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축구 관계자들과 팬들은 과연 비유럽 선수중에 발롱도르 수상자가 나올것인가라는 의혹과 기대감으로
설레이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강력한 후보는 독일의 클린스만과 핀란드의 리트마넨,그리고 이탈리아의 파올로 말디니,
그리고 오늘 소개할 조지 웨아 4명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는 쓰여졌을지 궁금하군요.ㅎㅎ
여느 축구스타들과 마찬가지로 조지 웨아 역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독한 가난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릴적 그의 꿈은 축구선수가 아닌 전화교환원이었다고 합니다. 그저 가난만 벗어날수 있다면 뭐든지 할 의욕이 있던 소년이었죠.
허나 그의 천재적인 운동신경과 신체조건은 바로 축구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었고 15살의 나이에 라이베리아 3부리그에 소속된
클럽과 계약을 맺으며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뛰어난 반사신경과 좋은 신체조건으로 그의 축구 선수 시작 포지션은 바로 골키퍼였습니다. 골키퍼로 상당한 재능을 보였던
조지 웨아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고 타고난 공격 본능과 골냄새를 맡는 능력은 그를 공격수의 자리로 이끌게 만들죠.
공격수로의 전환과 동시에 30경기 31골을 넣은 놀라운 득점력으로 팀을 2부리그로 승격시켜버립니다.
놀랄만한 천재 공격수가 아프리카의 조그만 변방 국가 라이베리아에서 나타난겁니다.
그 재능을 알아 본 라이베리아 1부 리그의 한 클럽팀이 그를 영입하게 되었고 계속되는 활약의 결과로 라이베리아 최고의 명문팀인
인빈시블 일레븐에 입단하게 되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죠. 거기서도 웨아의 득점력은 식을줄 몰랐고 라이베리아 리그를 초토화시킵니다.
그에 대한 입소문은 널리 퍼져서 아프리카 축구강국인 카메룬까지 알려졌고 1987년 카메룬 야운데팀으로 이적 18경기 15득점의 준수한 활약 바탕으로 마침내 유럽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의 유럽생활의 첫시작은 프랑스였습니다. AS 모나코와 파리 SG 두팀에서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피지컬을 뽐내며 맹활약하여
우승트로피를 여러차례 손에 쥐었고 그의 능력은 유럽 빅리그 강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됩니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관심을 보인건 바로 AC 밀란이었습니다. 반 바스텐이 지독한 발목부상으로 결국 선수생활을 끝내면서 공백으로 남아있던 최전방 공격수자리에 그가 낙점된겁니다. 허나 밀란 팬들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촌뜨기 오리가 반 바스텐이라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백조를 대신할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 엄청난 수비를 자랑하던 세리에 A에서 망신이나 안당하면 다행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웨아는 남달랐습니다. 뛰어난 피지컬을 바탕으로한 폭발적인 돌파력과 리드미컬한 움직임, 강력한 슈팅력, 완벽한 제공권 장악력과 표범과도 같은 민첩함을 이용하여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고 침투하는 능력은 가히 유럽 최고라 할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밀란 팬들은 경악했고 그에게 라이베리아의 괴수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었죠.
밀란에서의 어마어마한 활약으로 웨아는 1995년 아프리카 선수로서 그리고 비유럽인으로서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고
그것도 모자라서 FIFA 올해의 선수상,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3회째)까지 휩쓸며 개인이 받을수 있는 상은 모조리 수상해버립니다.
1995년은 조지 웨아의 검은돌풍이 휩쓴 한해였습니다.
이후로도 웨아의 열기는 식을줄 몰랐고 세리에 A 우승 2회,3년 연속 AC 밀란 최다득점자 등 밀란의 기둥으로 우뚝 솟아 빛을 발하며
반 바스텐의 대체자가 아닌 밀란의 또다른 레전드로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찾아 오는 법. 30줄에 접어든 조지 웨아는 심각한 무릎부상을 당하면서 운동능력이 크게 퇴보했고 체력적으로도 많은 부담을 느끼면서 전성기가 끝이 납니다. 결국 로쏘네리의 유니폼을 벗고 첼시,맨시티,마르세유 등 여러 팀을 전전하면서 쏠쏠한 활약을 보이다가 2003년에 은퇴를 합니다.
