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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모음시집 [☆백제왕도의 천년향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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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도의 천년향기]
백제문화제시화전 시모음 / 충남시인협회 • 한국문협부여지부(2015.09.10) / 값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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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연꽃
구재기
연꽃은
진흙 속에서만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가만히
눈 여겨 보아라
청순 고결한 연꽃, 뿌리
근처에 고인 맑은 하늘을!
숨겨져 버린
아픈 역사 속에서
오똑하니 피어난, 저리도
밝고 고운 향기들을 보아라
백제의 피
권선옥
백마강에 가서 나는 보았다
물새 한 마리 차운 강물에 발 씻고
날아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흐트러진 발소리들이 뒤섞여 강을 이루고
철지난 갈대꽃이 풋눈에 떨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계백도 흥수도 말 없이 누운 지금,
시퍼런 칼을 차고 달려오는 강물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강을 건넌 칼잡이들이 갯바닥에 잠기고 난 뒤
어두운 하늘 찢으며 떨어지는 벼락불,
신라의 떼도둑을 깡그리 물리치고
소정방을 잡아 주리를 틀고 있었다
시뻘건 핏물이 튀겼다
단근질을 했는지 살 타는 냄새도 났다
할망구 하나가 뒷물하고 난 물을
쓰러져 누운 소정방에서 끼얹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고지랑물을 빨아 입맛을 다셨다
그는 길게 신음소리를 냈다
찢어진 옷을 적시며, 그러난 살을 적시며
숱이 적고 노랗게 바랜 머리털을 적시며
궂은비가 내렸다
비를 맞은 소장방의 몸이 서리꽃처럼 녹아
형틀은 비어 있었다
꿈을 깬 내 눈자위를 백제의 피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부여에서
김명수
부소산성에 오르면 보인다
꽃잎처럼 날린 삼천궁녀의 슬픔
백마강에 잠긴 백제의 절규
허공을 맴도는 그들의 춤사위
가끔은 정림사지 주변에서
궁남지를 서성이다가
깨어진 기왓장 조각에 써지는
백제의 역사
마을이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는데
아직도 황산벌 하늘을 휘젖는
계백의 거친 숨소리
그래서 부여는 지금도 꿈을 뀬다
백제 부활의 꿈
천년이 지났어도
낙화암에서
고란사에서
박물관에서
그리고 정림사지에서
부여박물관
김백겸
칠백년 세월의 백제영화는 허공에 달아나고 없네
백제금동대향로와 토기들이 전시실의 불빛에 반짝거릴 뿐
사비백제를 보았는지 현실세계를 보았는지 햇빛이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쏟아져 내리는 미궁이었네
모래시계는 공간 속의 시간이고 미궁은 시간속의 공간이니 우리가 본 백제는 우로보스의 뱀처럼 얽힌 꿈같은 시간
역사의 꽃길을 밟고 가는 관광객들은
세월의 꽃향기에 취하네
부소산 소나무
나호열
아무리 거룩한 역사役事라 하더라도 나는 싸움이 싫다
망한 나라 군량미 불탄 자리
그 옛날 군사들처럼 우뚝 서 있는 소나무들 바라보면서
칼이든 머리로든 사람의 마음을 베는 싸움의 역사歷史를
피로 읽었다
소나무들은 곧거나 휘어지면서도 몸 부딪는 일 없다
샅바를 잡기 전에 상대방의 기를 제압하는 준비 자세일까
아니면 한바탕 용을 쓰고 난 후 이기거나 지거나
다 같이 모래바닥에 뒹굴고 난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툭툭 모래 털어내는 몸서리일까
마음을 읽고 근육을 움직이며 서로 땀 묻히고
숨결을 주고받는 후
으라찻차 상대를 들어올려주는 씨름 한 판이 그리워
허공의 샅바를 붙잡고 평생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아 왔다고 해도
아무리 거룩한 역사役事라 하더라도 나는 싸움이 싫다
부여 궁남지에서
문상재
아스라한 기억 저편
백제의 말발굽 소리 들려온다.
풍악이 멈추고
달빛 채워진 술잔에
밤이 기운다.
밤 새 별이 쏟아지던 궁남지
중생의 억겁이
연꽃으로 피어나는가
백제의 혼백이
구리주전자를 두들기며
천년을 노래한다.
바람의 그림자를 지우며
어디선가 서동요 가락
귓가에 애잔하다.
