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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 전에.
1차 자료의 가치는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근간 자료라는 것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과거와 관련된 공문서들이 계속 공개될 것인데, 부디 그런 작업이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소개되는 내용들은 일부, 여러분들의 믿음에 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최종 평가가 바뀔 정도는 전혀 아닙니다. 그 점 만큼은 기억하시고 읽기를 권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 역시, 사실과 믿음은 다릅니다. 하지만 역사책은 차분히 읽는 지식인들도,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는 차분함 보다는 자신의 믿음에 매여 미래를 전망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건 사실은 도도하게 흘러가고 언제나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럼 즐기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없어 사진을 마저 작업하지 못했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5·16 군사쿠데타
민주당은 4·19 덕분에 별다른 노력 없이 집권한 뒤로 윤보선 중심의 구파와 장면 중심의 신파로 나뉘어 파벌다툼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혼란스러워진 사회분위기가 쿠데타 음모에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민주당 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비롯한 자유당 정권의 실정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분야에서도 내세울 만한 업적을 세우지 못해 민심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민주당 정권의 무능력한 모습을 지켜본 국민은 쿠데타가 일어날 때 관망
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1961년 2월 22일 마침내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했다. 위원장에는 김도연 의원, 간사장에는 유진산 의원이 선출됐다.
장면 정권 때에는 신문사, 통신사 등 언론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1500개를 헤아릴 정도가 됐다. 이들은 대부분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언론기관으로서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간첩활
동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1960년 한 해에만 남한에서 100명 이상의 북한 간첩이 체포됐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경제도 침체했다. 1960년에 경제성장률이 1959년의 5.2%에 비해 크게 낮은 2.3%로 떨어졌고, 물가
는 38%나 올랐다. 1천만 명의 노동인구 가운데 완전실업자가 240만 명, 잠재실업자는 200만 명에 달했다. 즉 노동인구의 4
할 이상이 직업 없이 그날그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참담한 실정이었다. 전국실업자협회가 결성되어 활동할 정도로 실업
문제가 심각했다. 설상가상으로 1961년 봄에 농업위기로 식량난이 발생해 1961년 3월 현재 모두 2만 7456가구가 정부의 구
조가 없으면 당장 굶어죽게 될 형편이었다.
국민은 새로운 정부가 민생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주기를 고대했다. 장면 총리는 민주당 정권 출범과 더불어 경제제일주의
를 내걸었으나 마냥 더디게 진행되는 그의 경제발전 정책은 국민을 실망시켰다.
4·19 이후에 혁신세력이 대두하고 북한이 평화공세를 펼친 것이 장면 정권에 큰 부담을 주었다. 김일성은 1960년 8·15 경축
사에서 처음으로 ‘연방제 통일 방안’을 들고 나왔다. ‘선 건설 후 통일’의 입장을 내세운 장면 정권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장면 정부는 ‘데모 규제법’과 ‘반공 임시특별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혁신계 정당, 신민당의 일부, 신풍회 등 30여 개 단체들이 1961년 3월 18일부터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였다.
특히 1961년 3월 22일 혁신계가 벌인 횃불데모는 많은 국민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이날 시위대는 서울시청 앞에서 ‘2대
악법 성토대회’를 연 다음 ‘장면 정권 타도’를 외치며 명륜동에 있는 장면 총리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밤늦도록 ‘남북회
담 개최’, ‘미군 철수’ 등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윤보선 대통령은 한 대의 경호차도 없이 비서실장 전용 지프를타고 데모 현장에 가서 시위를 지켜보았다. 충격을 받은 윤보
선 대통령은 다음날인 23일 장면 총리, 현석호 국방부 장관, 곽상훈 민의원 의장, 백낙준 참의원 의장과 신민당의 김도연 대
표, 유진산(柳珍山) 간사장, 양일동(梁一東) 총무 등 정부 요인과 정당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것은
여야를 망라한 ‘국가 최고지도자 회의’라고 할 만한 회의였다. 여기서도 의견이 갈리자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에게 거
국일치 내각을 구성하고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단호하게 사태수습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것을 자신에게 퇴진을 요구한 것
으로 받아들인 장면은 반발하면서 윤보선 대통령과 다투었다. 이날 회의는 ‘현 시국은 위기’라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
나 대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이즈음 언론들은 ‘4월 위기설’이니 ‘5월 위기설’이니 하는 제목의
기사를 자주 실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로 대학가에서 급진적인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서울대의 민통련(민족통일연
맹)은 5월 3일 북한 학생들에게 판문점에서 만나 통일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5일에는 민통전학련(민족통일전국학생
연맹) 결성준비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 참석한 학생대표들이 남북 학생회담을 열자고 북한 쪽에 제의했다. 장면 정부가 불
허하는 태도를 취하자 범혁신계 조직인 자민통 주최로 13일
서울운동장에서 4만 명이 모여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열었다.
시국이 불안한 가운데 군부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됐다. 장면 총리는 1960년 12월 이후 네 차례나 군사쿠데타가 일
어날 조짐에 관한 정보를 보고받았고 그때마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문의했다. 장도영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은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도모해오면서 김포 해병여단 여단장 김윤근(金潤根) 준장, 제1공수특전
단 단장 박치옥 대령,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30사단 참모장, 90연대장, 33사단장 등을 포섭했다. 이들은 쿠데타를 실
행하기로 했다. 부대출동은 야간훈련을 명목으로 감행하기로 했다. 이들의 쿠데타 계획에 따른 각 부대의 임무와 출동시간
은 다음과 같았다.
─D데이 H아워는 5월 16일 새벽 3시.
─5월 15일 자정에 비상훈련을 가장한 혁명군 출동령을 예하부대에 하달.
─선두부대는 제1공수단 박치옥 대령의 지휘 하에 반도호텔의 총리실을 점령.
─제2대는 해병여단 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 하에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을 점령.
─제3대는 33사단으로 시청 앞의 덕수궁에 집결. 점령목표는 KBS 제1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 국제전신국, 중앙전화국.
─제4대는 30사단(수색 주둔)으로 점령목표는 중앙청, 청와대, 시경 탄약고, 서대문 및 마포 형무소, 연희 송신소. 이후 수색
과 연희동에 이르는 도로와 영천고개 일대를 방어.
─제5대는 6군단 포병단으로 16일 3시까지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에 도착해 예비대의 역할을 수행.
─제1지휘소는 6관구 사령부, 제2지휘소는 남산, 제3지휘소는 육군본부에 둠.
1961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 문재준 6군단 포병 사령관이 신윤창 중령, 김인화 중령, 정오경 중령, 구자춘 소령, 백태하 중
령 등을 불러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도량이 넓어 부하 지휘관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문재준 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쿠데타
계획을 알렸다. “여러분, 내일 5월 16일 서울에서 군사혁명이 예정돼 있소. 나는 혁명에 가담합니다. 당신들 중에서 가담할
사람은 나와 같이 나갑시다. 혁명에 가담할 의사가 없는 사람은 가담하지 않아도 무방하오. 그러나 내일 오전 3시까지는 이
런 사실을 비밀로 지켜주시오. 나는 당신들의 인격을 믿소.”
