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이민을 가는데 정든 서울거리 이름을 잊을까 걱정됐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신체의 각 부위에 비유해서 외자는 것이었다.
"귀는 우이동,
눈은 안국동,
코는 후암동,
입은 구로동,
어깨는 견지동,
양가슴은 쌍문동,
엉덩이는 응암동,
왼발은 외발산동,
오른발은 내발산동."
둘 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이 표현들은 모두 서울의 동명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풀이한 것들이지만, 그 동명의 실제 유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응암동은 임금이 매를 데리고 나와 사냥터로 쓰던 곳인데,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방학동은 학이 앉아 놀았다는 데서, 수표동은 청계천의 수위를 재던 석표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사는 동네의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자가 취재하며 열 사람에게 물었더니 두 명만이 자기 동네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한 사람은 사직공원이 있는 사직동에, 또 하 사람은 TV드라마로 유명해진 압구정동에 사는 사람이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한성부라 하여 우리나라의 수도였으며, 백제의 도읍지인 위례성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남경이라 했다. 따라서 서울에는 삼국시대부터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다. 또한 개천이나 바위 등과 같은 자연물과 관련된 지명, 풍수지리와 관련된 지명도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지명은 크게 나누어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 및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수립 이후 등 대강 7차의 개혁을 거쳤다. 여기서는 현재 서울의 법정동명으로 돼 있는 4백 71개 중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오는 동명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궁정동은 영조 생모 사당에서 유래<
오랜 역사를 지닌 서울에는 궁, 관청, 대문, 누각 등의 유물, 유적이 많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유래된 동명도 많다. 지금의 종로1가 일대는 성안을 중심으로 하던 옛날 한양에 있어서 동서남북 4대문의 통로를 연결하는 십자가였던 만큼, 조선 초 한양 천도와 함께 서울의 중심지요, 대 시가였다. 아침저녁으로 종을 쳐서 도성의 8문을 개폐하게 하던 종 루가 세워진 후로는 이 거리를 종루 십자가라 불렀으며, 구름이 바람에 따라 흩어졌다 모였다 하듯이 종을 치는데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에 모였다 흩어졌다 하므로 일 명 운종가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종로거리의 옛 모습을 여실히 상기시키는 조선 초 문인 권우의 시가 있다.
지금의 종로의 명칭도 이 거리에 종루가 세워진 데서 연유한다. 화신 백화점 건너편에 있는 보신각이 바로 그 종루. 위치와 명칭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종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10.26 사건으로 유명해진 궁정동은 종래의 육상궁동, 온정동의 이름을 합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청와대 안에는 지금도 육상궁의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조 21 대왕 영조가 종묘에 들지 못하는 생모 최숙빈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세운 궁이다.
그런데 최숙빈이 궁중의 일개 나인으로서 숙종을 모시고 영조를 낳기까지에는 인정이 풍기는 일화가 있다. 인경왕후 김씨가 20세로 죽고, 경종을 낳은 장희빈의 위세는 당당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동 식어 갔다.
그러던 어느날 궁중을 거닐던 숙종은 최나인의 방에서 제사 드리는 모습이 비치는 것 을 보았다. 사연을 물은 즉 최나인은 "중전이 비록 세상을 떠났으나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어, 생신 날마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 지낸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녀의 지성과 인정에 감동하여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진 최숙빈의 소생인 영조는 후에 왕이 되어 어머님을 길이 모시고 싶은 마음 으로 육상궁을 지은 것이다.
이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한다. 이는 최숙빈 외에 왕의 정실이 아니면서도 임금을 낳 아 궁호를 받은 6개의 궁묘를 이곳으로 모두 합한 데에서 온 것이다. 그 중에는 최숙빈 을 박해하던 장희빈의 신위도 있어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인경궁루의 위?아래 누상,누하동<
누상동, 누하동은 이전의 누각동이 나뉘어 생긴 동명이다. 누각동이란 명칭은, 동명이 다. 누각동이란 명칭은, 광해군이 건립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완성치 못하고 그후 폐멸된 인경궁의 일부 전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해군은, 인왕산은 석산이 돌기 하고 인왕이란 두 자가 길하니, 인왕산 아래에 왕궁을 세워 거처하면 장수하고 태평성대 를 이룬다는 한 중의 권유에 따라 인경궁을 건립했다고 한다.
연희동도 지금 연세대학교 자리에 있던 연희궁에서 따온 이름이다. 종로구의 원서동은 창덕궁 후원의 서쪽에, 원남동은 창경원의 남쪽에 위치해서 붙은 이름이다.
