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5일 온고을교회 주일설교 – 황의찬 목사
《 있으므로 감사 》
살후 1:3~4
<비빌 언덕>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옛 어른들이 많이 쓰시던 속담입니다.
어린 시절 소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많습니다.
소는 연신 꼬리를 휘둘러서 소 등에 앉은 파리를 쫓습니다.
그런데 꼬리가 온몸을 다 커버하지 못합니다.
꼬리가 닿지 않는 곳에 앉은 파리는 어떻게 쫓아낼까?
소는 그래서 외양간의 기둥에 대고 비비기도 합니다.
소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야 하는데, 허공에 대고 비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덕이 있으면 거기에 대고 비빕니다. 언덕이 있으니 소에게는 참 다행입니다.
소를 보면서 사람들이 속담을 만들어냈습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있으므로 감사》입니다.
이 제목을 조금 길게 표현하자면, “감사도 감사할 건덕지가 있어야 감사한다”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할 때, 아예 대놓고 “무조건 감사하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 오죽, 감사를 하지 못하면, 설교하는 목사님이, 대놓고~
“무조건 감사하자!”라고 하실까? 물론 그 설교에 우리는 “아멘!!”으로 받음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감사해야 옳지만,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다면 결코 감사가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 소로 말하자면 비빌 언덕, 감사할 건더기가 있음에도,
우리가 그것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을 몰라요!
소가 등이 지금 무지하게 가려워요, 어디 서까래 기둥이라도 있으면 비비겠어요.
그런데 소 등 바로 위에 비비기 딱 알맞은 서까래가 있어요.
그런데 소가 거기에 ‘비빌 언덕’이 있는 것을 몰라요!
그냥, 가려운데도 끙끙거리면서 참습니다.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 오늘은 본문은 우리에게 비빌 언덕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감사도 감사할 이유가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할 이유가 없는데 감사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감사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주시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감사입니다.
☞ 오늘 설교하는 제가 감사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목사가 되었으니 감사, 이렇게 설교할 수 있으니 감사,
안정적인 직장에서 30여 년간 먹고살았으니 감사,
늦깎이 목사가 되었고, 신학 박사까지 되었으니 감사,
15년 목회하는 동안 책을 8권이나 펴냈으니 감사,
아내가 있으니 감사, 자녀가 있고 손주가 있으니 감사,
비록 질환이 있으나 그럭저럭 일상생활할만큼의 건강이 있으니 감사,
이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네요, 그러니 저는 감사함이 옳습니다.
그런데요, 감사하려고 보니, 감사 못 할 조건도 만만치 않아요!
감사보다 불만족, 불평할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감사할 것과 감사하지 못할 것을 대립시켜 탕감시키고 나면 불평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것들은 외면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만으로 억지로 감사해라?
이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못마땅한 것은 못마땅한 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감사할 수도 없고요, 매우 못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 “그래도 무조건 감사해야 해!”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 우리가 못마땅한 것을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받을 것은 받고, 해야 할 것은 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감해 주십니다.
‘아, 그랬구나, 마음이 아팠구나, 속이 상했구나, 그 말 들으니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불평에 먼저 공감해 주시고, 이어서 위로를 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위로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의 아픔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공감과 위로” 이것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이를 ‘신원’이라 합니다.
고후 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왜 없겠습니까?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이 평생 안질을 앓았다고 합니다.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번이나 고쳐주십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2:9)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께 신원하고 응답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감사가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후에 나오는 감사라야 진정한 감사로서 의미를 띠게 됩니다.
☞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감사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2~3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바울의 감사>
☞ 본문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믿음이 자란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가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내 문제, 나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감사의 조건을 자기 밖에서 찾아서 감사합니다.
자기가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믿음과 서로 사랑!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내 문제만 가지고 신원하고, 내 문제로 감사할 뿐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자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내 문제가 아닌 ‘너’의 문제로 감사하는 감사가 수준 높은 감사입니다.
특히 자신이 전도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이 쑥쑥 자라감을 보면서 하는 감사!
감사 중에서도 고차원 감사입니다.
사람들은 한평생 살아가는 중에, 나, 나의 가족, 나의 피붙이로 인한 감사에 갇혀 있습니다.
그나마 늙어가면서 피붙이 감사도 시들해집니다. 자식에 대한 감사도 시큰둥해집니다.
나중에는 아내에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것이 늙어가는 서러움입니다. 우리가 늙어가되 이렇게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이들어갈수록 내 문제로 인한 감사는 물론, 이웃을 위한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전도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가 감사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전도하여 구원받은 성도가 있다. 그 성도의 신앙이 날로날로 자라가고 있다.
성도간의 사랑이 있다. 이래서 《있으므로 감사》입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 불평 불만, 망설이지 말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원하여 분명한 응답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런 연후에 감사를 합니다. 처음 감사는 내 문제, 나 자신의 문제로 합니다.
그리고나서 내 이웃, 내가 전도한 성도로 인하여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랑하는 감사>
오늘 본문 4절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4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로 인하여 감사를 한다고 해놓고, 4절에서 무얼 말합니까?
“~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가해지는 박해와 환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음으로써 받는 핍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 핍박은 나중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 믿다가 목숨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말한 다음에 “~ 박해와 환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도 박해와 환난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박해와 환난이 감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해집니다.
데살로니가 전서가 쓰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합니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탄압은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를 잡아서 사자 먹이로 줍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제공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주 안에서 자랑합니다.
박해받고 환난 중에 있으나 감사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은 감사 거리와 불만 거리를 서로 탕감하지 않습니다.
불만은 있는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감사는 있는대로 감사합니다.
《있으므로 감사》
오늘 설교 제목, 《있으므로 감사》입니다. 뭐가 있는지 정리합니다.
① 첫 번째 “있으므로”
_ 불평불만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비빌 언덕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불평하는 나, 위로를 받는 나(我), 내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② 두 번째 “있으므로”
_ 가족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너, 이웃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내가 전도하여 맺은 전도의 열매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주안에서 형제되어 사랑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감사하는 나, 위로를 하는 나(我), 내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③ 세 번째 “있으므로”
첫째는_ 불평하는 나, 위로를 받는 나(我), 내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둘째는_ 감사하는 나, 위로를 하는 나(我), 내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세 번째 “있으므로”무엇일까요?
_ 세상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사람들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_ 이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셋째는_ 창조의 주, 하나님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첫째는_ 불평하는 나, 위로를 받는 나(我), 내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둘째는_ 감사하는 나, 위로를 하는 나(我), 내가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셋째는_ 창조의 주, 하나님이 있으므로 감사합니다. |
<돈 지갑 마음 지갑>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개의 지갑이 있습니다. 하나는 돈지갑입니다. 또 하나는 마음지갑입니다.
돈지갑에서는 돈을 꺼내서 씁니다. 마음지갑에서는 마음을 꺼내서 씁니다.
돈을 꺼내서 어디에 쓰는가가 중요하듯이 마음을 꺼내어 어디에 쓰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지갑에서 마음을 꺼내어 어디에 주로 쓰십니까?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노여움’ ‘분노’ ‘화’를 삽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슬픔’ ‘비통’을 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즐거움’을 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기쁨’을 사들입니다. 역순으로 말했습니다. 히로애락입니다.
‘희로애락’은 달리 표현하면, 마음지갑에서 마음을 꺼내어 ‘희로애락’을 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귀중한 것 하나가 빠졌습니다. 마음을 꺼내어 ‘감사’를 구입해야 합니다.
마음지갑에서 꺼낸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 “감사”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비싼 것, 그것이 “감사”입니다.
“마음을 꺼내어 감사를 구매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