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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記
-어느 덜 여문 진보주의자의 슬픈 실패
“노 대통령 검찰 처음에 잘못했다. 일반 사회도 서열이 있는데 검찰 그런 데는 딱 하고 서열 이런 게 얼마나 심하노. 그런데 젊은 여자를 내세우다니. 나이 많은 사람들이 밀려나고, 그래서 시끄럽지. 초긴데 좀 달래가면서 해야지.”
“노무현 대통령 사람이 보면 마음이 착해 속에 안 감추고 막 지끼니 가벼워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사람 보면 신실하다. 대통령은 그래도 하고 싶은 말 다할 수 없다. 앞으론 좀 떠억하고 권위를 좀 잡아야 한다.”
『양백집 추 소론필담』((주)에세이퍼블리싱, 2010, 17~18p)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지 꼭 1년이 되는 2004년 1월에, 화려한 수식어로 엮인 정치 평론가들의 백 마디 말보다, 수구세력의 모판인 영남의 소도시 영주에 사는 어느 이발사가 한 위 두 마디 말 속에 노무현 정권의 본질이 직관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는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당시에는 절실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쁨과 슬픔의 농도가 차츰 옅어지다가 종내엔 저 푸른 하늘 속으로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다.
노무현 그가 고향 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자진한지도 벌써 1주년이 되어간다. 2000년부터 그에게 관심 갖기 시작해 2002년 봄부터 시작된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그가 꼭 승리하기를 염원하였다.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분투를 통해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우뚝 섰을 때, 이제 ‘좋은 세상’이 온전히 펼쳐지리란 견고한 믿음이 내 온몸을 관통하였다. 이젠 과잉된 정치 관심을 마감하고 내 일상의 즐거움에 푹 빠져들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2009년 5월 23일 아침, 청천벼락이란 말이 국어사전에만 있는 말인 줄 여겼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 투신 사망’이란 급보가 떨어졌다. 그의 장례기간 동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비분강개하고 애통해 할 때, 나는 매우 담담하였다.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언어와 정치 행적을 지켜보았기에 그의 극단적 선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군사독재 시절 동안에 보인 그의 결기도 결기지만 대통령이 되기 위해, 되고 난 다음에 그가 하는 말을 통하여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가를 나름대로 파악했기에 그의 자진은 내게 전혀 낯설었다. 그는 그렇게 생을 던져버릴 위인이 전혀 아니었다.
그로부터 커피 한 잔 얻어 마신 일이 없지만 2001년 가을부터 시작된 ‘대통령으로 가는 마라톤’이 2002년 12월 19일에 그의 승리로 마감 될 때 까지 친노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 올린 글만 해도 참 많다. 민주당 경선 연설을 녹음해서 출퇴근 시간에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광주 경선에서 그가 이겼을 때는 ‘좋은 세상’이 가시권 안에 들어왔음을 예감했다. ‘산 자여 따르라’ 노래 테이프를 따라 부르며 곧 있을 민주혁명의 완성을 즐거워했다.
덕분에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고, 이듬해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엔 교사 대표로 참석해 그의 뒷줄에 앉았고 리셉션에선 그와 악수를 하였다.
국장 기간 동안 내내 침묵하다가, 1주기를 앞두고 영주작가 회원들과 함께 나선 봉하마을 문학기행 길, 애도하는 마음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으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그의 고향을 찾았다.
하늘은 잿빛 구름을 잔뜩 깔았지만 승용차와 관광버스로 온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생가를 들러보고, 무덤에 헌화 참배하고, 부엉이 바위 돌아 오르고, 사자바위와 정토원을 찾는 표정은 내내 엄숙하였다.
노무현 그 만큼 극적인 삶, 성공과 실패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정치 행장을 보인 사람이 드물다. 노무현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 앞선 시대의 인물들인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고당 조만식, 이정 박헌영, 박정희 같은 인물들은 가슴 속에 많은 욕망을 품은 상태에서 갑자기 외적인 압력에 의해 타살되었다. 그에 비해 노무현은 스스로의 좌절감에 못 이겨 자기 목숨을 버렸다. 즉 앞의 인물들은 동력이 아직 팔팔할 때 갑자기 생명을 잃었으나 노무현은 이미 동력이 쇠진한 상태였던 것이다.
