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의 혀가 바람을 감아들였다 흰 뼈가 드러났다 피 철철 흘리며 시간이 걸음을 멈췄다 화석 속에 살던 물고기가 나뭇잎을 물고 계곡으로 사라졌다 적막의 지느러미가 날렵하게 흔들렸다 이내 안개가 왔다 죽은 자들이 제 무덤 속으로 안개를 끌어들였다 마른 내장을 꺼내 적시는 숲의 늑골 사이에서 시간은 무수히 알을 낳았고 알 수 없는 섬광이 안개 사이로 비쳐들었다 제 속의 너무나 많은 구멍들, 그 구멍들 속으로 스며든 안개를 나무들은 힘겨워했다 땅에 구멍을 파고 눈감고 들어가 누울까 안개 너머 멀리 한 세상이 씨앗들을 터뜨렸다 적막의 지느러미가 별들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섬광을 잠재워버린 안개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구멍들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고, 그때 숲의 내장엔 소화되지 못한 온갖 나무들 뿌리가 엉켜 들고 있었다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문예공모 시 당선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오월문학상 수상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안개지역 / 배한봉
습기찬 바람 속에 나는 서 있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뒤엉킨, 곧 무너질 듯 위태로운 다리 위에 나는 서 있다 눈 뜨면 안개 뿐인 이곳을 사람들은 희망을 노래하며 건너갔다 절망하면 불안 때문에 발을 헛딛게 되니까 산다는 것은 안개와 같으니까 가끔씩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싸움과 슬픔에 지친 마음들끼리 술 마시면서 주먹을 펴면 차가운 바람들만 스칠 뿐인 이곳을 나도 이제 희망을 노래하며 지나가려 한다 세계는 슬몃 태양을 밀어올리고 갓 깨어난 새들이 날아오를 때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로 등단 시집 『흑조 』『우포늪의 왁새 』『악기점 』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 계간 <시와 생명> 편집위원 웹진 <詩鄕> 편집주간
안개 / 나희덕
나는 바늘이다 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 마악 몸을 밀어넣기 시작한다 나는 종이다 눅눅해지도록 누워 있다 더 이상 젖을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갈매기다 너무 멀리 날아와버렸나보다 갯내가 나지 않는다 나는 박쥐다 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 쥐가 되지 못했다 나는 맨드라미다 닭벼슬 같은 내 입술을 그가 삼켜버렸다 금잔화가 따라 울었다 나는 느티나무다 가지 끝으로 누군가의 살 속을 찌르고 있음을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다 나는 가로등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 그는 내 배경이 되어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좌석버스다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는데 좌석은 이미 만원이다 나는 자전거다 나를 타고 간 사람 돌아오지 않는다 어디서 쳇바퀴 돌리는 소리가 자꾸 들린다
나는 이미 지워졌다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연세대 국문과 졸업,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등 다수 수상 현재 '시힘' 동인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등
새벽 안개 / 신경림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로 등단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시집[농무],[새재],[달넘세],[남한강],[가난한 사랑의 노래],[길]등 산문집 [민요기행 1·2],[강따라 아리랑 찾아],[시인을 찾아서]등
그리운 안개 / 류외향
팔을 뻗으면 그믐의 어둠보다 더 캄캄하게 삼켜버리는 심장마저 지독히 막막하고 아득한 물방울로 채워버리는 안개 속에서 처음으로 소리내어 엄마를 불러보았던가 아파서 썩지 않는 몸의 기억 갈대들은 제 몸을 흔들어 바람을 말하고 벼포기들은 모로 누워 또 다른 뿌리를 내리며 폭풍을 말하고 그 모든 것을 안개가 먹이고 키웠던 것이다
소읍의 바람소리 비소리 다 거두어들이던 안개 더 깊숙이 나를 삼켜라 더 더 깊숙이 나를 품어라 안개의 감옥 속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늘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가 아파서 아프지 않았던가
