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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을 위한 심리학」
이 책은 2023년 12월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 김해남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걱정과 고민이 많겠지만, 오늘은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그냥 당신 자신을 챙기기를 바랍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하나라도 더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산다면 초조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결코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완벽한 때는 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걱정과 고민을 내려놓고 어디로든 가보기를 바랍니다. 그만큼 당신의 인생은 분명 더 단단해질 테니까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서울대 의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고, 신경정신과 병원 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64세이지만, 40대에 파킨슨병을 앓아 지금도 치료 중이라고 한다. 이제는 할머니, 시어머니, 장모 등 이름이 새로 생기기도 했다고 하는데, 병이 진행 중이라 몸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바꿀 수 없는 것에 매달리기보다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살아서인지 그로 인해 행복하고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거나, 혹은 조언일 것인데 이미 나이 들고, 생각이 많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책을 잡는 순간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음 상태분석 모형’(심리학적 용어)에 따르면,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의 황금비율은 1.6:1이라고 하면서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다. 살다 보면 돌발변수가 너무 많고,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 부정적 생각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다만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행한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부정적인 일이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오늘날에는 서른 살쯤 나이가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들고, 중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은 나이인 서른 살을 연구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이 시기를 ‘미지의 시기’라고 했다. 취업준비로 젊음을 다 소진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숨 가쁘게 차가운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시기라는 것이다. 내 나이 때만 해도 25세가 되면 대부분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졸 신입사원 연령이 31세, 초혼 연령이 남자 33.72세, 여자 31.26세(2022년 기준)인 것만 봐도 그렇다.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평생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결혼 후에 더 외롭다고 하고 아이를 낳고 ‘나’를 읽어버린 것 같다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외롭고 괴로운 것이 어른의 삶인 걸까? 인생의 한 전환기로서 미래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의 시기로서, 홀로 서야 하는 독립의 시기로서, 꿈에서 현실로 내려오는 좌절의 시기로서, 서른 살의 삶은 고되기만 하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보다는 의무가 커지는 때로 들어서는 나이가 서른이다. 이때부터 삶의 무게가 다가온다.
이때는 자신에게 조언과 도움을 줄 멘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방면에 그들은 고아나 다름없다. 부모와 스승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고, 노인들은 사회의 퇴물로 취급받고 있다. 이는 곧 가야 할 길을 비춰주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꾸짖어 주고, 믿고 의지할 만한 어른들이 사라져 버렸음을 뜻한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자기 스스로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기개발과 인간관계 책에 몰두하는 이유기도 하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고,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중간 세계가 필요하다. 이 중간 세계를 정신분석학에서 ‘이행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미운 세 살’처럼 부모와 아기가 탯줄을 자르고 서로 독립된 존재임을 인식하는 시기와도 같다. 중간 세계가 사라지고 예행 연습도 없이, 미지의 땅에 대한 사전 조사 없이, 떠밀려 들어간 삶은 낯설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멘토가 사라진 시대, 이행기마저 없는 서른 살은 뒤늦게 방황하게 되고, 방황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청춘은 눈부시다’는 청춘예찬에 그들은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세상살이가, 인간관계가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유행가 가사도 있지 않은가. 만약에 회사에서 상사가 아침에 당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상사는 출근길에 아내와 말다툼을 해서 기분이 좋지 않거나, 그도 웟사람에게 불려가 문책을 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분명한 것은 당신 탓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고, 남의 눈치를 보고, 상대방의 반응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면, 한 번쯤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조용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사라지면,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추락하거나 공허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타인의 사랑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공허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 30%가 당신을 좋아하고, 50%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20%가 당신을 싫어한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는 말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까지를 버리고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을 때 온다는 것을.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우리는 흔히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고 한다. 둘의 기준은 행동방식이 자기중심적인지, 현실중심적인지에 따라 다르다. 쾌락 위주로 행동하면 아이고, 현실 원칙에 따르면 어른이다. 그래서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현실의 이모저모를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애늙은이’가 되고, 어른이 현실을 제쳐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철이 들든 사람’이 된다. 현실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으면 나잇값 못한다고 욕하고, 현실적으로 움직이면 속물이라고 비아냥댄다. 어른의 나잇값에 대한 기대치는 막중하다.
