다.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맡은 지 8개월 만이었다.
“보복 두려우니 이사 가자” 김대중 정부에서 한직을 돌던 그가 다시 중앙무대에 복귀한 것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요청으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을 맡아 검찰 개혁을 이끌었다. 이후 그에게는 ‘강금실의 최측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지난 1월말 그는 28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났다.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수사 비화와 참여정부의 검찰 비사를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부담스럽다며 고사했다. 설득 끝에 마감 직전 인터뷰가 성사됐다. 검사 이훈규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91년 1월 국회 상공위 의원들의 뇌물외유사건 수사였다. 이재근 상공위원장과 이돈만, 박진구 세 의원이 자동차공업협회에서 항공료 등 여행경비를 받아 외유를 떠났던 사건이다. 이재근, 이돈만 의원은 평민당, 박 의원은 민자당 소속이었다.
당시 이훈규 검사는 서울지검 특수3부 수석검사였다. 부장검사는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에 임명된 이종찬씨. 세 의원이 받은 돈의 액수는 크지 않았다. 셋이 합쳐 5000만원이었다. 하지만 이훈규 검사는 이를 뇌물로 보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자동차공업협회가 상공위의 피감기관이었기 때문에 로비로 판단한 것이다. 당시 상공위는 자동차공업협회에 대한 예산 지원 법안을 다루고 있었다. 의원이 협회나 업체 지원으로 외유를 떠나는 것이 별 문제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일종의 관행이었다.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국회의 반발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 검사는 언론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결국 세 의원을 구속했다. 평민당 의원이자 이 검사와 사법연수원 동기인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 변호를 맡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재판에서도 수뢰혐의가 인정돼 세 의원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국회의원의 무분별한 외유에 제동을 건 최초의 수사였다. 서울지검 특수3부 시절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은 폭력조직인 장안파 일망타진 사건이다. 1990년 1월 이 검사는 서울 장안동 경남호텔 주변 유흥가를 무대로 청부폭력을 행사해온 장안파 일당을 검거했다. 치밀한 작전으로 하룻밤에 조직원 30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인 이 사건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첫 조직폭력배 검거 사건이었다. 이 검사는 잡혀온 폭력배 전원의 윗도리를 벗겨 한 줄로 늘어서게 했다. 수갑을 찬 채 뒤돌아선 모습이었다. 앞에는 그들이 소지했던 각종 칼 수십 여 점을 전시했다.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 언론에 공개했다. 요즘이라면 인권침해 시비가 제기될 만한 일이었다. 문신이 새겨진 폭력배의 벗은 몸과 칼들이 함께 있는 사진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사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방송에서 이를 본 이 검사의 부인도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 검사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부인이 “보복이 두렵다”며 이사를 졸라 아파트로 옮겼다.
사표 써놓고 수사 시작한 검사들 1997년 2월 하순 이훈규 검사는 대검 중수부 3과장에 임명됐다.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이 검사는 부임하자마자 김씨 사건을 맡게 될 것에 대비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언론 보도를 챙겼다. “시중에 ‘카더라’ 소문이 무성했다. 다 모아보니 A4 용지 30장 분량이었다.” 그에 앞서 검찰은 한보 비리 사건과 관련해 김씨를 조사한 후 무혐의 처리했다. 2월21일 고소인 자격으로 불러 26시간 동안 조사한 후 조용히 돌려보낸 것이다.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검찰은 주임검사를 이훈규 중수 3과장으로 바꿨다. 이 검사는 재수사 의지를 내비쳤지만, 검찰 지휘부는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검찰이 정권에 예속돼 있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현직 대통령의 아들 아닌가. “김현철씨는 이미 한 차례 무혐의 판정을 받은 터였다. 상부에서는 김씨에 대해서는 아예 접근도 못하게 했다. 재수사를 건의했지만, ‘사태를 좀더 관망하자’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 검사는 우회작전을 폈다. 김씨의 최측근인 (주)심우 대표 박태중씨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박씨의 집과 회사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작성해 상부에 결재를 올렸다. 