노무현을 지탱하는 동력이 쇠진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이야 말로 그의 시대를 평가하는 관건이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밑거름이 아닐 수 없다. 퇴임 후 자기반성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정리한 ‘나의 실패론’이야말로 반면교사,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의 정리대로 지난 10년 동안이 ‘진보주의 정권기’였고 지금의 이명박정권이 ‘보수주의 정권기’라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의 무엇이 어떻게 되었기에 한 때 승승장구 하던 진보주의 정권이 다수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는가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처방이야말로, 진보주의가 내적 충실을 기하고 보수주의가 현대성을 갖춰 알맞은 기간 동안 서로 교대로 집권하는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 명분과 도덕성 면에서는 진보주의 정권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전의 군사독재 시대나 6공화국 초기의 민주 정권 시절의 인사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 그 중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이전의 어느 대통령들보다 시대적 명분이 강했고 결벽증일 정도로 도덕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시대적 명분이 강한 것은 좋으나 그것이 현실성을 갖지 못할 때는 문제가 된다. 특히 자기만족적인 도덕적 우월성에만 근거해 정치 현실을 무시하고 시대적 명분에만 집착하게 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정치는 현실이다. 정치는 자기 눈높이만큼 사람을 키우기도 하고 깎기도 한다. 대부분의 민인들은 저 멀리 보이는 곳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고 선지자들이 외쳐도 가는 길이 어슴푸레하면 발걸음이 자작자작 할 뿐이다. 선지자들의 외침에 혹해 달음질치다가도 아차 싶어 주저앉거나 뒷걸음을 친다. 그것도 배가 불러야 선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지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아서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그런 점에서 소위 조중동 언론들을 가까이 하고 보수 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했어야 했다. 진보 쪽에서 아무리 나쁘게 매도해도 조중동은 우리나라 언론계에서 주류이다. 주류를 무시하고선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5년 임기 동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적대시 하였다. 조중동 역시 오기가 발동해서라도 더욱 치열하게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물어뜯었다. 대통령이 당선 전의 사감을 당선 후에도 갖는다는 것은 본인으로서나 국가적으로서나 비극이다. 어느 자리에서나 자기 생각을 말하길 즐겨하면서도 언론을 극도로 불신한 이중적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에 알맞지 않은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태도가 결국 참극을 초래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릇 지도자라면, 강골적 주관만 내세우기 보다는 부드러움과 여유를 함께 깔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새삼 알 수 있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으면 먼저 내 사람만 챙기겠다는 옹심을 풀고 인재를 널리 등용해야 한다. 대통령이 되도록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정도와 경우를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결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비록 정적이라 하더라도 유위유능한 인물이라면 나라를 위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등용해야 한다.
국가 일의 중심인 장관 임명에 있어서 특히 신중해야 한다. 각 부서는 각 부서 나름대로의 문화풍토와 위계질서가 있다. 오늘 자 뉴스에서 참여정부 시절의 청와대 수석이 한 말에서 보니, 고건 총리가 강금실과 김두관 두 사람에 대한 장관 임명에 반대했으나 노 대통령의 설득으로 장관 임명 부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고건 총리의 말은 이 글의 제일 앞에 나온 영주 어느 이발사의 말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이명박 정권이 여러 가지 면에서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점이 있지만, 장관 자리를 오래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난맥상을 보이게 된 원인은 잦은 장관 교체였다. 누에 똥 가리듯이 몇 달, 아니 한 달 간격으로 장관이 바뀌니 어디 정책 추진이 옳게 될 턱이 없다. 미국은 대통령의 임기와 장관의 임기가 같다. 그러니 정권이 힘을 더하게 되고 정부가 권위를 갖게 된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집권 초기의 ‘검사들과의 대화’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노 대통령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과정이나 끝이 결코 민주주의 정착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외려 검사들의 오만스런 기득권만 강화해줬다고들 평가한다. 그 때 강금실 장관이 아니라 검찰 출신의 중후한 인물이 법무장관이었다면 대화의 질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주 영리한 신예 검사들이 이미 노무현의 여린 성격을 간파했기 때문에 “(상고 졸업인 당신 노무현의) 정권은 유한하지만 검찰 권력은 무한하다”란 말을 정색하고 한 것이다. 기득권 수호 첨병인 젊은 검사들로부터 사법고시 합격자요 판사 출신인 노무현은 무시되고 상고 졸업자 대우만 받고만 것이다. 이후 10년 뒤, 중견 검사가 된 그들로부터 전임 대통령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일 정도인 가족들의 부정자금 수수 때문에 자존심과 체면을 몹시 깎이도록 모진 추궁을 당하고만 것이다. 그가 목숨을 던지기로 작심하고 결행한 데는 가족들의 부정도 부정이지만 비법적인 피의사실 공표, 조사를 받으면서 당한 수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특히 돈 받은 일이 결코 없다고 몇 번이나 확인받고 받은 부인이 결국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걸 실토하였을 때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믿었던 부인이 배반했을 적에는 필부도 눈앞이 캄캄할 진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명예로서는 부인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과 그동안 “절대로 부정한 돈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나 보통 전직 대통령 같으면 그 정도의 잘못 때문에 결코 목숨을 스스로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가장으로써 가족들의 잘못을 모두 안고 자진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다했다.