어른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져야 한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져야 할 때도 있다. 어른은 쉽게 동요해서도, 흥분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슬퍼도 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일에 어른은 이래서도 안 되고, 저래서도 안 된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나면 그게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면서도 모든 것에 조건을 단다. “멋있게 남보란 듯이 살고 싶니? 그러면 열심히 돈 벌어야지!”어른도 울고 싶을 때가 있고, 울 때도 있다. 어른도 겁이 나고 무서울 때가 있다. 어른도 아이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인간에게, 어른에게도 매우 소중하다. 그 소중한 자유를 갖기 위해 어른이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 자기 인생의 짐을 스스로 들고 가는 것이다. 힘이 없던 시절에는 부모가 그 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짐을 내가 들어야 한다. 부모가 들어줄 때는 싫든 좋든 이끄는 방향으로 가야 했지만, 내가 직접 드는 순간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쉬었다 갈 수 있고, 발을 냇물에 담갔다가 갈 수도 있다. 오솔길을 가도 되고 너른 길로 가도 된다. 낮잠을 자고 갈 수도 있어서 짐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기꺼이 내 행동에 책임을 진다. 세상에는 무수한 종류의 어른이 있고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어울려 살아간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짐을 지고 당신의 길을,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작가이자 라이프 코치인 어니 젤렌스키는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걱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걱정의 22%는 사소한 것이다. 또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겨우 4%만이 우리가 바꿀 수 있다.”
걱정의 96%는 해봐야 소용이 없는 걱정이라는 것이다. “혹시 1년 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기억나나요?”하고 물으면 대답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실험 결과 20분 후에 42%가 잊어버렸으며, 1시간 후에는 56%, 30일 후에는 79%가 기억하지 못했다. 이는 한 달이 지나면 거의(80% 가까이)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지금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더라도 1년 뒤에 돌이켜보면 무슨 고민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인생과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통제 불가능한 것과 통제 가능한 것부터 구분할 것.
내가, 가족이 갑자기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은 지금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려라.
2. 불안은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당신을 결코 해치지 못한다.
살다 보면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보통은 어느 정도까지 점점 강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불안으로 걱정을 해도, 또 한다고 해도 소용없고 또 무슨 일이 곧바로 생기지도 않는다. 다가오는 불안을 억지로 막으려 하면 불안은 눈덩이처럼 커져 어느 순간 나를 잠식해 버린다. 그러나 불안은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결코 당신을 해치지 못한다. 불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불안이 찾아왔을 때 ‘괜찮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라.
3.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
자기개발 분야의 선구자인 데일 카네기는 걱정을 줄일 방법과 노하우를 모아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을 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표에 다가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면 누구나 신경 쇠약에 걸리고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저는 명확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걱정의 50%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40%는 결정을 실천에 옮길 때 사라지더군요. 결국 저는 다음 네 가지 단계를 밟아 걱정의 90%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1) 내가 걱정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써 본다.
2)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써 본다.
3) 무엇을 할지 결정한다.
