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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가 11,27-28)
“Blessed is the womb that carried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He replied, “Rather,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serve it.”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공동체에게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구원은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믿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잉태하고 젖을 먹인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말에 단호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대답하신다. 사실 예수님의 어머니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신 분이심은 분명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조개는 바다 밑 모래 바닥에서 숨을 쉽니다. 어쩌다 잘못되면 모래를 빨아들이기도 합니다. 연한 살 속에 모래가 박히면 조개는 통증을 없애려 ‘진액’을 짜냅니다. 끊임없이 짜내어 모래알을 에워쌉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나면 조개 속의 모래알은 영롱한 ‘진주’로 탈바꿈합니다. 하지만 ‘조개 속에 박힌 모래’가 전부 진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모래 때문에 생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군중 속의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가슴이 어떤 가슴인지 알고 있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 믿음으로 친구가 됩니다. 믿음으로 부부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집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으로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이 세상의 혈연, 지연, 학연 등과 상관없습니다. 친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는 믿음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용 불량자가 되지 맙시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군중 속의 한 여인이 성모님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여인입니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자녀를 진주로 키워 내는 어머니의 헌신을 체험해 본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어머니처럼 사는 것이 ‘말씀의 실천’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족과 이웃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들과의 부딪침을 ‘어머니의 인내’로 극복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삶의 진주’를 만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셨습니다.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도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답게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
모든 어머니는 따뜻한 가슴을 지녔습니다. 자녀에 관한 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내부에 발전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발전소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마음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더라도 전기를 일으켜 그것을 이겨 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의 답변 역시 따뜻합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쉬운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따르면 행복이 옵니다. 그분의 말씀인 ‘사랑하며 사는 것’을 실천하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평범하면서 쉬운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길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네온사인도 전기가 들어와야 빛을 냅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차가운 유리 조각에 불과합니다. 전기는 따뜻함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닮는 행동입니다. 타인을 기쁨으로 대하면 자신의 운명에도 기쁨이 함께합니다. 짧은 인생에서 차갑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어린아이 하나가 물이 가득한 아주 커다란 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독에 빠진 아이를 바라보면서 발을 구르며 “아이고! 큰일 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요. 왜냐하면 독이 너무 커서 독 위로 올라가기도 힘들었지만, 올라가더라도 독 안의 아이를 꺼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해야 하는 결단, 지혜, 용기를 생각해 봅시다. 말씀 상본 10년 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날 아침 일찍 성당 근처의 학교를 잘 새겨들으려면 -김지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양승국신부-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오늘 제시된 복음은 무척 짧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복음말씀입니다. 3년간의 공생활 가운데 절정기를 보내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군중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목활동을 통해 하느님 무한하신 권능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감쪽같이 일으켜 세우시는가 하면, 지독하게도 떨어지지 않던 악령들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하나같이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기적과 치유의 능력만 갖추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변도 얼마나 탁월한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입을 여셨다 하면, 주옥같은 말씀, 감칠 맛 나는 말씀이 샘물처럼 솟아나왔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너 좋지, 인물 좋지, 거기다가 겸손하지... 사람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 ‘뿅’ 갔습니다.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당신 자신으로 인해 모친 마리아까지 덩달아 칭송을 받으시니 예수님 입장에서 아주 기분이 뿌듯한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응답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무슨 뜻밖의 말씀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이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재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은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나자렛, 이스라엘에 안주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작은 시냇물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육적인 관계에 매달려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참 신앙공동체는 폐쇄된 작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벽을 무너트립니다. 국경도 넘어섭니다. 민족도 초월합니다. 남녀, 빈부격차, 인종, 이념, 사상...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그리스도'표 유니폼 -김찬선신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어머니 -오상선신부- <독서강론> : 우리의 은신처이시며 산채이신 하느님