6군단 포병단의 지휘관 가운데 이미 거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는 문재준 대령, 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신윤창 중령 등 3
인이었다. 나머지 4명의 포병 대대장들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쿠데타에 참여하기로 했다. 당시 포병부대는
다른 병과의 부대와 달리 장교와 하사관의 대부분이 이북출신이어서 반공성향이 강했다.
6군단 포병단을 제외하고는 병력동원이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30사단은 병력이 1천 명도 안 되는 예비사단이지만 서
울 근교에 주둔하고 있기에 중요했다. 쿠데타에 가담하기로 했던 연대장 박상훈과 참모장 이갑영이 5월 15일 저녁 사단장
이상국(李相國) 준장에게 쿠데타 음모를 밀고했다. 이상국 준장은 즉각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 장도영은 밤 10시 30분경 부평에 있는 33사단장 안동순 준장에게 출동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박정희 소장은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늦은 16일 새벽 0시 15분경 6관구 사령부에 도착했다. 장도영 참모총장이 보낸 헌병들
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여기서 전화로 장도영에게서 쿠데타를 중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박
정희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병력출동을 독려하려고 지프를 타고 공수특전단으로 갔다. 박정희가 공수특전단 정문으로 들
어가려는 순간 공수특전단 병력이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박정희는 다시 해병대로 지프를 몰고 가다가 염창교에서 김윤근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여단을 만났다. 해병대 뒤에는 공수단 병력이 따라붙고 있었다.
새벽 2시경 총리경호실인 반도호텔(현재의 롯데호텔) 808호실에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전화가 걸려왔다(당시 총리공관은
반도호텔 안에 있었다). 경호대장 조인원(趙仁元) 경감이 총리의 숙소인 809호실로 가서 자고 있던 장면 총리를 깨우고 전
화를 바꾸어주었다. 장면 총리가 전화를 건네받으니 장도영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장면은 장도영에게
총리공관으로 오라고 했으나 장도영은 별것 아니라면서 자신에게 맡겨두라고 말했다.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육사 5기, 함경도 출신) 대령과 6군단 작전참모 홍종철(평안도 출신) 대령은 5개 포병대대보다 앞
서서 가장 먼저 서울에 들어왔으나 주요 목표물들을 점령하고 있어야 할 해병대도 공수단도 보이지 않자 크게 당황했다. 문
재준 대령은 박정희 소장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데타군의 지휘소로 결정된 남산 기슭의 KBS 방송국
에 가보았지만 거기에도 인적이 없었다. 다급해진 문재준과 홍종철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나눴다.
문재준 : 사람들이 없지 앙이요? 공수단도 해병도 안 왔습매.
홍종철 : 사령관님, 혁명 D데이가 5월 16일이 맞디요?
문재준 : 그러씀. 5월 16일이지비.
홍종철 : 사령관님, 오늘이 5월 16일입네까? 5월 15일 아닙네까?
문재준 : 그럼 우리가 하루 먼저 나왔습매. 어찌게이?
홍종철 : 사령관님, 우리 아무도 만난 사람 없디요? 난 딱 부대로 돌아가면 누구도 모릅네다. 우리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나오면 되지 않습네까?
문재준 : 그럼 우리 포병대대들은 어찌게이. 벌써 나왔지비?
홍종철 : 이거 야단났습네다, 사령관님.
《반역자의 고백》, 제일미디어, 1996, 179쪽
장교 68명, 사병 1283명으로 구성된 6군단 포병단의 전 병력은 차질 없이 의정부, 미아리를 거쳐 5월 16일 새벽 3시경 용산
의 육군본부 연병장에 진주했다. 야포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 문재준과 홍종철은 육군본부 연병장으로 돌아와 포병대대를
만났다.
해병대와 공수단은 새벽 3시 20분경 노량진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 있는 한강 인도교에서는 헌병들이 바리케이드와 트럭을
겹겹이 세워 다리를 막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병여단의 선두인 제2중대가 한강 인도교로 진입할 때 헌병들이 트럭 두 대를 여덟 팔 자로 배치해놓고 제지했다. 제2중대
중대장 이준섭(李俊燮) 대위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도 이번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헌병들이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온 줄 알고 반가워하며 김석률 헌병 중대장과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김석률은 “우리는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라 어떤 부대의 통과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김윤근 여단장에게 뛰어갔다. 참모총장도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던
오정근 중령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따지듯 물었다. 김윤근은 박정희 소장한테서 들은 대로 설명해준 뒤 “해병
대만 가지고 혁명을 강행하기로 했으니 헌병이 계속해서 막으면 밀어버리시오”라고 명령했다. 오정근은 “알았습니다. 밀어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새벽 3시 24분에 한강 인도교에서 총성이 울렸다. 해병대가 헌병들과 교전하는 소리였다. 이 총성을 들은 주한 미해군 사령
관 조지 프래시 소장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인 카터 매그루더 대장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렸다.
한강 인도교 남단에 설치된 트럭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총격전으로 헌병 쪽에서 3명, 해병대 쪽에서 이준섭 대
위 등 6명이 부상했다. 김윤근 여단장을 태우고 해병대의 후미에 붙어있던 지프도 인도교로 들어섰다. 바리케이드로 갖다놓
은 트럭들은 엔진이 꺼져있어 치우는 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한강 인도교의 중지도 지점에 제2저지선이 설치돼있었다. 김윤
근의 명령에 따라 오정근 중령의 부대가 제2저지선의 헤드라이트를 겨냥해 일제사격을 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꺼지고 제2
저지선도 돌파됐다.
김윤근 준장은 중지도를 지나 용산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서서히 움직이던 해병대의 차량종대가 또 다른 저지선을 보
고 정지했다. 김윤근은 오정근에게 그것도 돌파하라고 지시했으나 앞으로 저지선을 몇 개나 더 돌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
에 걱정이 됐다. ‘날은 이미 밝아오기 시작하는데 아직도 한강다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으니…. 실패라면 살아서 욕을 보느니
자결해버려야지’하고 생각하니 아내와 세 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트럭에 탄 장병들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니다. 내가 살아있어야 아무것도 모르고 출동한 장병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증언을 해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때 박정희도 차에서 내려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고 있었다. 그를 호위하는 장교들 가운데 한웅진 준장과 이석제(李錫濟
) 중령이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박정희는 이석제에게 제2안대로 하자고 말했다. 제2안이란 출동한 부대로 일정한 지
역을 점거하고 정부와 담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한강의 총성을 들은 6군단 포병단이 한강 인도교로 접근해 헌병의 배후에서 공포를 쏘아대니 헌병들이 포위됐
다고 생각하고 도주했다. 새벽 4시 15분경 해병대와 공수단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장도영에게서 쿠데타 소식을 보고받은 현석호 국방부 장관은 지프차를 타고 소공동에 있는 육군 방첩대의 506 서울파견부
대(‘대륙공사’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에 도착했다. 장도영이 여러 명의 참모와 함께 전화통에 매달려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
다. 현석호가 “윤보선 대통령에게 보고 드렸느냐”고 물었다. 장도영이 “아직 안 드렸다”고 말하자 현석호는 “즉각 전화를 걸
라”고 했다.
