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라는 것이었으며, 십일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인데 그 표현은 레위인과 객들과 과부와 고아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했습니다.
즉 돈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가히 모든 종교의 페러다임을 깨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싶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네 이웃에게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으며 물론 동일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며,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막 10: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 받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사실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하냐면 눅 6:38 그 말씀의 전문맥을 보면 '원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달라며 교회에 바친다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주는 것이 오히려 복의 조건인데, 그토록 복을 좋아하고 갈구하면서 왜 이 말씀은 큰 소리로 가르치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은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핍절한 자가 없지(행 2:44-45, 4:32-35) 않았습니까?
심지어 고넬료는 이방인었고 로마의 군대장관이었으며 아직 성령을 알기 전이었지만 그의 '구제와 기도(행 10:31)'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구제단체가 아니고 자선기관이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는,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율법으로는 되지 못하였고 결국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며, 초대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침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니 하나님이 원하셨던 대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돈을 나누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에겐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된 것이며, 이것이 진정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이 일을 행하는 도구가 바로 연보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하여 이웃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5)"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우선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연보(捐補)'의 연(捐)은 원래 '버린다'의 뜻으로 사용된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 타인에게 내 놓거나 바치거나 기부한다는 뜻인 셈입니다.
그리고 연보의 '보(補)'는 원래 '깁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한자로 된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헤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됩니다.
참 좋은 뜻의 단어이며 원어의 의미도 잘 살린 아주 좋은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글번역은 일관되게 '연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과거에는 연보를 드린다고 했지 헌금을 드린다고 한 것은
사실 최근의 일입니다.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고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었을 때 우리는 의례히 '연보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모두들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특히 좀 산다는 사람들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연보는 사라지고 어느 듯 헌금으로 대체된 것이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헌금제도의 변천사입니다.
결국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서기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연보는 우선 고전 16:1,2에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먼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두 번 사용되어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기아'인데 영어로는 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연보는 당시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했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살펴 볼 단어는 헬라어 '하프로테토스(고후 8:2, 9:11, 9:13)' , '하드로테스(고후 8:20)' , '유로기아(고후 9:5)'로 단어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영어로는 generosity, generous gift, liberality gift로 번역되고 있는, 모두가 구제를 염두에 둔 관대한 나눔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연보'의 의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에 의하여 주로 언급된 연보들을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뚜렷해지는 연보의 원리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원리들을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꼭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① 연보는 있는 대로 형편대로 하면 됩니다. (고후 8:11-12)
② 연보는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고후 9:5)
③ 연보는 마음에 정한대로(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고후 9:7)
④ 연보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고후 9:7)
⑤ 연보를 통하여 평균케 되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고후 8:14-15)
연보가 십일조를 대체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와같은 연보의 원리가 십일조의 원리인 '의와 인과 신'의 원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일조를 통하여 나눔의 삶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함께 평균케되길 하나님은 원하셨기에 연보는 십일조의 가장 기본적인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공유함으로 평균케 되는 것은 구속의 역사에서 항상 따라오는 첫 원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즉 구속함 받아 광야에서 배웠던 첫 원리가 만나를 통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고후 8:15)" 평균케 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광야에서 누렸던 그 평균케 된 공유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안식년과 십일조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으로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던 구속받은 그 성도들의 삶은 또한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있는(행 2:45, 4:32 역시 공유의 삶이며 평균케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구속의 진리를 가르쳤던 바울 사도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지적하며 연보를 권고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으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바쳐야만 되는 분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인간에게는 집이 필요하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왕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뭇 백성이 우러러 볼 만큼 거대한 왕궁과 식탁을 가득 채운 산해진미가 필요하지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커다란 성전을 지어 바치고 자신이 소유한 값비싼 재물과 돈(헌금)을 드리며 만족스러워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합니다. 그러한 와중에 사람들은 누가 얼마나 더 열심히 바쳤느냐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존재(有)라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하나님도 존재하기 위해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가 좋은 집이 있으면 좋아하고 값비싼 것을 보면 흐뭇해하듯이, 하나님도 뭔가 화려하고 귀중한 것을 드리면 좋아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드리는 것이 정말 필요할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습니다.
그냥 (만유의 주인이시기에)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드리는 우리의 정성 때문에 좋아하실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립니다.