비록 자궁과 젖가슴이 없어도!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전삼용신부- 보통 성지는 성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요즘 한국은 성지가 아주 잘 가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 유럽도 매우 많은 성지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지는 비단 그분이 사셨던 아씨시만이 아니라 그분이 돌아다니신 모든 곳이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스쳐간 곳은 모두 성지가 되었습니다. 성지는 거룩한 땅이란 뜻이지만 그 거룩한 땅에 사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거룩해 질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성지 안에 산다고 해서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지는 다만 성인들의 발자취를 기리고 그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분들이 스쳐 지나갔다고 해서 그 땅이 거룩해지고 그 안에 사는 사람도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순례자들은 성지에 도장을 찍고 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성인들의 삶을 본받고 그 삶을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거룩해집니다. 이스라엘 예수님의 성지엔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고 예수님께서 사신 곳에 살아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통적인 사고방식은 거룩한 것과 접하면 거룩해지고 부정한 것과 접하면 부정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제나 레위인들이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고 멀찌감치 돌아서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사고방식을 고치는데 매우 큰 노력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거룩한 것과 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룩한 뜻을 실천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당신도 죽기까지 아버지 뜻을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정통적인 이스라엘 사람의 생각을 지닌 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이렇게 칭송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성인들이 스쳐지나갔던 곳들이 성지가 된다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열 달을 머무신 성모님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얼마나 거룩해 졌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 단지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젖을 먹여 키운 것 때문에 복되시고 거룩하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거룩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이오니,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여인 중에 복되신 여인이 되신 것이지 단지 예수님을 나았기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당 다닌다고 해서, 성경을 옆에 끼고 다닌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당이나 성경 자체는 거룩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쌀이 있다면 그것으로 밥을 해서 먹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 몫입니다. 먹지 않으면 그 쌀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과 삼년씩이나 깊은 관계를 맺으며 함께 있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룩한 분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거룩해지지 않았기에 더욱 책망 받을 이유가 큽니다. 우리도 미사를 하고 성체를 영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구원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면서도 성체의 참 뜻을 실천하며 살지 않았다면 더 큰 책망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면, 혹은 미사에 참례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좋고 거룩한 것을 지니고 있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삶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어떤 꼬마 아이 하나가 큰 돌을 가져와 사정없이 항아리를 쳐버렸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항아리는 깨졌지만, 그 바람에 아이는 무사히 살아났습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독을 깨뜨리지 않고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걱정으로 상징되는 큰 독을 깨뜨리는 결단과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결단과 지혜와 용기가 바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도구가 됩니다. 특히 주님을 선택하는 결단,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생활하는 지혜, 세상의 그릇됨에 반대하는 용기는 분명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줍니다. 이를 우리들은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가 있지요.
물론 화려한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지혜를 간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는 용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역사학자였던 아놀드 조셉 토인비에게 누군가가 “역사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역사 그것 별것 아닐세. 우리 맘대로 못하는 게 역사일세. 역사는 전부 하느님이 맘대로 하신 걸세.”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그러면 우리가 역사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옷깃을 여미고 그 앞에 겸손해야 하는 것일세.”라고 답변했다고 하지요.
이 겸손의 삶이 앞서 말씀드린 겸손과 지혜와 용기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 앞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옷깃을 여미고 겸손하게 그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함께 걸어가야 하는 행복의 길의 시작인 것이지요.
