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상산사고[ 赤裳山史庫 ]
1610년(광해군 2)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睍)과 무주현감 이유경(李有慶)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1614년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했으며, 4년 뒤인 1618년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 璿源錄≫을 봉안하여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5사고 중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산실(散失)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1666년(현종 7)에 시작되었다.
이 때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등사·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三道儒生)이 300명이나 동원되었다. 이 사고의 설치를 계기로 사고의 수호와 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 사찰(守護寺刹)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성밖의 석굴(石窟)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하였다. 사고의 수호가 이와 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해 수호 사찰로 하였다.
조선 말기에 사고가 퇴락해 1872년(고종 9)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하였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시켰다. 그러나 산질(散秩)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 6·25동란 중에 분실되어버렸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원각은 부근 안국사(安國寺)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오고 있다. →사고(史庫)
♣ 안국사 [安國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적상지(赤裳誌)》에 따르면 1277년(고려 충렬왕 3) 월인(月印)이 세웠다고 하나 조선 태조(재위:1392∼1398)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柳正煥)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천불보전·청하루·지장전·삼성각·범종각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내부에는 본래 1772년(영조 48)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 도난당하였으며 현재의 탱화는 최근에 만든 것들이다. 삼성각 안에는 1899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있는데, 화기에 따르면 본래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 있었다.
그밖에 유물로는 범종과 괘불·괘불대·부도가 전한다. 범종은 1788년(정조 12)에 제작된 것으로 요사 옆에 걸려 있고, 1997년 8월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된 안국사괘불은 1728년(영조 4)에 의겸(義謙)·의윤(義允) 등 비구니 5명이 그린 것이다. 가로 1,075cm, 세로 750cm이며 가뭄 때 이 괘불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4기의 부도는 모두 석종형 부도로 조선 후기 유물이다.
♣ 안렴대(按廉臺)
정상 남쪽 1km 정도 떨어진 층암 절벽위에 위치한 안렴대는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기로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한다. 고려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 적상산 사고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 난을 피한 유서 깊은 사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안렴대라는 이름도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붙여진 것이다.
※ 안렴사 : 고려말까지 있던던 지방관리로 처음에는 안찰사(按察使)라 하다가 안렴사로 되었으며
다시 제찰사(提察使)로 바뀌었다가 다시 안렴사로 환원되는 과정을 밟았지만 제도로서는 고려말까지 계속 되었다. 이들은 각 도의 주현을 순안(巡按)하면서 ①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펴 출척 (黜陟)하는 일, ②민생의 질고(疾苦)를 묻는 일, ③형옥의 심치(審治), ④조부(租賦)의 수납, ⑤군사적 기능 등을 맡아보았던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각 주현(州縣)의 수령을 통할하여 중앙정부와 연결하는 중간기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급 행정관이면서도 그 관품이 보통 5품내지 6품으로 낮았고, 전임관이 아니라
행정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며, 또한 임기가 6개월로 매우 짧았다가 후에 1년으로 연장되었다.
♣ 적상산성 및 서문
적상산성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고려 후기 거란이 침입한 후 최영은 이곳에 산성을 쌓게 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도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고려 때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이미 산성을 이용하여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조선 광해군 2년(1610) 이곳에 조선시대 5개의 역사책보관소 중의 하나인 적상산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실록전, 사각(史閣), 선원각, 군기고, 대별관, 호국사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현재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 성 안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 산성에는 규장각에 소장된 "적상산성 조진성책"의 기록에 의하면 동서남북 4곳에 문이 있었으며,특히 북문과 서문에는 2층3간의 문루까지 솟아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북문터와 서문터만이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서문은 사적지 146호로 일명 용담문이라고 하였으며 성문밖에는 서창과 고경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창은 미창과 군기창이 있었으나 지형이 험하여 성내까지 운반이 어려워 조정에 상소하여 성내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고 전하며, 지금도 마을 이름을 서창이라고 한다.
♣ 장도(長刀)바위
장도바위는 고려말에 최영장군이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하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절벽같은 바위에 길을 막고 있어 앞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長刀)로 바위를 힘껏 내리치니 순간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다고 하여 장도바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장도바위 위에는 암반 위에 떨어짐 방지용 밧줄을 설치해 놓았으며 난간을 지나면 곧바로 적상산성사문지의 서문에 도착한다.
♣ 서창(西倉), 서창마을
서창(西倉)은 적상산성 서문밖에 병기(兵器)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는데 적상산성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어 이를 서창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창고가 있던 마을을 서창마을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거리도 가깝고 경사가 완만해 적성산을 오르는 주요통로였으며 지금은 등산객이 주로 찾고 있습니다.
제221차 전북 무주 적상산(1,034m) 단풍 정기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