드리는 우리의 정성. 그 정성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내게 주어질 재물과 건강과 출세와 안전...... 뭐 이런 복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과 정성은 항상 우리의 삶속에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굳이 재물을 바침으로써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은 아시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재물(헌금)을 드렸느냐 안 드렸느냐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게 중요해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 심중을 아시므로 재물을 드리고 안 드리고의 행위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말씀)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공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네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소자 하나를 대접한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자꾸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라고 외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 중에서 일부를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물과 능력과 시간 중에 최소한 십분의 일은 가난하고 힘이 없고 약한 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라는 것이 십일조의 본래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그 분은 받아야 할 것이 없는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얼마나 바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단지 교회에 바쳤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사이비 이단이라 불리는 종파에 속한 사람들도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헌금을 하나님이 아닌 교주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하나님께 드린다는 정성을 가지고 헌금을 합니다.
정통 교회에 속한 우리가 갖고 있는 정성과 똑같은 정성입니다. 우리나 그들이나 하나님께 드린다는 정성으로 자기가 속한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쳐진 헌금들이 과연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려진 것일까요.
다시 한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단지 자신이 속한 교회(공동체)에 내놓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경우는 목사(혹은 종교 지도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일정한 재물(헌금)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할 바를 다 한 것이라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회피이며 기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책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헌금하는 것만으로는 사실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교회라는 공동체에(어떤 경우는 담임목사에게)바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공동체에 내놓은 헌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세심히 살핌으로써, 그 헌금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도록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일 교회(또는 종교 지도자)가 헌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게 됩니다.
말라기서에 나오는 유명한 십일조와 연관된 심판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선포된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교회에 바칠 것이 아니라, 나 개인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직접 집행하는 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에 바쳐진 헌금이 담임 목사(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의 축재와 호사를 위해 남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마치 목사를 위해 교회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 말입니다.
교회는 담임 목사의 밥줄이 아닙니다. 담임 목사를 극진 정성으로 대접하는 게 하나님의 사업도 아닙니다. 물론 목사가 가난한 자의 부류에 속하는 상황에서야 당연히 대접하는 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기에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를 위해 목사가 있는 것이지 목사를 대접하기(혹은 목사의 넉넉한 생활을)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의 교만이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뿐, 그 분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것을 그 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주신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헌금을 바치는 행위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진짜로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얼마나 잘 바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내가(혹은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잘 쓰느냐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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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할수없는 것을 말할수 있는 목회자
내가 존경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남들이 할수없는 말을 용기있게 할줄 아는 사람일것이다
그가 말주변이 어눌하여 설교를 좀 못해도 좋으며 입담이 안좋아 성도들에게 인기가 없어도 상관없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강단에서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편에 서서 옳은 말만을 전하는 목회자이며
무엇보다 돈에 관하여 성도들에게 진실을 말할수있는 용기가 있는 목회자를 나는 원한다
천사의 말을 전한다해도 사랑없으면......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이제 목회자들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정직이 없다면 그 공허함 또한 이와같을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돈을 드린다하는 가르침 이 얼마나 헛된 말인지요
드릴때는 하나님에게 드린다해놓고 예배가 끝난후에는 사람의 것이 되어진다면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마음대로 쓰는것이 헌금이라면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드린것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목사들중에서 빈손으로 나오지말라 즐겨 내는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늘에 복을 쌓아라...등 이러한 성경구절만 눈에 번쩍 띄며
이 말씀들만 골라서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여기는 자들이라면
문제가 많은 위험한 자들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절을 볼때 이 말씀을 인용하여 헌금을 강조하는데 악용하겠노라 순간적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자들이라면
삯꾼 목사의 기질이 다분하니 차라리 자신을 위해서나 성도들을 위해서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목사직을 떠나는것이 백번 옳을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자들은 성경을 보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몰아갑니다
빈손으로 나아오지말라 했을때 하나님이 그 당시에 어떠한 심정으로 그 말씀을 주셨는지 모르는 영적인 통찰력이 부족한 눈뜬 장님이요
간음을 한 자에게 당시에 돌로 쳐 죽일것을 명하신때의 그 당시에 왜그런말씀을 하셨을까? 헤아리지도 못하는 자요
그러면 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하며 말씀이 바뀌어졌을까 도무지 분별할줄 모르는
영적으로 무지한 소경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는 예물을 싫어하고 제사도 싫어한다고 단호히 말씀하셨을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옛적 말씀하신것중에 돈이 될만한 것들만 성경 구절들만
고르고 골라서 하나님이 돈을 좋아하시는것처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뻔히 자신은 알면서도 교회의 재정이 어려울까봐 부득이하게 진실을 말하지못한다면 이또한 하나님앞에 죄악을 행하는것입니다
이것은 내일일을 염려하지말라! 하나님이 모두 책임져주실것이라며 믿음이 부족한자여! 하면서 성도들에게 가르쳐놓고
정작 목사인 자신은 돈이라는 우상에게 무릎을 꿇은 격이 되어있는것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기보다는 눈에보이는 돈을 더 의지하는 모습을 스스로 보이는것임을 알아야할것입니다
어찌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하나님을 속이려하며 사람을 속이려하는것입니까?