4) 결정한 대로 즉시 실행한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도 뭔가 일이 안 풀리고 난감한 상황이 되면 일단 누군가에게 전화부터 건다고 한다. 그럴 때 전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망가지 않고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해결을 위해 집중하는 순간 걱정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흔두 살에 찾아온 파킨슨병(근육이 굳어지는 증세)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삶이야말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항상 나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떠올린다고 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상은 [Chaoter 1]‘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 걸까?’에서 가져온 것이다. [쳅터 2]는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인데, 여기서는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의 어린 시절과 그의 역경을 소개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더러 본 이야기지만 다시 보자.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노예 해방을 이뤄낸 그는 숱한 시련을 겪었다. 어려서부터 많은 죽음을 접해야만 했다. 세 살 때 남동생이 죽었고,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이모와 삼촌도 세상을 떠났다. 열여덟 살 때 누나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등 불운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후 네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중 두 명을 잃었다. 고통은 말할 수 없었고 목숨을 끊으려 했을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그만의 활달함과 적극성으로 절망을 극복하고, 1860년 51세의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렇게 불행을 겪은 위인은 링컨뿐 아니다.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도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게로르도 평생 불행의 그림자가 그들을 짓눌렀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거나 혹은 죄를 지어서 이런 불행을 겪은 것이 아니다. 살다 보면 그저 좋은 일,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늘, 누구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묻지 마라. 나쁜 일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이자. 장애물을 넘으려 애쓰다 보면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영국의 철학자로 세계적인 석학 버트런드 러셀은 수많은 책을 읽고 사람들 앞에서 강연도 했지만, 언제나 말실수를 하거나 말할 내용을 잊어버릴까 봐 불안에 떨었다. 어떨 땐 차라리 발목이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청중의 반응이 걱정되어 신경 쓰느라 마음이 무척 피곤했다. 그는 어느 날 생각했다. ‘조금 실수했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그로 인해 타격입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 어때서? 지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약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림으로써 이겨냈다고 한다.
흔히 강한 사람은 어떤 일도 겁내지 않고 어떤 난관도 헤쳐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만 나아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이겨냈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갈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강한 사람이라고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약점이 남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불안해하지 않을 뿐이다. 강한 사람은 약점이 자신을 열등하게 만들거나 추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약점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보완하려고 애쓴다.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에 조금 더 관대해져라. 남들에게 실망한 듯 보일라치면 러셀처럼 외쳐라. “그게 뭐 어때서?”
젊어서는 냉소(冷笑)가 멋있고 철학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까지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당신이 실패자이며, 가까이하기엔 불쾌한 사람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에 불과하다. 냉소의 가면을 벗고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외롭고, 따뜻함을 갈망하고 있으며 멋지게 성공하고 싶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어차피 비슷비슷한 욕망과 갈등 안에서 살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을 이루었을 때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더 많이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싸움에서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를 벌하면서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비인간적인 욕구로 감정이 격해졌을 때 화가 난다. 상대방을 해할 수만 있다면 하고 다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 화는 마치 비수와 같다. 소토아 철학의 대가인 세네카는 《화에 대하여》에서 “분노야 말로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며 분노만큼 인류의 희생을 초래한 역병은 결코 없다.”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를 참지 못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파괴하는 최악의 결말을 원치 않기에 되도록 화를 내지 않으려 한다. 사람은 화를 억누르면 화병이 생기고 또 어떤 사람은 화를 심하게 내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든지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사람들도 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화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 여섯 가지를 소개한다. 1.‘화가 날 때는 먼저 숫자부터 세어라.’미국 제3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면 10까지 세어라. 화가 너무 많이 날 때는 100까지 세어라”고 조언했다. 2.‘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세상은 온통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투성이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누군가 어깨를 치고 간다’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데, 부장이 와서 “나 주려고 뽑은 거지”하면서 가져가 버린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고 이기적일까 싶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저 나와 삶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내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화를 내거나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3. 먼저 화를 낸 이유를 생각해 보라. 사실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과 두렵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4. 화가 났을 때는 어떤 결심도, 행동도 하지 마라. 홧김에 이혼하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혹시 상대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이 먼저다. 모든 결정은 이성을 회복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5. 화나는 것을 내일로 미루라. 체코에는 “내일로 미뤄야 할 유일한 것은 분노다”라는 속담이 있다. 내일로 미루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화는 이미 누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6. 인생에서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상대가 이기적이거나 약간 생각이 부족했을 뿐이다. 내게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사에 시시콜콜 파고들지 말라. 가장 좋은 방법은 더러는 그냥 무시하고, 더러는 웃어넘기고, 그래도 남는 것들에 대해서는 용서하는 것이다.”세네카의 말이다.
