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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성인 이야기] 어버이를 수호하는 성인들
수호성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사도신경(또는 공인된 다른 신경)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면서 실행하려고 노력한다. 사도신경에는 우리 믿음의 조목(신조)들이 들어 있고, 그중에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 있다. 이에 이승에 사는 우리는 천상 하느님 나라에 있는 성인들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더불어 상통하고 기억하며 기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성인들이며 연옥 영혼들과 공유하는 강한 유대감과 연대의식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교회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성인들의 전구 또는 중개가 필요함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삶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길목과 고비에서 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수호성인 또는 주보성인을 정해 두었다. 그러기에 현대에 이르러 인터넷의 수호성인(세비야의 성 이시도로)에 이르기까지 우리 곁에는 다양하고 많은 수호성인들이 대기 중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인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정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수호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이들이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는 연대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표현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예비 엄마의 수호성인, 성 제라르도 마젤라(축일 10월 16일)
18세기에 이탈리아 남부의 무로에서 태어난 성인은 아버지를 여읜 뒤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원했으나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주교관에서 일하다가 19세에 양복점을 열었다. 그리고 22세 때 마침내 구속주회에 수사로서 입회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고, 26세 때 이 수도회의 설립자인 성 알퐁소에 의해 수도서원까지 하게 되었다. 성인은 예언, 탈혼, 환시, 초자연적인 천상 지식,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일과 같은 특별한 은사들을 받았고, 그리하여 수녀들의 영성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성인은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고 거룩한 아이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기도했으며 특히 성체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다고 한다. 그러했기에 성인의 어머니는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런 성인이 수도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고향을 떠나 주교관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그리고 선종하기 1년 전에는 임신한 한 여성으로부터 자신과 성인 사이에 불미스런 관계가 있었다는 고발을 당했다. 그러나 성인은 한 마디 변명도 없이 그 치욕을 인내로 받아들였고, 결국 그 여성은 자신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런 곡절로 해서 성인은 남성임에도 특이하게 아기 출산의, 그리고 출산을 앞둔 예비 엄마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다자녀 가정 부모들의 수호성인, 성 아달발도(축일 2월 2일)
성 아달발도는 7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은 그리스도인 귀족으로서 왕의 궁정에서 일을 했고, 야망에 불타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출정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출정한 지역의 귀족과 친분이 두터워졌고, 마침내 그의 딸인 성녀 릭트루다(축일 12월 6일)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아내 친척들의 적대감 때문에 축복과 기쁨 속에 치를 수 없었지만,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지내며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이 부부는 틈나는 대로 병자를 방문하거나 범법자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도왔다.
그런데 성인은 또다시 반란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제는 아내의 친척들과 싸워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이 난처한 상황에서 부부가 모두 고통스러워하던 중에 성인이 처가 쪽 친척에 의해 살해당했다. 성인 부부는 신앙심 깊은 성가정을 이루어 살았고 자녀들을 훌륭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키웠다. 성인과 사별한 아내는 자녀들이 장성한 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성인 부부의 네 자녀들은 나중에 모두 교회의 성인 성녀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의 할머니와 처제 역시 성인들이다.
성인은 적대자들의 손에 살해당했지만, 투철한 신앙 정신 때문에 순교자로서 공경받는다. 그리고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모범적인 성가정을 이루며 살았기에 다자녀를 둔 부모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의붓 어버이들의 수호성인, 성 레오폴도(축일 11월 15일)
12세기의 성 레오폴도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독일로 가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3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하였다. 성인과 아녜스는 자녀 18명을 두었고, 거기에다 아녜스가 전 남편과 사별하기 전에 낳은 아들 2명까지 있었다. 성인은 모두 20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웠다.
신심이 깊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알려진 성인은 오스트리아 비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수도원들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40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다스렸는데, 온전히 그리스도인다운 마음가짐으로 일관했기에 백성으로부터 ‘착한 사람(왕)’이란 칭호를 받았다.