그러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론은 김씨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원하고 있었다. 여론이 계속 들끓자 3월 하순 여권은 대검 중수부장을 경질했다. PK 출신인 최병국 중수부장을 교체하고 검찰 내 신망이 높은 심재륜 인천지검장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원래 여권에서는 김기수 검찰총장을 바꿔 여론을 무마하려 했다. 그런데 김현철씨와 그 측근인 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청와대는 총장을 살리는 대신 중수부장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심재륜 인천지검장이 중수부장으로 부임 한 이후 수사에 불이 붙었다.” 이훈규 검사는 짐을 싸고 있는 최병국 중수부장을 찾아가 다시 박태중씨 관련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었다. 최 부장은 떠나는 마당이라 그랬는지 순순히 사인을 해줬다. 영장 내용은 박씨가 한보철강의 대리인으로 독일 SMS사와 열연설비 수입을 계약하는 과정에 실제가격보다 50% 높게 계약서를 작성하는 수법으로 2000억원의 리베이트를 받아 김현철씨에게 제공했다는 의혹이었다. 심재륜 중수부장은 부임 직후 전국의 실력 있는 검사를 모아 드림팀을 구성했다. 대검 연구관인 김준호, 신현수 검사와 서울지검 특수부 소속이던 김경수, 오광수, 노관규 검사가 합류했다. 검사들은 사표 작성이라는 배수진을 쳤다. ‘국민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책임지고 검사직을 사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사에 실패하면 사표를 내겠다는, 다시 말해 반드시 김현철씨를 잡아넣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표현이었다. 이 전 검사장은 지금도 그 사표를 기념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김현철씨에 대한 초기 수사는 막막하기만 했다. 설(說)만 무성했지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 지휘부의 소극적인 태도도 걸림돌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태중씨 수사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박씨의 집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에 기재된 2000억 리베이트설이 언론에 보도되자 여권도 검찰 지휘부도 수사에 제동을 걸기가 어려워졌다. “대대적인 압수수색 덕분에 일단 박태중씨를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기업체 등에서 10억 여원을 받아 공무원에게 청탁한 알선수재 혐의였다. 증거가 뚜렷했고 박씨도 깨끗이 자백해 잡음이 없었다.”
“내 집에 사람 보내지 말라” 김현철씨 비리에 대해 별다른 단서가 없던 수사팀은 박씨 수사에 승부를 걸었다. 계좌추적을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심재륜 중수부장은 다른 수사로 여론의 눈길을 돌렸다. 한보사건 1차 수사결과를 토대로 정치인들과 대출비리에 관련된 은행장들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수사에 착수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김현철씨 비리의 꼬리가 잡혔다. 박태중씨 계좌에서 132억원의 뭉칫돈이 발견됐는데, 추적을 계속해보니 1992년 대선자금의 일부였다. 이 중 120억원이 수십 개의 가·차명계좌를 거쳐 두 개의 계좌로 분산 입금됐다. 하나는 이성호 대호건설 사장의 부친 명의의 계좌였다. 이성호씨는 김현철씨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다른 하나는 안기부의 위장 명칭인 ‘세기문화사’ 계좌였다. 이 계좌를 관리한 사람은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었다. 이성호씨 부친 명의의 계좌에는 50억원이, 안기부 계좌에는 70억원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12억원은 박씨의 사업자금이었다. 수사팀은 또 이성호씨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 김현철씨의 고교 선배인 D그룹 김모 회장의 수표 1억5000만원을 발견했다. 이로써 이씨가 김씨의 자금을 관리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어 김씨가 또 다른 고교 동문 기업인들에게서 수십억원을 받은 사실이 포착됐다. 이훈규 검사는 한 달 동안의 계좌추적 결과를 바탕으로 자금추적도를 만들었다. 4월 중순 이 검사의 요청에 따라 김기수 검찰총장과 최명선 대검차장, 심재륜 중수부장이 대검 11층 특별조사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 검사는 자금추적도를 꺼내 그간의 수사성과를 보고했다. 이 보고 후 수사에 가속도가 붙었다. 돈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선 이성호씨에 대한 수사가 필요했다. 수사팀은 이씨와 형제처럼 지내는 박태중씨를 통해 설득하고 이씨 회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등 강온 양면작전으로 이씨를 귀국하게 만들었다. 혐의를 부인하던 이씨는 자금추적도를 보여주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현철씨가 이씨에게 맡긴 50억원은 현금이었다. 이씨는 그 돈을 자신이 사는 빌라의 안방에 쌓아두었다. 나중엔 돈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이씨는 김기섭씨가 그 돈을 차에 실어 현철씨에게 되돌려줬다고 털어놓았다.”
