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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22) 사도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직접 뽑으시고 파견한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
그리스도교 초기 사도 시대 복음 선포 과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습니다. 교부 시대로 넘어가기 전 ‘사도’라는 말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교회와의 관계, 열두 사도의 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 가운데 열둘을 세워 사도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마르 3,13-19; 마태 10,1-4; 루카 6,12-16) 그런데 사도행전과 신약 성경 서간들에서는 이 열두 사도에 속하지 않는 바오로나 바르나바에게도 사도라 부릅니다.(사도 14,14) 어떻게 이들도 사도로 불렸을까요?
사도(使徒)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s)’의 한자어로, 우리말로는 ‘파견된 자’ ‘파견된 제자’라 옮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성부에게서 파견되신 분이시죠.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열두 사도를 통해 계속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그러므로 사도들의 파견은 예수님 파견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마태 10,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복음서를 살펴보면 대략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내용(마르 6,7-13; 마태 10,5-15; 루카 9,1-6)을 보면 공통점이 보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불러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 선택하신 제자로서 예수님에게서 능력을 받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훗날에는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사도들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증언할 사명을 받고 파견된 자들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받은 당신의 사명에 열두 제자를 참여시키십니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요한 5,19.30) 당신을 파견하신 성부에게서 모든 것을 받으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도 그들에게 직무를 맡기시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새 계약의 일꾼’(2코린 3,6), ‘하느님의 일꾼’(2코린 6,4),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의 자격을 하느님께 받았음을 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59항)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해야 할 복음은 교회를 위해 모든 시대에 모든 삶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세우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령과 사도들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사도들과 교회에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광 중에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세워지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충만함에서 성령을 사도들과 교회에 부어주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46항)
성령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양육하고 치유하는 성사를 통하여, 사도들이 받은 가장 뛰어난 은총을 통하여, 선을 행하게 하는 덕행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특별한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생동적으로 이끄십니다.
이에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새 신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의 은총을 완성시키는 성령의 선물을 베풉니다. 이 안수로 성령 강림의 은총이 교회 안에 영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사도들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을 거룩하게 전승하여 성령의 이끄심대로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초로 사도들을 통해 지어졌고, 그 기초 때문에 견고한 결속력을 지니게 되어 ‘하느님의 집’ 곧 ‘하느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성령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 교회는 사도들의 설교와 복음 선포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이 거룩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들 위에 세워졌으므로 사도적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선교에 파견하신 증인들인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 교회는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 사도들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보존하고 전한다. -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도들의 사목직을 이어받아 그들을 계승한 사람들, 곧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회의 최고 목자와 하나 되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 명령을 수행하는 주교단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지도를 받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57항)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46) 전례 주기 ④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새로운 믿음과 희망 선사
부활 시기
예수님 부활은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 첫째 : 죽음에 대한 극복 -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안을 느끼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로운 삶의 길이란 초자연적인 사건을 제시합니다. 생명을 창조한 생명의 주인공이 부활함으로써 새 삶의 희망을 줍니다.
- 둘째 : 죄와 악마에 대한 승리 -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죽음은 죄에서 비롯됐는데, 주님 부활로 모든 죄와 악마의 세력이 꺾였습니다. 부활은 세속에 대한 승리의 사건입니다.
- 셋째 : 우리 부활을 보증 - 우리 인간이 죽은 다음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과 새 삶의 희망을 줍니다.
예수 부활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절대자임을 일깨워주는 당신 절대성에 대한 증명입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 고백의 근거요 부활 사건입니다.
① 부활 주일 날짜 : 주님 부활 대축일은 언제나 주일이지만 그 날짜는 매년 다릅니다. 부활 주일은 구약의 파스카 축제와 연결됩니다. 유다인들은 초봄의 만월(滿月, 보름)을 ‘니산(Nisan)’이라 하는데, 이달 14일을 파스카 축제일로 정했습니다. 일찍이 동방 교회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일을 부활 주일로, 서방 교회는 그 다음 주일로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춘분(3월 21일)이 지난 만월 다음 오는 주일을 부활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순 시기도, 성령 강림 대축일도 예수 승천 축일도 모두 부활 주일에 따라 결정됩니다.
② 부활의 상징 : 달걀은 겉보기에 죽은 것 같으나 그 안에는 언제나 생명이 깃들어 있습니다. 곧 달걀은 부활의 새 생명을 뜻합니다. 또 다산(多産)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토끼 역시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토끼의 깨끗한 털이 우리 영혼의 깨끗한 모습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부활 토끼를 만드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을 상징하는 빛나는 흰색의 백합은 완전성과 선의를 뜻합니다.