[Chapter3] 당신을 힘들게 만드는 문제는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려는 속성과 과거를 반복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찰을 생활에 적응시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한 걸음 전진하면 한 걸음 후퇴하는 식으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다.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절당하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적어도 현재와 과거를 분리할 수는 있게 된다. 똑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멈칫하는 이유기도 하다. 반복되는 일에 선택권은 내가 쥐게 있다. 과거 속에 살 것인가. 아니면 현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것인가. 마음속으로는 왜 같은 일이 자꾸 반복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더 이상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과거가 고통스러웠다면 그것을 잘 이겨온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누구에게나 불행했다고 느끼는 과거의 시간이 있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던 시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평온을 위해 불행을 부정해 버리면 상처를 자연스럽게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더욱 곪게 만든다. 상처를 그냥 구멍 막듯 막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불행했던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괴롭힌다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야 한다. 과거의 불행을 인정하고 상처와 직면해야만 상처를 치유할 힘을 얻게 된다. 자신과 혹은 가정에서 싸움이 없는 집은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모두 갈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곳에서 흐르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숨 막히는 침묵이다. 화목한 가정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서 먼저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 세상에 문제가 없고 갈등이 없는 집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앞서도 보았지만, 분노는 너무 자주 폭발시키는 사람만큼 전혀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도 문제가 많다. 50대의 전업주부가 있었다. 그녀는 평생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만 하고 살았다.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남편과 아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집안일을 좀 도와달라는 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양말 찾아달라, 물 좀 달라는 남편을 보며 화가 났지만 분노를 속으로만 삼켰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악몽을 꾸고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결국 병원을 찾았고, 의사의 맘대로 “당신이 하라”고하면서 화를 냈다. 그리고는 의사에게 전화로 말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화를 내도 큰일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했어요.”마음 속에다 분노를 담아 두지 말자. 상대에게 느끼는 불만을 털어놓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흥분하지 말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으면서 불만을 잘 전달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창시자로 알려진 프로이트는 정상의 기준을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누구도 이런 것들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내 안에 콤플렉스나 갈등이 있다는 것,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가 관건이다. 우리는 어떤 작용에서 완벽해야만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콤플렉스는 나를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사랑할 때는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하는가? 왜 모든 사람이 열정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이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고 편안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굳이 이상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고,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할 수도 있다. 얼마든지 행복하면서 풍부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래 그게 내 모습이야, 어쩔래?”이렇게 말하면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챕터4] 정신분석에서 배우는 단단한 어른의 태도
사랑은 무의식의 운명이다. 첫눈에 반하는 경우 그 대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인연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이거나 나의 내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장 흔한 경우가 부모와 같은 유형이거나, 자신을 돌봐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인 경우다. 이를테면 어릴 때 두려움이 많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강박적인 성격을 갖게 된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혼자 있는 것을 잘 못 견디는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는 자신의 억압된 두려움과 불안을 어루만지고 보살펴주고 싶은 무의식의 욕구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어릴 때 상처를 치유하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지만, 상처가 깊은 경우는 결혼은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첫눈에 반하는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온몸을 내맡기기는 것은 위험한 측면이 있다.
소중한 사람을 지켜가려면 자기 자신과 상대에 대해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운명의 짝은 어디선가 나타나 처음부터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 서서히 내 운명에 맞게 만들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거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태오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정신치료를 받고 그림 그리는 것이 힘들지만, 언젠가 좋아질 때도 있겠지 하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뭔가를 계속하다 보면 문제가 풀리고 상태가 좋아지는 때가 오곤 한다. 물론 그럴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면, 싫증도 지겨움도 없이 항상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겹고 싫증이 나면 원하는 일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세상에 싫증 나지 않는 일이란 없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무언가 익숙해지면 흥미를 잃고 그것의 소중함 또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 식기 마련인데, 힘든 일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조급한 마음에 가시적인 결과를 중시하다 보니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중간에 좌절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공부가 쉽고 즐겁다고 말하지 않는 일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일을 하면 신나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기쁨과 보람은 지겹고 힘든 과정을 참고 넘긴 후에 찾아온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기 싫은 일을 즐길 수 있겠는가? 그건 스트레스다. 해결방법이 있다면, 그때는 속전속결이 최고다. 빨리 끝내고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싫은 일을 제쳐두고 잘하는 일을 먼저 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찌 됐건 어려운 문제다.