소공동이란 동명은 조선 태종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작은공 주골'이라 하던 것으로, 한자로는 소공주동이라 했고 이를 줄여서 소공동이라 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 궁에 일군과 명군의 사령부가 주둔하기도 했다. 일군은 처음에는 이씨 왕조의 역대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종묘에 주둔했는데, 밤마다 많은 군사들이 피를 토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 종묘에 불을 지르고는 이 궁으로 주둔지를 옮겼다고 한다. 일군이 철수한 뒤에는 우리나라에 지원을 온 명군이 주둔했는데, 이후로 중국사신이 입경하면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 후 이 자리에는 구한말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원구단'이 설치되었음, 일제 시대 에는 조선호텔이 세워졌다.
또한 조선시대 관청에서 유래한 동명도 육조를 위시한 중요한 관아가 있어 '육조앞거 리'라 불리던 세종로 일대에 많이 있다.
경복궁 서편의 체부동은 '체찰사부' 또는 '체부청'이라 불리던 조신시대의 관청이 이곳 에 있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체찰사부는 임금의 명을 받아 장병들을 감찰, 독려하던 곳이었다.
이 체부동과 얽힌 한 가지 설화가 정해 온다. 옛날 이 체부동에는 보물을 많이 가진 공 주가 살았었다. 공주는 죽을 때 소중히 간직해온 보물들을 석함에 넣어 혼자만 아는 뜰 안 땅 속 깊이 묻었다. 그 뒤 이 공주의 집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새로운 주인 마다 얼마 동안씩은 그 보물함을 찾기 위해 뜰안의 이곳 저곳을 깊이 파보곤 했다. 하지 만 공주가 묻었다는 보물 석함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주의 보물이 묻혀있다는 그 집은 옛날부터 '석함가'라 전해 온다고 한다. 정말 그 보 물함은 지금도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인지, 재개발 사업이라도 벌여야 할지 모를 일이다.
내자동, 내수동, 도염동은 모두 그곳에 있던 조선시대 관청에서 유래한 동명이다. 내자 시는 궁중에 술? 기름? 과일 등을 공급하던 곳이며, 내수사는 곡식? 포목? 노비 등의 수 요를 공급하던 곳이고, 도염서는 궁중에 들이는 직조물을 염색하던 관청이었다.
경복궁의 동편 일대는 옛날부터 간동 또는 사간동으로 불려오는데, 이는 경복궁의 동문 인 건춘문의 길건너편에 사간원이란 관청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사간원은 그 명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주로 왕의 과실과 정치의 과오를 간하여 시정을 촉구하던 관청이다. 군주제에 있어서 왕의 전제를 견제하던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곳 이다. 사간원의 관리들은 다른 관직을 겸임하지 못했으며, 사복차림의 외출을 금해 사적 인 교제를 막으려 했다. 이는 그 직무를 공정하게 집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간원은 백성과 신하의 말을 귀담아 듣는 훌륭한 왕에게는 우대 받았지만, 전 제와 횡포를 일삼는 왕에게는 눈의 가시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폭군인 연산 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던 것이다.
종로구 계동은 전에는 '계생동'이라 했다. 그런데 계생동의 원명은 '제생동'이요, 이는 이 지역에 '제생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제'와 '계'의 음이 서로 혼동되어 나중에는 제생 동이 계생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제생원은 이조 태조 때 설치한 민생 구제기관이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모아 양호하고 치료도 해주었다. 성내에 인가가 조밀해지면서는 미아가 많이 생겨, 어떤 자들은 미아를 숨겨 길러서 노비로 삼기도 했다. 이에 세종은 미아를 제생원에서 수용, 양육케 했다. 어린이를 잃은 부모들은 모두 제생원으로 가서 일정액을 내고 아이를 찾아 기게 했으며, 일부 아이들을 양자로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초의 제생원은 양로, 보육, 무료치료, 미아보호 등의 광범한 사회사업을 수 행했다. 제생원은 이외에도 향약재를 직접 재배하기도 했다. 따라서 제생원이 있던 계동 일대에도 공한지를 이용한 약초 재배가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사실과 결부하여 '계동'이 란 이름이 한약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생기게 되었다.
이태원동은 조선시대 이태원이라는 역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다. 원래의 옛 이태원의 위치는 현재 군인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나, 일찍이 일제에 의해 군용지 로 책정되어 주민들은 현재의 이태원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과거의 이태원은 그 위치가 남산의 남쪽에 있어 당시에는 사수가 수려한 계곡이었으리 라 생각된다. 따라서 조선 초부터 여행자를 위하여 역원을 지었던 것 같다.