“활동비로 줬다”
이제 남은 것은 김현철씨 조사였다. 당시 김씨는 검찰 소환을 피하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하고 있었다. 이훈규 검사는 수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김씨를 자진출두하게 할 방법을 모색했다. “김현철씨의 측근 중에 윤성로씨라고 있었다. 그는 김씨의 중대부중 동문이었다. 박태중씨를 포함해 세 사람은 ‘중대부중 3총사’로 불릴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먼저 수감 중인 박씨를 불러 자금추적 결과를 보여주며 수사협조를 부탁했다. ‘대통령이 이 문제로 국정수행을 못할 정도니 나라를 위해서라도 빨리 수사를 끝내야 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현철씨 스스로 검찰에 나와 조사받는 게 좋다.’ 그런 다음 윤씨를 불러 박씨를 면회하게 했다. 박씨는 윤씨에게 ‘중수부에 가 보니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며 김씨 설득을 부탁했다. 결국 윤씨가 밀사로 구기동 김현철씨 집을 찾아가 검찰의 메시지를 전했다.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 더 이상 저항 말고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바깥 분위기는 대통령 하야운동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문민정부의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나는 가능하면 수사를 빨리 끝낼 방침이었다. 윤씨를 통해 김씨측에 ‘자백하면 형량을 감경해 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흘렸다. 그런데 윤씨는 설득은커녕 혼만 나고 돌아왔다. 김씨가 윤씨에게 ‘검찰은 나를 절대 못 친다. 나를 건드리면 지들이 죽는다’고 큰소리쳤다는 것이다.” 검찰의 김현철씨 설득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일로 이훈규 검사는 김기수 검찰총장에게 불려가 혼이 났다. 김 총장은 ‘왜 김현철한테 사람을 보내 시끄럽게 하느냐’고 질책했다. 김씨의 강력한 항의 탓이었다. 김씨가 청와대와 안기부 등에 “검찰이 아무런 범죄사실이 없는 사람한테 친구를 보내 협박한다”고 항의하며 검찰을 우회적으로 압박했던 것이다. “‘설득’을 ‘협박’으로 바꾼 것이다. 김씨는 ‘내 집에 함부로 사람 보내지 말라’며 검찰을 공격했다. 결국 진검승부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씨의 부인이 전화를 받아 바꿔줬다. 출두를 통보하자 나오겠다고 했다.”
“아버지냐, 총장이냐” 그런데 김현철씨 소환을 앞둔 이훈규 검사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김씨가 받은 돈의 성격 규정이었다. 대선자금과 관련된 120억원은 성격이 명확한 만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그가 개인적으로 기업인들에게 받은 돈이었다. 확인된 금액은 모두 66억원이었다. 돈을 건넨 기업인들을 조사해보니 그 중 딱 절반인 33억원은 대가성이 드러났고 나머지 반은 성격이 모호했다. 해당 기업인들은 검찰 조사에서 “활동비로 준 돈”이라고 주장했다. “지휘부에 보고하기 전까지는 나만 아는 돈이었다. 가장 큰 고민이 ‘활동비’33억원 수수에 대한 법률적 해석이었다. 기소가 불투명해 보였다. 33억원을 아예 뺄 것인가, 아니면 발표하되 ‘떡값’으로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다 있는 대로 다 보고했다. 법률 적용에 대해 지휘부도 설왕설래했다. 이 상태에서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하면 자칫 수사팀이 어려움에 빠질 수 있었다. 돈을 받은 게 사실이라도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고 당사자가 묵비권을 행사하면 재판에서 검찰이 불리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정치자금법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공무원이라면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할 수도 있겠지만 김씨가 공무원이 아니니 ‘그림의 떡’이었다. 변호사법위반죄도 적절치 않았다. 다행히 검찰에 나온 김씨는 묵비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김현철씨가 검찰에 소환된 것은 5월15일. 