현대사회에서 가족은 일찌감치 각자 돈 버느라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고, 회사는 우리를 보호하기는커녕 능력이 없으면 알아서 나가라고 눈치를 준다. 개인은 각자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절망적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면 남자 주인공이 짠!하고 나타나서 구해주었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요즘은 남자 주인공에게 의존하면 ‘민폐끼친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의존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까?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사람을 건강하고 바람직한 모델로 삼은 이유가 있을까?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문제해결에 실패했음을 뜻한다. 능력 부족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부분이 수치로 여긴다. 차라리 내가 도움을 줄망정 도움받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들은 모든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못하는 부분을 처리해줄 뛰어난 사람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의존성은 불가피하다. 의존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의존성이 심하거나 의존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힘들 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약한 부분을 타인에게 기꺼이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때 독립과 고립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독립은 다른 사람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관계를 모두 끊는 것은 독립이 아니라 고립일 뿐이다. 독립은 관계 속에서 홀로 서는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혼자 풀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시간 낭비고 에너지 낭비다. 문제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빨리 주위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시간을 단축하고 미처 보지 못한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
《불경》에는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어설픈 용서는 서로를 망칠 뿐이다. 만약에 친한 친구가 내 애인을 빼앗아갔다면,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사기를 당해 하루아침에 파산을 당했다면, 강도가 휘두른 칼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때로는 아주 쉽게 ‘용서’라는 말을 하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고 밤낮 괴로워하고, 일상생활까지 황폐해져 버린 사람에게 용서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쉽게 지우는 반면에 상처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상대를 미워한다. 결국은 인간관계마저 기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거짓용서를 할 경우 겉으로는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지 몰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분노로 인해 상대를 원망하게 되고 서로를 파괴하는 병적인 관계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분노는 결국은 자신에게로 방향을 틀어 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상처가 너무 깊어 상대를 용서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용서하자니 화가 덜 풀렸고, 화를 계속 내자니 관계가 완전히 끝나버릴 것 같아 두려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꼭 용서해야 할까? 용서하면 성처를 준 사람과 다시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용서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발목을 잡고 있는 분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떠나보냄’이다. 절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 어설픈 용서는 서로를 망칠 뿐이다. 복수는 달콤하고 강렬하다. 그러나 복수는 당신과 상대 모두를 파괴한다. 복수도 생각하지 마라. 상대에게 쏟을 에너지를 거두고, 그 에너지를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쓰라. 당신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그것이 최상의 복수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보고 우리는 안타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 성인이 되었음에도 뭔가 부족해서 생기는 갈등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보인다. 몇 년 전에 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아들이 부모를 죽이는 끔찍한 일도 있었지 않은가. 가족이란 가장 가까이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다. 엄마(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키운 것은 그들의 선택이었고, 즐거움이다. 딸(아들)이 잘 자라 줌으로써 부모에게 충분히 보답한 것이다.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주변에 보면 싫어도 좋은 척, 힘들어도 괜찮은 척, 화가 나도 아닌 척하며 항상 남의 기분에 신경 쓰느라 자기 마음이 곯아 터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잘못도 없이 일단 덮어놓고 사과부터 하기도 한다. 대립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부류인데, 마찰을 피하면 편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러나 지나친 사과는 아니 함만 못하다.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신을 깎아내린다. 다른 사람은 존종하면서 정작 자신을 시궁창에 버리는 꼴이다. 자신을 지키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부당하면 부당하다고 당당히 말하라. 그래야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예의를 갖출 것이다.
참으면서 관계를 지키고자 애썼지만, 결국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친절과 배려가 아닌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 벽을 쌓고 접촉을 끊는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하고 거기까지는 최선을 다하되 그 이상은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능력 밖의 일까지 떠맡아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기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내 처지와 능력이 여기까지밖에 안 된다는 것을 상대에게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관계가 틀어질까 봐 두려워 선을 긋지 못하는 것이다.