자신의 친자녀들뿐 아니라 아내가 이전에 결혼해서 낳은 아들들까지 품어서 잘 키웠기에, 성인은 의붓 어버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는다.
과부들의 수호성인,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축일 2월 28일)
13세기에 이탈리아 폴리뇨에서 태어난 성녀는 부유한 사람과 결혼해서 여러 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 초기에는 현세적이고 하찮은 데 마음을 빼앗겨서 살았으나, 이내 그런 삶을 뉘우치고 속죄하며 지냈고, 나중에는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이 되었다. 기도와 참회를 거듭하며 지내던 성녀는 초자연적인 환시를 체험했고, 그럼에도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주님과의 신비로운 결합의 표징인 오상까지 받았다. 61세의 나이로 선종한 성녀의 유해는 폴리뇨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에서 성녀의 중개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성되지 않았음에도 17세기 말에 성녀에 대한 공경이 인노첸시오 교황에 의해 승인되었고, 2013년에 이르러서야 성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두 번째 기적에 대한 심사를 면제받아 시성되었다.
성녀는 남편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또한 자녀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고통도 겪었다. 그러나 성녀는 프란치스코회 아르놀도 수사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시련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며 기도와 보속, 그리고 주님과 신비로이 결합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렇듯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겸손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았기에, 성녀는 특별히 남편과 사별한 과부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수호성인 이야기] 어린이를 수호하는 성인들
어린이들의 수호성인, 미라의 성 니콜라오(축일 12월 6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성 니콜라오는 3세기에 튀르키예 남서부 지중해 연안의 한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부유했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성인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또한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잘 돕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은 성인은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종한 미라의 주교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체포되어 10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며 옥살이에서 풀려난 성인은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싸웠다, 그런 한편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억울한 일에 시달리는 이들을 도왔다.
성인의 선행과 기적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딸 셋을 둔 가난한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이 없어 딸들을 출가시킬 수 없었는데, 성인이 몰래 금이 든 자루를 보내어 세 자매 모두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근이 들어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어느 사악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죽여서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했는데, 성인이 이 세 아이를 빼내어 되살려냈다.
이런 이야기들과 함께 성탄 시기가 되면 성인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선물과 축복을 전해 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성인은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공경을 받는다.
버림받거나 학대받는 아이들의 수호성인, 성녀 제르마나 쿠쟁(축일 6월 15일)
성녀 제르마나 쿠쟁은 16세기 프랑스의 툴루즈 부근 어느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던 성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게다가 연주창이라는 부스럼 병까지 생겨 고생했는데, 새어머니는 행여라도 자기의 친자녀들에게 병이 옮을까 싶어 어린 성녀를 심하게 구박했고, 심지어는 집에서 내쫓아 양 우리에서 양들과 함께 지내게 했다. 성녀는 찌꺼기 음식을 먹고 벽장이나 양 우리에서 잠을 자며 지냈고, 아홉 살이 되면서부터는 양을 치며 살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는 양치기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곤 했는데, 그러면 양들이 그 지팡이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래서 늑대들에게 물려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심이 깊고 참을성까지 대단한 성녀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였고, 늘 누구에게나 도움을 베풀고자 했다. 사람들은 이런 성녀를 보며 감탄했고, 차츰 성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번은 성녀가 자신이 먹을 빵을 거지에게 나누어주다가 새어머니에게 들켰다. 새어머니는 성녀가 빵을 훔쳐다가 거지에게 주었으려니 생각하고 성녀를 호되게 꾸중하며 때리려 했다. 성녀가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면서 앞치마를 펼쳐 보였다. 앞치마에는 빵이 아니라 아름다운 봄꽃들이 가득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새어머니도 마음이 누그러져서 조금씩 성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성녀는 22살 때 계단 아래 구석진 곳에 놓인 매트리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입양아들의 수호성인, 성녀 클로틸다(축일 6월 3일)
성녀 클로틸다는 5세기 프랑스의 리옹에서 왕의 딸로 태어났다. 성녀는 비신자인 아버지의 양해를 얻어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에게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숙부의 손에 아버지는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우물에 던져졌으며, 성녀와 자매 크로나는 왕궁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크로나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그리고 성녀는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인 클로비스의 청혼을 받았다.