잘못 든 꿈이었던가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몸은 시래기처럼 말라가는가 느리게 느리게 점멸하는 생이여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경북대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999년 <시안> 신인상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1999년에 대산창작기금, 2000년에 문예진흥기금을 받았으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천년의시작, 2002년) 등
공화국의 모든 길은 / 김선우
대관령 관통고속도로 생긴후 돌개바람 심해지고 안개가 자주 낀다 아침 저녁 안개의 점령지를 뚫고 헤드라이트 군단이 달려 간다 안개는 도처에서 몰려오고 어디든 가는 무적이지만 대관령에 이르러 슬픔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구술한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적으며 꽃을 뿌리고 안개는 다만 떠다닌다 발자국 내면 그 뒤로 더 많은 발자국 들끊을까봐 안개는 길을 내지 않는다 떠다닐 뿐 형상을 버린 세포만으로 새벽을 나부대면서
가장 오랜된 안개의 족속 중 현자인 족장 하나가 물파이프를 빨아올린다 옅은 기침을 할 때 쪼개진 손톱 속으로 안개의 혼이 스민다
저 길이 두렵고 아뜩하다 강릉을 향해 직선으로 내뻗은 고속도로로 영혼은 직선을 타고 오는 법이 없으니 저 물 아래가 황량하구나, 현자의 목소리가 젖어 있어 나는 꽃대신 잔기침을 하며 펜 끝에 침을 묻힌다 공중으로 날 듯이 이 같은 동해를 향해 내려가는 것 같지만 아니다 실은, 이 공화국의 모든 길은 서울을 향해 놓인 것이다
1970 강원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등단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동화집 : 『바리공주』 산문집 : 『물밑에 달이 열릴 때』 시힘동인
안개의 나라 / 박진성
물기로 호흡하고 젖은 노래로 이야기하라 별빛은 두텁게 가려져 있고 視界를 가늠하지 마라 우울할 땐 걸어라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무엇을 만져도 너는 불안할 것이다 나무들은 이상한 예감으로 흔들리며 팽창한다 눈썹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강가에 앉아도 좋다 기다리는 일이 지친다면 발목을 만지고 죽고 싶다면 죽고 싶다면 귓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라 미간을 만지며 고향을 생각하고 흐르는 나뭇잎을 주워라 우리는 먼 데서 왔고 영원히 우리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만끽하라 발끝으로 밀리는 공포, 공중전화부스는 아스팔트에 박혀 흐느껴 울고 자동차 경적 소리가 물고기처럼 튀어 오른다 창문은 흐느낌이고 고양이는 버려진 짐승의 시체를 찾아다닌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오래 응시하고 족보를 만들지 마라 울음소리와 울음소리 사이의 침묵에 대해 생각하고 철로처럼 길게 울어라 육교는 하늘로 승천하고 싶고 우리의 발바닥은 언제나 꽃보다 낮다 아픈 사람 만나면 사라진 길을 열어주고 물기 머금은 꽃잎의 얼굴로 뒤를 돌아봐라 빛을 뿜어내는 것들은 저마다 고통스러운 것들이니 그러니까 이것은 안개의 말이다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2년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2001년 《현대시 》등단 시집 『목숨 』『아라리 』
안개 당신 / 김왕노
안개란 당신, 있으나 잡으면 잡히지 않는 안개라는 당신 모두가 돌아간 밤, 세상에서 안개로 피어오르는 당신, 끝없이 자욱한 당신, 안으면 한 없 이 안겨오나 실체가 없는 당신, 안개라는 당신, 당신이 길을 막고 시야를 가려도 원망할 수 없는 당신, 안개란 당신, 미루나무보다 더 키 큰 당신, 벌판 보다 더 넓은 당신, 강 보다 더 깊은 당신, 안개란 당신, 어디나 있으 나 어디나 없으며 날 외롭게 하는 안개란 당신, 까르르 웃으며 안기고 싶 은 당신, 안개란 당신, 참 많은 당신, 전혀 없는 당신, 안개란 당신
1957년 포항출생 1988년 공주교대 졸업 199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 1995년 6인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 2002년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 2003년 한국해양문학대상 글발 동인
안개 / 오규원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툭 소리를 냈다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 ,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1 ·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 이민하