선을 그을 때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해야 한다.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거나, 무리한 부탁을 해 오면 일단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곧바로 대응하기보다 잠시 멈춰서서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다음 내 의견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아무리 불쾌한 대우를 받았더라도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좋다.
[챕터5] 마흔이 되기 전에 배워두어야 할 것들
이 장은 나와는 상관없어 보인다. 정말 그럴까 하는 것은 각자 몫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는 포근하고 안전했다. 뭐를 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엄마가 다 해줬다. 그런데 막상 세상 밖으로 나오고 보기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엄마와 분리된 순간 엄마와 자신은 한 몸이 아닌 분리된 존재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슬픈 일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최초로 경험하게 되는 슬픔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했지만, 거짓이었고, 사랑하고 결혼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혼자일 때보다 더 깊은 외로움이 찾아오고 때로는 나를 짓누르는 의무와 책임감에 숨이 막힌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도 한다.
착하게 산다고 병에 안 걸리고 사고를 안 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는 슬픔도 감당해야만 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불합리한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 내가 너무 작고 미미하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하루를 더 살면 그만큼 죽음이 하루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에도 경악한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또 무엇을 잃고 만다. 상실은 슬프지만, 때로 새로운 만남과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완벽한 보호처였던 어머니의 자궁과 젖가슴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독립된 개체로서 내가 될 수 있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게 되고, 내 운명의 지배자가 되고, 내 영혼의 선장이 될 수 있다.
내 앞에 닥칠 불행을 미리 예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아무런 작별 인사 없이 헤어지는 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별 인사를 한다는 것은 헤어짐을 구체화함으로써 상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작별 인사는 떠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 사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어제의 나에게도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과거를 소중히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한때는 내 소유였지만,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안녕’하며 손을 흔들 수 있어야 하고, 생의 마지막 날에도 이 세상을 살아왔던 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 시절에는 되고 싶은 것이 참 많다.(할아버지도 그랬다) 이것은 손자들에게 보내고자 하는 문자메시지로 이 책의 ‘더 늦기 전에 꼭 해야할 일’에서 발췌했다.
큰 성공을 거두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기도 하고, 모든 것을 희생해서 성자 같은 모습을 꿈꾸기도 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내가 바라고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내 모습이 그동안 꿈꿔 온 나와 많이 다름을 알게 된다. 내 모습을 비추던 거울을 깨버린다고 내 모습이 변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때는 체념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은 잘 못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상황을 바꿔 줄 것이라는 어릴 적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권리만큼 의무도 커진 시절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힘은 적고 누릴 자유 또한 제한적이며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을 깨닫는 것, 필연적인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세상이고 내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별해야 한다. 이별과 상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 상실의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사람과의 추억으로부터 나온다.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추억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 길이 갈라지는 교차로에서 아쉬운 이별을 나누면서 말이다.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모음은 “노년을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의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능력의 감퇴가 아니라, 그의 기억의 짐이다”라고 했다. 나이 들수록 쌓이는 것은 주름살과 함께 점점 더 쌓여가는 추억이다. ‘내가 젊었을 땐, 옛날에는’으로 시작해서 ‘그땐 그랬지’로 끝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에 손주들은 몸을 비비 꼬고 하품을 한다. 또 그 소리라며…. 그러나 추억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추억을 회상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상기시키는 작업이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한다. 먼저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실연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다는 아닐지 모르지만, 실연하고 허무에 빠지는 경우를 겪는 사람들이 꽤많다. 실연은 죽음이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의 죽음이며, 사랑받던 자신의 죽음이며, 꿈꾸던 이상적인 사랑의 죽음이다. 실연 때문에 죽음과 같은 고통이 다가오기도 한다. 베르테르는 실연당한 후에 권총으로 자살했고, 카미유 클로텔은 로뎅과 결별한 후 정신병으로 비참한 생을 보냈다. 이런 극단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눈물, 잠 못 이루는 밤으로 몰아가는 것이 실연이다. 실연은 언제든 올 수 있다. 같이 살고 오래 사랑했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 후에도 올 수 있다. 사랑이 식기 시작하면 변화가 온다. 목소리 톤이 바뀌고, 애칭 대신 이름을 부르고, 기존에 해오던 행동을 안 하기도 한다. 뭔가 변화를 느낀 한쪽이 이야기하자고 하면 ‘다음에 하자’면서 말을 돌리고, 점점 관심이 멀어진다.
