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신하의 믿음 성장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4:46-53)
① 지난 주일 우리는 믿음이 주는 선물 세 가지를 나누었어요! 그 첫 번째는 창조주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불법과 불신의 세상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결국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역시 창조주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세 번째는 그 믿음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좋은 믿음을 진작에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에 역시 선물로 주어진다고도 말씀드렸어요!
② 오늘은 이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이 단번에 성숙한 분량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발전해간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그 좋은 예가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왕의 신하 이야기예요!
③ 그런데 여러분, 인생에는 많은 만남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많은 만남들이 우리에게 선악간에 영향을 미쳐요! 간혹 TV 뉴스에서 보면 어느 특수 절도범이 잡혀서 범행 동기를 말하는데 감방 동기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는 거예요! 그리고 호기심 반 호구책 반 해서 그 기술을 써보았더니 되더라는 거예요! 하지만 붙잡혔고 그 처벌이 가중되었어요! 이러한 만남을 두고 좋은 만남이라고 하지는 않죠! 좀 부정적인 극단적인 예를 들긴 했지만 좋은 만남을 통해서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경우도 작게 혹은 크게 많이 있어요!
④ 그런데 만남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만남은 부모님과의 만남이고 학교 선생님과의 만남이고 친구와의 만남이라고 해요! 이러한 만남들이 내 인격과 내 능력의 기초를 놓아주기에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자기 복이라고도 해요!
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있어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그 이전의 만남들이 아무리 크고 풍성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어떤 경우는 해로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그 이전의 만남들이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고 또 나를 힘들게 하였더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내게 복이 된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⑥ 이제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죠! 요한복음 4장 46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⑦ 여러분, 이 가나라는 지방이 참 복이 있는 것이 바로 이 곳에서 두 번의 기적이 예수님으로부터 베풀어졌어요! 한번은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구요, 또 한번은 오늘 우리가 보게 될 기적이에요! 수혜자는 왕의 신하인데 그의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산 거예요! 아멘!
⑧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시는데 옆 동네 가나에서 결혼 잔치가 있어서 참석하셨다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결혼 잔치가 성황리에 잘 끝나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리고 유월절을 맞이하여 유대 지역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다시 갈릴리로 오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 오시면서 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셨고 또 가나에서 당신을 친히 찾아온 왕의 신하를 만나 마침내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기적을 베푸셨어요!
⑨ 본문 말씀을 이어서 보면 47절에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가나에서 34Km쯤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뵈러 왔어요! 그의 아들이 병들어서 예수님을 찾은 거예요!
⑩ 여기서 잠깐 왕의 신하의 이전 행적을 추리해보면, 왕의 신하이니까 부귀 영화를 누리는 높은 계급의 사람이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어요! 그런데 아들이 병들었어요! 그래서 그 병을 고치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을 거예요! 그런데 낫지를 않았어요! 마침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은 거예요!
⑪ 당시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예요! 천한 신분이에요! 비록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왕의 신하가 찾아가기에는 그 신분의 차이가 너무 커요! 그래서 눈치도 보이고 썩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자식이 아파하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정치 일번지인 왕궁과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가버나움을 떠나서 천민의 마을 갈릴리 가나로 왔어요!
⑫ 그런데 예수님은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태를 꾸짖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그러자 왕의 신하가 더 초조한 심정으로 아뢰요!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4:49) ‘그렇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 아들이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집을 떠나 왔는데 과연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걱정이고 해서 한시라도 빨리 함께 가셔서 기도해주세요!’ 그런 마음이에요!
⑬ 집까지 거리가 34Km쯤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의 도로 사정과 교통수단이라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죠마는! 아무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빨리 모시고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뿐인데 예수님은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요4:50上) 아멘! 그런데 그렇게 조급해하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가요!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요4:50下) 아멘!
⑭ 그런데 보세요! 왕의 신하가 친히 와서 목수인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가려고 하는데 순순히 따라 나서시지 않고 고작 하시는 말씀이 세태를 꾸짖는 말씀을 하시고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하시니 왕의 신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을 대면하고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몰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긴 시간 동안에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거예요! ‘만약 아들이 죽어 있으면 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목수인 주제에 왕의 신하인 나를 경멸해! .... 아니, 이런 부정한 생각을 하면 안되지!’
⑮ 그렇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집을 향해 가는데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요4:51) 아멘! 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주인을 기다리던 종들이 마중 나와서 기쁜 소식을 전해요! “도련님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왕의 신하는 아들이 나았다는 사실도 기쁘고 중요하지만 그 때가 더 궁금했어요! 그래서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요4:52) 아멘! 예수님을 만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하루가 지났어요! 당시로는 참 먼길이었어요!
⑯ 아무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4:53) 아멘! ‘예수님의 말씀이 허튼 소리가 아니었구나! 너무 쉽게 말씀하셔서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능력자이시구나!’ 그렇게 왕의 신하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⑰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왕의 신하도 역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자 변화가 일어났어요! 다름 아닌 마음 속에서 일어난 믿음의 변화예요! 처음에 예수님을 찾아갈 때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어요!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냥 간절한 기대, 그래도 신분을 생각지 않고 찾아갔다는 것은 믿음이 있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예수님을 대면하고 말씀을 듣고는 아들이 나았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그 믿음이 반으로 줄고 의심이 그 반을 차지하게 돼요! 그래서 믿음 반 의심 반! 하지만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남을 보게 되면서 그 말씀이 진리인 줄 믿게 됐어요! 아멘!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즐겨 듣게 되고 따르게 되고 충성하게 돼요! 할렐루야! 왕의 신하는 그렇게 예수님을 만남으로해서 믿음의 발전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온 가족을 믿음으로 구원 받게 했어요!
⑱ 믿음의 발전을 세 가지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어요! 첫째는 수용이에요!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것은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죠! 믿기 때문에 수용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내용을 학생들이 수용하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죠! 교회에서 설교를 수용하는 것은 설교자를 믿기 때문 아닌가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예요!
⑲ 그리고 믿음의 두 번째 단계가 되면 의지하게 돼요! 수용을 하면 그 다음은 의지의 단계라는 거예요! 부부가 또한 친구가 서로를 수용을 하고는 의지해요! 그만큼 발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당신을 나의 남편으로 아내로 혹은 친구로 수용합니다. 그러나 의지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믿는다고 말할 수 없죠! 믿음은 수용의 단계를 거쳐 의지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면 그를 의지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게 돼요!
⑳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된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경우가 사실상 많아요! 믿음은 수용의 단계와 의지의 단계를 거쳐 순종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순종이 어렵거든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희생도 해야 하거든요! 그러나 순종의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자기를 비우게 되고 그 믿음의 대상과 온전히 하나가 돼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요,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인 거예요! 할렐루야!
㉑ 여러분, 군대 생활이 힘들어 교회에 나왔나요? 교회에 나오면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고 생각하시죠? 물론 그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면 믿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예배를 빠짐 없이 잘 드리고 또 그의 명령을 따라 전도를 열심히 하고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고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거예요!
㉒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설교 시간에 말씀을 잘 들으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게 돼요! 그러면 마음 속에서 믿음이 주어지고 자라게 돼요! 변화하고 발전하게 돼요!
㉓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는 ‘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물어요! ‘당신은 회원입니까, 제자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회원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배우고 따르는 제자인지를 묻는 거에요!
㉔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글에서 강조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아멘!
㉕ “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아멘!
㉖ 부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해서 믿음이 자라고 성장해서 더욱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에 대하여 그 유혹과 핍박에 승리하는 삶을 살고 모든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살면서 그 소망의 이유를 물어오는 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과 사랑을 전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