연보를 통하여 서로 사랑하고 구제하고 나누는 삶을 살라 하는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인데
어찌 하나님께 드린다하고 거짓된 말로 하나님을 욕보이는것인지 이제라도 양심을 지키기를 요구합니다
교회의 개혁 문제들중에서도 이것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고 하는것이 거짓된 가르침이라는것을 성도 모두에게 인식되도록 하는것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
이 돈문제(헌금관)의 올바른 정립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교회를 바르게 세울수있는 토대가 될것입니다
헌금(연보)에 관한 성도들의 의식이 깨어날때 부패한 교회를 정화시킬수있는 자정능력이 생겨날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주의 종들이라면 반드시 그 열매가 보내신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께만 영광을 돌리며 이 땅에서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고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주의 날에 영광 얻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온 자라면 반드시 사람에게서 영광을 지금 구하기를 힘쓰고 자기의 이름을 많은 사람가운데 드러내려 할 것이며(요5:38-47)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과 무리만(~교회 종교로 이름하여)을 일방적으로 따르게 하고 성경을 소홀히 여기도록 가르쳐서 미혹할 것입니다.
오직 말씀과 말하게 하시는 성령으로 증거 하되 오직 그리스도예수 한 분만이 구원자인 그리스도라고 능히 증거하고 원수들의 입을 막는 것입니다.
언제나 스스로 나타난 사단의 사자들은 성경을 왜곡시키고 은근히 자기가르침과 은근히 들여온 지어낸 말들을 통하여 자신을 높여서 사람들을 끌어 탈취하고 어리석어 일방적으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은밀한 중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말씀을 오용하여 진리를 밟아 버립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종들은 언제나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인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영혼들이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길 가신 증거를 따라 우리도 살도록 가르치고 중매하는 일을 하되 자신들도 그 길을 좇으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들의 육체에 예수를 죽인 것, 그리스도 예수 죽게 된 죄책 곧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 것은 육신의 염려보다 영의 소망인 생명의 염려로 육신은 고난 가운데서 예수의 생명이 더욱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유익함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거짓 선지자들이 가난과 고난을 살며 말씀을 섬기는 것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칭 주의 종이라고 자부하는 종교단체등록교회지도자들은 좋은 집과 좋은 차와 좋은 생활여건들을 대접받고 살면서 월세(月貰)방에 전전하며 식생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어떻게 떳떳한 얼굴로 마주 대하며
도리어 지어낸 말들인 긍정적 적극적 사고의 믿음이 없어 가난한 것들로 말하여 움츠리게 가르치고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를 하는지 그의 양심과 마음 상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칭 그리스도 곧 스스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자라 말하며 가르치는 주의 종이라 불리우며 자신들의 배만 염려하는 거짓목자
목사들에게 한마디 말하고 싶은 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보내신 이만을 증거하고 드러나게 하였을 것이니 당연히 보내신 이의 영광만을 구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며 그분께로만 향하게 할 것이나
스스로 온 자들 곧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고 자기가 성직자로 자처하여 온갖 이 땅 영광을 받을 것이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유명을 나타내어 자기와 자기무리에게로 향하기를 힘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체인 성도로 하여금 연보하게 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8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1) 착한 일을 위해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8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이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연보할 수 있는 은혜를 넘치게 주신 이유는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해 주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보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도록 명하라고 분부한 일이 있다.