이날 오후 8시 김씨는 대검 11층 특별조사실에서 이훈규 검사와 철제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그물은 쳐놓았지만, 김씨 진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 강한 성격이었다. 인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이 검사는 조사실의 불을 끄고 미리 준비해둔 촛불 2개를 켰다. 이어 김씨의 마음을 흔드는 얘기를 꺼냈다. “당신이나 나나 기독교 신자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기독교 신자로서 서로 솔직하게 얘기하자.” 이 검사는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었다. 김씨가 평소 즐겨 읽는다는 구약 욥기의 몇 구절이었다. 돈을 건넨 기업인들의 진술 때문인지 김씨는 돈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다만 66원 중 55억원만 인정하고 10억원에 대해서는 한사코 부인했다. 이 돈은 그가 자신의 고교 선배인 D기업 사장한테 청와대 경내에서 받은 것이었다. 김씨의 승용차에 돈 가방을 싣는 방식이었다. “청와대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김씨에게 아주 뼈아픈 것이었다. 자꾸 부인하기에 ‘받은 장소를 바꿔줄 테니 시인하라’고 설득했다. 그랬더니 인정했다.” 대가성 있는 돈은 알선수재죄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대가성 없는 돈이었다. 이 검사는 조세포탈죄를 적용하기로 했다. 금융실명제 하에서 기업인들에게 받은 돈을 20여 개의 차명계좌로 돌린 데는 증여세를 회피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지휘부에 조세포탈죄를 적용하겠다고 보고하자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까지 이와 유사한 사건에서 한 번도 적용해보지 않은 죄목이었기 때문이다. 이 검사는 ‘이번 기회에 판례를 받아보자’고 지휘부를 설득했다. “사실 수사팀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3대 2였다. 5명의 검사 중 3명이 찬성했다. ‘그럼 우리 한 번 해보자’고 밀어붙였다.”
매년 ‘김현철 구속일’에 모임 가져 대선잔금인 120억원에 대해서도 조세포탈죄를 적용했다. 김현철씨는 그 돈을 50억원과 70억원으로 나눠 기업인들에게 맡겨놓고 이자 수입을 챙겼다. 그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았으니 소득세 포탈에 해당된다는 게 검찰 논리였다. 김씨가 구속된 것은 검찰에 출두한 지 이틀 만인 5월17일. 구속영장이 집행되기 전 이 검사는 그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초밥을 사주고는 구속사실을 통보했다. 충격을 받은 듯 김씨가 부르짖었다. “아버지냐, 총장이냐.” 이 검사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김씨를 나무랐다. “대한민국 검사를 뭘로 아나. 당신 구속은 주임검사인 내가 하는 거지, 총장이나 대통령이 하는 게 아니다.” 이어 안기부 기조실장인 김기섭씨까지 구속했다. 그에게 1억5000만원을 줬다는 이성호씨의 진술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수사과정에서 안기부가 조직적으로 검찰수사에 저항한다는 징후가 포착됐다. 대표적인 게 도청 의혹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심재륜 부장과 이훈규 검사의 집 전화에 대해 도청을 시도한 흔적이 발견된 것. 수사팀 검사들의 사생활을 뒷조사하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수사책임자인 심재륜 중수부장이 집중적으로 견제를 당했다. 심 부장은 수사팀의 훌륭한 방패막이가 돼 줬다. 당시 나는 수사과정에서 별건의 안기부 비리를 포착했다. 그걸 무기로 삼았다. 안기부 관계자에게 ‘심재륜 부장을 위해(危害)하면 수사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얘기를 흘려 안기부장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 후 안기부의 저항이 잠잠해졌다.” 이 전 검사장은 당시 포착했다는 ‘안기부 비리’에 대해 “불법자금 조성과 관련된 비리”라며 자세한 설명을 피했다. “개인 비리가 아니라 기관 비리였다. 수사의 본류가 아니어서 덮어뒀다.” 법원은 김현철씨의 조세포탈죄를 인정했다. 이후 조세포탈죄는 정치인의 ‘떡값’을 처벌하는 유력한 잣대로 자리 잡았다. 당시 드림팀 검사들 중 반은 검찰을 떠났다. 이들은 매년 5월17일이면 김현철씨 구속을 기념해 심재륜 전 중수부장을 모시고 식사를 함께한다.
