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인용문이 나돕니다. 개중에는 역사에 관련된 것들도 많지요.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역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라 익히 알려져 있는 다음 문장일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문장이 유명해진 건 역시 축구 국가대표팀 한일전 때 응원걸개로 걸리면서 일겁니다. 이후로 주구장창 인용됐지요. 무한도전 역사특집이라든가, 그 외 여러 언론사라든가, 심지어 역사를 가르치는 인터넷 스타강사의 인터뷰에서도 등장하더군요. 물론 대부분 신채호의 말이라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은,
제 성격대로 좀 말하자면...
‘이런 멋있는 말 하면서 역사왜곡하지 마!’
여하튼, 위의 인용문은 보통 신채호의 말로, 좀 더 나가면 그의 대표작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문장으로 와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단언컨대 <조선상고사>에는 저런 문장이 안 나옵니다. 직접 확인했습니다. 전혀 안 나옵니다. 비슷한 어감의 문장도 없습니다.
그 외에 신채호의 저작인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그리고 유명한 <조선혁명선언> 등에서도 이런 문장은 발견한 바 없습니다. 간혹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가 와전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문장도 명확한 출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조선상고사>에는 절대 안 나옵니다.(명확한 출처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그나마 <독사신론> 서론에서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라는 문장이 나오기는 하는데, 위 유명한 문장과는 구조가 좀 달라 보입니다.
그럼 대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은 어디서 툭 튀어나온 말일까요? 일단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영국의 윈스턴 처칠입니다. 처칠이 1965년 라디오 연설에서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과거를 잊은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란 말을 했다는 견해가 있지요.
근데 이것도 의심스러운 게 처칠은 1965년 1월 24일에 사망합니다. 물론 사망 직전에 라디오 연설을 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확신하기에는 좀 그렇지요.
그럼에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건 영국 정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아이버 케플린(영국의 정치가)의 몬테카시나 전투 관련 기고문에서 저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국회의원들도 저 말을 당당하게 신채호의 말이라고 인용하는 일이 잦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요. 그 외에 뉴멕시코 주립 문서보관소에서 저 문장을 처칠의 말이라고 간판을 달아놓은 것 정도를 근거로 들 수 있겠습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다지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역사학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말인 만큼 비슷한 말은 은근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그의 저서 <이성의 삶>에서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과거를 기억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지요.
종합하자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누가 처음으로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신채호 선생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요. 그럼에도 여기저기서 확인도 되지 않은 문장을 선생의 명언이랍시고 인용하고 있으니 참 씁쓸합니다.
개인적으로 선생의 어록 중 더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건 다른 문장이라 봅니다.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의 결점’ 중에서
신채호의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역사 자체를 위해서 연구되어야 합니다. 다른 목적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지요. 역사를 기억한답시고 역사를 왜곡하고, 그걸 확인하지도 않은 채 영향력 있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대놓고 쓰는 일은 신채호의 정신에 제대로 역행하는 짓이니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