꿈속에서라도
박만진
부여 궁남지
연꽃 지고
덩두렷한
한가위 달밤도
백마강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시월이 時月,
시월이 詩月 아닌가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꼭 이맘때쯤이면
꿈속에서라도
나는
의자왕의 왕관을
물려받고 싶고
성충과 흥수를
만나고 싶네
백제와당
박헌오
천년 또 천년을
흙속애 살았어라
영원히 지지 않는
여덟 잎 적멸보궁
백제의 순열한 향기
두근대며 품었어라
배감강 등에 엎혀
무량수의 벼링 뜨고
고란사 석간수에
왕조의 혼 목적시고
억겁을 타오르는 사랑
송이송이 피었어라
백쟁와당
손종호
천년 또 천년을
흙속에서 살았어라
영원히 지지 않는
여덟 잎 적멸보궁
백제의 순열한 향기
두근대며 품었어라
백마강 등에 업혀
무량수의 별이 뜨고
고란사 석간수에
왕조의 혼 목적시고
억겁을 타오르는 사랑
송이송이 피었어라
부여행
손종호
중학생 시절 백마강 강가에 쪼그려 앉아
강물에게 물었다.
넌 어디로 가니? - 하나가 되는 길.
하나가 뭐야? - 이름을 버리는 길.
그곳이 어디인데? - 바다 지나 하늘.
삼충사 베롱나무에 맺힌 아침이슬이 낯익어
50년 만에 만난 내가 다시 물었다.
바다 지나 하늘 간다더니 왜 여기에 있누?
- 하늘 갔으니 왔지.
하나가 된다 했잖아?
- 어디에 있던 우린 하나니까.
누구와 하나라는 거지?
- 너와 나, 그리고 만유와
난 너와 이렇게 나뉘어 있는데 무슨?
- 가까이 와봐, 난 그때처럼 네 얼굴을 품고 있는 걸
네 등 뒤의 무량 햇빛까지도.
헤브 어 굿 타임
― 금동대향로를 위하여
연용흠
해와 달이 알고 있을까
능산리 절터 한 구덩이에 묻힌 천삼백 년 시간
다 삭아내린 못이
자잘한 발가락 뼛조각과 함께 남긴
두 관반짜리 향로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별도 기쁨되어 서기瑞氣를 뿜어낼 줄 알고 있을까
살아 있을 때 향로 앞에 제 올리며
흥에 겨우면 악사樂士 때맞춰 무관에 신선神仙이었을 당신
첩첩산중 시시때때로 피어오르는 향 연기 몸에 휘감고
서른아홉 동물과 여섯 나무와 열둘의 바위와 산길과 시내와 폭포와 호숫가에 머물며
피리와 비파, 현금과 북소리로 님 오시는 걸음 재촉하신다
때에 맞춰 이승을 떠나신 혼들 편히 모시려
맨 꼭대기선 봉황이 날개 편 채 하늘 향해 우뚝 서게 하며
계란같이 둥근 몸체 아래 연꽃 활짝 피워 세상을 통째로 용에게 맡겨놓고
심오한 고요에 살풋 눈 감으신다
연잎에 싸여 노니는 사슴과 학과 불사조와 물고기떼들 함께 태평이었고
당신이 떠날 때 황토빛 혼으로 남겨둔 백제
청띠신선나비가 날아든 것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땅속에서 정말 찾아낸 것은 당신이 우리였다는 것
한 줌 시간에 잠시 머물었던 빛
소중하게 지키지 않으면 영영 만날 수 없는 것들
그리하여 향로처럼 아름답고 무덤처럼 평온하게
헤브 어 굿 타임
사비성泗泌城
유준호
두견이 울어 천년 구드래를 적시는데
들으면 가슴 파는 서러운 적막들이
아롱진 자취를 끌며 하염없이 떠다닌다.
봄마다 흘러드는 꽃 이파리 붉은 눈물
애환의 그림자도 간간히 얼비치는
낙화암 바위너설에 이마 찢겨 누운 세월.
올해에도 잃은 꿈 말끔 닦아 쪼아 몰고
‘잡초들 질기게 달라붙는 골짝 돌며
넋 빼는 두견이 울음 백마강에 흐너진다.
구드래
유준화
구드래 나루 건너면
써걱거리는 갈대의 소리가 강물 위에 뜬다
갈대는 언재부터 서로 어깨를 잡고
피리를 불어 강물 위에 저렇게 띄웠는가
천 년 전 백제 유민의 서러움이
노을이 시뻘겋게 쏟아지는 가을 강가에
나룻배 위에
붉게 타고 있는 백강
연꽃
윤문자
보세요
나는 기름진 진흙탕을
발 부리로 받아 올려
꽃을 피우지요
꽃도 그냥 꽃은 아니지요
연화문 꽃접시를
피워 올리지요
아! 꽃접시
진흙과 물로 빚어내는
나의 연금술을
보세요
부소산의 아침
윤문자
부소산은 낮아서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산은 정상을 바라보며 山을 오르지만
부소산은 높은 곳을 드러내어 놓고
누구도 정상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名山은 명산이로되,
명상하지 않으면서 이 산을 오르는 이는
아버지 의 든든한 두 팔과 어머니의 양수가 흐르는
부드러운 속살을 느끼지 못하는 명산입니다.