안개의 거리 끄트머리에 모퉁이가 있네 옆구리에 빵냄새를 겨누고 붉은 피톨을 터는 빵가게가 있네 맛보지 못한 무수한 빵의 종류와 이끼로 뒤덮인 축축한 티비가 있네 종일 생중계되는 수족관이 있네 날마다 여자들을 갈아끼우는 유리창이 있네 천천히 유리창을 닦다가 주방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이 있네 안개에 절인 여자들을 곱게 갈아 반죽을 빚는 주방이 있네 문드러진 음부까지 바삭하게 굽는 토스터가 있네 비닐 포장된 여자들을 오토바이에 실어 어디론가 발송하는 하루가 있네 오토바이가 첨벙거리며 횡단하는 샛노란 고름 투성이의 저수지가 있네 울렁거리는 새벽비에 나뭇잎들을 토해내는 가로수가 있네 유리창에 튄 녹색 토사물을 씻어내는 오늘 처음 배달된 여자가 있네 여자가 엎드려 닦는 바닥에 기억 속으로 전송된 여자의 남겨진 핏자국이 있네 그걸 무심히 바라보는 창 밖의 여자가 잇네 그녀들을 이야기하는 길가의 여자와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길 밖의 여자가 있네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길모퉁이가 있네 손을 대면 사라지는 한 칸의 유리가 있네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안개에게 길을 묻다 / 조은길
안개는 고양이걸음으로 불쑥 나타나서 순식간에 둑을 뭉개주었다 늘 둑 너머가 그리웠던 호수는 그때마다 벗은 발로 들판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얼굴 붉은 태양에게 목덜미를 질질 끌려 되돌아 올 때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호수의 가출 물새들은 팅팅 불어난 호수의 젖가슴에 주둥이를 박고 꾸역꾸역 날개가 자란다 지난밤 안개에 여자가 빠져죽었다 벗은 신발 속에 긴 유서처럼 온몸에 안개의 지문이 그어져 있던 여자 날이 흐리자 호수가 둑쪽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물새들이 투덜투덜 호수를 따라 자리를 옮긴다 저 새들에게 호수는 벗어나고 싶은 감옥인지도 모른다 날개는 수만 리 하늘 길을 회전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형량 같은 것 어떻게 저 둑을 넘을까
1955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방송대 국문과를 졸업.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노을이 흐르는 강』
물안개 / 김수목
친전리의 고인돌 유적지에서 보았다. 모든 고인돌들이 집채 만한 원시인의 무덤들이 같은 방향으로 일정하게 놓여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물이 흐르는 방향이라고 한다 원시인들도 물처럼 흐르고 싶었을 것이다 흐르고 흘러 몸도 영혼에 닿고 싶었을 것이다
흙이 되고 진토가 되고 주검은 물처럼 흘러갔다
오늘 새벽 나는 냇물 위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신새벽에 스물거리며 피어 오른 물안개는 자꾸만 내게로 다가왔다가 다시 강을 향하여 강심을 향하여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전남 강진 출생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2년 중퇴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 문학과 창작 신인상 수상 한국시인협회회원, 시안시회회원, 시아카데미회원 시집 <나이테의 향기>, < 브레히트의 객석> 등
안개의 발바닥은 왜 검은가 / 박현솔
강가에 어스름이 밀려올 무렵 사람들이 흘려보낸 물소리가 안개가 되어 흐르네 그 안개 속, 도시의 잊혀진 이야기가 물비늘로 밀려와 강기슭에 쌓여가네
검은 근육질의 강 속에 토사물이 함께 흐르고 낡은 슬리퍼 한 짝을 삼켰다가 뱉으며 도시의 검은 부유물들을 울컥울컥 토해놓는 강물과 그것들을 가만히 감싸 안는 안개가 물의 유목을 몰고 강의 하류 쪽으로 흘러가네
긴 도시의 강을 업고 온 안개의 발바닥이 너덜거리고 미세한 혈관들이 터져 얽혀 있던 길들이 쏟아지네 안개의 발밑 평온해 보이는 강물 속에 먼 곳에서 흘러든 부음들이 하나 둘 젖은 몸을 뒤척이고 사람들의 검은 울음이 불씨를 숨긴 채 꺼져가네
나는 안개에 떠밀려온 깊은 물소리를 듣고 있네 오래 전 강가를 떠돌던 사람들에게 물소리 외피를 벗겨 물결의 안부를 띄우네 누군가 던져 넣은 슬픔 속으로 안개의 발이 빠지는 것을 보았네 안개의 검은 발바닥을 보았네
제주 출생 본명 박미경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2001년 [현대시] 신인상 수상 2005년 한국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집 <달의 영토>
안개 / 최광임
