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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문제 1] <제시문 1>과 <제시문 2>의 내용을 요약하시오. [문제 2] 제시문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입장에서 나머지 입장을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비판하시오. |
(가) 개항 당시 조선에는 자본의 축적도 없었고, 기업적 정신에 충만한 계급도 없었다. 대규모 생산을 감당할 수 있는 기계도 기술도 없었다. 아니! 이러한 것들의 존재를 희망하는 사정도, 필연케 하는 조건도 구비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오직 쌀․보리의 생산자인 농민, 여가 노동에 가까운 수공업자, 잉여생산물, 사치품의 거래자인 상인, 이들을 위해서 모든 권리를 향유하고 모든 잉여를 흡수하는 관리, 양반들뿐이었다. 자본주의 생성의 조건과 거의 정반대의 요소뿐이라고 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출발점에 있어서나 성장 과정에 있어서나 외국의 자본과 기술능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가케 <조선사회경제사 연구> 1933.
(나) 조선 후기에는 사회 구조가 동요하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 구조의 근간이 되는 신분제가 전면적으로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농민층 내부 계층 분화 현상과 그에 따른 국가의 대농 정책으로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전은 농민층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봉건제의 해체 과정을 의미하는 전환기의 현상이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봉건제의 재조종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보수적인 사회 정책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는 이 상반된 입장과 발전 방향이 상국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후자의 조정이 전자의 발전과정에 의해 극복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농촌 사회의 이러한 두 국면은 농촌경제의 문제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전호 경제의 여러 가지 문제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당초에는 없었던,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외적이었던 양반 신분의 소유자가 소작 전호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게 된 점, 토지 소유권과는 유리되어 있는 경영형 부농이 등장하고 있는 점, 민전 내 대부분의 지주 전호 간에는 봉건적인 지배 예속관계를 인정하기 어렵게 된 점. 자주권이 아직 강력하기는 하는 소작권이 매우 발전하고 있는 점 등은 전자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김용섭. <속양안의 연구,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1에서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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