어느 이발사 말씀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이 착하고 사람이 신실하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권위의식을 멀리하려 하고 사람을 써도 권위적인 사람보단 소탈한 사람을 즐겨 쓴다. 생각인즉슨 말인즉슨 맞는데 생명체인 현실 정치는 그렇지 못하니 문제이다.
인사는 만사라고, 참여정부의 실패는 인사의 실패에 기인한다. 집권 5년 내내 인재풀이 넓고 깊지 못했는데, 초기 장관 등의 인사에서 특유의 ‘가벼움’을 보임으로써 중량감 있는 인사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게를 돌아보게 하여 참여를 망설이게 했다. 자기 편 사람만 가볍게 챙김으로써 나라 인재의 반인 보수 쪽 사람들의 참여를 원천 봉쇄했으며, 나머지 반에서도 민주당 계열 인사, 동교동 계열 인사들 등 반 너머 잘라내고 나니 쓸만한 인재는 나라 전체 인재의 2할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한미 FTA 문제, 보안법 문제, 노동법 문제 등으로 가용 인재풀이 거의 바닥 정도까지 줄어들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집권 초기 민주당에서의 문제점을 짚어보도록 하자.
먼저, 최대의 정적이었던 이인제를 안아야 했다. 정적이라 해도 민주주의 제도 속의 정당인 민주당을 함께 하는 한에는 그를 대우하여야 했다. 그랬다면 이인제 역시 장래를 보아서라도 협조 내지 방관적 입장을 견지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당이란 틀 속에서 경선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으면 민주당을 탈당하지 말고 임기 끝까지 함께해야 했다. 그 때 민주당에서 함께 탈당한 정동영, 김근태 등은 결국 배신을 때렸지 아니한가. 그 당시 어느 쪽에서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만들자고 먼저 제안했는지 몰라도 탈당은 결국 큰 패착의 시초가 되고 말았지 아니한가. 노무현 계열이 먼저 제안하였다면 그것은 오만 때문이었고, 정동영 계열이 먼저 제안하였다면 버거운 세력들을 단절하고 정동영 2인자를 굳히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여하튼 간에 대통령이 되도록 한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든 것은 짧게는 정권의 실수요 불행이었지만 길게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당 발전사를 왜곡시킨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이낙연 의원이 왜 장관 자리가 보장 된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는 민주주의 정당정치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민주당을 그대로 살려두었다면 탄핵도 없었을 것이고 인재를 널리 구해 쓸 수 있어 정권의 기반이 더욱 튼튼해지고 진보주의가 한층 영글어 우리나라의 발전이 성큼 눈앞에 다가왔을 텐데 말이다.
민중의 바다는 결코 좌절하지 아니하나니 2004년 12월 31일
대문 열어주고 문간방 내주고 사랑방 내주고 기어이 안방 내주고, 빈손으로 쫓겨나 낙목한천에 유리걸식하게 생겼네.
쯪쯪쯪 하수와 고수의 차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 야금야금 다 내주고 이제 내년 봄이면 우수수 과반 무너지고.
그리하여 시대 개혁은 한갓 봄날의 꿈이런가, 바람 타고 청와대와 국회로 들어간 어설픈 인간들 역시 바람 탈만큼 가볍던가. 엉겹결에 출세하다보니 아직도 남가지몽에 바져 기득보수 저들의 교활한 암수를 모른단 말인가. 이거 뭐 송양지인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쯪쯪.
그러나 수백 년 파도쳐온 민중의 바다는 결코 좌절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범선들을 준비한다.
