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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16일 주일
[(녹) 연중 제20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자비를 청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읍시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성자의 낮추심으로 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증언하도록 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주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니,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았지만 자비를 입게 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낫게 해 주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이방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6,1.6-7
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6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7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1,13-15.29-32
형제 여러분, 13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4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15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강아지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 여인을 모욕하고 비하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상태, 곧 현재 놓인 상황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무시당하는 처지였고, 딸은 마귀가 들려 손쓸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러한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15,28)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상황을 포장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며 낫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 간청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예수님께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당신과 나누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우리가 성찰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나의 상태를 주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치유를 청하는, 큰 믿음을 닮아 가면 좋겠습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주님께 부르짖는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저를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우리는 인공지능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 가까이에 들어와 있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자료를 정리하고, 언어를 번역하는 데도 인공지능이 사용됩니다. 어떤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인공지능 사용 빈도가 절반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공지능은 우리 일상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젠슨 황은 인공지능을 ‘5단 케이크’로 설명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다섯 가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가장 아래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엄청난 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안정적인 전기가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프로그램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반도체’가 있습니다. 반도체는 인공지능의 머리와 같습니다. 특별히 한국이 잘 만드는 HBM 메모리 반도체는 인공지능 시대에 꼭 필요한 부품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플랫폼’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정보를 학습하고 연결합니다. 인터넷과 플랫폼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데이터 센터’가 있습니다. 방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그록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그 위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에너지, 반도체, 플랫폼, 데이터 센터, 프로그램이 함께 있어야 인공지능은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한민국을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땅이 넓은 나라는 아닙니다. 자원이 많은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났고, 가난을 견디며 배웠고, 땀 흘려 일했습니다. 에너지를 만들고, 반도체를 만들고, 빠른 인터넷을 구축하고, 플랫폼과 데이터 산업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의 중요한 인공지능 기업들이 대한민국을 찾아옵니다. 대한민국이 인공지능의 5단 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느 한 나라나 한 기업만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술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을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을 더 많이 갖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공정과 정의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바벨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힘 있는 사람만 잘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이 주님의 집에서 기도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산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나라, 어느 한 계층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은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눈으로 보면 밖에 있는 사람,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거절당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러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다시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말은 듣기에 참 힘든 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말은 비굴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깊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는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작은 은총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제 딸은 살 수 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신앙생활의 ‘5단 케이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에 에너지, 반도체, 플랫폼, 데이터 센터, 프로그램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입니다. 가장 아래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에너지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도 멈추고, 봉사도 지치고, 사랑도 쉽게 식어 버립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여인을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거절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여인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귀찮은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희망은 상황이 좋아서 생기는 낙관이 아닙니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다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여인이 그토록 간절했던 이유는 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사랑은 체면을 내려놓게 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게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차갑고, 사랑이 없는 희망은 자기만을 위한 바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나눔은 단순히 물질을 나누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아픔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도 나눔이고, 누군가의 아픔을 들어 주는 것도 나눔입니다. 받은 은총을 공동체와 나누는 것도 나눔입니다.
마지막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희생은 신앙생활의 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을 위해 체면도 내려놓고, 자존심도 내려놓았습니다. 희생은 억지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사랑 때문에 기꺼이 내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자가 공동체를 위해 시간을 내어놓고, 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큰 희생이었고, 그 희생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공지능의 5단 케이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면, 신앙생활의 5단 케이크는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영혼은 가정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세상을 살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결코 우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받은 능력이 세상을 위한 책임이듯이, 우리가 받은 믿음도 세상을 위한 사명입니다.
<당신처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5,21)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나에게 오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께 갑니다
내가 되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이 됩니다
나를 믿으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을 믿습니다
나를 바라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을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처럼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의 성인
성 스테파노(Stephen)
신분 : 왕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활동연도 : 969/970?-1038년
같은이름 :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헝가리 게자(Geza) 대공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데(Adelaide)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크(Vaik)는 10살 때에 세례를 받고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된 바이에른(Bayern) 공작의 누이동생인 기셀라(Ghisela)와 결혼했고, 997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자르족(Magyars)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일련의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고, 1001년에는 헝가리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스테파누스 왕은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4월 23일)의 지도하에 교계제도를 구성하고 교회 재건을 도모하며, 온 나라를 평화롭고 지혜롭게 다스림으로써 헝가리 국가를 창건하고 그리스도교화 시킨 최초의 헝가리 왕이었다. 그는 자신이 후계자로 여겨 왔던 신심 깊은 아들 성 에메리쿠스(Emericus, 11월 4일)가 사냥 도중 사고로 죽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친척들간의 암투와 음모로 큰 시련을 겪고, 말년에는 건강마저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다. 그는 1038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사망하였다.
성 스테파누스가 사망한 후에도 헝가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었으며, 묘지를 참배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1083년에 라디슬라스 1세 왕은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의 허가를 받아 헝가리의 주교들과 수도원장, 고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그의 유해를 장엄한 예식으로써 공경하도록 결정하였다.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성 게라르두스 사그레도(Gerardus Sagredo, 9월 24일)의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686년에 부다페스트는 터키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는 성 스테파누스의 축일을 9월 2일로 선포하고 전세계 교회에서 공경하도록 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000년 8월 2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 스테파누스 성당에서 성 스테파누스를 그리스 정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성 스테파누스는 그리스도교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된 1054년 이후 서방교회의 성인이 동방교회에서도 성인으로 공식 인정받은 첫 사례가 되었다.
성 로코 (Roch)
활동년도 : 1295-1378년
신분 : 평신도,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로꼬, 로꾸스, 로케, 로쿠스, 로크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 출신인 성 로쿠스(Rochus, 또는 로코)의 부친은 그 지방의 장관이었다. 그러나 20세 되던 해에 부친을 잃자 그는 로마(Roma)를 순례했는데, 그 당시 이탈리아를 휩쓴 전염병의 희생자를 돕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피아첸차(Piacenza)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풍성하게 드러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순례자로 변장한 스파이 혐의를 쓰고서 5년 동안이나 투옥되었다. 성 로쿠스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나중에야 그가 전직 장관의 아들이며 현 장관의 조카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또 그렇게 공경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는 로코(Rocco), 에스파냐에서는 로케(Roque)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