성녀는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첫아들이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죽자, 남편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이 세례를 받은 탓이라고 생각하며 아내를 원망했다. 그렇지만 결혼 전에 약속한 바가 있어서 다른 자녀들이 세례받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마침 둘째 아들 또한 세례를 받은 뒤 중병에 걸렸는데, 이번에는 다행히도 성녀의 간절한 기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 뒤 태어난 두 아들과 딸 하나는 모두 건강하게 자랐다.
5세기 말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레마니족이 프랑크 왕국을 공격해 왔고, 클로비스 왕이 이끄는 군대는 전쟁에서 패하며 수세에 몰렸다.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탈주병이 속출하는 가운데, 클로비스 왕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투에서 만약 자신이 승리한다면 아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전 국민과 함께 섬기겠다고 기도하며 다짐했다. 그리고 아내인 클로틸다의 기도로 힘을 얻은 클로비스 왕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를 계기로 프랑크 왕국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 뒤 클로비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성녀는 궁궐을 떠나 수도원으로 가서 앓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성녀는 그 와중에서 죽은 아들의 자녀들, 곧 손자들을 받아들여 키웠다. 그러나 그렇게 보호하며 키우던 손자들이 숙부의 손에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를 지켜보는 성녀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그리고 성녀는 숨을 거두기 전에 아들들이 화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아들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축일 11월 13일)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는 1850년 이탈리아 북부의 한 농가에서 13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성녀는 18세 때 부모를 여읜 뒤 집을 떠나 고아원에 가서 고아들과 함께 지냈다. 이때 교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수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두 수도회로부터 입회를 거부당했고, 끝내는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헌신하는 ‘성심의 선교 수녀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 수도회는 1880년에 교회의 승인을 받은 뒤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9년 뒤에는 미국 뉴욕 대교구장의 초청으로 뉴욕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성심의 선교 수녀회는 성녀의 고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고아들과 같이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고아원, 병원, 학교와 관련되는 일들을 하게 되었고, 이 활동은 남북 아메리카와 영국으로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1917년에 선종한 성녀는 미국 시민으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되었고(1946년), 이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도 선포되었다(1950년).
[수호성인 이야기]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의 수호성인들
병자와 병원의 수호성인, 성 카밀로 데 렐리스(축일 7월 14일)
성 카밀로 데 렐리스는 16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에서 태어났다. 군인을 동경하던 성인은 발에 생긴 상처로 한 차례 연기한 끝에 입대하여 전투에도 몇 차례 참가했다. 20대 중반에 도박으로 빈털터리가 되고, 군에서도 제대한 성인은 방황하던 중 한때 카푸친 수도원의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사의 설교를 듣고 수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거친 수도복에 발이 쓸리며 전에 생겼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수련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환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투신했고, 병원의 회계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가 된 성인은 뜻을 같이하는 간호사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형편이 어려운 병자들을 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러던 중 주위의 권유로 사제품을 받았고, 함께 봉사하던 이들과 협조자들을 모아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를 세웠다. 흔히 카밀로회라 불리는 이 수도회는 청빈, 정결, 순명의 3대 서원 외에 ‘환자를 위한 정성 어린 간호’를 추가로 서원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했는데, 성인과 동료들은 페스트 환자들을 돌보면서 무엇보다도 병원의 청결을 중시하여 자주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알맞은 음식을 공급하고, 환자를 격리하여 전염을 방지하는 등 특화한 환자 돌봄을 펼쳤다. 그런 한편으로 숨을 거두는 환자들을 끝까지 곁에서 지켰고, 장례까지도 세심하게 챙겼다. 헌신적인 간호, 인격적 만남과 배려에 감동한 사람들은 “카밀로 신부의 품에서 죽으면 지옥에는 안 간다”라는 말로 성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드러냈다. 성인은 건강 악화로 총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끊임없이 이탈리아 전역과 헝가리까지 확장된 수도회와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암 환자의 수호성인, 페레그리노 라치오시(축일 5월 1일)