『양백집 추 소론필담』((주)에세이퍼블리싱, 2010, 61p)
‘탄핵사태’가 승부수가 미끼로 걸린 낚시였는지 혐오 세력들의 법률적 반격이었는지는 후일 언제가 판별될 일이지만, 탄핵에 분노한 다수 국민들의 지지 덕분에 2004년 4월 15일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당선자가 과반수를 넘었다. 익숙한 정치 평론가들도 ‘감히 우리가 대통령을 뽑았는데 헌법 재판관 저들이 뒤집으려고 하다니, 고얀 것들!' 하는 다수 국민들의 원초적 분노가 그렇게 엄청날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다수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으로 하여금 과반수 국회의원 갖도록 하여 대통령과 집권 세력들이 그들 하고 싶은 대로 국가를 경영해보라고 밀어주었다.
그 시금석이 바로 2004년 12월의 보안법 등 4대 법안의 개폐였다. 보수 세력들의 반대가 매우 극심했지만 여당의석이 과반수였고 다수 국민들도 여당의 의도를 지지 또는 묵인하고 있는 상태였다. 치열한 야야 공방전이 계속되더니 회기 말이 되자 김원기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할까 말까 재더니 결국 포기하고 2004년 12월 31일 자정이 넘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정권의 권위는 추락하고 여당이 균열하는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치는 현실이라고 한다. 현실이란 말은 살아있는 생물이란 말이다. 생물이 살아있다는 것은 기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가 꺾이면 다시 살아나기가 어렵다.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할 때를 한 번 실기하면 다음부터는 바람 빠진 공 신세가 되고 만다. 이후의 열린우리당은 과반을 넘는 의석이 야금야금 무너지더니 코 꿰인 우둔한 코끼리 신세가 되어버렸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집권당을 통제하지 않고,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려는 의회 민주주의자로서의 노무현의 태도는 이상적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뿌리 내리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집권 2년 만에 조기 레임 덕 현상이 생겨 집권 세력 내에서 이미 후계자가 자기 몫을 챙기기 시작함으로써 노무현의 좋은 생각과 정책은 퇴색하기 시작하였고 정책 수립과 추진에서 난맥상이 노정되었다.
경호권, 역사에 길이 반면교사로 남으리 2005년 5월 1일
깨어있는 지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울리는구나. 정치는 현실, 맞지. 그러니까 작년 12월 말에 경호권 발동했어야지. 그것이 정치 현실이었어. 착한 아마추어들의 한계, 역사에 길이 반면교사로 남으리.
게도 잃고 구럭도 잃고 밀물은 저어만치서 슬슬 밀려오고, 이제 열우당 누가 업어갈꼬. 개혁 깃발 높이 들고 익사할 의인 있나? 열우당 맛 가는 건 별로다만, 개혁을 위해 흙 한 줌 보탠 사람들은 어이할꼬. 지길 넘들.
『양백집 추 소론필담』((주)에세이퍼블리싱, 2010, 126p)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신자유주의였다. IMF 구제금융이란 폭탄을 맞은 한국 경제 형편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는 절대적 경제 체제였다. 대중경제론자인 김대중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 경제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이미 닦여진 길을 걸어갈 수밖엔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미국이 요구하는 FTA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주의자들이 집권한 10년 기간 동안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적용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지만, 파탄 난 경제를 그래도 오늘날만큼이나마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10여 년 동안 추진된 신자유주의를 반성하고 더 나은 경제 제도와 정책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FTA가 계속해서 세계 여러 나라들과 체결 될 것인데, 괜히 주눅 들어 뒷전에 어슬렁거리지 말고 눈 똑바로 뜨고 달려들어 국익을 최대한 챙기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참여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는 시대적 정당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노동 문제에서도 정책의 실패만 되풀이 되었다. 이제 노동자의 권익이 보장되고 즐겁게 노동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좋아하였지만, 진보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룬 참여정부 집권 기간동안에도 많은 노동 문제가 발생하였다. 폭력 투쟁이 빈발하였고 전경은 영일이 없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중산층은 하향 조정되었다.
