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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마지막 주/그리스도 왕 주일)
나는 왕이오
단7:9~10;13~14; 계1:4~8; 요18:33~37
호수공원 곳곳에 떨어진 은행잎들이 노랗게 깔려 있습니다. 만추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면 같아 보입니다. 노란 은행잎이 깔린 길을 산책하다가,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생각났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노래지요.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가만히 가사를 읊조리면, 뜻밖에도 가사가 철학적입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 허위단심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처럼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날려 사라져 가는 은행잎을 보다 문득 질문이 하나 올라옵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에 굳세게 버틴 꽃들도 있었고, 지난 겨울 눈보라에 우뚝 선 나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꽃들은 사라졌고, 겨울을 이겨내고 초록빛 무성했던 나뭇잎들도 곱게 물들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은, 낙엽이 지는 가을에 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이들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아니, 질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 힘겨워 이런 질문을 할 틈이 없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물음을 품고 산다면 우리 삶의 방향은 그리 잘못되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 오늘은 2023~24년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주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교회력이 끝나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스도 왕 주일(Reign of Christ)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혹은 “그리스도 통치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주일”로 지키는 일은 매우 뜻이 깊습니다. 그것은, 뒤돌아보는 한 해의 우리네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세상 소리들의 배경엔 침묵이 있고, 온갖 세상 사물들의 배경엔 공간이 있듯이, 우리 삶의 배경엔 언제나 하나님께서 계시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온 세상 우주 삼라만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나다가 제자들이 했던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홀로 설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진정알고 계셨습니다.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 다시 말해, 그냥 지나가는 것들과 지나가게 해주는 길(공간)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영원할 것 같은 것들도, 우리가 보기에 영원히 아름다울 것 같은 것들도, 모두 지나갑니다. 하늘 아래 홀로 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영원히 아름다울 것처럼, 영원히 홀로 설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면, 그래서 거기에 우리의 삶을 기대고 산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은 매우 허약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앞에 기초가 흔들리고 터전이 흔들리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속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아직 끝이 아니다.” 똑같은 얘기를 아빌라 데레사도 했지요.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도/ 하느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시다/ 인내함으로써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 하느님을 품은 자는/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폭풍이 아니라도, 지나가는 바람에도 깜짝 깜짝 놀라는 우리네 삶입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마치 이 땅에서 우리의 본업인 양,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사명인 양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전전긍긍 노심초사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까요?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로 유대병정들에게 붙잡혀 유대총독 빌라도의 관저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사람들이 고발한 죄목, “이 자가 로마의 황제를 거스르고 자칭 왕이라고 한 자요.”라는 죄목을 놓고 예수님께 거듭 힐문합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의 왕이오?” “당신의 동족이 나에게 당신을 넘겨주었는데,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한거요?”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세상에 속한 왕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나를 위해 싸워 줄 것이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빌라도가 또 묻습니다. “내 나라 운운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왕이오?”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드디어 예수님은 망설이지 않고 당신이 왕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왕이라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선언하십니다. 보세요, 처음 “유대인의 왕”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이 떨어져 나갔지요?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나는 왕이오.”
여러분, 오늘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선입견을 버리고 읽는다면, 이 대화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위임받은 로마 총독과 로마의 작은 식민지에 불과했던 유대인 청년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처럼 거사를 치룬 영웅을 재판하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 동족에 의해 고발된 별 볼일 없는 사건이지요.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현실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총독의 권력과 군중들에 끌려 잡혀온 힘없는 식민지의 한 청년의 대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그리고 늘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 힘있는 것과 힘없는 것의 대비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대화에서 예수님은 “나는 왕이오”라고 선언하셨고, 또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그리고 예수님이 아시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늘 변하고 언젠가는 사라져가는 나라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에서 예수님은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온전히 승복했기에,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었기에, 그분은 그 나라에서 하나도 걸릴 것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어디에 터 잡고 있는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 그냥 지나가는 것들과 지나가게 해주는 공간(배경)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헛되이 지나가는 것과 결코 변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터잡고 있는 곳은 바로 영원한 것, 모든 것의 공간, 결코 변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모든 것이 예수라는 유대인 청년의 뇌피셜이었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고 하면, 직접 체험하지 않았거나 실질적인 증거가 없어도 사실일 꺼라고 믿을 때, 대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또는 충실(신실)하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하나님이나 자신의 의무 또는 타인에게 충성스럽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누군가 그럴 꺼라고 했던 것을 나도 동의한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교리문답을, 도그마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입니다.
물론 교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데도 상당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그 이상입니다. 믿음이란, 데레사 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도, 하느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진짜 아는 것입니다. 지식은 지식인데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뇌피셜이 아니라 진짜 뇌구조가 달라져서 이전과는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든 그렇지 않든(우리에게 이것은 대부분 우리가 느끼는 상황에 따라 결정됩니다), 잠시 지나가는 것과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왕이오”라는 말은 이 “사실”에 기반해서 나온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립니다. 거기서 나도 왕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을 때 당신이 왕이 되심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승복한다면, 우리도 진짜 왕으로 살 수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도 왕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세상의 힘있다 하는 것들의 구속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오직 사랑의 다스리심 안에서, 노예가 아닌 왕처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왕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당신이 말한대로 나는 왕이오” 하면서 이 마지막 말을 덧붙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저는 오늘 이 말이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온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 해서 이 세상에 왕처럼 권위 있게, 존엄하게,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진리”(본질)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당신 혼자서 누릴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당신 혼자 누릴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저는 이 말이 그냥 단순히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정도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왕처럼 살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재판하려고 하는 빌라도 앞에서 “내가 왕이오.”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진리에 속한 사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온전하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왕처럼, 존엄하게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말과도 같은 말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주일에 우리도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왕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단지 당신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그리로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우리가 진리에 속할 때, 우리가 진리를 알 때에 우리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왕처럼 존엄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예근성, 종으로 사는 구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손바닥에 왕(王)자 새긴다고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근성을 씻어내고 왕으로 살기 위해서는 궁중예법도 익혀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왕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내가 왕이 아니라 노예처럼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우리의 신원과 정체성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와 존엄을 자각하는 일들을 거듭 알아차리면서 그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러기 위한 실제적인 훈련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재판 끝에 빌라도는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옷을 입은 채로 나온 예수님을 향해 <이두 호 안드로포스>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소리쳤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지만, 이 말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시선을 모으게 합니다. 거기엔 왕이 계셨습니다. 왕관을 가시관으로 대신하고, 왕의 상징인 홍포를 입으신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신성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둘 다입니다. 전자는 보이고 들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고, 후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배와 찬양으로 드리는 흠숭이며 또 하나는 바탕을 알아차리는 침묵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정 왕의 신분으로 살게 될 때, 우리는 지나가는 것들, 잠시 우리 곁에 머무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소유하거나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게 됩니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가사 그대로입니다.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도/ 하느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시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세상에 지나가는 것, 하늘 아래 홀로 설 수 없는 것들을 무시하고 쓸데없다고 멸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소유와 탐욕으로가 아니라, 조종과 통제로서가 아니라, 진정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었지만, 소유하고 조종하기 위한 왕이 아니셨고, 진정 사라져 가는 것들, 연약한 것들, 불쌍한 것들을 사랑하는 진짜 왕이셨습니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랑을 배우기 위해 사랑으로 온 사랑 덩어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