아무래도 잘못 든 길이다 정신을 가다듬겠다고 안경을 닦아서도 안 된다 짐작이지만 외길 성급히 돌아가는 낭떠러지쯤이지 싶다 나는 아직 작별의 말들을 남기지 않았다 일정 속도로 진행하는 기차 사실은 도깨비도로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무도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들도 없다 군데군데 마을의 나지막한 지붕들은 또 아침 하늘을 나는 새들은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은 어둠만이 갖는 줄 알았다 빛으로 호명되지 못하는 것 가장 불행한 말이 어둠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서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검정이 품고 있는 환한 빛 고양이 숨소리를 내는 옆 좌석 할머니의 눈가에 묻어나는 세상 수없이 거쳐왔을 어둠들이 환하다 저렇듯 검은 얼굴로도 평온한 할머니의 잠이라니 이곳에서는 모두 안개가 아니면 검은 물체들뿐이다 대가리부터 급류를 타는 뱀과 같이 기차는 제 몸조차 보이다 말다 한다 변함없을 저편의 강 들 산을 기억한다 나는 안에서 밖으로만 향한 사시의 눈을 가졌던가 엇나간 시선을 좇다 빠진 안개의 나라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광활한 공중의 나라 기차는 철로도 없이 급경사 낭떠러지를 타고 돌며 날고 있다 조심스럽게 닦는 차창 안으로 하나 둘 깊숙이 들어오는 저 환한 세상
1967년 전북 변산 출생. 전주기전여대와 대전대 문예창작과 졸업. 대전대 문창과 대학원 박사과정.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다층', '빈터' 동인.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안개주식회사 / 이영식
구로동 인력시장 익명의 그림자들이 실루엣으로 흘러든다 삼삼오오 모여 선 유령들 팔과 다리를 새벽 안개가 자르고 붙인다 이름도 뭉텅 떼어 김씨, 이씨, 박씨, 어이-- 안개가 대기번호표를 나눠주고 제멋대로 잣대를 들이댄다 남루한 손에 쥐어줄 일당을 흥정한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람들 봉고차에 굴비 두름처럼 엮여 실리고 몇 몇은 타이탄 트럭 화물칸에 부려져 스스스 안개터널을 빠져 나간다 퇴박꾼들이 드럼통 장작불 곁에 모인다 얼었던 손과 발이 녹아 내리자 연장 가방보다 어깨를 짓누르는 하루, 안개가 선지 한 덩이를 물컹 뱉어낸다 (저 해의 긴 목을 무엇으로 칠거나!) 인력시장 사람들은 누구나 새벽 안개의 지분을 갖고 있다 휴지 조각보다 못한 그 주식을 차마 찢거나 태워버리지 못하고 돌아설 때쯤 유령회사의 휘장이 걷힌다 불 꺼진 드럼통난로 속 타다 남은 뼛조각들이 서로 안부를 묻는 시간 희망이라는 이름은 별난 족속들이 공구거리를 접수하기 시작한다.
경기도 이천 출생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 시집 <공갈빵이 먹고 싶다>, <희망 온도> 등
안개타운 / 신지혜
내 팔을 만져보아라 내 몸은 안개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물론 내 뼈와 피의 원료 역시 차가운 안개, 내 숨소리 귀울여보면 안개들이 바스락거리며 깨어나는 소리, 말소리, 흐느끼는 소리, 내 딱딱한 입술은 안개 콜크로 밀봉되었다 어쩌다 힘겹게 내 입술을 딸 때마다 스스스 흩어져버리는 희고 미끄러운 말들,
내 폐부 깊숙이 혹은 뇌속에도 안개를 쏟아 붓는다 이제 안개에 흠뻑 중독 되버린 사람들이 안개 목책에 기댄 채 차륵, 차르륵 서로의 뼈 뭉개지는 소리 듣는다
나를 낳은 무수한 안개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들 중, 어느 누구는 혹여 내 몸에서 태어나기도 하였으리 혹은, 한때 내가 낳은 아이는 내 전생의 오래된 안개 조상이기도 했을 것이리
나는 지금, 곧 사라져버릴 안개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안개 한잔 주문한다 안개는 방부제없이도 결코 상하지 않는다 천 오백년 전 안개젖소의 온기가 아직 스며있다
안개집으로 속속 귀가할 우리들 서로 다정하게 안개웃음 한 컵씩 나누고 등을 돌린다 고대에도 먼 미래에도 다시 잠깐씩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는 바로 그 황홀한, 안개 타운인 것이다
서울 출생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및 「현대시학」 제5회 신인작품공모로 등단 제3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 전, <시와 뉴욕> 편집위원 재미시인협회, 한국 문인협회, 미동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뉴욕 중앙일보 컬럼니스트 한.영 대역시집'New York Poetry'(미동부한국문인협회 간) The Famous Poets Society' U.S.A (2001) New Millennium Poet '로 선정
첫댓글 한참을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걸어봅니다. 손에 잡힐듯 빠져나가는 안개속에서 혼자가 되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