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품었다.
청봉 곽노연
극장 안의 불이 켜졌을 때,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어떤 이는 눈물을 닦았고, 어떤 이는 한참 동안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는 끝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된다. 집 안의 작은 화면에서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시 극장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어떤 이야기
는 큰 화면이 아니라 큰마음으로 봐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우리는 이미 단종의 운명을 알고 있다. 역사책에 적힌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 어린 왕은
왕좌에서 밀려났고 강원도 영월의 깊은 물길 곁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이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온 역사였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었는
지도 모른다. 중학교를 영월에 했기에 남달리 영화 속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았으나
영화가 주는 울림은 생각 이상이었다.
많은 사람이 왜 지금 다시 단종을 떠올리는가! 영화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밥상에서 시작
한다. 다슬기국이 담긴 그릇 하나와 그리고 그 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서부터다. 어린 왕은
백성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함께 밥을 나눈다. 왕과 신하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은 자리였다. 권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였다.
단종이 죽은 뒤,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이는 이름 없는 한 사람, ‘엄홍도’라는
사내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왕의 마지막을 지켰고 이 일로 평생 숨어 살았다. 역사책의
한 줄에 지나지 않는 이름이지만, 그 한 줄이 수백 년을 건너 오늘의 사람들을 영월로
불러들이고 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왕을 추모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확인하러 가는 것일지 모른다.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현실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때 가장
높은 권력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법정에 서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고 있다. 판결문
속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실패란 어떤 시도를 잘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그르침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전적 뜻을 읽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실패란 무엇일까.”
결과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을 향했던 것을
말하는 것일까. 단종의 삶을 떠올리면 그 질문은 더 깊어진다. 그는 결국 패배한 왕이었다.
왕좌를 지키지 못했고 살아남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실패한 왕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승자 편에만
머물지않는다. 때로는 패배한 자의 고요한 표정을 더 오래 기억한다. 영월의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500여 년 전 어린 왕이 바라보았던 그 물길을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바라본다.
그들이 찾는 것은 아마도 한 왕의 비극이 아니라 한 사람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품격일
것이다.
권력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힘이다. 그러나 존경은 아래에서 끌어올려지는 마음이다.
그래서 권력을 오래 쥔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잃은 뒤에도
품격을 잃지 않은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활시위는 이미 당겨져 있었다. 화살이 과녁에 닿을지, 빗나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현실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결과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화살이 어디를 향해 날아갔는지는 역사에
남는다. 아마도 사람들이 지금 단종을 떠올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과
만으로 역사를 이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방향을 향해 서 있었는지를
함께 묻는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상하게도 작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 그것은 한 왕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6.3.11.)
첫댓글
연송님 아직 관람하지 않으셨으면 꼭 다녀오셔요
네 바로다녀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