따라서 연보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이웃과 함꼐 나누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의 연보를 통해 영육간에 가난한 지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며 구제하게 하시는 착한 일을 넘치도록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바로 연보의 목적 중에 하나이다.
2), 감사케 하려고 한다
바울은 연보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케 하려 한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9장 11절에서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 했다.
성도의 연보를 통해 풍요롭게 된 자가 풍요로움에 대한 은혜의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게 하려고 연보를 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뜻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것이 하나님께 직접 드린다고하는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연보로 도움을 받은 지체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것을 말하는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많은 연보를 한 자에게 그 공로를 돌리고 뿐만 아니라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로비까지 세워서 연보에 대한 감사를 인간에게 돌리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참 연보는 부요하게 된 자로 하여금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도록 해야 한다.
참 연보답지 못한 연보는 감사가 인간에게 돌려지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연보하고 감사를 자기가 받는 어리석은 연보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성도가 자기것을 가지고 연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것으로 연보한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알고 한다면 마땅히 감사가 하나님께 돌려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연보의 중요한 목적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3),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한다
성도가 연보하는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13절에서 성도 섬기는 직무와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성도의 모든 행위와 만물의 존재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연보 자체가 인간의 소유를 가지고 인간이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행위인고로 연보를 통한 모든 영광이 마땅이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러의 경우는 연보를 통한 인간의 영광이 인간에게 돌려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결국, 연보의 목적은 착한 일이 넉넉히 성사되게 하기 위함이며,부요케 된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함이며 이로 인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는데 있다.
연보란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을 나누어 드리는 성도의 생활이다.
이것은 성도의 영육간의 생활 전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자신을 위한 삶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지체를 위한 자기 희생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곧 참된 연보이며 연보의 삶인 것이다.
미리 말씀 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은 십일조가 옳으냐 연보가 옳으냐라는 측면이 아니라 십일조와 연보라는 것이 동일연결선상에 놓인 헌금종류냐 즉 구약에서 제사가 신약의 예배로 바뀜(변혁, 개혁)과 같이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의 연보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연보라는 것이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십일조와는 전혀 별개의 다른 헌금 종류인지 먼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시라는 것입니다.
저도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한국 기독교에서는 어떤 말씀은 선택적으로 구약시대때부터 있어 왔던것들을 (율법)진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강요하고 어떤 말씀들은 아예 숨기거나 언급조차 안하는 것을요....십일조와 헌금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히 생각하게 하는글 감사합니다...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 함을 표현하는가? 미가서6장1~5절의 말씀을 읽고 6장6절 이하의 말씀을 이해하라 말라기3장8절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똑똑히 성경을 읽거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지말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깨달으세요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연보)에 대해서 하여간 목사님들께서 너무 해석이 다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것을 명심을 하고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십일조를 가지고 남과 함깨 십일조를 가지고 남과 함께 나눈다면 그것을 자기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봉사 즉 남을 도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교회가 올바로 물질을 사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모든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넉넉함으로, 교회의 물질의 형편에 따라 도와야 해야 합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5:3-4) 교회에 물질을 내면서 이름,금액을 공개 하면서 그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자들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여 이웃을 섬기는 것이 무슨 자기영광 이라는 것인지요?
첫댓글 글 올리신 분께 연보라는 것이 언제 시작되었고 어떤 명목의 헌금이었는지 먼저 성경 전체를 살피셔서 파악해보심은 어떠실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십일조와 연보가 같은 연결선상에 있는 것인지 전혀 별개의 것인지 한번 성경의 경우를 가지고 파악해 보셨으면 합니다.
미리 말씀 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은 십일조가 옳으냐 연보가 옳으냐라는 측면이 아니라 십일조와 연보라는 것이 동일연결선상에 놓인 헌금종류냐 즉 구약에서 제사가 신약의 예배로 바뀜(변혁, 개혁)과 같이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의 연보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연보라는 것이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십일조와는 전혀 별개의 다른 헌금 종류인지 먼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시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차지않는 구석이 많으신 가 보죠? 위에 글이 자세히 적었으니 님께서 달리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직접적으로 밝히지죠~~저희들도 참작할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십일조나 연보,헌금 명칭이 중요하다 생각치 않습니다. 글쓴이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허락하신 물질을 하나님께 얼마나 바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과제 인거 같습니다.