나만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들어가야 하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서로가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모습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김귀웅 신부-
찾아갔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성경구절을 골라 종이에 프린트하여 사탕과
함께 돌돌 말아 진짜 말씀 사탕을 만들어 시험보러 오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떤 아이는 다른 친구의 것을
얻어 모아두기도 하였다는군요. 몇 해 전부터는 명함 만한 크기의 종이에다
제가 직접 찍은 사진과 성경구절을 넣어서 인쇄하고 코팅까지 해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각 단체 회합 때 말씀 상본을 하나씩 가져가서 그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해보자고 한 뒤 그런 경험을 다음 주 회합에서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그러나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회합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과 봉사에서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짧은 한 구절의 성경말씀을 살려고 노력했던 이들은 자신의
경험 끝에 늘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젖을 먹인 여인이기에 행복하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가
행복하답니다. 매주, 매일 성당에 나와 예수님을 모시기에 행복하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일상에서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성모님이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낳아 기르신 이유는 오직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복으로 가는 길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잘 듣는 것도 어렵습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좋은 것은 어려운가 봅니다. 사실 말씀을 잘 지키고 잘 듣는 것조차 어려운 것은 인간의 소통 수단인 말과 글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과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나타내기에 부족한 것이 말과 글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언어에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담았을 때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잘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리의 말씀은 종종 비유로 나타납니다. 진리를 말과 글, 곧 직설법으로 표현했을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과 시인들이 비유를 들어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말과 글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자연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천둥 번개와 함께 몰아치는 폭풍우, 폭풍우가 지난 뒤 활짝 갠 푸른 하늘과 산과 들, 바람과 꽃과 나무, 티 없이 맑게 웃는 아기의 얼굴, 사람보다 먼저 천하의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고 댓돌 밑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 이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감동을 주고 경이로움을 자아냅니다. 자연은 말 이전의 말이며 글 이전의 글입니다. 때로 인간의 말과 글보다 훨씬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우리는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새로워집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어디에나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이든, 대자연의 말씀이든 잘 새겨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무지한 원리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또 말씀을 잘 새겨들으려면 센서, 곧 귀가 좋아야 합니다. 필경 깨끗한 마음,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이라면 내 귀가 더욱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큰 바다에서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인류 전체가 크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언젠지 정확히 기억치 못하지만 1980년대부터 교복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턴지 교복을 입는 학교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군대문화의 산물이고 획일화의 주범으로 몰려 없어졌다가
뭔 이유인지 모르지만 다시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복을 입지 않는 것이
개성,
자유로운 생각,
창의성 개발에 도움이 되지만
좋은 것 못지않게 나쁜 것이 있나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놀란 것은
수녀님들이 수도복을 입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자 수도자들은 수도복을 입는데 수녀님들은 아예 입지 않는 것이
한국과는 반대 현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때 안식년 과정을 같이 한 수녀님들이 계셨는데
대부분은 안식년 마치고
무슨 일을 어디서 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받은 느낌은 공동체 안에서 소임을 받아 사는 수도자가 아니라
자기의 일을 가지고 각기 살아가는 직업인 같아 보였습니다.
옛날에 예비군일 때 신학교는 가톨릭 의대와 같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의사가 상당수였는데
그 점잖은 의사들이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똑같아집니다.
상스런 말을 일부러 하는 것 같고
괜히 일탈의 행동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 어떤 옷을 입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옛날에 새로운 삶을 선택한 성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통일된 옷을 입음으로써
자기들의 정체성을 공동 확인하고
같이 회개의 삶을 살고
같이 자기들의 공동 이상을 살아가는데
서로 자극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의 같은 자녀가 되었음을 얘기한 다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하고 복음을 생활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즉시
입던 옷을 벗어버리고
타우(T) 십자가 모습의 수도복을 입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뜻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명 디자이너의 명품 옷을 입고 싶고
나의 개성을 한껏 드러내는 옷을 입고 싶을 때도 있지만
기꺼이 그리스도표 유니폼을 입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고
그 복장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가장 행복한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일까?
오늘 어떤 여인(어머니)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낳아 기른 그 엄마는 얼마나 행복한 여인이겠느냐고 찬탄한다.
엄마의 행복은 자식이 잘 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자식이
공부 잘 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짝을 만나서 잘 먹고 잘 산다면
그게 낙인양 생각한다.
그런 자식 만들기 위해
쌩~ 고생을 다 한다.
오늘 그 여인은
왜 예수님의 엄마가 부러웠을까?
저렇게 훌륭한 랍비,
저렇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전해 주는 젊은이를 보면서
찬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현세적인 것 안에서
자식 잘 되는 것만 바라는 보통의 우리네 엄마들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좀 특별하다.