성 페레그리노 라치오시는 13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한때는 반(反)교황 단체에 가담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끈 성 필립보 베니티오를 만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께 자신을 봉헌한 성인은 환시 중에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하고는 그분의 권유를 따라 시에나로 가서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 뒤 장상의 명을 받들어 자신의 고향에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그런데 고행으로 성덕을 쌓으며 설교가와 고해 사제로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성인의 다리에 악성 혹이 생겼다. 차츰 증상이 악화하며 암 덩어리가 터지고 헐었다.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껴 다가오기를 꺼렸지만, 성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교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의사가 성인에게 발을 잘라야 한다고 말할 지경이 되었는데, 성인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기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암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이때부터 성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인의 다리에 생겼던 암이 기적적으로 치유됨으로써 성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는 이의 수호성인, 성녀 모니카(축일 8월 27일)
성녀 모니카는 4세기 아프리카 북부의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신심 깊은 부모 슬하에서 온순하고 심성 따뜻한 딸로 자랐다. 그리고 이른 나이에 이교인인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 셋을 두었다. 성녀는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써 마침내 권위적이고 난폭하며 방탕한 남편과 까다로우며 늘 며느리를 괴롭히던 시어머니를 회개시키고 개종시켰다. 남편은 세례 후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고, 성녀는 혼자 힘으로 세 자녀를 키우며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다.
세 자녀 중 맏이인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를 닮아서 일찍부터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총명했으나 현세적인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어머니의 종교와 신심에는 무관심했다. 나아가 마니교 이단과 이교 철학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여인과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았다. 이런 아들을 보며 성녀는 크게 마음 아파했고,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회심과 개종을 위해 기도했다. 성녀는 아우구스티노가 활동하던 로마와 밀라노까지 쫓아가서 아들의 방탕한 생활을 중지시키기 위해 온갖 수모를 참고 견디며 기도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그리고 밀라노의 주교이던 성 암브로시오의 도움에 힘입어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회심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기도와 인내로써 아들을 여인과 술과 가무의 수렁에서 건져낸 성녀는 이제 아들 곁을 떠나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로마 근처의 어느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에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이의 수호성인, 성녀 딤프나(축일 5월 30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 딤프나는 7세기 아일랜드에서 이교도인 켈트족 족장의 딸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인이던 어머니의 배려로 유아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앙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련이 밀려왔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던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차츰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재혼을 권유하는 측근의 요청을 받아들여 새로운 아내를 찾았으나 죽은 아내만 한 여성을 찾지는 못했다. 점점 죽은 아내만큼이나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딸을 보며 딸과 결혼하려는 끔찍한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성녀는 이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한 사제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의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으로 피신했다.성녀는 새 피신처에서 그 사제와 동료 2명과 함께 기도처를 세우고 은수 생활을 하며 그 지역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성녀의 아버지가 군인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군인들을 시켜 성녀에게 도움을 준 사제와 함께 지내던 동료들을 죽였다. 그러고는 성녀에게 아일랜드로 돌아가자고 강요했다. 성녀는 끝까지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저항했고, 분노한 아버지는 직접 칼을 뽑아 15살 된 딸의 목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성녀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가까운 동굴에 안장했다. 그리고 600년쯤 지난 13세기에 사람들이 동굴에서 빛나는 관에 안치된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곳에 성녀를 기리는 새로운 성당이 세워졌고, 유해는 새로운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때부터 많은 순례자가 성녀 딤프나 성당을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성녀의 무덤에서는 특별히 간질과 정신 이상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기도하고 치유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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