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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명예를 지켜줍시다-제9계명
20: 16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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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6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2:17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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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잊지 못할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법원 에서 낙태를 허용하는 엄청난 결정을 내림으로 말미암아 미혼모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나거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들이 수없이 죽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당시부터 임신부들의 낙태 문제가 사회의 잇슈가 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미국의 법정에서는 어느 한 여인의 결정적인 호소를 듣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낙태를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를 허락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자매가 대법관들 앞에서 울면서 호소하기를 <나는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내 뱃속에 있는 아기는 내가 원한 아기가 아닙니다. 나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습니다. 이 아기는 나를 강간한 사람의 아이입니다. 강간을 당해도 무조건 아기를 낳아야 합니까?>
이 여자의 억울한 호소를 들은 법관들은 5대4로 낙태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그해부터 청소년 여자 아이들의 낙태가 급증하면서 급기야는 1년에 150만 명의 여자들이 낙태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후 1년이 지나고 난 뒤에 그 여자가 양심선언을 했는데 그때 법정에서 했던 말이 거짓말(위증)이었다고 자백한 사실입니다. 한 여인의 거짓말로 인해 한나라의 법이 바뀌었고,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거짓말이라는 범죄의 심각성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75년도에 독일에서도 낙태법이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違憲判決) 로 무효가 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거짓말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1. 하나님께서 제9계명을 주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제9계명은 이웃의 명예를 위한 보호하기 위해 주신 계명입니다.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내 생명처럼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 된 도리입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명예를 위해 사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소나 말은 명예를 크게 생각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제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명예를 위해 죽고 살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명예를 존중합니다. 만일 인간 으로서 명예에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동물적 인 사람일 겁니다. 명예는 단순한 명예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상응하는 보상이 있습니다. 국가 유공자는 훈장만 받지 않습니다 유공자로써 국가의 특별한 혜택을 받습니다. 반대로 명예를 잃을 때에 엄청난 손실도 발생합니다. 요즘 유명 인사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바로 언론입니다. 요즘 언론은 윤리도 인권도 없습니다. 남의 명예가 손상되든지 말든지 따옴표 붙여서 마구 의혹 보도를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시켜서 많이 보게 하자는 것이 최대 목적일 뿐입니다. 어쨌든지 그런 언론에 의해서 한 번 명예가 땅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들이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단 몇 줄의 정정보도로 끝입니다. 본래 명예란 땅에 떨어지기는 쉬워도 회복 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명예의 실추는 개인에게 엄청난 고통입니다.
요즘 자살 하는 유명 인사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배우들이 자살 했습니다. 재벌 회장님이 자살했습니다. 학교 교장 선생님이 자살을 했습니다. 큰 건설회사 사장님이 자살을 했습니다. 광역단체의 시장님이 자살을 했습니다. 급기야는 대통령이 자살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명예 손상입니다.
사람에게 명예는 생명과 같이 귀중합니다. 만일 명예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명예가 엄청난 돈으로 환산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법에도 명예 훼손 죄에 대해서는 돈으로 환산하여 배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말입니다. 제9계명에 사용된 단어 중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이란 단어이고,
둘째는 “증거”라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를 합쳐서 생각한다면 주로 말로써 나타나는 거짓을 의미합니다.
이제 제9계명의 의도를 아실 겁니다.
이웃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제9계명의 의도라면, 그 명예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우리의 言行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법에도 명예 훼손 죄란 게 있습니다. 명예 훼손은 주로 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공식적인 말이든, 비공식적인 말이든,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웃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언행에 대해서 아주 많은 교훈을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함께 봉독하면서 묵상해 보시기바랍니다.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잠 12:18)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현대어 성경)
(잠 25:9)“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약 1:26)“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약 3:7)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약 3: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엡 5:4) “더러운 말과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은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감사에 찬 말을 하십시오.”
(잠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전 5: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우리가 평소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웃의 명예가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말 한 마디에 다른 사람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말 한 마디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습니다. 말 조심이 곧 이웃의 명예를 지키는 길입니다. 다같이… 말조심합시다!