③ 부활 전례
부활 성야
빛의 예식과 부활 초 : 빛과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축성 시 활활 타오르는 불은 하느님의 출현을 뜻하며, 영원하신 성삼위의 지극히 거룩함을 묘사합니다.
말씀 전례 : 천지 창조부터 부활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역사를 되새기고 빛의 백성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구약 7개 독서를 3개로 줄일 수 있지만, 탈출기 14장은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 전례: 세례 관습은 2세기 말~3세기 초 시작됐지만, 성야 예식에 들어온 것은 4세기 초입니다. 세례의 바탕이 부활이며, 세례가 부활의 의미를 성사적으로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전례 : 죄와 죽음이 물러가고 펼쳐지는 새 세상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마련하신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성야 전례의 절정을 이룹니다.
④ 부활 8일 축제 전통적으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큰 축제일 경우 8일간 계속했습니다. 부활 8부는 부활 축일부터 그 다음 주일(부활 제2주일)까지 8일인데, 모두 대축일 등급입니다.
⑤ 예수 승천 대축일 : 4세기경 사도행전 1장 3절 영향을 받아 예수 승천 대축일이 생겼습니다. 5세기 동·서방 교회는 부활 후 40일을 승천 축일로 지냈습니다. 이는 구원의 신비를 새로운 각도, ‘구원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밝혀줍니다.
⑥ 성령 강림 대축일 :부활 시기의 마지막 날인 오순절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냅니다.
부활 시기는 ‘결백과 기쁨 ·환희’를 상징하는 흰색제의를 입습니다.
[생활교리] ‘예수님 부활’에 관한 몇 가지 물음
첫째, 예수님 부활은 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가? 예수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바탕으로서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인이 선포하고 증언해야 할 복음, 곧 “기쁜 소식”(사도 13,32)이다. 왜냐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 그리고 가르침은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참 진리로 완전히 밝혀졌기 때문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51 참조). 이로써 그리스도인에게 참 행복과 구원의 길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내 안에 ‘담고’, 그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죄의 형벌 속에 치욕적인 십자가 죽음으로 외롭게 생을 마감하신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주님’으로 온전히 믿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는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1코린 15, 14-15). 한 마디로 예수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의 모든 토대와 뿌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둘째, “예수님 부활은 우리를 위해 일어난 부활이다”(그레샤케). 부활 대축일에 서로서로가 함께 기쁨과 축하를 나누는 이유는 ‘예수님 부활’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부활’ 때문이기도 하다. 곧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첫 번째 분”(사도 26,23)으로서,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가톨릭 교회 교리서』 655)이시다. 이 복된 부활의 희망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 곧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다. 믿는 이에게 마지막 말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다.
셋째, 예수님 부활은 체험-증언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부활이 무엇이다’ 혹은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진다’라는 부활의 정의나 순서 그리고 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기쁨에 찬 신앙고백을 증언해 준다. 실제로 예수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보다 단 한 마디로 이렇게 고백할 뿐이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역시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그렇다면 복음서가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체험과 증언을 전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초대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이미’ 참여하고 있고, 무엇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말씀 안에, 교회 공동체 안에, 몸소 세우신 성사 안에 현존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73 참조).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활은 머나먼 ‘미래’의 일 이전에 ‘지금 여기서’ 체험되고 증언되어야 할 ‘오늘’의 일이다!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주님을 향한’ 탈출
2025년 희망의 희년을 맞이하며, 여러 회에 걸쳐 향주삼덕 곧 주님을 향한 세 가지 덕, 믿음 · 희망 ·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각자 주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1테살 1,3)
믿음 · 희망 · 사랑은 하나같이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알토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결정체인 ‘행동’으로 열매 맺지 못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희망의 결정체인 ‘인내’로 드러나지 않은 희망은 거품 희망이라 할 수 있으며, 사랑의 결정체인 ‘노고’로 이어지지 않은 사랑은 풋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향주삼덕’ 외에도 ‘복음삼덕’을 중요하게 여겨 왔습니다. 복음삼덕이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청빈’ · ‘순명’ · ‘정결’로서, 이들은 서로 통합니다.
첫째, 믿음이 완성되면 청빈이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기에 무엇을 자꾸 쌓아서 안전장치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면 그분께서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영성적으로 청빈의 삶을 선택합니다. 청빈은 하느님께 의지하여 ‘내’ 것을 챙기지 않고 ‘내’가 안전장치를 만들지 않는 삶의 태도, 그리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둘째, 희망이 완성되면 순명이 됩니다. 희망의 절정은 바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 땅의 것을 추구하다가 수준이 높아지면, 비로소 주님의 뜻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게 ‘순명’입니다.