이태원이란 명칭은 옛 기록을 보면 李泰院, 梨泰院, 異胎院 등 여러 가지로 씌어졌다. 이태원이란 이름은 효종 때 이 동네에 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 하며, 일설에는 임진왜 란 당시 침입한 왜병들이 마을에 있던 절에 머물면서 여승들을 겁탈하여 임신케 하여 그 절을 이태원이라고 속되게 불렀다고도 하고 또 왜병과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 하 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홍제동도 조선시대 이곳에 홍제원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홍제원은 중국사신이 서 울로 들어올 때 예복으로 갈아입던 곳으로,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침소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병자에게는 약을 주기도 했다.
>4대문(4소문에서 생긴 것도)<
조선의 한양 천도와 함께 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세워졌다. 여기서 유래한 동명도 많다.
세종로 네거리에서 서쪽으로, 전에 서대문이 있던 곳으로 가는 큰 길의 주변을 신문로 라 한다. 이곳은 일제시대에는 서대문정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 길가 서쪽 언덕 위에 도 성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는데 그 위치가 몇 번 변경됨에 따라, 서전문 또는 신문 즉 '새문'으로도 불렀다. 이에 따라 이 부근에는 전부터 신문내 즉 '새문안'이란 동리가 있었으며, 지금도 새문안교회라는 기독교회당이 있어 그 이름을 이어 오고 있다.
이 서대문은 1915년 도로 확장고사로 철거되었는데, 이때 문루에서 불상과 많은 보물이 나와서 건물을 구입한 사람이 큰 횡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의 서대문구라는 명칭도 이 문에서 유래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광해군 때에는 이 새문안에 왕기가 있다는 풍수가들의 주장에 따라 경덕궁 즉 뒷날의 경희궁(구 서울고등학교 자리)을 새로 지었으며, 숙종 이후에는 이 경희궁이 별궁이 아 닌 국왕의 시어소로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때로는 궐문 앞이 대로가 되어 번잡하다고 하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서소문을 이용케하기도 했다.
혜화동은 이전의 혜화문내동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글자 그대로 혜화문 안동네란 뜻이 다. 혜화문은 동족에 있는 작은문이라 하여 '동소문'이란 부르기도 했다. 지금 혜화동에 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부르는 것도 거기에 동소문 즉 혜화문이 있었기 때문이며, 성북구의 동소문동도 여기서 유래했다.
영조 때에는 혜화문 위에 특별히 문루를 지었는데, 그 천장에는, 도성의 다른 문루에는 용을 그린 것과는 달리, 봉황을 그렸다. 이는 혜화문 밖에 잡새가 많아 그 피해가 심했 기 때문에 그것을 방제한다는 뜻으로 조류의 영장인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한편 중구의 서소문동도 서소문이라 속칭하던 소의문이 이곳에 있던 데에서 유래했으 며, 중구 홍인동은 동대문이 본명인 '홍인지문'에서 유래했다.
중구 광희동 역시 '광희문'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광희문은 속칭으로는 '수구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 위치가 청계천의 수구에서 가까운 관계라든지, 남산 동북 기슭 일대의 물이 이 문 부근을 지나 한강으로 빠지던 데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수구문이 시체의 출구를 의미하는 '시구문'으로 바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임지왜란 당시에 "구수문 밖에 시체가 산적"했던 현상과 관련있다고도 한다. 수구문 밖 신당동에 는 공동 묘지가 있었다.
한편 서울에는 왕족의 능이나 묘에서 유래한 동명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구 정동 과 성북구 정릉동이다. 정동은 조선 태조의 게비인 신덕왕후 강시의 정릉이 있던 곳이 며, 태종때 현재 성북구의 정릉동으로 옮겼다. 성동구의 능동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중의 비 순명 황후 민씨의 능이 있던 데서 유래했다.
효창동의 동명은 효창원에서 연유한 것인데, 효창원은 조선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 원으로 처음에 효창묘라고 했다가 고종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여기에는 문효세자 의 생모인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 장녀인 영온 옹주의 묘도 있었다.
>폐비 윤씨의 무덤 터 회기동<
동대문구 휘경동도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이 있던 데서 유래했다.
