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쯤 써봤던 연필. 16세기 영국에서 흑연으로 만든 연필이 발명된 이래 오늘날의 표준 규격 연필은 길이가 18㎝다. 이를 국제 표준으로 만든 회사는 1761년부터 9대째 이어오는 독일의 장수 가족기업 '파버카스텔'이다. 올해로 25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버카스텔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회사이기도 하다.
파버카스텔은 대표적인 독일의 중견·중소기업인 '미텔슈탄트(Mittelstand)'다.
연필 하나에 온갖 기술을 집약한 경쟁력을 기반으로 세계 140개국에서 매년 8억유로가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독일 전체 기업 가운데 99.6%(약 360만개)는 파버카스텔과 같은 미텔슈탄트가 차지하고 있다. 독일 수출의 60~70%는 전부 미텔슈탄트로부터 나온다.
그간 국내에서는 미텔슈탄트를 가리켜 보통 매출액 5000만유로(약 720억원) 미만의 직원 수 500인 미만인 가족기업으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독일 미텔슈탄트 연구소 IfM에 따르면 소유와 경영의 일치 기준에 따른 두 가지 요건만 충족하면 미텔슈탄트로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경영주나 오너 일가가 해당 기업의 주식을 최소 50%까지 보유하는 것이다. 둘째는 해당 오너 주주는 반드시 기업 이사회 구성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텔슈탄트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2010년 불거진 유로존 위기에도 견조한 독일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2012년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다. 헤르만 지몬 지몬쿠허앤드파트너스 회장이 1994년에 저술한 '히든 챔피언'과 관련된 이야기다. 지몬 회장이 제시한 세계시장 점유율 1~2위, 연매출 40억달러 이하, 수출 비중 50% 이상인 기업 중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업체라는 조건을 만족하는 히든챔피언 기업 수를 2012년 조사한 결과 독일이 1307개로 전 세계 히든챔피언의 48%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100년 역사를 넘긴 기업으로 2세 이상 가족경영을 이어간 경우도 그중 70%에 달했다. 미텔슈탄트의 10%는 동시에 히든챔피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서구 경영학자와 기업인들이 앞다퉈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벤치마킹하려 들었던 것처럼 2014년에도 독일 미텔슈탄트를 벤치마킹하려 전 세계인들이 독일을 찾았다. 2014년 7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German lessons' 제하의 기사를 통해 "벤치마킹 대상인 미텔슈탄트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며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와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지만 미텔슈탄트의 성공을 따라하기에 앞서 학교와 기업, 자본과 노동 등이 정교한 관계를 맺은 독일 시스템부터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영원히 빛날 것 같던 독일 미텔슈탄트의 신화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파도에 무너지고 있다. 독일은 정부 차원에서 2006년부터 일찌감치 '인더스트리 4.0'을 주창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수년 새 독일 미텔슈탄트 대부분은 디지털 시대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재단인 프리드리히에베르트슈티프퉁(FES) 연구소가 2015~2017년 조사한 결과 아디다스, SAP 등 대기업에 비해 독일 미텔슈탄트가 인더스트리 4.0에 뒤처진 것으로 드러났다. 미텔슈탄트 중 오직 5%만 전면적인 네트워크화를 달성했고 10곳 중 4곳은 종합적인 인더스트리 4.0 전략이 부재했다. 독일 국영 투자은행인 KfW에 따르면 미텔슈탄트의 20%만이 생산 자동화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컨설팅 기업 맥길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독일 전체 기업의 10%만이 디지털 잠재력을 키우고 있고 지멘스 같은 소수 우량기업들이 글로벌 디지털화 속도를 따라잡고 있다고 밝혀졌다. 맥길은 독일의 모든 미텔슈탄트가 디지털화에 성공한다면 2025년까지 무려 1120억유로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전통과 기술력을 쌓은 독일 미텔슈탄트도 성공 사례가 희박한 상황에서 대개 경쟁력과 기술력, 노하우가 모두 부족한 한국 중소기업들로부터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춘 혁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독일의 건전한 미텔슈탄트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어떤 변신을 시도하고 있을까.
1923년 공구 판매 전문점으로 출발해 가구·도어 소재나 각종 건축 하드웨어 등 20만종이 넘는 제품을 취급하는 독일 헤펠레(Hafele)그룹도 전형적인 미텔슈탄트 기업이다. 전 세계 150여 개국에 솔루션을 수출하고 있고 7300여 명의 임직원이 작년 매출로 13억유로를 벌어들였다. 한국에도 1995년부터 해외법인 헤펠레코리아를 세워 잠실 롯데월드타워,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등 국내 주요 건물 안에 솔루션을 공급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타국과 달리 창업 교육과 목공 DIY(Do It Yourself)를 가르치는 헤펠레목공방도 운영하고 있다.
