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행위의 추억
내가 중학교에 다닐적에 큰이모부님께서는 김해의 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를 하시는 이모부님의 외삼촌으로 부터 추천을 받아서 진해의 해군본부에서 문관으로 직장을 구하셨는데 자유당시절이었다.
마산에 세를 든 집이 있었는데 직책이 미국에서 들어오는 밀가루수송선에서 큰 추럭으로 밀가루를 4일동안 실어 냈는데 시장에다가 팔아서 돈을 챙겨 가방에 넣어서 상관에게 갖다바치는 직책이라고 외할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하수인인 셈이다.
떡을 만지는사람밑에 있으면 떡고물이 떨어진다고 돈을 만지게 되는데 그당시 이모님이 새를든 집에는 일본산 자노메재봉틀이 있었고 하이파이전축이 있었으면 마산역전에서 제과점을 차리셨다.
내가 1959년에 완행열차를 타고 삼랑진역에서 환승을 하여 마산역전의 빵집을 찾았는데 주소는 필요가 없었다.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던 내가 수세식의 으리으리한 집에갔는데 모두들 밥을 공기에다가 먹으니 나는 한창먹을때이니 두그릇도 모자랄지경인데 밥을 더 달라고 하면 흉을 볼것같은 마음에서 항상 배가 고팠으니 내가 좀 덜 떨어진 쳥년 같았다.
돈을 만지니 소가도 생기고 내가 들어서 이름을 아는 장미화라는 걸프렌드도 생기게 되는데 이 걸프렌드가 새로운 보이프렌드가 생겼는지 어쨋는지는 몰라도 관계를 끊으려고 조사를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소가에 은익을 하고 계시다가 다시 우리집으로 오셔서 은둔생활을 하게 되시게 되는데 그때 나는 일본가요곡을 알았다.
일본의 고음가수 미하시미찌야[三橋美智也]의 죽는것 보다도 더한 버림받은 남자의 심정을 노래한 おさらば東京[오사루바도꾜],
사과꽃이 필즈음 사과꽃같은 고향에 두고온 처녀의 그리움을 노래한 リンゴ花咲く故郷へ[링고하나사꾸교교해:능금꽃피는 고향으로.]등이 있다.
나중에 당국에서 수사를 시작했다는 말이 거짓말로 탄로가 나서 자유인이 되신 후에 금광을 사셨는데 자유당 국회의원에게 빼앗겨 버렸지만 어디에 호소할곳도 없았으면 가난뱅이로 사시다가 돌아사셨다.
두 형님은 쌀한가마니씩을 준다는 정부에 속아서 가입을 했다가 형무소에서 줄줄이 죄수를 엮어서 대빼이고개 옆의 구덩이옆에다가 세우고 총살형을 시켰다.
그후 이모부님께서도 형무소[그당시의 이름]에 투옥이 되신후에 고문을 받았는데 양손목을 등뒤로 묶은 후에 천정에다가 달아매고 고문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어깨관절의 탈골로인해서 손목과 발목이 직선이 되셨단다.
다른이야기는 나의 작은동생의 장인어른의 동생은 장성광산을 경영을 하는데 탄의 질이좋고 채탄을 많이하여 돈을 버니 혁명에 가담을 했던 이모씨 실세장군이 탄광을 빼앗기위하여 UDT군인을 데리고 와서 추럭이 지나가는 신작로에 일열로 누워서 있으니 판로가 없어져서 결국 탈취를 당하고 난 후에 사장을 유치장에다가 가두었단다.
그러니 어디다가 고소도 할수가 없고 해보았자 지게 되는데 형이 백방으로 관청에다가 호소를 했지만 석방이 아니되니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감을 하시면서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서 넣고서야 자유인이 되셨단다.
빈 털털이가 되시니 미국의 내 동생집에 오셔서 같이 살다가 우리집 옆집고향친구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옆집부부가 그로스리 가게로 일을 나가니 사장어른 부부가 식사준비도 하고 집 청소도 하시면서 사장어른께서는 우리집 텃밭에다가 마디호박을 심어서 진미식품에 내다 팔았다.
위의 경우로 볼적에 언론이 통제가 되니 부정행위가 판을 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법치국가에서 억을함을 당하게 되는데 이씨조선때 관리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부과하게 되니 상민들은 차라리 일본의 반상의 차별이 없는 정치제도를 더 선호하는 천민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