축구선수로서 그는 라이베리아의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은퇴하고나서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내전으로 고통받는 라이베리아의 국민들을 위해 후원단체를 설립하였고 조국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조지 웨아를 축구선수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고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2005년 대선후보에 까지 나선 웨아는
2차 결선 투표에서 라이베리아 철의 여인 설리프에게 근소한 표차이로 패배하여 아깝게 대통령의 꿈은 무산됩니다.
라이베리아 축구대표팀에 대한 애정도 대단해서 아예 본인 자비로 팀을 운영하며(FIFA 회비,비행기 티켓,감독과 코치들 수당,전지훈련 비용,식대등등)
대표팀을 크게 성장시키며 현역시절 못지않게 라이베리아의 국위선양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레전드였던 조지 웨아. 그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딱 하나 공약으로 내세운 말로 글을 마칩니다.
02월드컵의 경우는 나이지리아가 서서히 전성기가 지나면서 지역예선에서 한참 부진할때라 기회였는데 라이베리아의 뒷심부족으로 떨어졌죠 저 양반 국적이 라이베리아가 아닌 나이지리아, 카메룬 이런 팀이었다면 아프리카 축구역사가 크게 요동쳤을거라 봅니다 특히 90년대 중후반 나이지리아라고 가정하고 카누와 익페바가 아닌 카누, 웨아 투톱이었다면 프랑스, 브라질 같은 팀들도 상당히 두려워했을거 같고요
첫댓글 라이베리아 할때 바로 조지웨아가 떠올랐습니다 은퇴후가 궁금했는데 은퇴후가 더 위대하네요
라이베리아의 영웅이죠^^
우리나라에도 왔었던걸로 기억합니다... ac밀란팀과 함꼐...
96년 5월 24일.아직도 기억나네요.엄청 설레였었던.로베르토 바조와 조지 웨아,장 피에르 파팽이 한국에 온다니~~~
정말 빠르네요. 운동능력 갑인듯 합니다.
점프력도 엄청났었고 쭉쭉 치고나가는 치달도 정말 폭발적이었죠.드리블이 좀 긴게 단점이었지만.
예전에 인터넷 티비매체가 발달되기전에 정말 전설의 선수
요즘이야 워낙 유럽축구를 쉽게 접할수 있지만 그때 당시는 초청경기를 해야 제대로 볼수 있었지요.^^
AC밀란이 한국와서 국대랑 친선경기 한거 기억나네요. 그때 직관갔는데..... 조지웨아 한 골 넣은걸로 기억.
로베르토 바조때문에 밀란을 초청했는데 3-2 펠레 스코어의 다득점 경기였죠.조지 웨아가 전반 4분만에 질풍같은 드리블로 선제골 넣었지만 서정원의 동점골과 고정운의 역전골.그리고 황선홍의 세번째 골로 밀란을 두들겨 팼었던.후반 인저리 타임때 로카텔리가 한골 만회해서 겨우 체면치레 했던 밀란.밀란 선수들 대체적으로 몸이 무거웠고 설렁설렁 뛰어서 경기력이 별로였었던 기억이 납니다.특히 기대를 모았던 바조가 별다른 활약을 못했죠.
@Dennis Johnson 서정원감독 골넣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생생히 기억납니다 ㅋㅋㅋㅋ
@Dennis Johnson AC밀란, 유벤투스 잇달아 격파하는거 보고 '이제 한국축구도 세계적인 강호구나'라고 착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
죠지 웨아!!!!
02년 월드컵 못간게 천추의 한이라 말할 만큼 애국심이 대단한 선수였죠....
2002년 월드컵,,군대시절..코엑스 프레스센터 치안경비 하고있었는데..아무도 몰라보는 흑표범 죠지웨아를 보고..미천한 짭밥신분이였는데도..달려가서 사진 찍었습니다..ㅎㅎ;; 눈물날뻔 했어요 ㅎㅎ;;
02월드컵의 경우는 나이지리아가 서서히 전성기가 지나면서 지역예선에서 한참 부진할때라 기회였는데 라이베리아의 뒷심부족으로 떨어졌죠 저 양반 국적이 라이베리아가 아닌 나이지리아, 카메룬 이런 팀이었다면 아프리카 축구역사가 크게 요동쳤을거라 봅니다 특히 90년대 중후반 나이지리아라고 가정하고 카누와 익페바가 아닌 카누, 웨아 투톱이었다면 프랑스, 브라질 같은 팀들도 상당히 두려워했을거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