자칫 당신 어머니가 들으면 좀 섭섭해 하실지도 모를 표현이다.
나를 기르고 젖먹인 그 어머니가 행복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표현은
자식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기르고 가르치고 젖먹이는 그 어머니의 행복도 행복이겠지만
실제로 당신 어머니가 복되신 것은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었다는 그 사실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하고 순종하고 그분의 말씀을 잘 지키신 분이기 때문에
더욱 행복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복관을 한 단계 더 성숙시켜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의 행복이
단순히 자식 잘 되는 것이 전부라면
이는 현세적인 행복일지는 몰라도 사실 부서지기 쉬운 행복일 것이다.
자식이 내가 바라는 대로 다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공들인 만큼
내가 사랑을 쏟아 부은 만큼
뜻대로 다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에
거기에만 행복의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모님처럼
하느님께서 이 자식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묵상할 줄 알고
내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이 되도록 내맡기는 것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아닐까?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가 바라는 대로 자식들이 성장해 주기만 바라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식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려주고
기도해 주고 있는지...
어떻게 보면
하느님이 진짜 내 자식의 아버지요
나는 요셉과 마리아처럼
그의 양아버지, 양어머니 역할로 불림받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이고
가장 행복한 부모의 길이 아닐까?
-경규봉 신부-
예언자는 주님께서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뭇 민족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한다. 뭇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악행에 대해 갚아주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가고 그들의 땅을 빼앗으며 그들을 팔아넘긴 모든 죄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 백성에게는 은신처가 되시고 산채가 되시어 이들을 살리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머무르시며 예루살렘이 거룩한 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유다의 땅은 산마다 포도즙이 흐르고 언덕마다 젖이 흥건하며 시냇물이 넘쳐흐르듯이 그렇게 차고 넘치는 풍요로운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당신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당신을 거역한 민족들은 쑥밭이 되고 허허벌판이 되어 황폐할 것이며, 그들은 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예언한다.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인하여 백성과 가축들조차 굶주리고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조차 없는 상황을 통하여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다가옴을 보았다. 주님의 날은 악에 대한 심판의 날이며 종말의 날이다. 그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시작되는 날이다.
때문에 주님의 날은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악을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을 거스른 다른 민족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르며 하느님을 섬긴 유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은 단순히 세상종말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 새롭게 시작하는 새 시대의 날이라고 예언자는 예언한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또한 율법이나 제사에 충실한 것만으로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해야만 된다. 가슴을 찢는 참다운 회개를 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예언자가 된다. 저마다 예언자처럼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3,1-2).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을 참된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다(3,5).
인생이란 죽음을 향한 여정이기도 하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물질과 능력, 인간관계나 사랑까지도 모두 앗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죽음은 곧 파멸이요 허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들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허무이며 파멸이겠지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개개인의 죽음이란 곧 개개인이 맞는 주님의 날이다.
주님의 날을 선포하는 예언자 요엘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권고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격려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이름을 참된 마음으로 부름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도록 격려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은신처이며 산채임을 전하며 주님 안에서 생명의 샘물을 마시도록 초대한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가치와 기준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느님께 둠으로써 하느님께 충실하자. 우리의 은신처이며 산채이신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복을 누릴 것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신앙인이 되자............◆
“정말로 강론 준비가 안 되어서 급할 때는 네 묵상 글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 변함없이 매일 올려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계속 묵상 글 멈추지 않고 올려주었으면 좋겠어.”
