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오몽근 목사가 편집한 책, 고난은 맞서서 이기고 죄는 피해서 이기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를 사는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대학 교수가 말했다. "자네는 금방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먹고살기 위해 연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합니다.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다. 로망 롤랑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건져내서 예술의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입니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보석같이 빛나고 행복의 어머니가 됩니다.
신앙인에게 고난은 단지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에 고난이라는 과정을 겪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분명히 고난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성숙하고 복된 삶으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 때문에 받는 괴로움도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병원에 오래 입원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거의 6개월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다시 그런 생활을 하라고 한다면 죽어도 못하겠다고 할 것 같은 오랜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래도 참았던 것은 나로 인한 괴로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겪는 괴로움이 아닌 다른 사람들 때문에 받는 괴로움을 진심으로 기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엄청난 도전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삶에서 고백될 수 있는 가장 귀한 믿음의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더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품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의 약함과 악함마저도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부모들은 자식의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자식의 아픔을 보면서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 본문에서 읽혀지는 것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아비가 자식을 품듯이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항상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 인한 괴로움을 받는 것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한 가장의 실패로 온 가족이 고통을 받는 일들, 회사 직원중 누군가의 큰 실수와 잘못으로 회사 전체가 큰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로 인한 괴로움이 아니면 우리안에는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불평,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대부분 “너 때문이야”라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원망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좋은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해 손에 돌을 들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원망과 불평의 돌을 들고 내리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그 괴로움을 품고 기뻐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시장에서 점을 쳐주고 그 주인들을 이롭게 하는 한 여자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고 옷을 벗기고 매를 맞고 발에 착고를 차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일어나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찬양이란 기쁨이 있을 때는 쉽게 나오지만, 괴로움과 고통을 겪을 때는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빌립보 감옥에서는 찬양이 울려 퍼졌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영혼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갖고 있는 다른 측면 즉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의 길로만 인도하지 않고 때로는 고난을 지나가게 하신다는 사실에 아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면서 늘 오냐오냐하며 그 모든 요구를 다 받아주며 키우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마다 다르지만 여기까지는 들어주고 그 선을 넘으면 거절당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말로 달래기도 하지만 매를 들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반드시 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다른 측면은 아프지만 괴롭지만 고난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있다면(물질적인 고통, 건강의 고통, 남편(혹은 아내)나, 자녀가 주는 고통, 믿음의 낙담으로 영혼의 상처로 인해 절망속에 있을 때 당신은‘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가?’‘그분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계시는가?’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상황을 가장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광야에 두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괴로움을 견뎌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엄마가 아기를 10달동안 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힘들고 불편합니다. 아기를 갖는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아기중심으로 살면서 자신의 기쁨과 편안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 희생의 댓가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괴로움을 기뻐할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열매들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소망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채우십시요.
오스왈드 샌더스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세기 전에 동방의 호전적인 어느 왕이 자신의 무적의 군대를 이끌고 어린 추장 아부타버의 영토에 이르렀습니다. 이 왕은 아부타버의 용맹성에 대해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죽이는 대신 평화의 사절을 보냈습니다. 아부타버는 그 제안을 듣자 한 병사에게 단도를 주면서 “이것을 너의 가슴에 꽂으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병사는 명령대로 그 칼을 가슴에 꽂았습니다. 아부타버는 다른 병사를 불러“이 낭떠러지에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뛰어내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지체하지 않고 뛰어내렸습니다. 아부타버는 그 사절에게 “가서 당신의 왕에게 전하시오. 나에게는 이와 같이 용맹한 군사 500명이 있소. 앞으로 20시간 이내에 내 부하들이 당신 왕을 체포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왕은 아부타버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무적의 군대와 함께 진격을 했지만 아부타버의 충성스러운 작은 군대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대중적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세상의 인기를 나누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밴스 헤브너는“교회는 상처를 통하여 성숙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위대함이 증명될 때는 군중의 자리에서 방관자로 있을 때가 아니라 신앙 때문에 사자 먹이가 될 때였습니다.”
한때는 1천만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 1천만명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을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녔지만 세상이 더 정직해졌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더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인이 많다고, 교회가 많다고 숫자로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을 만나면 인사를 하고, 인사 없이 그냥 지나쳤던 한 어린아이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앞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서 존재감없는 교회가 아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자기 희생이 없는 공허한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숫자에 매달리는 교회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교회는 소중한 모임의 장소였고,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의 단독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가정교회였습니다. 자신의 가정을 교회의 집회장소로 내놓는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교회가 핍박를 받을 때 가정교회 또한 이 핍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놓은 사람들은 옥에 갇히고 심지어 집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오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우리에게 남겨준 믿음의 선조들을 교회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당한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여러 가지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이 괴로움을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 역시 동일하게 마음을 아파하시며 함께 그 고난을 담당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몸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아프면 머리도 아프고, 머리가 아프면 몸도 아픈 것입니다. 즉“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나 고난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서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나를 일깨워주시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고난은 은혜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다른 이들로 인한 괴로움을 기뻐하며,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당해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