“‘소검’이 ‘대검’을 쳤다” 1999년 6월 이훈규 검사는 서울지검 특수1부장에 보임됐다. 특수통 계보에 들려면 반듯이 거쳐야 하는 자리였다. 취임하자마자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진형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의 취중 발언이 발단이었다. 문제의 발언은 대전고검장으로 발령 난 진형구씨가 집무실에 찾아온 세 기자와 대화하던 중에 터져 나왔다. 기자들이 “대전에 연고가 있느냐”고 묻자 진씨는 “1998년에 있었던 조폐공사(대전 소재) 파업은 공기업 구조조정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검찰이 유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폐공사 파업은 공사측이 조폐창의 통폐합을 강행하는 바람에 발생했는데, 검찰의 강력한 대처로 조기에 무력화됐다. 강희복 조폐공사 사장은 진씨의 고교 후배였다. 진씨는 기자들에게 “강 사장에게 ‘파업이 발생하면 검찰이 강력하게 대처할 테니 조폐창 통폐합을 밀어붙여라’고 권유했다”고 무용담처럼 말했다. 발언 당시 진씨는 점심 때 간부들과 송별회식을 하면서 폭탄주를 마셔 다소 취한 상태였다. 다음날 그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여론에 밀린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차렸다. 본부장에는 이훈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앉혔다. “사실 누구도 맡지 않으려던 사건이라 본부장에 임명되자 곤혹스러웠다. 결과야 어쨌든 과정과 절차는 엄격하고 투명해야 된다는 생각에 임명 직후 박순용 총장에게 ‘독립된 수사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사내용에 대해 총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지시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총장이 받아들였다.” 수사팀에 소속된 검사는 이훈규 본부장을 포함해 12명. 수사팀은 대검 공안부와 진씨의 집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서울지검이 대검을 압수수색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검찰 안팎에서는 ‘하극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언론도 “소검이 대검을 쳤다” “특수부가 공안부를 쳤다”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진씨의 후임인 김각영 대검 공안부장은 집무실에 앉아 있다가 수사관들과 맞닥뜨려졌다. “김각영 부장한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모른다.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고. 난처했다. 하지만 미리 알려주고 들어가면 압수수색 효과가 없지 않은가. 총장한테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 일로 나중에 많이 시달렸다. 내가 검찰 내부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은 김현철 수사의 교훈 때문이었다. 당시 김씨 집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려 했는데 지휘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대통령 관련 서류가 나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당시 김씨 집을 압수수색했다면 수사가 더욱 활기를 띠었을 것이다.”
새벽 6시에 받아낸 진술 번복 그런데 이 본부장은 강도 높은 수사를 하면서도 ‘실체가 없는 사건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진형구씨는 “취중 실언”이라며 자신의 발언을 부인했다. 열쇠는 강희복 조폐공사 사장이 쥐고 있었다. 그런데 검찰에 출석한 강씨는 “(조폐창 통폐합은) 내가 스스로 판단한 결정으로 진 부장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본부장은 강씨 조사에 검사 2명을 투입했다. 김필규(현 변호사), 조은석(현 대검 범죄정보1담당관) 검사였다. 하룻밤 조사 후 선임자인 김필규 검사가 받아온 진술서를 보니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이 본부장은 이번엔 조은석 검사 단독으로 조사하게 했다. 이튿날 새벽 6시, 조 검사가 진술서를 들고 왔는데 진술이 180도 달라져 있었다. “진형구 부장이 시켜서 했다”는 자백이었다. 강씨는 화를 내는 김필규 검사에게 사과했다. “진형구와 강희복 두 사람을 대질신문하니 서로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강 사장의 말에 진실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신문이 막 끝났을 때였다. 조서에 무인을 찍은 강씨가 손가락을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진씨에게 ‘선배님,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수사팀은 강희복씨의 자백을 근거로 진씨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진씨는 직권남용, 업무방해,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새로 수사를 맡은 특별검사팀은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았다. 검찰이 무혐의 처분한 강씨를 구속함으로써 진 전 부장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법원은 검찰 손을 들어줬다. 강씨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진씨의 경우 대법원 상고심까지 진행됐다. 2005년 대법원은 진씨의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익치의 반성문 50장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수사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난 1999년 8월 이훈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 수사를 맡았다. 