셋째, 사랑이 완성되면 정결이 됩니다. 사랑 중에 최상의 사랑은 오롯한 사랑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정결’이라 부릅니다. 정결의 덕은 깨끗한 몸과 마음을 이루는 인격적 완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내포하기에,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요구됩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수난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반복하며 갖가지 시련과 아픔, 회복, 치유 등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며 불안과 원망, 기쁨과 감사, 희망과 좌절 등을 반복했듯이 말이지요. 이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내기도 하고, 또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섬기기도 하지만, 마침내 견고한 믿음을 품고 하느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또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시지요.(탈출 13,21-22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 우리 또한 매일의 일상에서 저마다의 광야에서 벗어나, 굳은 믿음과 뿌리 깊은 희망, 오롯한 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주님을 향한’ 탈출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길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우리와 늘 함께하실 거라 믿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파스카 성삼일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성주간의 절정인 파스카 성삼일은 주님 만찬 저녁 미사부터 시작하여 파스카 성야에 절정을 이루며 부활 주일의 저녁기도로 끝납니다. 모든 전례 주년의 핵심과 기준이 되는 파스카 성삼일의 전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목요일에는 주님 만찬 저녁 미사를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 승리를 내다보시며 당신을 미리 봉헌하셨고, 그 수난을 기억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기념해 바치는 주님 만찬 저녁 미사는 ① 말씀 전례([1] 탈출 12,1-8.11-14; [2] 1코린 11,23-26; [복] 요한 13,1-15), ② 발 씻김 예식, ③ 성찬 전례, ④ 성체를 옮겨 모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미사 후에는 성체 앞에서 적당한 시간 동안 조배(朝拜)할 것을 권고합니다.
성금요일에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리는 이 예식은 ① 말씀 전례 ( [1] 이사 52,13-53,12; [2] 히브 4,14-16; 5,7-9; [복] 요한 18,1-19,42), ② 십자가 경배, ③ 영성체로 구성됩니다. 이날은 고통받으신 주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고자 ‘파스카 단식’을 합니다. 또한 할 수 있으면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까지 단식할 것이 권고됩니다.
성토요일에는 주님의 무덤 곁에 머물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 특히 저승에 가심을 묵상합니다. 이날의 의미는 벗겨진 제대 주변에서 거행되는 시간 전례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신자들은 기도와 단식으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파스카 성야는 “모든 거룩한 밤샘 전례의 어머니”(성 아우구스티노)입니다. 이 밤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어 경축하며 파스카 성야 미사를 거행합니다. 이 미사는 ① 빛의 예식, ② 말씀 전례 ( [1] 창세 1,1-2,2: [2] 창세 22,1-18; [3] 탈출 14,15-15,1ㄱ; [4] 이사 54,5-14; [5] 이사 55,1-11; [6] 바룩 3,9-15.32-4,4; [7] 에제 36,16-28; [서] 로마 6,3-11; [복] 루카 24,1-12), ③ 세례식, ④ 성찬 전례로 구성됩니다. 파스카 성야 예식에서 중요한 상징은 빛이며, 이 밤은 ‘밝게 빛나는 밤’ ‘낮에 정복된 밤’이 됩니다. 그래서 파스카 성야의 전례는 밤중, 곧 해가 진 후에 시작하여 주일 날이 밝기 전에 마칩니다.