그 신부는 신학생 때 저보다 훨씬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친구였습니다. 또한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만능 신부였지요. 그러다보니 학창 시절에 이 친구의 능력과 재주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서 이 친구를 비롯해서 오히려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하긴 며칠 전에는 신학생 때 같은 방을 썼던 동창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까? 아침에 못 일어나서 내가 깨워주고, 지저분하게 살았던 그 모습을 상상이나 할까?”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은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다릅니다. 이렇게 변한 이유는 바로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다보니 이렇게 변할 수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보니 이렇게 바뀔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주님을 몰랐더라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구멍가게 주인? 조그마한 회사의 샐러리맨? 혹시 예전에 탁구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탁구장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덕분에 출세한 것이지요. 주님 덕분에 이렇게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저에게만 특별히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많은 특권을 누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하게 베풀어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잠시 뒤의 시간에서 바라볼 때 주님의 이끄심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복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이렇게 정의를 내려 주시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행복할까를 이야기하지요. 이렇게 훌륭한 분을 낳았다는 이유때문이지요. 그러나 더 행복한 사람은 세상의 판단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하게 받고 또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저처럼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둔 사람이라면
훌륭한 자식을 둔 것이 가장 큰 행복일 것입니다.
기업은 잘 키워놨지만 자식을 잘못 키웠다면
아마 자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자식을 둔 사람을 무엇보다 부러워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자궁과 젖가슴은 행복하다고 하며 부러워합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도 젖가슴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다른 것은 여자가 안 부러운데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 있는 것만은 여자가 부럽습니다.
아기에게 생명을 주는 젖은 얼마나 숭고합니까?
젖을 물릴 아기가 있는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저는 젖이 없고 아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저와 여인을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복음의 다른 데(루카 8,28)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성모 마리아처럼 당신의 어머니가 되고 그래서 행복하다 하십니다.
그래서 비록 자궁은 없어도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마리아의 젖가슴은 아니지만 선행을 실천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행복은 더불어 함께 함에 있습니다.
-이차룡 신부-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군중 속에 어떤 여인이 예수님 말씀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감탄을 나타내려고 여성답게 그분 어머니를 칭찬하였습니다. 자식의 위대함은 어머니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아들을 낳고 기른 어머니는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예언(루가 1,42-45)과 마니피캇(루가 1,48)의 첫 성취였습니다.
교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라고 표현된 이 여인의 호칭을 동정녀 마리아께 드립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칭찬을 인정하셨으나 초자연적 질서가 얼마나 자연적 질서보다 뛰어나는가를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 완전한 전형이요 모델이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성모님은 정녕 복되신 분이십니다. 영광의 아들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이시기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기에 복되신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는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수고보다 더 큰 수고는 없습니다. 성모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사촌 엘리사벳이 성모님에게 "당신은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되신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가졌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함께 따라가며 고통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 가족과 친구와 가까운 이웃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진리이신 말씀을 거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나 혼자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 것입니까?
행복은 더불어 함께 함에 있습니다. 자식의 불행은 어머니의 아픔이요 자식의 행복은 어머니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방탕한 자식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희생기도를 바친 어머니 모니카의 생애는 성모님의 생애와 다를 바 없으며 자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모습입니다.
성녀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모니카에게 암브로시오 성인이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식은 잘못된 법이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고향인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가면서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출항시간을 거짓말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도 모니카는 다른 배를 타고 아들을 쫓아갔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귀찮을 정도로 아들을 따라다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자기만의 원을 그렸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더 큰사랑의 원으로 아들을 품었습니다.