이재항 대통령 비서실장이 윤보선 대통령을 새벽 4시경에 깨웠다. 윤보선이 전화기를 드니 장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각하, 지금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 저지선을 쳐보았으나 중과부적으로 저지선이 무너지고
, 그들이 이미 서울로 들어왔는데 쉽게 진압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정부 인사들은 은신하고 있는 중이오니 대통령 각하께서도
신변의 안전에 배려하십시오.”
윤보선 대통령은 노모(老母)와 처자들만 일단 친척집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청와대를 지키기로 했다.
현석호 장관은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에게는 자신이 직접 상황을 통보하고 싶었으나 영어가 서투르기 때문에 장도영으
로 하여금 통보하게 했다. 장도영은 매그루더 사령관에게도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쿠데타에 관해 보고했다. “주동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장도영은 “박정희와 김종필”이라고 대답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한국군의 장성 인사와 참모총장 인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는 평소에 박정희 소장의 사상이 의심스러우니 그를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요구했고, 기어코 1961년 5월 31일자로 그를 예편시킬 예정이었다.
매그루더는 곧바로 주한 미국 대리대사인 마셜 그린(Marshall Green)에게 연락했다. 매카나기 전 대사가 미국 국무성의 동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전임되어 떠났지만 후임인 새뮤얼 버거(Samuel A. Berger) 대사는 아직 부임하지 않은 상황
이었기에 그린 대리대사는 한국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었다.
현석호 국방장관은 서울방첩대를 나와 소공로를 건너 반도호텔로 갔다. 8층 총리실에 이태희 검찰총장과 조인원 경호대장
등 몇 사람이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현석호 장관은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맞는 장면 총리에게 피신하라고 말했다. 이
태희 검찰총장이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하고 나섰다. 한강 쪽에서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장면 총리는 이태희 검찰총장의 승용차를 타고 호텔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운전사가 보이지 않았다. 한 경호원이 길 건너
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철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망을 보던 경호원이 “군인들이 온다”하고 소리
쳤다. 장면 총리 부부는 서둘러 전용차에 몸을 실었다. 이때 총리의 안경이 떨어져 깨졌다. 차는 청진동 뒷골목으로 달려 중
학동 한국일보사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 사택단지 앞에 가서 멈추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2대 서울지부장인
피어 드 실버(Peer de Silva)의 집이 그곳에 있었다. 장면 총리는 부통령이었던 2년 전부터 실버의 초청으로 그의 집을 방
문해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장면 총리는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실버는 새벽에 미국 대사관의 CIA 당직요원으로부터 “한강에서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를 받고 집을 나와 세단을 타고 대사
관으로 달렸다. 이미 무장한 쿠데타군이 거리를 통제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광화문 거리에는
기관총이 설치되고 있었다. 실버는 여러 번 검문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장면 총리가 그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린 것이었
다.
장면 총리는 혜화동에 있는 외국인 수녀원인 카르멜 수녀원으로원장수녀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원장수녀는 장면 총리
부부를 부속건물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장면은 기도부터 했다.
바로 그 시각에 현석호 장관은 장도영을 만나러 방첩대로 돌아가다가 쿠데타군에 체포되어 서울시청의 시장실 부속실에 억
류됐다. 그는 장도영이 분주하게 시장실을 드나드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는 장도영에게 “참모총장, 이게 어떻게 된 거요?”라
고 물었다. 장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룹시다”라고 대답했다. 장도영은
박정희 소장이 자신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장면 정권과 쿠데타 세력에 양다리를 걸치
고 있었다.
16일 새벽에 미8군 지하벙커의 전쟁상황실은 주한미군의 매그루더 사령관과 멜로이(Guy Stanley Meloy Jr.) 부사령관, 주
한 미국 군사고문단장인 해밀턴 하우스 소장을 비롯한 미군의 주요 장성들, 피어 드 실버를 비롯한 미국의 정보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공식으로 파견한 하우스 소장이 새벽 5시경에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이 만남은 짧게 끝났고
, 그 분위기도 냉랭했다.
5월 16일 새벽 5시 30분경 KBS 라디오에서 군부의 거사를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장악하
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
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1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
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
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
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
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
5월 16일 오전 10시경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대장과 마셜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는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계획을 세
웠다. 이 진압계획의 단계별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1. 쿠데타에 반대하고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로써 야전군을 포함한 다른 군부대의 가담을 저지하고 쿠
데타군을 고립시킨다.
2. 미8군 방송을 대기상태로 두고 이 방송을 이용해 장면 총리로 하여금 기존 정권에 대한 지지를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송
을 하게 한다. 이로써 불안정한 국민심리를 쿠데타군으로부터 분리하고 안정시킨다.
3.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야전군을 동원하게 한다. (적어도 이 단계에 이르면 쿠데타군은 투항할 것이라고 매그루더 사
령관은 예상했다.)
4. 한국의 야전군을 동원해 서울을 포위하고 쿠데타군을 섬멸한다.
이 계획을 구상하면서 매그루더 사령관은 최악의 경우에도 쿠데타군(매그루더는 ‘반란군’이라고 불렀다)과 진압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장면 총리나 윤보선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
고 쿠데타군에 가담하지 않은 대부분의 군대에 쿠데타를 지지하지 말라고 호소하기만 하면 서울에 들어온 소수의 쿠데타군
병력은 투항할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 진압 계획은 두 가지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첫째, 매그루더는 장면이나 윤보선이 합법적인
민선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결연하게 쿠데타군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 있는내어 정권 수호를 포기하고 수녀원으로 도주하리
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군 진압에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둘째, 매그루더는 한국
의 야전군을 쿠데타군 진압을 위한 작전에 동원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작전
지휘권 발동만으로는 한국군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16일 오전 10시 18분 매그루더 사령관의 성명과 그린 대리대사의 성명이 잇달아 발표됐다. 매그루더의 성명은 다음과 같았
다.
유엔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본인은 본인의 지휘권 안에 있는 한국군 모두에게 장면 국무총리가 이끄는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
부를 지지할 것을 요망한다. 한국군 수뇌들은 자신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해 즉각 통치권을 합법적인 정부당국에 반환하
고 군내의 질서를 회복시킬 것을 요망한다.
그린 대리대사의 성명은 다음과 같았다.
자유로이 선출되고 합헌적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유엔군 사령관의 입장에 본인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본
인은 미국이 지난해 7월 한국 국민에 의해 선출되고 지난 8월 국무총리 선거로 조각된 합헌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한다
는 점을 분명히 강조해 밝히고자 한다.