2. 제9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제9계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재판에 적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재판에 있어서의 제9계명의 적용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진실에 있습니다. 감정이 개입되어서도 안 되고, 단순한 의구심만 가지고 증거도 없이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져도 안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출 23:1-3)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재판장이 범법자에 대해서 판결을 할 때에 범죄의 사실에 따라 정확히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은 보복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확히 손상을 입힌 만큼 갚게하라는 뜻입니다. 눈을 발로 하거나, 이를 눈으 로 갚게 하지 말고 정확히 재판하여 배상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정확한 판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판의 정확성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한 증언입니다. 만일 증인이 거짓 증언을 해서 피의자(被疑者)가 억울한 처벌을 받게 하거나, 반대 로 중죄인(重罪人)이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한다면 큰 일입니다. 증인은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최소한 다음과 같은 증언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로, 허위 증언입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양 증언하면 그릇된 판결이 나옵니다.
둘째로, 과장, 축소, 혹은 왜곡하는 일입니다.
사실보다 크게 부풀리거나, 사실을 작게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셋째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침묵입니다.
상 재판에 서 피의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인정됩니다. 그러나 증인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법정에서는 큰 죄악입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억울한 판결이 나올 수 있습니다.
위증은 재판에서 결정적인 죄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증자를 철저하게 심사하여 처벌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 19:16-19)
만일 어떤 사람이 위증자가 되어 재판이 끝나면 모든 것은 끝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세상 법정에서의 재판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이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래 인간 세상의 재판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도 재판관 에 따라서 형량이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증언에 따라서 재판을 굽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모든 사실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신 1:17)
세상 법정에서 끝났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결이 남아 있습니다. 세상 법정은 대법원 판결로 끝입니다. 그러나 대법원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 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시 7:11-13)
아무튼지 우리는 법정적인 증언을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증인이 되어야 할 처지에 있다면 증언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증언해야 될 자가 침묵하는 것도 제9계명 위반입니다. 또한 거짓된 증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장, 축소, 왜곡, 허위 증언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슬픈 일이지만 손봉호 교수의 말씀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범법 자료 가운데 위증에 대한 통계가 이렇게 소개됩니다. 지난 2000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이 1,198 명인데 같은 기간에 일본에서는 불과 5 명이 위증으로 기소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위증의 숫자가 240 배나 된다는 수치입니다.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서 무려 670 배나 위증을 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기독교인 수는 0.7%임에 반하여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0%가 넘게 집계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 입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정직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는 현실입니다.
엡 4:22절 이하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새사람이 된 가장 현저한 증거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변화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할 때 새사람의 기준이 바로 25절입니다.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것이 도데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거듭나지 못한 성령 충만하지 못한 명목 상의 기독교인들이 1,000 만명있다한들 우리 사회의 정직도가 이 모양이라면 그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 입니다…진실하신 주님…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닮아가기 시작한다면 이 사회는 변화를 외치지 않아도 변화 되고 말 것입니다.
법정 뿐만 아니라…일상 생활에의 적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로, 이웃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 니다. 거짓말도 많지만 거짓 행위도 많습니다. 공문서를 위조하고, 변조합니 다. 거짓 증명서, 거짓 진단서, 심지어 거짓 호적, 거짓 신분증, 거짓 면허증, 거짓 학위… 수백명의 가짜 박사 소동…자신의 신분을 속입니다. (추천서..)
항상 말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출 23:1)
특히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아무 이해상관도 없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공동체 안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공동체가 큰 피해를 입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고, 없는 오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특히 가끔 진실을 말하면서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사람을 잡습니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속아넘어갑니다. 심지어는 평생 사는 가족도 속으면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딤전 5:13)
돌아다니면서 이사람 저사람 만나면서 일구이언 하는 사람은 교회의 악입니다.
둘째로, 이웃에 대하여 진실을 왜곡하거나 확실치 않은 말을 퍼뜨리는 행위 입니다.
지옥에 가면 가장 많이 와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말장난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널리 진실을 왜곡하여 전파한 사람들입니다. (정치인, 언론인..) 가장 많은 소문과 의혹을 전파한 사람들입니다. 왜곡이란 사실의 경중을 뒤집는 행위나, 문맥을 무시하고 낱말을 해석하는 행위입니다. 말은 반드시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화자(話者)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어의 기초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언론들이 단어 하나만 과장하여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사실을 전하는 언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 볼 수 없습니 다. 언론을 통해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론의 왜곡은 사회 전체를 왜곡시키게 됩니다 미확인 된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도 그렇습니다. 요즘 신문 을 가리켜 “따옴표 신문”이라고 합니다. 따옴표 신문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바로 “의혹” 세상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진실은 없고 의혹만 있습니다.