오늘 내가 사랑의 원을 그려 품어야 자식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의 어머니들이여! 귀찮을 정도로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희생기도를 바치며 자식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면 많은 자녀와 젊은이들이 교회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네 신앙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무사안일한 마음으로는 자식이 예수님 안에서의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혼배미사나 관면혼배 또는 장례미사 때에야 볼 수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성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단 10분이라도 기도하는 가정은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들은 구원의 진리를 내가 먼저 몸으로 살고 가족들과 친척, 직장 동료와 이웃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성녀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의 말씀입니다."아들아, 내게 있어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 것도 없다. 현세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주께서 과분하게 나에게 이런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향락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그리고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마마보이
-김정대 신부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은 가끔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을 누가 나무라랴?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강인함은 자식을 키우면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물론 다른 문화권 어머니들도 마찬가지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성 중심적이다. 남아를 선호해서 무죄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나, 결혼을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남편 쪽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한 여자는 자신의 신원을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누구의 아내, 또는 누구의 엄마라는 종속된 인격체로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이런 구조에서 아이에게 집착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물심양면으로 자식에게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다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한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단지 그 자식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의 배우자가 되는 사람한테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새로 결성된 가정은 독립성을 잃고 엄청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자식에 대한 무질서한 집착 때문에 마마보이로 만들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 최영균 신부 -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어떤 실행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많은 경우 말로 사람의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말하는 능력만 있고 듣는 능력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봅시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댈 것입니다. 거기엔 말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물원의 동물이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같아질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언어행위에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말을 잘 하지만 듣는 것에는 서툽니다. 잘 들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특히 진리를 행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명’이라는 말은 영어로 ‘Obedience’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ob’이라는 말과 ‘audire’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즉 ‘…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순명입니다. 진리에 순명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나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에 대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그만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어질 것입니다.
행복한 여인
-강영구신부-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대에게
아침저녁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기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지요. 규칙적인 생활과 체온 관리가 감기를 예방하는 길입니다.
저는 지금 어머니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늘 어머니께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5남1녀를 낳아 젖을 먹이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래도 환갑이 다 된 신부(神父) 아들 때문에 오늘도 로사리오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시집 장가 간 다른 자식들과 달리 신부(神父) 아들은 부뚜막에 앉혀 논 아이처럼 한 순간도 안심할 수 없으신 모양입니다. 사제(司祭)의 길을 가는 저는 불효막심(不孝莫甚)한 쌍놈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쳐다보면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만한 불효자(不孝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때문에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임신하던 순간부터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비명횡사(非命橫死)할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불효 중의 불효는 부모 앞서 죽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래도 성모님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된 여인’(루가1,42)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모자지간(母子之間)이라는 혈연(血緣) 때문에 복된 여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십니다.”(루가1,45)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린 성모님은 성당 앞뜰의 뿌리 깊은 느티나무처럼 폭풍우 같은 시련과 유혹,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었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킨’(루가 11,28) 복된 여인입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양승국신부-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 특별한 수녀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신지, 또 소리 없이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내시는지 신자들로부터 ‘살아있는 성모님’으로 통합니다.
수녀님과 한번 인연을 맺은 신자들은 얼마나 수녀님께 매료되는지, 그리고 존경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을 한번 만난 많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수녀님의 팬클럽에 가입합니다. 수녀님의 영성과 정신,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에.
그런 수녀님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인품도 인품이지만, 탁월한 친화력과 중재력이 비결이었습니다.
이 수녀님의 특기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소지가 발생하면 아주 조용히, 지혜롭게, 소리 없이 개입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크게 하지 않습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빠져나가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습니다. 수녀님 자신이 본당 굳은 일은 거의 다 뒷전에서 도맡아하십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라도 잘 되면, 주임 신부님 덕분이라고, 작은 수녀님이 수고하셨다고, 신자여러분들이 잘 협조해주셨다고 칭찬하고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물론 신자들을 향해 거짓말도 많이 하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들께서 얼마나 신자 여러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고, 자나 깨나 신자들의 영성생활 성장을 위해 노심초사하시고, 오직 신자 여러분들 영혼구원만을 위해 존재하신다고 약간의 ‘뻥’을 칩니다.
그리고 신부님에게도 거짓말을 종종 하십니다. 신자들이 끔찍이도 신부님 생각한다고. 이런 좋은 신자들 처음이라고.
그러니 가시는 본당마다 갈등이나 불화가 생겨날 이유가 없습니다. 평화롭습니다. 늘 화기애애합니다.