최근 헤펠레그룹은 서울 논현동에 새로 쇼룸을 열고 국내 사업 확장에 나섰다. 모든 매출이 기업 간 거래(B2B) 형태로 발생하고 최종 소비재가 아닌 상부장 힌지(경첩), 서랍재 시스템, 미닫이문 시스템, 가구 커넥터 등 중간재 성격의 제품만 다룸에도 불구하고 엔드유저 공략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이는 이승호 헤펠레코리아 대표와 슈테판 후버 헤펠레 글로벌 총괄사장이다.
매일경제 비즈타임스는 후버 총괄사장과 이승호 한국대표를 함께 만나 독일 미텔슈탄트 기업인 헤펠레가 4차 산업혁명 시대 인더스트리 4.0을 어떻게 실천하고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를 열어갈 수 있을지 물었다.
먼저 이 대표와의 일문일답.
―헤펠레코리아는 헤펠레그룹 안에서도 독특한 해외법인이다. 전 세계 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DIY 목공방 형태로 로컬 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한국법인인 헤펠레코리아도 독일 헤펠레그룹과 마찬가지로 전체 사업 매출의 80% 이상이 B2B 기반인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 헤펠레목공방 사업을 시작한 것이 2002년도인데, 미국·호주·유럽 등과 달리 DIY 문화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한국 시장에서 최종 소비자들에게 DIY 문화를 알리고자 시작하게 됐다. 현재 전국에 80여 개 헤펠레목공방 파트너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구와 DIY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회사는 이케아다. 이케아는 가급적 가격을 낮게 책정해 비교적 고품질의 제품을 많은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DIY 방식을 택했다. 헤펠레코리아의 DIY는 이케아식 DIY와 어떻게 다른가.
▶이케아식 DIY와 헤펠레식 DIY는 추구하는 고객 가치가 두 가지 차원에서 다르다. 첫째로 헤펠레식 DIY는 최종 조립 단계만이 아닌 가구 제작을 위한 목공 제작 기술을 배우는 것부터 가구 자재의 선정과 가구 디자인까지 직접 소비자가 구상할 수 있다. 가구 제작에까지 직접 참여해 소비자의 경험과 정성을 담은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가구가 만들어진다. 둘째로 헤펠레식 DIY는 자연친화적 제품을 사용한다. 원목가구를 기본으로 석유화학계열 수지로 만든 페인트 대신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만을 갖고 생산된 천연 페인트를 사용해 제작하는 등 보다 친환경적인 DIY 제품을 추구하고 있다.
이어서 매일경제 비즈타임스는 후버 총괄사장과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하 후버 총괄사장과의 일문일답.
―헤펠레그룹은 전형적인 하드웨어 제조업종이 중심인 미텔슈탄트다. 세계경제는 이미 정보기술(IT)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뤄졌지만 최근 수년 새 헤펠레그룹의 매출은 꾸준히 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지난 12년간 헤펠레그룹의 글로벌한 성장 결과 헤펠레는 오늘날 매출의 80%를 수출이 차지할 정도로 성장 기반을 닦았다. 우리는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초기 단계의 신시장에 진출했고 필요할 때마다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렸다.
헤펠레 같은 독일 가족 소유 기업의 장점은 장기적인 사고방식에 있다. 상장기업은 사상 최대 실적이란 뉴스로 주주들을 분기마다 만족시켜야 한다. 반면 우리는 분기를 떠나 더 장기적인 시각으로 사업을 보고 있다. 직원들 역시 전형적인 가족 경영 회사에서 일하면서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 일에 고마워하고 있다.
하드웨어 기업이지만 헤펠레의 강점은 물류에 있다. 우리는 전 세계 52곳의 물류창고에서 매일 5800여 건, 135t의 주문을 처리하고 있다. 당신이 무엇을 주문하든지 전 세계 물류창고에서 일주일 안에 배달해줄 수 있다. 심지어 아마존 오지나 시베리아 지역이더라도 해당 국가의 물류창고에서 5일이면 보내줄 수 있다. 호텔이나 상업 빌딩 같은 곳에 제공하는 토털 서비스도 성공 비결이다. 우리는 설계 단계 영업부터 오퍼레이션까지 계속 관여한다.
―헤펠레그룹 입장에서 한국 시장은 어떠한 시장인가.
▶한국 소비자들은 일본 시장처럼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테스트 마켓으로 활용 가능하고 한국에서 받은 피드백으로 제품을 개선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파는 제품은 80%가 독일 본사에서 판매하는 제품과 같다. 모든 매출은 B2B 형태로 발생하지만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은 10~15%가량이고 나머지는 전부 시판용 시장(애프터마켓)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많은 중소사업자들을 위한 맞춤형 주문 요구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하드웨어 제품에 강점이 있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새로운 솔루션은 어떤 방향으로 개발하고 있는가.
