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엽 金聖燁(1896 ~ 1966)】 "광복군사령부 국내특파원으로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 활동"
1896년 5월 7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진음리(秦音里)에서 출생하였다. 생전 주소지는 서울 종로구 누상동이다. 이름은 김성엽(金成燁)으로도 표기하기도 한다.
1914년 평북 선천(宣川)의 신성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1917년 가족과 같이 만주의 펑톈성(奉天省)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중국 펑톈성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에서 조맹선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경 대한독립단이 연호 사용 문제로 복벽주의 계열인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 연호를 주장하는 공화주의 계열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나누어지자, 조병준·김승학 등의 민국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말 대한독립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되자, 박이열·백의범·김익곤·배준호·박찬계·장학구·이명서·서춘보·최지관·최찬·이용담·신영렬·양승우·주상옥·김덕명·한철수·권영규·하병일·신계관·김창곤 등과 함께 광복군사령부의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최지관·이운봉 등 대원들과 함께 의주(義州)·구성(龜城) 등지에서 광복군 지방 단위 조직과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결사대도 구성하여 의주와 구성 지역을 중심으로 친일파 처단 및 주재소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같이 활동하던 최지관·김순호 등은 10월 8일 결사대의 움직임을 사전 탐지한 신의주경찰서 수색대에 체포되었으며, 김효준·이한익·이정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1921년 1월 8일 선천지역 출장원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그후 복역 중 3차에 걸친 특서(特敍)로 1932년 8월 31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66년 6월 2일 사망하여 1967년 7월 26일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