장엄한 성야에 교회가 경축한 이 ‘날’의 기쁨을 부활 팔일 축제 동안 이어가며, 이후 50일간 곧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부활 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1) 교회, 성령의 이끄심으로 거룩하게 되다, 「교회헌장」 4항
「교회헌장」 4항은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성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성자는 파스카 만찬과 십자가 죽음으로 교회를 세우시며, 성부께서 파견하여 맡기신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헌장」이 성령 강림에 앞서 성자의 공생활 중에 활동하신 성령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고 세례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성자 위에 내리셨으며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나가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 악의 권세를 누르셨고 병든 이와 마귀들린 이들을 치유하셨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파견됨으로써 신자들은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헌장」은 공의회 이전에는 다루지 않았던 성령과 관련한 삼위일체의 교회론을 전개합니다. 이어서 「교회헌장」은 신약성경 안에 담긴 성령의 역할과 사명을 소개합니다. 성령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영입니다(요한 4,14 참조). 따라서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킴으로써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줍니다(로마 8,10-11 참조). 또한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고(1코린 3,16; 6,19 참조), 신자들 안에서 기도하고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해 줍니다(갈라 4,6). 성령은 교회를 진리로 인도하고(요한 16,13 참조), 친교와 봉사로 교회를 일치시켜 줍니다. 「교회헌장」은 성령께서 이러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공의회 회기 중에 베아 추기경은 「교회헌장」의 이 구절에서 ‘성령이 교회를 이끈다.’라는 문장의 사용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위원회는 바오로계 신학을 바탕으로 ‘이끌다’(dirigit)라는 동사가 교계 제도의 권위와 관련된 동사가 아니라 은사를 풍부히 내려주시는 성령의 활동에 적용되는 동사라고 설명하면서 ‘이끌다’라는 표현을 유지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자유로운 권능에 따르는 다양한 은사들을 강조하면서 넓은 의미의 성령론을 펼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여 신부인 교회가 신랑인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를 두고 「교회헌장」은 성령과 신부(교회)가 신랑(성자)에게 “오십시오.”하고 말씀하신다고 표현합니다(묵시 22,17 참조). 끝으로, 2항~4항을 마무리하면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라는 삼위일체의 교회론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희년
‘르네상스 교황’은 1440년대부터 1520년대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예술을 옹호했던 10명의 교황을 말합니다. 첫 번째 르네상스 교황인 니콜라오 5세의 재위 기간은 예술과 학문에 있어 비할 데 없는 중요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와 그리스도교 세계가 오랜만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바젤 공의회(1431-1449년)의 대립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로 다시금 이교를 종식하고 교회의 일치를 회복할 수 있게 된 니콜라오 5세 교황은 이에 대한 감사로 1450년을 희년으로 선포했습니다. 1449년 1월 19일자로 작성된 교황 칙서 “Immensa et innumerabilia”에서 교황은 “무한하고 셀 수 없는” 하느님 자비의 선물 가운데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매고 푸는 권한’을 주셨다는 점과,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특정한 시기를 정하여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의 샘이 더욱 풍성히 흘러넘치도록 마련하였다는 점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전임 클레멘스 6세 교황이 정한 50년 희년 주기를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이 희년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5월 24일에 시에나의 위대한 성인 베르나르디노(Bernardino)의 시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당시의 목격자들과 기록자들은 이때에 세계 각지에서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의 수가 엄청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하루에 약 4만 명의 순례자가 로마로 몰려들었고, 가을에도 많은 순례자가 찾아왔지만 여름에는 흑사병이 다시 극심하게 퍼지면서 순례자의 수가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당시 흑사병을 몹시 두려워했던 교황은 파브리아노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희년에 비극적인 사건들도 발생했는데, 12월 19일 엄청난 인파의 순례자들이 성 안젤로 다리의 계단 난간으로 한꺼번에 몰려든 결과, 일부 노새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엄청난 혼잡이 일어나 172명이 강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희년에 “거의 무한한 양의 은화”가 교황청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신자들의 헌금뿐만 아니라 희년에 맞춰 엄청난 양으로 유입된 식료품들에 부과된 높은 관세와 세금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수입으로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바티칸 도서관의 실질적 설립자로서 사본 수집과 필사본 제작에 거금을 투자했고, 르네상스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으며, 로마의 수많은 성당, 궁전 그리고 다리를 재건축했습니다.
1450년 희년을 기념하는 금화도 발행되었는데, 교황 문장과 함께 “N. PP. V. Anno Ivbilei. 교황 니콜라오 5세, 희년”, 그리고 로마의 대표적 사도 성인들과 함께 “Alma Roma, S. Petrus, S. Paulus, 곧 거룩한 로마, 성 베드로, 성 바오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열쇠를, 바오로 사도는 순교를 상징하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언어] Wounds(상처)
주님 수난 성지 주일(Palm Sunday, 팜 선데이), 우리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 기도를 바치며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매 처(station)마다 십자가에 깊은 절을 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합니다.(We adore You, O Christ, and we praise You.) 그분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Because, by his holy cross he has redeemed the world.)”
우리는 십자고상(crucifix)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역설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로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그분의 상처는 우리 죄의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그분 상처로 여러분은 나았습니다.(By his wounds you have been healed.)”(1베드 2,24) 나무에서 패배한 사람이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유혹에 빠져 추락한 사람을, 십자가 나무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주간은 상처를 묵상하게 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되게 해주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