이 두 건의 성명은 오전 11시경부터 미8군 방송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되풀이 방송됐다. 매그루더
와 그린은 기울였다. 미8군 방송은 장면 총리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그가 방송을 할 수 있도록 대기상태를 유지했다.
10시 30분과 11시 사이에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 김신(金信) 공군 참모총장, 이성호(李成浩) 해군 참모총장,
김성은(金聖恩) 해병대 사령관, 현석호 국방부 장관 등 군 수뇌들을 대동하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때 윤보선 대통령은 자
신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지만 진압할 의사도 없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윤보선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 크게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훗날 현석호는 윤
보선이 쿠데타를 승인했다고 증언했지만, 윤보선 자신은 그런 뜻을 밝힌 바 없다고 증언했다. 최근에 기밀이 해제된 미국 쪽
문서는 현석호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윤보선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회고록은 신빙성을 검증받아야 하고, 특
히 한국의 정치인이 쓴 회고록은 자기합리화와 거짓이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을 유념해서 읽어야 한다.)
1961년 5월 16일은 제2공화국이 탄생된 후 처음으로 외국 원수를 맞는 날이었다. 페루 대통령이 오기로 되어서 청와대는 그
분을 맞는 준비에 바쁜 일정을 보내고 모두 피곤한 몸으로 15일 밤을 맞이했던 것이다. 새벽 3시 반 아니면 4시로 생각된다.
갑자기 비서가 내 침실 문을 두드린다. 나는 무슨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청와대에 화재라도
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예감에서 급급히 비서에게 사유를 물었더니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전화인데 대통령께 직접 보고
해야 할 일이랍니다”한다. 그래서 수화기를 들으니 장도영은 “지금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헌병으로 한강교에서 저지하여 보
았으나 중과부적으로 저지선이 무너지고 그들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 같지 않아 대단히 우려됩니다”라고 혁명을 과
장평가하는 보고였으며, 직접 대놓고 하는 말은 아니었으나 그때 장도영의 말투로는 나더러 피신하라는 것 같았다.
그 전화를 받고 나는 공포감보다도 잠시 깊은 사념에 잠겼다. 실권 없는 대통령이라지만 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일신
의 안전만을 위해서 3백만의 서울시민을 버리고 피신할 수는 없다고 결심을 했다. 그것도 공산군이나 쳐들어왔다면야 이야
기가 달라지지만 국군의 쿠데타라면 이 자리에 앉아 귀추를 보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만일 공산군의 남침이라면
이 나라 대통령으로서 포로가 되는 이 처사가 국가에 해독과 체면의 손상이 될 것이나 아군의 쿠데타라면 공산군의 경우와
는 달라서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또 최악의 경우에 그들에게 포로가 되든지 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
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차차 총성은 가까워진다. 그것은 위험이 접근한다는 통고였다.
나는 밖의 정세가 몹시도 궁금했다. 이윽고 비서들이 수소문해온 정보로는 서울시 일원은 완전히 혁명군 수중에 들어가고
장 총리를 위시해서 각 장관은 모두 피신하고 다만 한통숙(韓通淑) 체신장관만이 붙잡혀서 서울시장실에 구금되었다는 것
이다. 아마 그때가 아침 10시쯤이나 되었다고 기억하는데,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 현 국방부 장관과 3군 참모총장, 해병
대 사령관이 청와대로 들어와 내게 면접을 요망하는 것이었다. 내가 응접실로 급히 내려가니 그들은 모두 서서 나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불안하기보다는 서글펐다.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말이 “올 것이 왔구나!”, 나
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다. 후일에 이 말이 자주 인용되어 내가 마치 혁명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 같이 전해지기도 했으나
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 당시 사회적, 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해볼 때에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나라엔 영일이 없고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니 하여 당장 무슨 일이든지 터지고야 말 것만 같지 않았던가. 그래서 “올 것이 왔구나”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박정희 소장이 입을 열어 “근심을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젊은 몸으로서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
하는 애국심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한다. 천천히 말을 잇는 그의 어조는 비교적 침착해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위시해서 전 서울이 혁명군 수중에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그대
들이 만일 애국하기 위해서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그대의 말이
곧 법이요, 생사가 그대의 말 한마디로 결정될 것이다. 애국에서 나온 거사라면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고 유혈의
금지를 부탁하며 아울러 민주당 각료들에게 보복행위를 금할 것을 역설했다.
내 말이 끝난 후 장도영 참모총장과 박정희 소장 둘 중 누가 말했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안 되나 이미 선포된 계엄령을 추인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엄령을 누가 펴놓고 나에게 추인하라는 것인가? 헌법상 대통령이 계엄령을 추인하게 되
어있다면 이것은 반드시 선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인데 계엄령은 이미 선포되었으니 이제 와서 추인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의 추인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모두 물러갔는데 박정희, 유원식 두 사람만이 되돌아와서 유 대령이 “저희들은 대통령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었
고 앞으로도 그 충성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혁명을 저희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을 꺼내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각하께서 이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주십시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요구
를 즉각 거절하고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들어가며 설명했다.
“첫째로, 후세의 사가들이 이러한 혁명을 어떻게 평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했다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 둘째로, 종래에 일면식도 없고 속도 모르는 그대들을 어떻게 믿고 지지성명을 내겠는가? 셋째로, 내가 만
일 지금 성명을 내면 국민은 둘 중에 한 가지, 즉 청와대가 혁명과 내통을 했다고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이 혁명
군의 위협에 못 이겨 성명을 낸 것이라고 추측할 터이니 그렇게 되면 피차간에 이롭지 못한 것이다.”
이 거절이 나와 혁명군 사이에는 다시 메울 수 없는 구거(溝渠)였다. 대통령의 혁명 지지 성명으로 명분을 세워보자는 것이
거절되자 그들이 낭패한 것은 사실이다. 혁명 지지 성명을 거절하고 나는 “혁명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이
상 청와대에 머물러있지 않겠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극구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혁명을 했으니 그들과 뜻이 맞는 사람
을 대통령으로 할 것이며, 또 나도 혁명이 난 이상 대통령직에 더 이상 머물러있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였다.