▶우리의 주력 사업은 가구용 경첩, 주방가구 액세서리, 가구 커넥터 등이고 실제로 이익을 남기는 사업 부문이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우리는 제품군을 넓히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소비자들이 복잡하고 많은 기능을 압축해 넣은 제품보다 설치가 쉽고 쓰기도 쉬운 스마트한 제품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자들의 사용 편의성에 보다 집중해 신제품을 개발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과거 주방가구를 지지하는 다리 높이를 조정하려면 먼저 주방가구를 들어올린 상태로 개별 다리마다 조작을 가해야 했다. 우리의 주방가구 다리와 특별한 공구를 함께 사용하면 그냥 다리에 멍키스패너를 조이는 것처럼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다. 즉, 과거 방식에 따라 불편하게 설치하거나 유지·관리해야 했던 많은 하드웨어들을 보다 쉽게 다룰 수 있는 방향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비교적 보수적인 독일 미텔슈탄트들도 시대에 걸맞은 근본적인 경영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우선 헤펠레는 작년에 열린 세계 최대 가구 박람회 '2017 인터줌(Interzum)'에 참가해 'More life per ㎡(1㎡ 안의 당신을 위한 세상)'를 모토로 마이크로 리빙(Micro Living)이란 솔루션을 제시했다. 작은 공간에서도 최대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제품들이 바로 마이크로 리빙 제품들이다.
헤펠레는 전 세계 메트로폴리탄과 인근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특히 뉴욕 홍콩 런던 등 인구 밀집지역과 높은 부동산 가격을 기록하는 지역은 더욱 좁아진 공간 안에서도 다양한 니즈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식탁을 넣고 빼서 안쪽에 내장된 인덕션을 꺼낼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위한 오피스 책상이 5인이 충분히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다이닝 테이블로 변할 수 있다. TV를 보다 다용도 수납장으로 집어넣으면 반대편에서 침대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마이크로 리빙 솔루션은 모두 죽은 공간을 다시 살리는 해결 방안이 들어가 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호텔에서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헤펠레의 솔루션을 많이 적용하고 있다. 이비스앰배서더 호텔 외에도 한국의 5개 건설사에 공급한 실적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심각한 고령화 문제에 대한 솔루션도 준비하고 있다. 모든 주방 식탁의 높이 조절이 가능하고 휠체어를 탄 상태로 싱크대와 상부장을 쓸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다만 헤펠레의 고민은 아직 노인 대상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제품 성능이 좋아진 만큼 가격이 비싸지는데 한국의 높은 노인 빈곤율로 인해 시장이 아직은 활짝 열리지 않아 고민이다.
―4차 산업혁명, 인더스트리 4.0 모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중심이 될 전망이다. 헤펠레는 디지털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2017 인터줌'에서 헤펠레가 들고나온 다른 종류의 솔루션은 '스마트홈'이다. 주변 환경에 맞춰 가구에 네트워킹·지능형 제어 기능을 부여하고 사용자 커스터마이징도 지원하는 제품들로 구성됐다. 미텔슈탄트인 헤펠레그룹도 옛날처럼 하드웨어에만 집중하다가는 언젠가 중국 등 신흥국에 전부 따라집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세상이 매우 빨리 바뀌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2007년부터 지속적으로 헤펠레그룹의 최우선순위 미래 사업을 스마트 솔루션으로 결정했다.
우선 'Fit for Digitizaion(디지털화 적합성)'부터 추구하고 있다. 목표는 스마트 솔루션이지만 우리가 구글이나 삼성과 경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의 기존 강점인 하드웨어에 스마트 기술을 적용하기로 했다. 헤펠레는 가구에 사물인터넷(IoT) 모터를 달아 스마트폰으로 움직이는 가구를 만들 수 있도록 프로토콜을 제공하는 신제품 'BLE박스'를 만들었다. 기존 IT 거인들의 스마트홈 솔루션이 그들이 다루지 않는 가구 하드웨어 영역에까지 도달하기 위한 중개 솔루션으로 BLE박스가 활용될 전망이다. BLE박스는 모든 가구 하드웨어, 도어 솔루션과 네트워킹이 가능하게 개발됐다. 6~7개 스마트 솔루션 제품군은 지난해 인터줌에서 소개된 이후 개별 시장별로 인증 절차를 밟고 있다.
―모범사례로 평가받던 독일 미텔슈탄트들이 오히려 인더스트리 4.0에 뒤처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래 경제는 소위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를 앞세운 디지털 회사들이 주도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여전히 헤펠레그룹은 독일의 전형적인 미텔슈탄트 회사다. 그러나 대기업과 달리 상대적으로 유연한 조직과 빠른 의사결정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분산되고 높은 자율성을 지닌 조직으로 글로벌 그룹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개별 시장의 니즈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더스트리 4.0은 독일과 다른 선진국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고 일반적인 헤펠레그룹의 고객사들도 중소·중견기업인 경우 적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독일 미텔슈탄트들도 인더스트리 4.0을 채택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생산성을 끌어올릴 것이다.
헤펠레그룹도 고객들에게 디지털 방식으로 서비스 지원을 하고 있고 CAD(컴퓨터자동화설계)와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컴퓨터보조생산) 데이터 등을 통해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경직된 노동시장도 제조 중소기업들로 하여금 인더스트리 4.0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우리의 스마트 솔루션은 FAANG 회사들의 솔루션과 보완재가 될 수 있다. 그들 입장에서 우리 시장은 매우 작은 시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