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海苔는 해의海衣 또는 김이라 한다. 주로 해의라 했던 해태가 김이 된 것은
광양 태인도에 살던 김여익이 처음 양식을 시작한 해초라 그 성姓을 따서
김이라 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시식지가 지방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됐다.
해의는 1424년에 만든 경상도지리지의 울산·동래·영일현 등의 토산편에
이미 그 이름이 나오고, 1530년에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진도·강진·보성
·흥양·순천·광양 등지의 토산편에 나오고 있으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천연산 석태石苔가 식용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태란 낱말은 1817년 강진 유배지에서 정약용이 쓴 경세유표에 처음
나오는데 그는 이 책의 균역사목均役事目 해세海稅편에서 ‘태는 해태이다’ 라
하여 이를 해설하고 있다. 해태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도 하는데 태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중에 자태紫苔라는 것이 있다.
이 자태를 속칭으로 해의라 하고 해의의 사투리가 짐朕이라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자태가 김이고 해태란 감태甘苔 등을 포함한 해태속海苔屬의 총칭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해태가 오늘날처럼 김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일제 이후다.
정약용의 주장에 따르면 김은 이 고장의 사투리로 김이 아닌 짐이라 한 것은 김金이
김과 금의 두 가지로 발음되기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광양사람들이 김을 김金으로 보고 이 김은 김여익이 양식을 개발한
양식해의養殖海衣로 보는 이유는 1714년 당시 광양현감을 있던 허심許鐔이 쓴
김여익의 묘표 비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여익은 김식金湜의 네 아들 중 막내로 영암 학산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셋째형
김여준金汝浚과 함께 장흥 동백동冬栢洞으로 옮겨 살다가 1640년(35세) 태인도에
들어가 정착했다. 그는 20년 뒤인 1660년 55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었는데
큰아들 김세능金世能은 계속 이곳에 살았다. 둘째아들 김현룡金顯龍은 다시
장흥 장평면 용강리로 옮겨가 완도, 장흥일대에 자손이 번져있다.
김여익은 실사구시實事求是정신이 투철했던 인물로 섬 갯가에 밀려온 대나무에
해의가 붙어 자라있는 것을 보고 태인도에 딸린 무인도의 ‘애기섬(아도兒島)’
주변에 신죽(시누대=산죽山竹)을 꽂아 해의를 양식한 것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태인도 일대의 오늘날 해태양식은 완도일대에서 하는 떼발이나 뜬발식이
아니고 댓가지가 많은 시누대를 개펄에 꽂는 고정식이라는 점에서 고대식古代式이라 볼 수 있겠다.
태인도에서는 어째서 오늘날도 고정식固定式 섶양식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완도 등지에서 하는 부유식浮流式보다 갯병 등 위험이 많고 생산량도 적지만 이 지역은
섬진강의 하구라 흙탕물이 맑고 유속流速 및 간만의 차가 많아서 부유식보다 실패율이 적다는 설명이다.
해태양식의 개척자를 태인도의 김여익으로 볼 경우 완도해태 양식개척자 정시원鄭時元 설과 충돌이 있다.
1942년에 만든 조선어업조합요람 완도해태조합 연혁조를 보면 “금일로부터 약 130여 년 전 완도군
고금면 장용리藏龍里 정시원이란 어부가 고기잡이를 위해 쳐 놓은 고깃살대에 해태가 붙어 자라는
것을 보고 홍(수초의 하나인 풀이름)을 만들어 죽도포竹島浦에 세운 것이 시초” 라고 적고 있다.
물론 정시원이란 인물은 1953년에 김선묘가 지은 해태양식론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온다.
이와는 달리 이들 기록보다 앞서 1924년에 발간된 조선지수산朝鮮之水産 제1호에는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완도군 조약도의 김유몽金有夢이란 사람이 해안을 거닐다가 우연히 떠내려온
나무에 많은 해태가 붙어 자란 것을 보고 이를 본 따 나뭇가지를 바다에 꽂았더니 해태가 자라
이를 마을사람들에게 권한 것이 완도해태양식의 시초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식 해태양식이 시작된 것은 1929년 전후이므로 이보다 앞선 기록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1909년 일인들이 만든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에는 “하동강구河東江口의 해태양식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으나 고노古老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적어도 2백여 년 전부터 시작된
듯 싶다”고 했다.
1924년의 조선지수산 제2호 하동 해태양식 연혁의 기록에는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
관찰사가 이곳을 순시할 때 태인도 동쪽의 갈도葛島 사람들이 관찰사 수행원으로부터 그 양식
및 제조방법을 전수 받았다고 전한다”고 되어있다.
한편으로 정문기鄭文基 박사는 1937년에 간행한 조선지수산 제44호 「조선해태朝鮮海苔」란 논문에
“조선해태양식은 2백여 년 전 완도에서 어구漁具의 울장에 붙은 것을 보고 시작되었다고 하나
동국여지승람에 광양에서 해의가 토산으로 적힌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태가 나오지
않을 하구에서 나올 수 있는 김은 지금 이곳의 양식김과 같은 본홍건홍양식이었을 수밖에 없다”
는 내용의 글을 썼다.
이처럼 기록들이 제각기 다르니 어느 주장이 가장 합리적일까. 정문기 박사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으나 광양해의가 양식해의말고 석태가 전혀 나오지 않았을까는 의문이고 김여익 시식설에도 맞지 않다.
필자는 해태양식 방법이 두 가지로 발전했을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광양태光陽苔가 가장 먼저
개발된 인공양식법이었다고 본다면, 완도태莞島苔는 보다 수심이 깊은 곳에 맞도록 이를 개량한
후기 방식이라고 본다. 완도지방에서도 일본발日本鉢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 성격의
차이 때문에 대를 쪼개 발을 엮고 동발에 묶어 물에 띄어놓는 방식을 주로 쓴다.
물론 완도는 태인도보다 어업이 발달해 일찍이 고기잡이 대발에 해태가 자랄 수도 있어서 태인도와
전혀 다른 떼밭 양식법이 개발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전이나 모든 기록이 태인도에 뒤지므로 태인도를 해태시배지海苔始培地로 볼 수밖에 없고
그 개척조는 조그만한 기록이라도 남아 있는 김여익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태인도 김씨들은
1955년 태인도에 영모재永慕齋란 제각을 지어 김여익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해태시배지 일대는
광양제철공장이 들어서면서 육지가 되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없다(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