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800호
슬픔에 대하여
유용주
지리산 종주를 하다 만난 안종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채 쉰을 못 채우고 돌아가신 시인 윤중호 형수가 마포 합정동 부근에다 식당을 냈다고 한번 갈아주러 가자고 한다 비빔밥 전문점, 그간의 사정을 알고도 남겠다 언제 서울 올라가면 한번 가보자, 소주 서너 잔에 볼그족족 말씀하셨다 합정동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중호 형 편집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처가에 가서 공부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 사정을 말 하고 밥 먹으러 갔다 화평동 냉면집에서 돼지갈비와 왕냉면을 먹었다 불현듯 아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장모님께 자랑했다 부부의 날 기념으로 이이가 선물한 것이라고…… 모두들 부러워 하는 눈치다 사실, 그 반지는 친구가 술김에 사서 선물한 것이었다 아내의 자존심을 생각하자 육수처럼 끓었다
외국인 결혼 이주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지 두어 달이 됐다 하루는 집으로 전화가 왔다 서투른 한국말이었다 선생님, 저 무까리예요 저, 화원을 열었어요 꽃집이라는 말은 아주 멀리 있었다 무까리 친정어머니가 이역만리 고향에 있듯, 부영아파트 앞, 부영화원이에요 개업인데, 전화할 곳이 선생님밖에 없어서…… 뒷산 숲속에서 소쩍새가 섧게 울었다 나는 결국 개업식에 가지 못했다 먼 남쪽 바닷가 대안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다 무까리……. 부영화원…… 그리고 봄꽃 피었다 지는 5월
-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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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제법 찬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을이니까요. 곧 겨울이 닥쳐올 테고 맹더위 대신 맹추위가 기승을 부릴 테지요.
사는 게 참 그렇습니다. "와 이리 덥노?" 하다가는 금세 "와 이리 춥노?" 하면서 늙고 병들고 마침내 한 생을 마치는 거지요.
그렇다면 사람의 일생이란 게 원래 본디 그렇게 다만 슬픈 걸까요?
시편지 800호를 띄우는 마당인데, 뭐가 좋을까, 고민 끝에
유용주 시인의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문학동네, 2018)에서 한 편 띄웁니다.
「슬픔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라는 주제로 시를 쓰겠다더니
막상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은 덤덤합니다. 무덤덤합니다.
마치 옴니버스 영화를 찍듯이, 슬픔이라는 주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를 중심으로 세 개의 신(scene)으로 나눠 이야기를 풀어냈지요.
1연의 상황, 2연의 상황, 3연의 상황이 각각 다른 듯하지만 하나로 연결되고 있는데, 제가 굳이 그게 무엇인지를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무까리'라는 여주인공의 대사가 자꾸만 목에 걸리긴 합니다.
"개업인데, 전화할 곳이 선생님밖에 없어서......"
당신은 지금 어떤 처지에 몰려 있는지요, 어떤 상황에 몰려 있는지요.
당신의 처지와 상황을 찍는다면 그 또한 어떤 슬픔에 대한 신이 될까요?
그렇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무까리도 결국 슬픔과 함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끝내 잘 완성할 테니 말입니다.
각설하고,
어느새 시편지 800호라니요.
볼 것 없는 시편지를 애독해주시는 독자 분들 덕분입니다.
물론 스스로에게도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수고했다. 잘 했다."라고 말입니다.
한 명의 독자만 남더라도 시편지는 계속될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1,000호를 채울 수 있을까요?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보면 알게 되겠지요.
고맙습니다.
2021. 9. 27.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달아실출판사: (24257) 강원도 춘천시 춘천로 257, 2층
첫댓글 800호 시편지를 축하하고 감사드립니다.
1000호까지라야 회갑까지 쓰시면 충분히 가능하죠
김형석교수 나이까지 사시면 3000호까지도 가능한데요, 뭐.
조금 지겨울 것 같으면 2000호까지만 .....^^*
건필하시고 가을 시집 나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이팅입니다.^^*
축하합니다. 800호
계속 가다보면
그 끝이 있겠지요.
축하합니다^^
형님께는 늘 빚만 집니다 고맙습니다^^
@也獸 고맙습니다... 격려에 힘입어 계속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