《정계비사,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희망출판사, 1966, 313~316쪽
16일 오전 11시 10분 그린과 매그루더가 청와대에 가서 윤보선 대통령을 만났다. 그린과 매그루더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쿠
데타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백히 해줄 것과 한국 야전군 병력으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고 하니 이에 동의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유엔군 사령관을 겸한 주한미군 사령관이 갖고 있었으나 국군 통수권은 한국 정부가 지니고 있
었다. 다만 국군 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느냐 국무총리에게 있느냐가 내각책임제 하의 민주당 정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었다
. 헌법학자들은 대체로 국무총리에게 국군 통수권이 있다는 견해를 폈다). 윤보선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혁명 수뇌들을 보낸 직후 유엔군 사령관의 장 총리 지지 성명이 나왔고, 또 발표되었다. 그후 그날 정오경 나는 매그루더 유
엔군 사령관과 그린 대리대사의 방문을 받았는데, 이 두 사람은 “지금 시내에 들어온 혁명군은 3천 6백 명으로 추산되니 이
병력의 10배가 되는 4만 명만 일선에서 동원하여 서울을 포위하고 좁혀 들어가면 혁명군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군의 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는지 국무총리에게 있는지 좌우간에 확정되어있지 않았으나 장 총리는 국무총리에게 있다는
견해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든지 사무적으로 국무총리가 대통령에게 군 출동을 요청해야 할 것인
데, 장 총리의 향방도 모르고 또 다른 국무위원의 소재도 알 수 없어 내가 유일한 헌법기관이라는 견지에서 유엔군 사령관은
나에게 병력동원에 동의하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린 대리대사는 국가원수로서 호헌(護憲)의 책임이 있으니 그 헌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 반도를 격파하기를 간청했다.
호헌은 해야겠고 법질서도 지켜야 하겠지만, 그때 내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첫째, 혁명군이 얼른 손을 들면 문제
가 없겠지만 그 사람들 말과 같이 목숨을 내걸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그리 간단히 항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국군끼리
서로 전투를 하여야 승부가 날 것이다. 그러면 국군끼리 서로 피를 보게 되며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사태는 여기
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이북의 괴뢰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으로 남으로 질풍같이 몰아내려올 것이다. 유
엔군 사령관이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괴뢰군이 벌써 휴전선에 집결중이라는 급보를 받았었다.
대통령은 물론 호헌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국토와 국민이 없는 호헌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민족 없는 호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매그루더 장군은 “대구 2군 사령부의 군인이 약간 동요를 했으나 바로 귀대를 하였
고 38선 부근에 있는 일군(一軍)은 조용하니 과히 걱정 말고 출병을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또 다시 말하기를 “휴전
선에 괴뢰군이 집결했다는 정보를 들었는가?” 물었더니 자기도 그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다시 그에게 괴뢰군이 밀려
내려오면은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를 다시 물었다. 그래도 그들은 “대통령은 호헌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
래서 나는 “4·19 때 매카나기 대사가 4·19 학생운동을 두둔하고 이 박사가 하야할 것을 종용했다면 이것이 미국 헌법이냐, 또
는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였느냐?”고 반문했더니 그린 대사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더 말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고
, 두 시간 동안 계속된 회담은 그것으로 끝났다.
지정학적으로 우리가 일본이나 필리핀, 호주와 같이 잠재적 적국으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모르겠지만, 우리의
적은 국경 아닌 38선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남한이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이때에 국군끼리 교전하라고 명할
수 있겠는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이뻐서가 아니고 집권하던 민주당이 미워서가 아니라, 나는 그 길 외에 다른 방법
이 없어서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 내가 다시 그런 결정을 지어야 할 입장이라도 나는 서슴지 않고 당시의 그 결단을 되
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계비사,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희망출판사, 1966, 316~317쪽
윤보선 대통령에 대한 그린 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사령관의 발언은 결의에 찬 것이었다. 그 발언의 핵심은 대통령에게는 호
헌의 책임이 있다는 것, 시내에 들어온 ‘반란군’은 3600명에 지나지 않으니 그 10배인 4만 명의 병력만 일선에서 동원해 서울
을 포위하고 좁혀 들어가면 ‘반란군’은 투항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 휴전선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청와대의
경비는 미8군 사령부의 본부중대에 맡기겠다는 것, 합헌정부를 지지하라는 것이 미국 정부의 훈령이며 그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에게 결단하기를 촉구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린과 매그루더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설득했으나 윤보선은 야전군을 동원하면 휴전선에 허점이 생긴다는 것과 한국군끼
리 교전하게 되면 유혈사태가 빚어진다는 점을 이유로 들면서 끝내 쿠데타군 진압을 거부했다(윤보선의 말대로라면 대한민
국은 군사쿠데타가 날 때마다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인정해야 한다).
그린 대리대사는 이때 윤보선 대통령을 방문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는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전력을 다 기울였다.
북한 공산군 얘기를 하지만 전쟁은 준비 없이는 일으킬 수 없다. 또 병력동원을 한다 해도 일선 방위군을 빼내 휴전선에 틈
이 생기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맡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어기고 지역을 이탈한 부대에
대해 복귀를 명령하고 그 명령을 집행시킬 권리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 자체가 미묘한 것이기에 작전지휘권 행사에 있어
국군 통수권자이고 현재 유일한 헌법기관인 청와대의 동의를 얻으려는 것이다.
매그루더가 이런 요지로 대통령에게 결단을 강권했다. 나도 말했다.
“국가원수는 헌법을 지킬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헌법질서를 지키기 위해 쿠데타군을 격파하는 데 동의해주십시오.”
매그루더 사령관은 진압군 동원 후의 청와대 안전에 대해서도 말했다. “쿠데타군은 결코 청와대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할 것
을 보증합니다. 각하가 병력동원에 동의하는 즉시 8군 사령부의 본부중대가 전 병력을 동원해서 청와대 호위를 맡도록 하겠
습니다.”
“매그루더 장군, 그린 대사, 들어보오. 반란이 얼른 진압된다면 몰라도 국군끼리 시가전을 벌이게 되고 그 틈을 북한 공산군
이 노린다면 어떻게 되겠소? 귀관들의 말 그대로 대통령은 호헌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소. 하
지만 국토와 국민이 없는 호헌은 있을 수 없는 것 아니오?”
대통령은 서울의 시가전이 가져올 시민의 피해에도 우려를 나타냈다. 이에 대해 매그루더는 쿠데타군의 장비와 유류 보급사
정을 설명하면서 시가전을 하지 않고 포위만 해도 사흘이면 쿠데타군은 기동력이 마비되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객관
적 상황을 설명했다. 나도 반복해 대통령의 호헌책임을 강조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미국 대통령이나 호헌의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끈질기고 집요한 설득에도 윤보선 씨는 처음의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4·19 때 매카나기 대사는 학생운동을 두둔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를 권고했소. 이는 미국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였는
가, 아니면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였는가?”
윤보선 대통령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매그루더 사령관은 먼저 청와대를 떠났다. 그린은 더 남아 그 자신의 표현대로 ‘쓸쓸
하고 씁쓸한’ 분위기 속에서 윤보선과 점심을 함께 들면서 진압명령을 내려주도록 더 설득했다. 작별의 악수를 나누면서 윤
보선은 “대통령의 호헌 책임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없는 호헌이란 있을 수 없지 않겠소”라고 말했고, 그린 대리대사는 “각하
의 오늘 이 결정에 따라 한국에는 군정이 오래도록 계속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김종필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계엄포고령을 KBS를 통해 잇달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 장도영 중장의 이름으
로 발표했다. 그중 포고령 4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상오 7시 장면 정부로부터 모든 정권을 인수했다.