대북정책 수립과 추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충실히 이어 받아 그것을 한층 업그레이드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성과가 성공적이지 못했다. 두 번의 남북정상 회담은 장미빛 선전만 요란했지 구체적으로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금강산 관광 등을 통해 막대한 자금이 핵 개발에 투자 되었다는 보수 세력의 공격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닐 정도로 북한은 햇볕정책의 과실만 따 먹었지 진정으로 남북관계를 풀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북한이 진정성을 가졌다면 핵 문제를 순리대로 풀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어도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10년 동안 추진된 햇볕정책의 실패는 핵 보유, 미사일과 해안포 발사 등이 증명하고 있다. 지난 10년의 진보정권은 햇볕정책에 역이용 당하면서 코가 꿰어 북한의 요구에 종속되는 정책을 계속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권은 대북정책 하나만큼은 소신을 갖고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총격 사건을 빌미로 하여 금강산 관광을 끊어 핵 개발 자금줄을 차단하고, 식량과 비료 등의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도 눈 질끈 감는 강심장을 보임으로써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보아 바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민족공조, 인도주의 원칙 등의 미사려구 아래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질질 끌려가면서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주었지만, 그들의 요구를 무시, 차단하여 북한 정권의 버릇을 고치려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은 이전 정권보다 훨씬 중량감이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쏜다 해안포를 쏜다 방사포를 방열한다 등 등 무력시위를 하며 협박을 하는데, 그렇다고 우리 대한민국이 벌벌 떨며 겁먹어 저들에게 다시 코가 꿰어선 안 된다. 이참에 그들의 기세를 확실하게 꺾어야 하고, 설혹 그들이 무력 도발을 해온다 하더라도 맞받아쳐서 저들을 꺾어야 한다. 물론 인명과 재산, 사회 간접자본, 경제 시설 등이 살상 당하는 전쟁을 최대한 피해야 하겠지만, 피해가 겁나 전쟁을 사양하고 굴복해선 안 된다.
10년 동안 이루어진 남북교류를 통해 남쪽에선 북한에 대해 더 깊이 알고 북쪽에선 남한에 대해 조금의 정보와 이해를 갖게 된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큰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햇볕정책의 깊은 의도대로 북한 주민들이 남쪽에 대해 선망하게 된 것은 크게 얻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햇볕정책이 북한의 상층부에는 이용당했지만 하층부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의 대북정책 수립과 추진에 있어서 지난 10년 동안의 결과를 자료로 삼아 좀더 주도면밀한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상층부는 압박하고 하층부는 녹이는 정책, 당근과 채찍을 함께 구사하는 고도의 전략 전술이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육군 사병으로 휴전선에서 근무한 이력답게 군사 분야에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군 인사도 한층 발전하여 능력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많은 신무기들이 개발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동안 수구 세력들이 걸핏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빨갱이다.”라 매도하였는데, 군 전력 증강을 볼 때 그들이 도저히 빨갱이일 수가 없다. 특히 군사적 요충지인 개성 지역에 공단을 조성토록 하여 전쟁 도발 시간을 30분이나 늦춘 것은 참으로 현명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자진한지 1년이 지난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오후에 엄숙한 표정을 한 남녀노소들이 봉하마을 길을 걷고 봉화산 부엉이 바위를 찾는 것을 보고, 저 사람들을 왜 무엇 때문에 여기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 생업에 바쁜 사람들로 하여금 휴일 하루 시간을 내어 먼 길을 달려오게 하였을까. 노무현이 권위적인 대통령이었다면 절대 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노무현이 바보였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정책보다는 그의 인간미를 말한다. 대통령이라 하면 우리 서민들과는 전혀 다른 자리의 사람인데, 노무현 그는 대통령을 국민들에게 너무 가깝게 만들었다.
대통령이라 하면 의젓한 태도, 점잖은 말씨, 중후한 행동, 구중궁궐에 사는 특이한 인물로만 여겼는데, 노무현 그는 너무나 우리 서민들과 닮은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통령 같기도 하고 아닌 듯하기도 한 헷갈림 속에 많은 사람들이 빠지게 되었다. 노무현의 그러한 모습이 초기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날이 가면서 많은 국민들에게 가벼움으로 식상하게 되었다. 특히 보수 쪽 사람들에겐 용납할 수 없는 ‘촐랑거림’으로 인식되어 통렬한 비판의 재료로 자주 사용되었다. 영남 지방에서 노무현을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보다는 “입이 방정이야.”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러한 가벼움이 쌓이고 쌓여 집권 후반기엔 지지도가 훌쩍 떨어지게 되었고, 빈약한 후계자가 민주당 경선에서 뽑히더니 2008년 12월에 야당에게 정권을 넘기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이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맞추어 봉하마을에서 시작한 답례 연설과 ‘사람 사는 세상’ 사이트 개설을 통해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는 기운이 일어나자 그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그가 봉하 마을에 1년만 죽은 듯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면 가족에 대한 조사가 없었을 것이다. 진득하지 못한 성격이다 보니 좀이 쑤셔 낙향한지 몇 달 만에 정치적 발언을 재개하게 되고 말았다.