저도 비단 구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하문요. 명칭은 이것을 바치는 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 되어지는 가가 더욱 중요 합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을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도록 인도합니다......... 거짓목사는 성도들의 돈을 십일조라는 명목으로..자기의 일부분만을 교회에 바치게 만듭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시험치 않게 하며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그분만을 신뢰하게 만듭니다.....먹사(별로 좋은 단어는 아니지만 오늘은 한번 쓰고 싶습니다)들은 십일조라는 말락기 성경의 한구절로 하나님을 시험게 만들며 십일조를 바치게 만듭니다!
저도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한국 기독교에서는 어떤 말씀은 선택적으로 구약시대때부터 있어 왔던것들을 (율법)진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강요하고 어떤 말씀들은 아예 숨기거나 언급조차 안하는 것을요....십일조와 헌금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히 생각하게 하는글 감사합니다...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
십일조는 아브라함때 시작했지만 그후 분깃이 없던 레위인들을 위하여 썻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제사장은 아닌듯 싶어요...
십일조, 연보, 헌금, 어떤 명목이든지 자발적 헌신, 진정한 헌신이 아닌 올무가 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예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작금의 교회는 이미 가난한자, 노약자, 작은자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한사람의 가치를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는 주님의 정신과는 많이 동떨어진, 세속에 물들어버린, 본질을 잃어버린, 그런 곳이 된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븍음 정신을 바탕으로 헌금이 드려지고 사용된다면 명목이 어떤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ㅎㅎ, 그런데 목사님들은 떫고 성도님들은 긍정적으로 받아드림니다..본글이 지적한 연보의 개념이 확립되면 기독교는 개혁됩니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분들은 역시나 먹사님들이죠~~~지금도 하나님에게 고한다고 하면서 아무개장로님 십일조 드림니다. ***권사님 생일감사헌금드립니다~~일일이 호명하고 심지어 액수까지 고합니다.그리고 축복기도합니다..무지한 성도들 하나님께 적게 드린것을 회개하고 다음에는 마니마니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이게 우리네 헌금시간 풍경 아닐까요?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 함을 표현하는가? 미가서6장1~5절의 말씀을 읽고 6장6절 이하의 말씀을 이해하라 말라기3장8절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똑똑히 성경을 읽거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지말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깨달으세요 감사합니다.
님이 사역자라면 심히 걱정 됩니다..ㅜㅜ
말라기 또 나왔네요. 그렇게 설명을 드렸건만... 말라기는 헌금갈취하는 목사들을 욕하는 내용임을 왜 모르시는것인지...
기독교가 기복적으로 변질되면서 헌금하면 복받는다라고 세뇌하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예전에 무당을 돈주고 불러 굿하면서 액운을 물리치던 습성과 뭐가 다릅니까? 기독교가 과연 그러한 종교입니까?
30배,60배,100배를 외치며 심은대로 거둔다며 헌금을 강조하는 행위는 주님주신 말씀(생명)을 육신의 썩어질것으로 왜곡하여 거짓 가르치는 다른 복음 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기독교가 기복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기독교가 아니며 이방종교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느낍니다.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연보)에 대해서 하여간 목사님들께서 너무 해석이 다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것을 명심을 하고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십일조를 가지고 남과 함깨 십일조를 가지고 남과 함께 나눈다면 그것을 자기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봉사 즉 남을 도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교회가 올바로 물질을 사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모든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넉넉함으로, 교회의 물질의 형편에 따라 도와야 해야 합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5:3-4) 교회에 물질을 내면서 이름,금액을 공개 하면서 그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자들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여 이웃을 섬기는 것이 무슨 자기영광 이라는 것인지요?
교회에는 기본적인 운영비만있으면 됩니다. 교회가 돈이많으면 타락합니다 사단이 침투했다는 징후입니다.중세교회보세요 면죄부발행하여, 성직자들 배불리고,교회당이나 휘황찬란하게 짓다가,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현재 한국교회와 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