한 사람의 그런 희생과 중재, 헌신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녀님의 그런 모습에 감동한 신부님, 사목위원들, 단체장들도 수녀님을 따라서 겸손하게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행복의 비결은 헌신이고, 희생이고, 자기낮춤이고,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들으셨을 때 몹시 섭섭해 하셨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저희 어머님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저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묵묵히 많은 수고를 해 오신 분입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참으로 성모님께서 들으셨다면 섭섭해 하실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배경에는 보다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나는 이제 인류구원이란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혈육과 가정과 부모와 고향을 떠나갑니다. 우리 어머님, 생각하면 제대로 한번 챙겨드리지 못해 늘 안쓰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면, 제가 더 이상 나자렛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제 어머님을 떠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지상과제인 인류전체의 구원을 위해 미련 없이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갑니다.”
이런 예수님의 출가 선언 앞에 성모님 역시 아쉽지만 예수님을 떠나보냅니다. 10달 동안이나 자신의 배속에 들어있었던 예수님, 낳고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했기에 애착이 가지 않은 수 없는 예수님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미련 없이 떠나보냅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Fiat(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가끔은 기쁘게 “예!”라고 응답합니다.
“생맥주 한잔하러 가자”는 형제들의 초대 앞에 저는 만사를 제쳐두고 기쁘게 일어섭니다. 뿐만 아니라 “손맛 좀 보러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설레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낚시도구 챙깁니다.
이런 Fiat은 진정한 Fiat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다하는 Fiat이니까요. 진정한 Fiat은 바로 성모님의 Fiat입니다. 고통스러운 길, 정말 가기 싫은 가시밭길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주님을 위한 길이기에 기꺼이 길 떠나는 Fiat이야말로 진정한 Fiat입니다.
다가오는 삶의 모든 국면들이나 사건들,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고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직면하는 자세가 진정한 Fiat의 자세입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 억울하기 그지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나대지 않고 조용히 마음에 간직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자세야말로 참 Fiat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됩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 계시는 계약의 궤가 됩니다.
-서보효 신부-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학생 때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지금은 좀 고생스럽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행복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좋은 대학교 들어가고, 또 열심히 공부한 덕에 좋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직장에서도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일해야 돈을 많이 벌고 행복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고생하며 살아갑니다.
과연 이러한 노력의 결과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일까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처럼 이러한 행복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는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며 외칩니다.
놀라운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 여인은 행복을 예수님의 어머니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복은 그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지 않는 인간 욕망에서 나오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참다운 행복,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행복의 조건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쳐다보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세에서만이 아니라 현세에서 이미 참다운 행복을 누립니다.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복은 어떠한 협박과 박해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우리들의 순교 성인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행복한 사람입니까? 내 십자가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있을 때,
아니 삶의 중심에 있을 때 그때야 비로써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박성태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자녀입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면 자녀 된 입장에서는 그 보다 더 큰 칭찬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녀의 부모도 자녀를 키운 보람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의 부모님과 자녀들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나는 부모님께 어떤 자녀일까? 또 내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일까?
모든 인간은 자연인 한 사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좁게는 가족, 넓게는 모든 인간과 깊이 연결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칭찬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비난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지만 결코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됩니다. 신앙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철저히 내버려진 고독한 존재가 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인간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넓게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인간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우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처럼 학연과 지연 등을 습관처럼 따지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첫째, 자기 스스로가 강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결속력을 보이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가족 관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는 강한 책임감과 소속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개인사에서는 의형제 혹은 의자매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에서는 각종 단체들이 자매결연의 관계를 맺습니다.
둘째, 상대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한 아무리 장엄하고 근사한 행사를 통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기본인 부부지간에서부터 모든 관계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입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신뢰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명하고 개인적으로는 손가락 걸며 굳게 약속 다짐을 합니다.