사랑할 때 확장되던 자아는 사랑을 잃을 때 수축한다. 연인들이 만들던 ‘우리’라는 세계는 ‘나’라는 원소로 환원된다. 사랑하는 동안 받던 보살핌과 돌봄이 사라지면 자신이 어린애처럼 굴던 지난날이 창피해지고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상대에 의존성이 강했던 사람은 이제 모든 것을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목놓아 울기도 한다. 자신의 내면을 모두 보여 준 데서 오는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경우 실연의 고통을 심한 자기 비하로 나타난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 상대가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실망해서 떠났다는 생각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실연을 당했다는 생각이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일반적인 사랑의 종말은 상처받은 쪽에서 계속 견디다가 결국 상대방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멈추고 무감각과 우울을 번갈아 경험하다가 서서히 회복되는 과정을 밟는다.”(정신분석학자 아니면 만들어 내지 못 할 말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제발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하고, 울며불며 매달리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데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연 과정의 고통을 잘 이겨낸다.
실연을 당하고 나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게 우리 인생이다. 실연을 당했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너무 분노하거나 너무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한 척할 필요도 없다. 슬퍼할 만큼 슬퍼해야 실연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 열렬히 사랑했던 추억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다른 사랑이 찾아왔을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Chapter 6] 이렇게 나이들 수만 있다면
한번 상처 입었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상처다. 큰 전염병을 막기 위해 그 균을 약화시켜서 몸에 주입하여 면역력을 높이는 것처럼…, 작은 상처와 상실은 나중에 올지 모르는 큰 상처나 상실에 대비할 수 있게 한다. 성장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옛것을 내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아들이는 과정이다.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란 게 따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것 말고도 종종 예기치 못했던 상실을 겪는다. 갑자기 이사 가야 한다든지, 부모와 이별한다든지, 사고로 누가 죽었다든지, 질병으로 건강을 잃고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만 한다. 또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을 잃는 경험도 할 수가 있다.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자신의 힘을 발견한다. 상처를 이겨낸 사람은 자신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을 가진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흉터는 삶의 훈장이 될 수도 있고, 숨기고 싶은 창피한 흔적이 될 수도 있다. 상처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 배우는 것도 우리 자신이고, 상처를 통해 강해지는 것도 우리 자신이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흉터를 보면서 무엇을 보고 듣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은 우리가 하기 나름에 달려 있다.
사람은 혼자 남겨진 시간이 필요하고, 그럴 권리가 있다. 에스키모인들은 내부의 슬픔, 걱정, 분노가 밀려올 때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슬픔이 가라앉고 걱정과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이 평안해지면 되돌아온다고 한다. 되돌아올 때 그곳에 막대기를 꽂아 둔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 다시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고 다시 걷기 할 때, 이전에 꽂아 둔 막대기를 보게 되면 요즘은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고, 그 막대기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견딜만하다고 느낀다는 뜻이란다. 휴식은 내 안에 막대기를 꽂는 일이다. 내 안의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막대기를 꽂고 돌아와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끝없이, 정처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 걸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과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또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창고에 물건을 쌓아두기만 하면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찾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지식을 쌓는 이유도 그것이다. 공부하는 이유가 지식이나 기술을 단백질의 형태로 뇌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한 것이다. 대뇌피질에는 140억 개의 신경 세포가 있고, 기억의 핵심은 바로 신경 세포와 신경 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에 있다. 시냅스가 얼마나 촘촘히 연결되어 있느냐가 두뇌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시냅스는 쓰면 쓸수록 활성화되지만, 쓰지 않으면 점차 약해진다. 최대한 효율을 발휘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많이 사용하고 계속 활성화 해야 한다.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틴) 1만 시간은 하루 3시간씩이면 1주일에 20시간, 그렇게 10년을 연습해야 한다는 수치다. 야구선수, 소설가, 피아니스트, 체스 선수, 숙달된 범죄자, 그밖의 어떤 분야도 이 정도 연습을 해야 숙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또 적어봤다. 23쪽이나 되니까 말이다. ‘결혼 한 아들 딸에게 해주고 싶은 유일한 당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많은 걸 희생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결혼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논리 없고 말 없는 핑계 없다는 것처럼, 나로서는 이유 같지 않아 보인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서 더욱 풍부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갈등과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잘 관리하면 결혼 생활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함과 행복을 줄 수도 있다. 부부 갈등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하는 말이 있다.