이 사건은 현대증권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의 자금 2134억원을 동원해 시세 조종으로 현대전자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가장 큰 화제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구속 여부였다. 재계는 물론 청와대에서도 공공연하게 이 회장의 선처를 바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익치 회장은 현대그룹에서 ‘넘버 쓰리’였다. 워낙 거물이라 정공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측근으로 주가조작의 실무를 맡았던 박모 상무를 먼저 구속한 다음 포위망을 좁혀갔다.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던 이 회장은 한때 잠적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해왔다.” 구명로비로 맞서던 이 회장은 검찰의 압박에 잠적한 지 일주일 만에 출두했다. 이 부장은 그에게 친필로 반성문 50장을 쓰게 했다. 그는 반성문에서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 부장은 구속영장을 준비했다. 구속 의견을 올리자 대검에서 대면보고를 요구했다. 임휘윤 서울지검장과 함께 가보니 박순용 검찰총장을 비롯해 대검의 모든 부장이 참석한 자리였다. “나는 이씨의 혐의를 설명하고는 ‘종범인 박모 상무를 구속한 마당에 주범인 이 회장을 구속하지 않으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특별한 얘기가 없기에 당연히 구속영장이 청구될 줄 알았다. 그때가 오후 3시쯤이었다. 오후 6시, 임휘윤 검사장이 찾았다. 대검에 다시 불려갔다 왔다면서 ‘대검보다 더 높은 곳의 지시니 이익치 회장에 대해 불구속을 검토하라’고 했다.”
“이익치가 구속되면 남북평화 깨진다” 그러잖아도 이 부장은 현대측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불길한 예감에 젖어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 부장이 평소 알고 지내던 현대 간부였다. “대뜸 물어보는 말이 ‘이익치 회장이 나온다면서요?’였다. 어떻게 아냐고 묻자 ‘이 회장의 여비서가 회장이 나올 것에 대비해 집무실을 청소하고 있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은 것 같다’면서. 전화를 끊은 후 검사장실로 연락하니 비서가 ‘대검에 올라갔다’고 했다. 왠지 불길했다.” 이 부장은 검사장의 지시에 반발했다. “무슨 검토를 하냐고 항의했다. 종범을 구속했는데 어떻게 주범을 구속하지 않냐고. 이 회장을 불구속하면 검찰이 재벌한테 졌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겠냐. 총장한테 직접 설명하겠다고 하자 검사장이 말렸다. 내일 아침까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날 밤 영장을 작성했다.” 다음날 이 부장은 임 검사장을 찾아가 “묘수가 있다”고 말했다. “한견표(현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주임검사와 나만 영장에 사인을 할 테니 검사장은 내부결재란에 사인하지 말라고 했다. 검사장 모르게 주임검사와 부장이 알아서 한 걸로. 그러자 임 검사장이 ‘그게 무슨 방법이냐.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하면서 다시 대검으로 올라갔다. 검사장은 총장에게 수사팀의 강력한 의지를 전했다. 총장은 이를 청와대에 알렸다.” 결국 수사팀이 이겼다. 이날 오전 11시 반, 검찰은 이익치 회장 구속사실을 발표했다. 이 회장 구속에 대한 청와대의 공식적인 반대논리는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몇몇 청와대 수석이 이런 논리를 폈다. 이 부장은 이 회장 구속 이후 상부에 수사보고를 하면서 일부러 주가동향을 첨부했다. 주가에 별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청와대에도 전달됐다. 일주일간 계속 그런 식으로 보고하자 상부에서 “더 이상 보고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뒷날 대북송금 특검 수사로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청와대가 이익치 회장을 그토록 보호하려 한 것은 단순히 경제논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회장은 이미 그때 현대의 대북경협과 정상회담 추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가조작 사건 수사 때 참고인으로 불려온 김윤규씨가 내게 한 얘기가 있다. ‘이익치가 구속되면 남북평화가 깨진다’고.” 이훈규 부장은 이듬해 2월 청주지검 차장검사로 발령 났다.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맡은 지 8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항명’에 따른 좌천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그는 지방으로만 돌았다. 청주지검에 이어 대전지검, 수원지검 차장검사를 지냈다. 한직으로 분류되는 지방검찰청의 차장검사를 거푸 세 번 맡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다. 그 시절 업자한테 고가의 카페트를 싸게 구입한 게 문제돼 감찰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노무현·강금실, 초기부터 삐걱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때도 이훈규 검사는 한직인 서울고검에 머물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 검찰 개혁을 이끌 검사를 찾던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검찰 안팎의 추천을 받아 그를 법무부로 불러들였다. 