2.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회를 16일 하오 5시 8시를 기하여 해산한다. 단 사무처 직원은 존속한다.
3. 일체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엄금한다.
4. 현 국무위원과 정무위원을 전원 체포한다.
5. 국가기구의 일체 기능은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이를 정상적으로 집행한다.
6. 모든 기관과 시설의 운영은 정상화하고 여하한 폭력행위도 이를 엄금한다.
쿠데타군은 16일 석간부터 언론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16일 밤 10시경 중앙방송을 통해 장면 총리와 모든
장관에게 은신처에서 나오라고 권고했다.
북한의 평양방송은 16일 저녁 7시에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문을 인용하며 5·16 쿠데타를 환영한다고 논평했다.
16일 새벽 3시를 기해 군사정변을 단행한 남조선 군인들은 행정, 입법, 사법 등 정부기관들과 방송국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장면 정권을 타도한 군사정권을 지지, 환영하는 군중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군사정변에 의하여 장면 정권이 타도되자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서울된 장면 정권에 반환해야 한다면서 노골적으로 남조
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나섰다.
이러한 북한의 방송으로 인해 쿠데타의 성격에 대한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의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북한이 이러한 방송
을 한 것은 박정희 소장이 여순반란 사건 이후 벌어진 국군숙정의 과정에서 군법회의에 회부됐던 경력을 오판한 탓이었다. (
북한은 1961년 9월 1일 박정희와 서로 잘 아는 황태성 무역성 부상을 밀사로 남한에 보냈는데, 황태성은 10월에 체포됐다.
이 사건이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이 되어 박정희 후보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날 장면은 그린 대리대사와 두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자신은 안전하다면서 매그루더와 그린이 성명을 발표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유엔군 사령관인 매그루더에게 “상황을 맡아서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진압을 거부함에 따라 그린과 매그루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한국의 야전군을 동원해 쿠데
타 진압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17일 아침 용산의 미8군 사령부에서 참모회의를 열었다. 의제는 ‘한국군
쿠데타 사태에 대해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취해야 할 조치’였다. 이 참모회의는 “쿠데타는 전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일
부 군인들의 비합법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한국의 야전군 중 일부 병력과 미국의 1개 기갑대대를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해
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압작전 계획을 수립한 매그루더는 곧바로 전화로 한국군 제1군라이언 2세 중장을 불러 참모회의의 결정사항을 전달하고
즉각 실행하라고 유엔군 사령관의 권한으로 지시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오후 4시경 경비행기를 타고 직접 강원도 원주로
날아가 이한림 1군 사령관을 만나 40분 동안 면담하며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한림 사령관은 사실상 쿠데타 진압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윤보선 대통령의 친서를 이미 받은 뒤였다. 이 친서
는 장도영이 “국군끼리의 유혈사태를 걱정하시는 각하의 충정을 일선 부대장들은 모르고 있으니 직접 편지를 써주십시오”라
고 윤보선 대통령에게 부탁해 쓰게 한 것이었다. 윤보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친서의 내용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도 반대
도 아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무혈로 진압할 수는 없으므로 윤보선 대통령이 중립을 요구하는 내용의 친
서를 보냈다면 그것은 사실상 쿠데타를 진압하지 말라는 뜻을 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보낸 비서관 김준하, 김남, 윤승구, 홍규선은 17일 오후 원주의 1군 비행장에 내렸다. 이들은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이한림 1군 사령관에게 중립을 지키라는 내용으로 씌어진 윤보선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이때 1군은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한림은 적법한 진압명령만 내려오면 쿠데타 진압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었다. 문제
는 그런 진압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는 세 사람, 즉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 가운데 두 사람이 쿠데
타를 진압하기를 주저하거나 포기한 데 있었다.
이한림은 윤보선 대통령의 진압명령만 내려오면 20년 친구인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를 진압할 생각이었지만 중립을 요구하는
윤보선의 편지를 받았고, 그 뒤에야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의 방문을 받았다. 이한림 중장은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잘 알았
다”는 정도의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돌아간 후 이한림은 상황을 분석해보고는 주한미군 사령관의 요구
를 받아들이기보다는 한국의 대통령 윤보선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날 아침 장면은 카르멜 수녀원에서 인편으로 그린 대리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를 지지하고 있습니까? 매그루더 장군이 쿠데타를 진압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이러한 점
이 분명해야 현 사태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은 그린 대리대사는 맥이 빠졌다. 주객이
전도된 현실이었다. 이런 정권이라면 주한미군이 주도해서 수호해준다고 해도 장래가 없어 보였다. 장면은 답신을 기다리
다가 초조해져서 전화를 걸어 미국 쪽의 쿠데타 진압 의지를 물었다. “한국인의 힘으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 그린 대리대사
의 최종 답변이었다.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은 역대 한국 정부를 미국의 괴뢰로 인식하고 그렇게 널리 선전했다. 이런 그들의 선전이 객관적인 사
실을 말한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적어도 장면 정권의 지도부는 심리적으로 괴뢰의 상태에 있었다. 특히 장면 총리의 대미의
존 심리는 심각한 정도였다. 그는 미국인 정치고문 도널드 위터카 없이는 화장실에도 못 갈 사람이라는 평까지 들었다(도널
드 위터카는 장면 개인에게 실망한 나머지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장면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장
면 정권의 대미의존 태도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에 의존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정권을 지키려고 했던 구한말 조선
의 위정자들이 보여준 태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한국군 내부는 대체로 쿠데타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김웅수(金雄洙) 6군단장, 정강(鄭剛) 8사단장 등 쿠데타를 진
압하려고 한 장군들도 일부 있었다. 이한림 1군 사령관은 이날 저녁 국기하강식에서 사령부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합니다. 그런 일은 있
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
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
는 쿠데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장병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이한림 1군 사령관을 만난 뒤 미8군 사령부로 돌아온 시각은 17일 오후 7시경이었다. 박정희 소장은 장
도영 육군 참모총장을 특사로 매그루더에게 보냈다. 군부의 거사는 반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반공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 설득해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오히려 장도영에게 “쿠데타에 가담하고 있는 6군단의 포병 5개 대대를 18일 오전 4시까지 원대복
귀시키라”고 요구했다”(18일 오전 4시부터 쿠데타 진압공격이 개시된 예정이었다). 이는 쿠데타군의 전투력을 사전에 거세
하려는 의도를 바탕에 깔고 내건 요구였다. 쿠데타군은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고, 보유하고 있는 실탄도 3일분밖에
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매그루더 사령관의 요구를 거절하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장도영을 만나고 난 뒤 미국 합참의장 렘니처(Lyman Louis Lemnitzer)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
냈다(렘니처 장군은 1951년에 미국 제7보병사단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바 있는 사람이었다).