동대문구 회기동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회묘가 있던 데에서 생긴 이름이다. 연산군은 이를 능으로 승격하여 회릉이라 했으며 이 동네는 회릉동이라 불렀다. 그러나 연산군이 쫓겨나자 능은 다시 묘로 되고 동네는 회(懷)묘동이 되었다. 후에 이 회자는 다시 음이 같은 회(回)자로 바뀌어 회묘동으로 되었다가 회기동이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농업을 위주로 했던 만큼 매해 봄이면 왕이 친히 적전에 나아가 밭을 갈고, 농단에서 제사를 드려 중농의 모범을 보이고 농민을 격려했다. 또 궁중의 후 원에는 대개 한족에 논밭을 만들어 곡식을 심고, 수시로 그 작황을 살피며 전국의 작황 을 생각했다. 이러한 임금의 모습을 보여 주는 조선 영조의 시가 전해온다.
열성조의 어진 정치 농사를 근본 삼은 것이 뒤를 이은 이 몸인들 전원을 어찌 잊으리.
뙤약볕 쪼이고 가물 때가 되면,
네치 이상의 두께로 결빙되었을 때 채취하여 이곳에 저장했다가, 동빙고에 저장한 얼음은 국가의 여러 행사에 쓰고 서빙고 의 얼음은 궁궐과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도봉구 창동에는 나라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1910년까지 있었으며, 강서구 염 창동은 조선시대 한강을 통해 한양에 올라오는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던 데서 유래 했다.
은평구 역촌동과 구파발동의 동명은 옛날의 통신수단인 역과 파발이 있던 데서 유래한 다. 역삼동은 조선시대의 역촌인 말죽거리, 상방하교, 하방하교의 세 마을을 합한 듯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이중 '말죽거리'는 , 조선 인조 때 왕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목이 마르자, 신하들이 급히 판죽을 쑤어 임금이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으로 갔으므로, 그 후에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는 뜻으로 생긴 이름이다.
현재 한국일보사가 있는 중학동은 조선시대 이 부근에 '중학'이 있었던 데에서 연유했 다. 여기서 중학은 오늘의 중등교육의 학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서울의 중부지역의 학교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의 한양 천도 후 도성 안을 동캙서캙남캙북캙중의 5부로 나누고 각 부마다 학당을 설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중학은 당시 중부가 아닌 북부지역에 있었다. 이는 중학이 5부학당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었기에, 도성 안의 중심지역인 이곳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중구의 남학동도 남학이 그곳에 있던 데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동학이 동대문 북측, 서 학은 중구 태평로 1가 부근에 있었던만큼 중학의 위치는 천체적으로 보아서 과히 치우 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북학은 옥인동에 있었는데,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중학의 번창 에 따라 쇠퇴하고 말았다.
명륜동이란 동명은 일제시대의 전신인 명륜학원의 교명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조선 초부터 교육을 숭상한다는 의미에서 동부 12방의 하나인 숭교 방이라 했으며, 조선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과 유학생들의 강학과 명륜의 전당인 명륜당 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명륜동의 이름이 굳이 명륜학원에서 연유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지금 성균관대에 들어서면 첫눈에 보이는 것이 '탕평지비'이다. 이는 탕평책으로 유명한 영조 대왕이 세운 것으로, '탕탕평평 불편부당'이라는 옛글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라 한 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파를 이루어, 나라보다는 당파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여, 나라는 피폐해지고 살벌한 당파 싸움만이 계속되었다. 이에 영조는 유학을 가르치고 선 비들의 출입이 잦은 성균관 입구에 이 비를 세워, 붕당을 경계하고 그 시정을 촉구했다 고 한다. 이러한 탕평지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이 된다고 하겠다.
한명회의 놀이터 압구정동
옛날 한양에서 경치가 좋은 곳에는 문인, 세도가들의 정자가 있었다. 이러한 정자에서 유래한 동명의 대표적인 예가 압구정동이다.
압구정동은 모 TV의 사극 '설중매'로 유명해진 조선 세조 때의 한명회가 강에서 갈매 기와 더불어 지내겠다 하여 지은 압구정에서 유래했는데, 지금 그 정자 주위에는 현대아 파트가 세워져 있다.
이화동은 지금 이화동에는 '이화정'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 유명해진 이화정은 이미 조선 중종 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정자의 주위가 봄이면 배꽃으로 싸여 그렇게 불렀다 한다. 배꽃이 아니더라도 이화정 일대는 암석과 수림의 경치가 뛰어나고, 멀지 않은 곳에는 유명한 낙산약수 (일 명 이화장약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또 지금 이화동과 동숭동에 걸쳐 있던 옛날의 쌍계동 일대는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 림에 두 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흘러 도성 안의 명승지였다. 옛날에는 1, 삼청 2, 인왕 3, 싸계 4, 백운 5, 청학이라고 하여 도성 안 5대 명소 중의 3번재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