이 山에서 아침을 여는 사람은
이 山처럼 든든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슴이 되어
가고 오는 사람, 노래하는 산새들과 다람쥐까지
깊은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山에서 아침을 여는 사람은
이 山처럼 분수를 알고 겸손하여
높아지고자, 많이 갖고자, 애써서
오늘 하루도 헤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고란초皐蘭草
이도현
천년 너머
벼랑 끝에
서럽게 매달린 삶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넋이런가
백제혼百濟魂
지키고 앉아
강물소리 감고 있네.
부소산 길
이은봉
삼십년 만에 오르는
부소산
서러운 길.
한때는 사랑 잃고
터벅터벅
오르던 길.
지금은 나무 그늘 속
혼자 걷는
그윽한 길!
노래의 끝
- 부여 중앙시장 어물전에서
이정록
낡은 턴테이블이
바늘 끝에 털이개를 묶고 파리를 쫓고 있다
절은 헝겊 쪼가리가 빙빙 돌아갈 때마다
얼음 조각에 누워 있던 어안魚眼이 끔벅거린다
소리의 틈을 가르던 뾰족한 바늘은
이제 젓국 휘젓듯, 저자를 안는다
손끝으로 간도 봐주며 파리들을 내친다
한 세상 끝장을 보고 온
전축이며 털이개를 만나면
몸이 가 닿아야 할 포구가 보인다
비린내 나는 옛날과
주황색 천막으로 출렁거리는 바다를
휘휘 버무려버리는 털이개처럼
내려가야 할 마음의 바닥이 끈적거린다
켜켜한 먼지 털어버리고
노래 가득한 세상 만들리라던 마음에
바늘 빠지고 녹이 끼기 전에
다시 길떠나야 한다고
저, 털이개의 묵직한 춤사위 끝으로
내 꼬리지느러미 개펄을 끌고 간다
뻘에서 배를 떼면, 딱딱하게
온몸이 굳을 것이다
낙화암에서
이흥우
절벽에 몸을 날린
낙화암 꽃잎처럼
긴 세월 씻겼어도
널 향한 솔바람에
고란초
암벽에 붙어
천년사랑 울고 있다
천정대에 올라
이희열
누가 낙점을 받았는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이
그 이름자 위에 햇살무늬로 타오르는
선명한 천인天印
삼락회 봉사팀과 천정대에 올라
하늘의 뜻으로 사람을 다스리던 그 날의 지혜와
한 천 년 변함없이 이 땅에 흘러
민주를 꽃피운 백마강을 굽어본다
세상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여
정사암애 올라 하늘을 섬기던
백제인의 꿈
오천 결사 앞세운 계백은
오늘도 백제보 위 말안장에 앉아
걱정스런 나라의 안위를 지켜보고
시간이 멈춘 백마강 모래톱에
끝없이 이어진 자전거 길은
아직 다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을 향해
흐르는 강물 따라 달려가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임승천
백제도 있었네
그 영화, 그 화려
다시 만날 수 있었네
그 빛남, 그 극치
피가 끓고
혼이 살아
숨 쉬는 향로의 꿈
용솟음 속에
닭울음 속에
오를 것 같은 그 뚜렷함
백제는 분명 살아 있었네
순간에서 영원까지
백제는 다시 넘치고 있었네
모든 사상과 상징으로
늦가을, 궁남지에서
진명희
길 위에
말없이 머문 가을
바람은 악기처럼
시든 연잎을 두드리고
한 판 춤사위를 벌리려는 것일까
궁남지의 수면 위
가득가득 물결을 일군다
눈물처럼 뚝 뚝 뚝,
낙엽이 진다
그동안 주체 못했던 가지에서
우수수 잎들이 떨어진다
앙상해져가는 수양버들
지나간 것들을 다
잊어버리려는 것일 게다, 아마
발길 떨어지지 않는
길을 또 걷는다
겨울로 가는 길은
언제나 낯설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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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간사
백제왕도의 천년 향기
올해의 [백제문화제]는 9월 2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백제 다시 태어나다> 주제로 열립니다. 특히 올해는 [백제문화제]가 61회 째를 맞으며 우리나라 12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백제문화유적지구 등록을 기념하여 열리게 되어서 더욱 뜻이 깊습니다.
이에 부여 관련詩 100여 편을 모아 유서 깊은 부소산에서 시화전과 함께 시집을 펴내게 됨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와 충남시인협회가 함께 세미나를 개최하여 백제 큰길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감으로써 나는 백제의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백제권의 거봉인 일모一茅 정한모鄭漢模 선생님의 시세계를 조명함은 물론 백제문화유산의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는 계기도 마련하였습니다.
향토문학의 획기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기회를 준 부여 군수님을 비롯한 축제 추진단 관계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태어난 백제문화에 성공적인 축제가 되기를 큰 박수로 기원합니다.
2015.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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