그해 5월 그는 법무·검찰 개혁의 사령탑인 정책기획단장을 맡았다. 그가 법무부를 떠난 것은 2004년 2월. 서울남부지검장을 지내다 3개월 만에 대검 형사부장으로 발령 났다. 그리고 두 달 뒤인 그해 7월말 강금실 장관이 전격 경질됐다.이후 그는 2005년 4월부터 2008년 1월 사직하기 전까지 창원지검, 대전지검, 인천지검 검사장을 차례로 지냈다. ‘강금실의 최측근’으로 불리던 이 전 검사장은 검찰 개혁을 둘러싼 법무부와 대검의 충돌현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강 장관 재임 시절 청와대, 법무부, 검찰은 3각 갈등을 겪었다. 이 전 검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과 강금실 장관은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강 장관 재임시 청와대와 법무부, 검찰의 관계가 미묘했다. 강 장관과 노 대통령의 관계는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그 시발점이 ‘검사와의 대화’였다. 장관을 임명했으면 장관에게 검찰 관리를 맡겨야 하는데 대통령이 나선 게 문제였다. 검찰 인사파동을 수습하려 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검사와의 대화’의 승자는 없다. 대통령과 검찰, 양쪽 다 패했다. 그 중간에 있던 강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강 장관은 내심 불쾌했다. 장관 체통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 장관은 이 일로 노 대통령에게 실망했다.” 이른바 코드도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나를 비롯한 검사들은 처음에 강 장관이 엄청난 실세인 줄 알았다. 노 대통령과의 친분도 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참여정부에서 만나기 전에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문재인 수석이 강 장관을 노 대통령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들도 일부 젊은 수석을 빼고는 강 장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부터 그랬다. 진보적 성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강 장관은 리버럴하고 소신이 뚜렷해 그들과 구분됐다. 청와대 참모들은 ‘강금실은 노무현파가 아니다’라고 낙인찍었다.” 법무부와 대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강금실 장관과 송광수 총장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송 총장이 이끄는 대검은 강 장관을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나서니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이념의 차이도 양측 갈등의 골을 깊게 했다. 한총련 수배, 국가보안법 폐지, 감찰권의 법무부 이양 등 주요 현안을 둘러싸고 강 장관과 송 총장은 엇박자 행진을 계속했다. 2003년 8월 이훈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이 징계 파동에 휩싸인 것도 양측 갈등의 산물이었다. 대검은 이 단장이 법조브로커에게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감찰 결과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법무부에 징계를 요청했다. 이에 강 장관은 통상 차관이 주재하는 징계위원회를 직접 주관해 이 단장에 대한 대검의 공격을 차단했다. 이 단장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저녁 잘 얻어먹고 갑니다”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8월 인사를 둘러싼 법무부와 대검의 힘겨루기가 이 사건의 배경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8월 하순 강 장관이 단행한 인사에 불만을 품은 대검 측이 반격 차원에서 강 장관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 단장을 의도적으로 흠집 냈다는 의혹이었다. 물론 대검 측은 이를 일축했다. 이에 대해 이 전 검사장은 “강금실-송광수 싸움에 내가 휘말린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대검 측에서는 강 장관이 의외로 검찰에 대해 잘 알자 나를 강 장관의 1급 참모로 지목했다. 정책기획단이 강 장관의 ‘싱크 탱크’이긴 했다. 그 수장인 내가 친정인 검찰 편을 안 들고 강 장관 편을 든다고 오해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운 털이 박힌 것이다. 내가 강 장관을 지지한 것은 그의 개혁방향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 장관은 검찰의 준사법기관 기능을 강조했다. 이는 수사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검찰의 전통적인 시각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법무부와 대검의 갈등은 인사권을 둘러싸고 더욱 깊어졌다. 2003년 8월 인사 직후 법무부 검찰국이 대검 측의 질책을 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6개월 후인 2004년 2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발생한 대충돌의 전주곡이었다. “대검 쪽에서 ‘장관이 인사를 하면서 총장과 협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에 검찰국에 알아보니 얘기가 달랐다. 