셋째, 자신의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속감도 있고 신뢰심도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한다면 이것은 마치 펑크난 타이어인 채로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상 함께 생각 해본 바와 같이 올바른 관계 형성과 유지를 위해 소속감, 신뢰감 그리고 맡은 바를 책임 있게 실천하는 것이 상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인간 관계에서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나갈 때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참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한 영적 가족공동체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일년 365일의 매일미사 복음 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으로 기억된다. 비록 단 두절의 복음이긴 하나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감격하여 외친 행복찬사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찬사로 엮어져 있다. 희랍어 원문(原文)을 보면 "복되도다! 당신을 품은 태와 당신이 먹고 자란 젖은!"(27절) 하고 여인이 외쳤다. 여기서 태와 젖은 어머니를 가리키는 비유법으로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아들이 잘되어 존경을 받으면 그를 낳아 기른 부모도 덩달아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제자가 잘되면 스승이, 부하가 잘되면 상관이,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덩달아 기뻐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며, 사람들은 당사자뿐 아니라 당연히 그들을 가르치고 키운 사람들까지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계산법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님은 진정 당신을 따르는 방법으로 모든 혈통과 인연과의 단절뿐 아니라 모든 물질적 소유와의 이별을 요구하셨고, 심지어는 자기자신마저 버릴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19,29; 마르 8,34) 그분은 세상에 칼을 내리쳐 가족끼리 서로 맞서게 하려 하셨다.(마태 10,34-35)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만나려고 했을 때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들인가?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마태 12,48-50; 마르 3,33-35; 루가 8,20-21)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적이고 물리적인 혈통에 근거를 둔 가족공동체의 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새로운 의미의 영적(靈的) 가족공동체를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복음이 함께 외치는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찬사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 찬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실존(實存) 속에서 유효성을 가진다. 즉 여인이 외친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행복찬사가 예수님의 대응찬사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다. 여인이 감격하여 침묵을 깨고 예수의 어머니를 행복하다고 외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감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응찬사는 당신의 어머니를 외면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여인임을, 그래서 가장 행복한 여인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실현되도록 사셨던 분이 아니신가?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비록 당신의 삶이 외롭고 힘들었을지언정 모든 여인 중에 복되시고, 모든 복된 사람들 중에 진복자(眞福者)가 되신 것이며, 영적 가족공동체의 어머니이시다
오히려 행복하다(루가11,27-28)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을 보고 군중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생각할 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관이다. 사실 어머니들의 행복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식이 좋은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여인은 소박한 여인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기 위해 쏟았던 정성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말한 행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행복은 여인이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얻어진 행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행복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것을 정성껏 돌보고 가꾼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정성껏 가꾸고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육체의 모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라는 표현은 영적인 모성적인 표현이다. 다만 인간적인 모성이냐 영적인 모성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육체적인 모성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듯이 영적인 모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모성애는 행복의 근원이다. 다만 무엇을 배에 잉태하고 가슴에 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제한적이고 또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도 있는 행복이다. 빼앗길 수 있는 행복이다. 불안한 행복이요 변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 늘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변치 않는 행복이다. 아무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맛보는 행복 그 이상의 행복 즉 영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여인이 생명을 배고 젖을 먹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태에 배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꼭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든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모성의 정열을 말한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그 합일의 정열이야말로 여성의 본능이며 위대함이기도 하다. 사실, 한자에서는 여성과 자식을 안데 합쳐서 "좋다"(好)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스칼은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식의 어리광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성의 "분리의 정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의 별개의 인간으로 나뉘는 사랑이다.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인 것이다. 사실 태아는 어느새 모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곧이어 젖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창세기의 결혼관에 나오듯이 "어버이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간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최종 단계를 다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 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육이란,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끔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서 세상을 비관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독립시켜 준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독립시켜 주는 셈이고 그것이야 말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보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식의 도약대로서 짓밣히고, 자식의 비료로서 썩어갈 각오가 어머니 쪽에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식은 주체성을 지닌 인격으로 커나가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모성애는 "합일의 정열"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리의 정열" 속에 있음을 마리아는 몸소 증거해 보이셨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말한 행복은 자식과의 일치 즉 자식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다. 인간적인 행복관은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을 언젠가는 빼앗기기 때문에 서글프고 허전하고 외로운 행복관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은 이별이 없는 영원히 함께 사는 행복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합일의 정열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관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이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