노무현에게 역사에 대한 책임, 시대와 역사를 통찰하는 혜안이 부족했다. 그가 그러한 역사적 책임을 자작하였다면, “나는 정권 재창출에 대한 의무가 없다.”라거나 “한나라당과 연정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면서 고건, 정운찬, 손학규 등 그래도 일정한 역량을 갖춘 인물들에 대해 저평가하는 말을 함으로써 결국 보수 세력에게 정권이 돌아가게 하는 데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 봉하마을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골수 노사모들도 많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작년 그의 국장을 치를 때 공식 집계로 약 500만이 분향하였다는데, 오늘 보니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참배하고 있는 바, 앞으로도 참배 행렬이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다.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 하면서 하는 말이 “오죽 했으면…….”이었다. 그 말 속에는 죽은 노무현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교묘하게 올가미를 옭아 맨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원망이 내재되어 있었다. 아내도 안타까워하며 “봉하마을에 꼭 가보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노무현이라 하면 “꼴도 보기 싫어!”하며 비웃던 장모와 처제도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선량한 사람들이 흘리는 진정한 눈물이었다. 그 눈물에 무슨 수식어가 필요하겠는가. 무슨 정치적 의미와 가치가 필요하겠는가. ‘가벼운 말과 행동’으로 가장 우리 서민들과 가까웠던 만만한 대통령, 바보 대통령을 졸지에 떠나보낸 안타까움 그것 하나 때문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살이란 절대로 합리화 또는 미화될 수 없다. 진흙탕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낫다고, 자연사 할 때까지 열심히 사는 게 생명의 이치이다. 노무현 그의 자살이 결백과 책임이라는 숭고한 도덕적 가치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미화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는 방법이 자살이어선 안 된다. 설혹 거대한 정치적 압력이 밀려오더라도 인내하며 후일을 기약해야지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갔다. 고향마을 뒷산 높은 바위에서 부엉이가 되어 날아갔다. 아직은 날려 보낼 때가 아닌데 그는 스스로 날아갔다. 그의 투신을 말리지 못한 마애불은 입과 눈이 파인 채 모로 누워 신음하고 등 너머 사자바위는 망연자실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 맛을 본 남녀노소들의 행렬을 보며, 가슴에 말라붙은 눈물 몇 방울 간직한 사람들이 이곳 봉하마을, 바보 노무현, 덜 여문 진보주의자 노무현 대통령이 삶을 스스로 닫은 민주주의 성지를 꾸준히 줄지어 찾을 것이란 예감이 짙게 든다.
풀씨의 꿈
밭 한 고랑 다 매고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이 지나면
긁어 놓은 풀 더미 속에서 수런수런
잡초들 낮은 소리 들린다
낚시 걸린 암붕어가 급히 산란하고
교수형 당하는 사형수가 방정하듯
뿌리가 뽑혀서도 급히 풀씨를 맺어
흙 속에 슬며시 묻는
잡초들 굽은 등 보인다
나는 이제 죽지만
너는 다시 싹을 틔워라
멀리서 날아오는 손님 풀씨들 반갑게 맞고
흙 깊숙이 잠든 풀씨들 깨워
다시 이 밭 가득 풀을 채워라
제초제를 덮어써도 뿌리가 잘려서도
살아나는 법을
온몸으로 알려 주었으니
모진 살기 닥치면 잠시 엎드려 있다가
햇살 따스한 날 오면 금세 싹을 틔워라
이름 없는 무시풀이 아니라
달과 별이 동무하여 불러주는 고운 이름 하나
가슴마다 새겨져 있으니
꽃 앞에서 주눅 들지 말고
채소 옆에서 기죽지 말고
하늘이 공평하게 주는 햇빛과 공기와 물
달게 마시며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며 조용히 엉킨
작은 풀꽃 하나
세상에 가득 피워라
2010년 3월 3일 열락연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