분명히 협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협의했다고 그쪽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 와중에도 강 장관의 개혁 작업은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검찰 개혁과 관련해서는 강 장관을 지원하고 대검을 못마땅히 여기던 청와대는 대선자금수사를 계기로 강 장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검찰이 대통령 측근들을 마구 조사하자 청와대는 강 장관이 적정선에서 통제해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강 장관은 그 기대를 보란 듯이 무너뜨렸다. “대선자금 수사 때 청와대는 강 장관을 원망했다. 대통령 측근들이 다 잡혀 들어가는데 강 장관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 장관은 오히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을 비롯한 수사팀과 밥을 함께 먹으며 격려했다. 수사내용을 청와대에 제대로 보고하지도 않았고 조정도 안 했다. 당시 대검이 장관을 제치고 청와대와 직거래를 했다는 징후도 있었다. 나중에 이를 알고 강 장관이 몹시 기분 나빠했다. 그런데 실은 강 장관도 수사내용을 정확히 몰랐다. 대검 측에서 형식적이고 영양가 없는 내용만 보고한 탓이다. 법무부 검찰국에서 ‘대검이 장관 대우를 너무 안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후 노 대통령은 기회가 닿는 대로 강 장관을 자르려 했다. 그런데 강 장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 맘대로 자르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이 전 검사장은 매우 흥미로운 비화를 공개했다. 대선자금수사 도중 청와대가 강 장관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강골 검사’의 상징인 심재륜 변호사를 앉히려 했다는 사실이다. “2003년 말 아니면 2004년 초로 기억된다. 청와대에서 심재륜 변호사에게 여러 차례 만남을 제안했다. 고사하던 심 변호사는 거듭된 요청에 청와대에 비밀리에 들어가 노무현 대통령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노 대통령의 장관 제의에 심 변호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강 장관이 잘하고 있다. 내가 그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다’면서. 그는 ‘저녁 잘 얻어먹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 청와대에서 나왔다.”
“이 정부에 검찰개혁 의지 있나” 노무현 정부와 어울리지 않는 심재륜 변호사의 보수적 성향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얘기다. 하지만 기자도 오래 전에 모 검찰 간부로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심 변호사에게 확인을 요청하자 그는 “그 일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겠다”며 입을 다물었다. 2004년 2월 법무부와 대검, 청와대의 3각 갈등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의 인사권에 도전하는 듯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대검은 총선에 대한 총력대응과 대선자금수사의 연속성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정기인사 연기를 주장했다. 자신의 개혁구상을 뒷받침할 혁신적인 인사안을 준비했던 강 장관은 분노했다. 하지만 결국 인사는 연기됐다. 청와대가 대검 편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총선 때문에 인사를 연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강 장관이 곧 경질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송 총장이 그걸 의식해 인사 지연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청와대가 송 총장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가 대선자금수사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청와대의 태도에 실망해왔던 강 장관은 이 사건 후 청와대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인사제청권자인 장관의 얘기를 듣지 않고 검찰총장 말을 들어주니 의욕을 잃은 것이다. 청와대가 장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사표 낼 생각까지 했다. 당시 강 장관은 주변사람들에게 ‘도대체 이 정부에 검찰개혁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한계를 느낀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이 전 검사장에 따르면 2004년 7월 강 장관이 전격 경질된 것은 청와대와의 갈등이 빚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경질은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청와대의 몇몇 젊은 비서관은 경질에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결심이 워낙 확고했다는 것이다. 바꿀 기회를 엿보다 윤광웅씨를 국방부 장관에 앉히면서 묻어가기 식으로 전격 경질한 것이다.” |
첫댓글 참여정부 초대내각은 고건 총리와 김두관 행자부장관 그리고 강금실 법무장관이 특징을 대변했다고 기억됩니다. 고건 총리는 튀는 대통령의 중심을 잡아줄 것이란 뜻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고, 김두관 장관은 파격이란 의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상징했다고 보여집니다. 강금실 법무장관은 참여정부 개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분이 경질되면서 참여정부의 개혁의지도 후퇴했다는 보는 평가가 옳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