군사쿠데타의 배후세력은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습니다. 미8군 방첩대(CIC)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
을 상대로 조사해본 결과 10명에 4명꼴로 쿠데타를 지지했고, 2명꼴로 지지하기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4명꼴
로 반대했습니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이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울한 상태라서 그의 행동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보선
대통령과 백낙준 참의원 의장은 진압군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쿠데타 계
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쿠데타의 기본 목적은 장면 정부를 제거하거나 내각제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미성향이나 친공성향은 아직 발견
되지 않고 있습니다. 쿠데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인데, 그는 이승만 정부 아래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기소
되어 유죄를 선고받은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그 뒤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해 제거하는 일에 협력했고, 이에 따라 반공주
의자라는 평을 듣게 됐습니다. 쿠데타 세력 내부에 반미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장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한림 사령관의 충고에 따라, 또한 1군을 내 지휘권 안에 묶어둠으로써송을 통해 합헌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한다고 밝
혔습니다. 나는 반란군의 지휘부에 본대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이는 반란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해
병대는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나 6군단 포병단은 원위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장도영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책을 이용해 반란군으로 하여금 서울에서 철수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한림 1군 사령관은 4개 사단을 출동준비 태세로 대기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 부대를 서울로 끌고 들어온다면 반란군을 진
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한림은 장면 총리가 명령을 내리면 반란군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는 아마도 내
명령에도 복종할 것입니다. 나는 간밤에 장면 총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오늘 아침까지도 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측근들과도 접촉해보았는데, 그들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한테 연락하게 해달
라고 부탁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만약 장면 총리가 1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면 나는 그의 그런 지시를 지지할 것입니다. 나는 그가 그런 지시를 내릴 때까지 1군을 내 편에 묶어둘 작정입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까
지1군을 우리 편에 묶어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장면이 숨어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가 정권
을 회복할 확률은 낮아질 것입니다.
하나의 가능한 방법은 대통령, 참의원 의장,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내가 이한림에게 명령해서
1군을 출동시켜 반란을 진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그리하여 정권이 회복된
다고 해도 그 정부를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태, 그리고 그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없는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임무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한국 내부의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
는 것도 나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쿠데타 세력은 공산주의자였던 인물에 의해 지도되고 있으나 공산당에 의해 조종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내 권한만을 이용하여 1군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이 전문을 보면 매그루더 사령관 역시 장면의 태도에 실망한 탓에 쿠데타군을 진압하려는 의지를 잃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쿠데타군이 거사한 지 48시간 가까이 흐른 17일 저녁에는 초긴장 상태가 조성됐다. 밤 9시경 미8군 사령부에 비상소집령이
내려져 미군 장병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서울의 상공에서는 미군의 정찰기와 헬리콥터가 쿠데타군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서울 시민들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절박한 분위기가 서울의 밤거리를 휩쓸고 있었
다.
그러나 이날 밤 늦게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의 쿠데타군에 대한 진압작전을 실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7일 박정희
소장을 만난 CIA 한국지부장 실버의 보고를 비롯한 여러 경로의 정보를 통해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아니냐는 의구심이 해소
됐고, 그가 주도한 쿠데타가 반미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됐을 뿐만 아니라 장면 정권의 무능함도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기로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5월 18일 새벽에 박정희 소장의 지시에 의해 이한림 1군 사령관이 체포됐다. 이로써 쿠데타군은 군 전체를 장악하는 데 성공
했다.
18일 오전에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장면의 미국인 정치고문인 도널드 위터카에게서 장면의 은신처가 어디인지를 전해 듣
고 카르멜 수녀원을 찾아갔다. 장도영을 따라 중앙청으로 간 장면은 김영선(金永善) 재무부 장관, 태완선(太完善) 상공부 장
관,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 등 국무위원들과 마지막 각의를 열었다. 각의는 오후 2시에 이미 선포된 비상계엄령을
추인하고 내각이 총사퇴하기로 의결했고, 장면은 그러한 의결에 대해 윤보선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청와대로 갔다.
이로써 장면 정권은 법적으로 소멸됐고, 대신 군사혁명위원회(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가 정권을 정식으로 이양받은 셈
이 됐다. 다만 윤보선은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다(그는 1962년 3월 22일에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 시각 미국 대사관에서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정치담당 참사관(1971?74년에 주한 미국 대사 역임)이 매카나기 미국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게 한국의 장면 내각은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산산조각 났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19일 5·16 주도세력이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장 : 장도영(육군 참모총장, 중장)
부의장 : 박정희(2군 부사령관, 소장)
위원 : 김종오, 박임항, 김신, 이성호, 김성은, 정래혁, 이주일, 한신, 유양수, 한웅진, 최주종, 김용순, 채명신, 김진위, 김윤근
, 장경순, 송찬호, 문재준, 박치옥, 박기석, 손창규, 류원식, 정세웅,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박원빈, 김석제
고문 : 김홍일, 김동하
20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한미간 우의와 협조를 재확인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훗날 5·16 쿠데타가 사전에 미국과 공모한 것이었다는 추론이 제기됐고,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추론을 사실로 믿었
다. 그러나 5·16 당시의 취재기자들은 쿠데타 세력과 미국 정부가 첨예한 갈등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한 갈등은 그
뒤 2년간 이어진 군정의 기간에도 계속됐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 10월 31일 발간한 <
한미관계 조사보고서(Investigation of Korean -American Relations)>는 5·16 쿠데타와 미국 사이에 관련이 없다는 결론
을 내렸다. 다음은 이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본 소위원회는 CIA가 한국의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주장에 대해 조사했다. 그런 주장을 모두 다 조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본 소위원회는 한미 양쪽의 많은 관리들과 면담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고, 모두 유엔군 사령부와 국무성이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 보인 적대적인 태도를 언급했다. 미국
의 한 전직 관리는 “미국 대사관의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CIA 요원들도 종전의 민주당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폭력
적인 권력탈취 세력을 의심과 반감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미국의 한 전직 관리’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다. 헨더슨은 5·16 군사쿠데타 당시
에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이었고 그 쿠데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훗날 한국 정치를 역사적 전통에
입각해 분석한 명저 《소용돌이의 정치(Politics of Vortex)》를 저술했다.
