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울산에는 도예전이 귀했다. 보고 싶었든 도예전을 보고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의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란 말이 생각난다. 4~50대에는 일에 찌들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이제는 하고 싶지 않는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사실 나는 도예는 잘 모른다 그래서 동행 할 지인에게 좀 일찍 출발하자고 양해를 구하고 1시간 전 전시장에 도착했다, 작가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노린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오는 손님을 위해서 깔끔하게 디자인 된 도록이 비치되어 있었다. 도록의 첫 페이지에 작가는 이렇게 적어 놨다.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흙을 주무릅니다”
참 아름다운 겸손의 표현이다. 질곡(桎梏)이란 사전적 의미에서는 ‘마음과 몸을 속박하여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정리 해 놨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마음과 몸을 구속하지 않고 이런 작품을 잉태 시킬 수 있을까. 작가는 오히려 질곡을 즐겼다. 질곡으로 승화시킨 작품 앞에서 자꾸만 발걸음의 속도가 늦어졌다. 특히 작품 속에는 무채색으로 무늬도 은근히 숨어 있으니 더 사랑스러웠다.
계획대로 작가로부터 직접 작품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의미와 제작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오기 까지 최소 8~12공정이 필요 했을 것이며, 작가의 혼이 손끝으로 전달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미세한 흙 입자인 점토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어 이를 900도이상의 불에 초벌구이 한 다음 광물질이나 재로 만든 유약을 바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가마에 넣고 유약의 특성에 따라 1260도에서 1280도까지 재벌 구이를 하면 성질과 빛깔이 다른 작품이 나온다고 한다. 불의 온도와 시간에 따라 작품이 달라진 다란 뜻으로 이해했다. 가만히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매끈함 보다 투박한 질감으로, 화려함 보다 모자란 듯한 색감이 아름다웠다. 특히 작가가 좋아하는 기법인 코일링 기법으로 오브제를 만들어 나가는 진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하여 판화가 박현수선생은 이렇게 첨언을 해 주었다. 선의 질감과 청자 빛에서 나오는 옥색 물결은 흙의 밀도와 불의 성질을 다룰 줄 모르면 이런 작품을 절대 구사할 수 없다고 극찬 하였다.
유구한 역사 속에 수많은 유물들이 많지만 그 속에 도자기는 늘 대표 선수였다. 여기 귀한 작품들 또 한 천년의 역사를 머금고 다음 세대에 긴 얘기로 전해 주리라 믿는다. 오늘 작품들은 화마 속에서 최소 1200도씨가 넘는 뜨거운 불에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결과물들이다. 어찌 인간도 이와 다를 수 있어리라. 인간 또 한 시련과 고통 없이 성공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봤다.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떠나지 않으면 만남도 없다’ 오늘 이 글은 울주문화원에서 낯선 세상을 엿보고 온 나의 감동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