셋째로, 이웃이 오해하도록 진실을 함구(緘口)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증인 되기를 꺼려하고 목격자로 나서기를 꺼려 합니다.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증언을 회피합니다. 물론 경찰에서 증인을 귀찮게 굴고 신변 보호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원망을 살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격자가 증언을 해주지 않으면 피해자가 가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로서는 평생 얼마나 원통하고 괴롭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증인이라는 단어를 <순교자>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 고 있습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순교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희생을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 .. 이것이 본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서 거짓말 을 못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슬쩍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을 하거나 사실을 왜곡 시키면 살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리 스도인들의 모습이 그 당시 거짓이 만연했던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것 입 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고, 선이 악을 이겼고, 진리가 거짓을 이긴 것 입니다.
3. 어떻게 하면 제9계명을 잘 지킬 수 있을까요?
오늘 창세기의 본문을 읽었습니다만… 거짓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거짓의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말의 원조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 해서 아름답게 포장해서 만든 거짓말에 하와가 넘어가고 만 것 입니다. 그래서 요 8장4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는 거짓의 근원이 마귀라고 가르치 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는데.. 마귀는 속삭이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을 왜곡시켰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죽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마귀는 명백한 거짓말을 한 것 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사단의 거짓말을 더 믿고 있다는 것 입니다. 자주 말씀 드렸지만 진화론을 비롯한 마귀의 성공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인류가 사기 맞은 것 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거짓말의 유혹이 찾아 올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유명한 c.s. 루이스가 어떤 청년에게 들려준 말 입니다. 그 청년은 말하기를 자기는 자기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쉽게 거짓말을 한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때 루이스 교수는 이 청년에게 이렇게 충고 합니다. 형제여! 형제가 이제부 터 거짓말 할 때마다 사탄이 형제의 등뒤에서 빙그레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충고 했다고 합니다.
거짓말 할 때마다 사탄은 우리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마귀 는 하늘 보좌를 향해 참소하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저 사람은 내자식입니다. 저사람은 내종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마귀를 따르고 있는 것 입니다. 마귀의 도구로 전락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거짓말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2) 적극적으로 은혜스런 언어 생활을 힘쓰시기바랍니다.
골 4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전도 잘 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언어생활이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보다 강력한 영향력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들의 마땅한 언어 생활 로 <은혜와 소금>이라는 두 단어를 강조합니다. 우리들의 언어생활에 소금을 쳐서 맛을 내고,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 입니다. 언어도 부패한 언어가 있습니 다. 부패한 언어는 거짓된 언어이고 속이는 언어 입니다. 그래서 소금을 치라는 것 입니다.
진실한 언어를 사용할 때 사람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복음의 말씀도 신뢰하게 될 것 이고 우리는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 받게 될것 입니다. 제9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혀를 재갈 먹여야 합니다. 혀는 뼈도 없는 작고 약한 지체지만 실상은 검보다도 예리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시면 의사들이 혀를 먼저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혀를 보면 여러가지 병을 알 수 있나 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혀를 내밀고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후 자신을 돌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 이렇게 자백하며 회개할 때 천사는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어 주면서 말 합니다.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사 6:1-5)
지금 우리들도 성령의 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입술이 깨끗해야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입니다.
(잠 12:19)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시 141: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20: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들이 진실을 말함으로 인해 이웃이 피해를 입을 경우 과연 그 진실이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계속 남게 됩니다. 예를들어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주고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을 어떻 게 생각 하십니까? 출애급기 1장에서 산파들이 출생하는 히브리 아이들을 살려내기 위해 바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어떻습니까? 이런 신학적 윤리적 논쟁으로 말미암아 상황윤리라는 학설도 생겼습니다만…
한결같은 기독교 윤리의 큰 흐름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지 못한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라합과 산파들의 입장에 선다면 우리들도 같은 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지만 … 내가 그렇게 한다고해서 거짓말을 정당화 시킬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동기입니다.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고민을 많이 하느냐가 중요합니 다. 정직과 거짓의 윤리적인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율법적인 태도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입장도 관용하는 너그러운 태도도 중요합니다…
진실한 것과 함께 잃어버린 이웃들을 찾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이웃들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