성공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던 5·16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한마디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미국은 장면 정권을 수호해줘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한일간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
한 반대에 부닥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은 성립되자마자 미국의 요구대로 일본과 국교 정상화에 관한 교섭
을 벌였고, 5·16 쿠데타가 일어날 즈음에는 국교 정상화를 거의 성사시켰다고 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한 장면 정권은 1961년 2월 8일 ‘한미 경제원조 협정’에 서명했다. 이것은 ‘제2의 태프트─가쓰라 협정’이라고 불릴 정도
로 미국에 유리하고 한국으로서는 굴욕적인 내용의 협정이었다. 이 협정은 3조 1항에 “원조자료 사용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미국 당국자들에게 사업 및 그 계획과 관계기록을 제약 없이 재검토할 것을 허용한다”고 규정했고, 7조 7항에는 “원조계획
의 전부 혹은 일부는 미국 정부가 사정의 변경으로 인하여 동 계획의 계속이 불필요하거나 또는 부적당하다고 결정하는 경
우에는 미국 정부에 의하여 중단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런 조항들에는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는 것이 명백했다. 당시에는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예산의 50% 이상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고 있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조항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의 내정을 무제한 감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조를 임의로 중단할 수도 있게 되므로 한국 정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합법적으로 갖추게 되는 셈이었다. 이 조약에 반대하는 시민과 학생들이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게다가 장면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끝까지 저항했던 환율인상 등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액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 이에 응해 장면 정권은 1달러당 650환이었던 환율을 1961년 2월
1달러당 1300환으로 대폭 올렸고,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액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국회에서
“민주당 정권이 미국 대사관을 제2의 조선총독부로 만들었다”는 등의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장면 정권이 미국의 뜻에
얼마나 충실하게 따랐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1961년 1월 미국에서 케네디 행정부가 공식으로 출범하자 백악관 안보팀에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한
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런 백악관 안보팀의 견해는 한국에 대한 정책을 주도하는 부서인 국무성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었
다. 장면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백악관 안보팀에 대해 미국 국무성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미국에 껄끄럽기 짝이 없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는 데 국무성도 한몫했고, 그 결과로 미국에 고분고분하면서 합
리적이고 민주적인 장면 정부가 들어선 것 아닌가. 장면 정부가 당 내분으로 지도력이 흔들리긴 했지만 최근에는 지도력도
회복하고 있다. 미국이 지속적인 원조와 함께 적절한 정치적, 경제적 지원만 해준다면 한국은 그럭저럭 제 갈 길을 찾아갈
것이다.
한국의 장면 정권이 지나치게 무능하므로 미국이 일종의 섭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미국 정부 내 일각의 주장은 1961년
3월에 나온 ‘팔리 보고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휴 팔리(Hugh D. Farley)는 국무성 산하조직인 ICA
(국제협력단)의 한국지부에서 중견간부로 재직한 기술자문역이었다. 25쪽으로 씌어진 이 보고서는 장면 정권이 지나치게
무능하고 부패하다고 평가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몇 개월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팔리는 “미국의 대한
정책을 실행하는 USOM(미국 대외원조기구)도 명확한 지도노선이 없어 장면 정권의 붕괴를 막기에 역부족”이라면서 “미국
이 4월 이전에 관료조직 대신에 전권을 가진 별도의 대규모 고문단을 파견해 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팔리 보고서를 읽은 케네디 대통령은 CIA와 국무성에 한국에 대해 정밀한 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국가안보회의(NSC)에 6월까지 새로운 대한정책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에서 새로운
대한정책이 수립되고 있던 시점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당 정권이 정권수호를 위해 노
력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본 미국 정부의 관리들은 팔리의 견해를 수용하게 됐다. 장면 정권이 쿠데타를 진압
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미국 정부도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한 셈이었다. 5월 17일 장면이 그린
대리대사에게 보여준 태도는 미국 정부가 장면 정권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 직후에 민주당 정권의 수뇌부 인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고 헌법기관으로서 유일하게 남은 대통령까지
쿠데타 진압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직접 쿠데타 진압에 나선다면 ‘장면 정권은 미국의 괴뢰정권’이라는 공산권
의 선전을 정당화시켜주게 된다는 점도 미국 정부에 부담이 됐을 것이다. 국가적 위기나 변란 시에 국정책임자의 자세가 정
국의 변화에 얼마나 큰 변수가 되는지를 5·16 쿠데타 직후에 민주당이 취한 태도가 잘 보여준 셈이다. 장면 정권의 몰락을 되
짚어보면 그것은 쿠데타에 의한 ‘타살’이라기보다 스스로 무너진 ‘자살’에 가깝다.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당쟁을 일삼다가
동반자살한 셈이다.
첫댓글 겁쟁이들 때문에.....
고종도 똑같은 유형이었죠.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정치적 제도화 수준이 대중의 사회적 열의를 따라가지 못하면 정치적 쇠퇴Political Decay가 일어나며, 군부는 이 간극gap으로부터 쿠데타의 기회를 엿본다. 만약 쿠데타가 성공하면 군부가 입법, 사법, 행정을 망라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정관 체제Praetorian Regime가 형성된다.
5.16에 대한 이 글을 보니 헌팅턴을 기초로 비교정치학과 민주화 이행에 대해 배웠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의 지난 행적을 보니 사회현상에 있어서 구조와 규범뿐만 아니라 개별 행위자agent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좋은 이야기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윤보선의 문제는 무능이나 겁쟁이(용기의 부족)란 단어만으론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 표현들도 기본적으로 뭔가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유의미한 것인데... 윤보선은 아얘 그런 의지도 없었음.. 뭔가를 개선하고자 할 의지 자체가 없으니 능력 부족을 논하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는...
인간은 타고난 능력으론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며 성장하고 유능해지는 것인데, 윤보선은 살아가면서 그런 극기를 체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듯...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고 학습을 잘 하는 머리를 갖고 태어나 그저 순탄하게만 흘러갔던... 영국 유학 중에는 지금으로 치면 몇억원 가치의 이탈리아제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다고 하죠.. 이런 종류의 인간이 인생에서 가지는 욕망이라고는 그저 남들의 인정과 존중을 얻는 거 뿐임.. 그것조차도 '어흠' 하고 뒷짐 지고 있으면 남들이 알아서 해결해주던 시절. 그러니 딱히 욕망이랄 건 없고 취향만 남는 거죠... 뭐 욕망이 있어야 극기를 하고 능력을 배양하는 것인데... 결국은 지식이 많고 세련된 바보가 되는... 안철수나 윤보선이나... 비슷한 과의 인간들..
이런 무욕의 인간을 대통령까지 올려줬으니... 보통의 인간이라면 쿠데타에 직면했을 때 권력욕 때문에라도 격렬히 저항했을 텐데, 윤보선은 진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냥 쉽게 쿠데타를 용인...
보통의 사람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
평생을 저항없이 물흐르듯 살아간 인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쿠데타 세력이 막부가 되고 자신은 덴노처럼 떠받들여지길 기대하면서 쿠데타에 순응했는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이에 비하면 그 다음에 나온, 신민당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김영삼(3당합당 이전시점까지 한정),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런 기라성 같은 민주당 지도자들은 밑바닥에서부터 고생하며 올라와서 그런지 클라스가 확 다르군요
발전의 기반이 된 고생을 군사정권이 각종 박해를 통해 제공한 반면,
군사정권의 후예 503이 장면 정권 못지않은 쌉무능 정권이 되어 역으로 민주당에게 정권을 털리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군요. 저쪽이 봣을 때는 금괴의 힘으로 양성한 문빠 친위대를 앞세운 촛불쿠데타로 (지들이 당연히 차지했어야 할) 국가를 털린 걸로 보일려나요 ㅋㅋ
ㄷㅅㅂ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