“우리 남편(아내)은 결혼 이후에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혹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잘 안 변한다. 그런데 내 뜻대로 만들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행복은 기대할 수 없다. 자기 생각도 쉽게 고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성격을 바꾸겠다는 것인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할 때 모든 관계가 편안해진다. 특히 부부관계는 고쳐 보겠다고 애쓰기보다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감당할지를 생각해 보는 게 맞다. 어쩌면 결혼 생활은 당연히 힘들다. 연애는 먼 곳에서 산을 구경하는 것이라면, 결혼은 직접 산에 오르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볼 때 몰랐던 상대방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경험하는 게 결혼생활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부터 버리는 게 좋다. 등산하면서 힘이 안 들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배우자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살아라.”(이것이 나의 유일한 당부이다 - 저자의 말이다)
나이 들어가지만, 건강을 위해 운동하라고 당부하기도 한 저자는 마지막에는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글에서 나이 들어 사라지는 것들은 젊음, 탄력, 검은 머리, 체력, 건강, 열정, 성 기능, 기억력, 친구나 배우자와의 사별, 남아 있는 시간들이라고 했다. 또 많아지는 것들로는 나이, 자손, 주름살, 뱃살, 검버섯, 고집, 잔소리, 격정, 회한, 오래된 가구, 옷가지, 외로움…. 이런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좋아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현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로 이전의 지식은 금방 쓸모가 없어진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전 세대의 지식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 든 사람들의 생각은 고리타분하고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아무도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따라하기가 어려워진다. 어느 순간 뒤처진 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것은 어느새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되어버린다. 부정적인 시각에 저항할 에너지도 낙천성도 없는 상태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고, 이제 나쁜 일만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노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늙고 싶지는 않아 한다. 과연 그럴까? 노년의 인생은 우리에게 여분으로 남아 있는 시간, 말 그대로 여생(餘生)일 뿐일까? 철저히 외면하고 싶은 두려운 현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시인 롱펠로에게 그의 친구가 물었다. “여보게, 자네는 여전하군, 비결이 뭔가?”퐁펠로는 건너편에 서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를 보게나! 이제는 늙은 저 나무가 저렇게 잎이 무성한 것은 저래뵈도 저 나무가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마찬가지라네. 나이가 들었어도 하루하루 성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네.”인생의 각 단계는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변화하고 능동적인 인생이 될 수 있다.
같은 내 또래 70대라도 정말로 그 나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젊게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은 자신의 나이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열심히 운동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활기차게 살고 있다.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다면, 신체 나이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것이 좋다. 70세가 되든 80세가 되든 나이와 상관없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성장하는 나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방법이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김형석 선생은 60세까지는 미숙했으며 자신의 황금기는 65세 또는 75세를 지나면서였다고 하기도 한다. 나이들어도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지, 오늘 누구를 만날지, 나이 많으신 어머니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머리를 염색할지 말지, 영화를 볼지, 어떤 책을 읽을지, 친구에게 어떤 문자를 보낼지 고민하고 신중하게 결정한다. 너무 아파 누워있어도 덜 아픈 시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면 아직도 많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공부할 게 많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기왕 오늘 눈을 떴으니 추억 하나를 만들면서 살아야겠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방식이고, 나이 듦에 대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