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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창세기 35:1-8 “ 다시 벧엘로 “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옆으로 새는 야곱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형 에서에게 세일로 가겠다고 하고서는 옆으로 갔습니다. 그곳이 숙곳이였습니다. 집을 짓고 짐승의 우리를 만들어 산 것입니다. 얼마나 짐승의 우리를 많이 지었으면 그곳 이름을 숙곳이라고 지을까요? 그리고 다시 세겜으로 가서는 아예 그곳에서 땅을 사고 삽니다. 자기 형에게 약속한 곧 뒤따라 세일로 간다는 것도 아랑곳없고, 더더구나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따라 벧엘로 밀어 올리시는 것도 관심밖인 것입니다. 엄청난 얍복강의 씨름을 통과하고서 이름이 바뀌고 다리를 절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대로 제대로 가지 못하는 야곱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봅니다. 얼마나 더 이끌어 주셔야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야곱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다시 택하여 하시든지 아니면 그 능력으로 단번에 벧엘로 쑥 가게 하시든지 하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할 수 있습니다. 얍복강에서의 씨름만이 아니라 야곱을 항복시키시고 결국 벧엘로 올라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설득하고 계십니까? 이것에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가게 하시는데 절대로 비행기 태워서 가듯이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자기 발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숙제를 할 때 엄마가 볼 때 답답하다고 해서 아이의 숙제를 자기가 다 풀어주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의 실력이 자라지 않지요? 그러므로 야곱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자기 걸음으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돌아갔다면 돌아간 만큼 그 자리에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심이고 열심이고 고집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아! 나도 야곱 같지만 하나님이 결국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겠구나 하는 것으로 확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드디어 세겜을 떠나서 벧엘로 향하여 갑니다. 그러나 벧엘로 가기까지 34장의 사건이 있습니다. 세겜에서 땅을 사고서 그곳에 눌러 앉아 살고 있으니 야곱의 딸이 그 곳의 여인들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가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겜의 추장 이름이 세겜입니다. 하몰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디나를 보고서 한눈에 반하여 자기의 아내를 삼을 목적으로 디나를 범하고 맙니다. 세겜이 디나를 한번 욕을 보이고 버릴 생각이 아니었음을 그 후속조치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34:3-4절입니다. 비록 강제로 끌어들여 디나를 범하였으나 깊이 디나를 연련하여 자기 아버지 하몰에게 이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몰이 야곱에게 와서 디나를 자기 아들과 결혼을 시키면 우리가 서로 통혼을 하고 그리고 서로 매매하고 기업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디나의 혼인을 위하여 어떠한 예물을 청구하여도 다 해주겠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야곱은 아들들이 오기까지 잠잠히 있습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이러한 야곱의 가만히 있는 태도가 그 하몰의 말이 좋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디나와 통혼을 하게 하면 그 세겜의 재산들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전력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보아집니다. 특히 세겜은 그렇게 큰 성읍은 아닌 것으로 볼 때 야곱의 그러한 계산이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는데 디나의 오빠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몰의 제안에 그들은 속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서로 통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례로 고통중에 있을 때 습격하려고 속인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그러자 세겜의 사람들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다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를 받고 제 삼일째 시므온과 레위가 부지중에 기습하여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리고 자기 누이 디나를 데리고 옵니다. 이미 디나는 세겜의 추장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산들은 약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야곱의 태도를 봅시다. 34:30절입니다. “봉독” 너희가 네게 화를 끼쳐 우리로 모두 죽게 하였다고 탄식을 합니다. 큰일났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이들이 연합하여 우리를 치면 이제 꼼짝없이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가 적은데 어찌하려고 그렇게 하였느냐는 것이지요. 야곱의 이런 말에는 그저 좋은게 좋은 것 아니냐 비록 디나가 욕을 당하였어도 추장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세겜지역이 여러모로 살기도 좋은 곳이기에 우리가 여기서 살면 될텐데 너희 때문에 다 틀렸다 이제는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들들이 그러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처럼 대우함이 옳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왜 일어났습니까? 사실은 야곱 자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듣고서 이곳까지 왔는데 다시 이곳에 머물러 땅을 사고서 살고 있으니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 선지자를 압니다. 물론 요나서 자체는 이런 주제가 아닙니다만 그러나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tm로 가는 배를 타고서 배 제일 밑에 가서 누워 자는 것입니다. 이 요나를 깨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태풍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나 까닭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역할 물건들을 전부 바다에 던지는 것입니다. 요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야곱 때문에 세겜의 일들이 일어났는데 야곱은 도리어 자기의 아들들에게 너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할례를 빌미로 속이고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하여 들어갈 때 기브온 족속이 변장하여 와서는 화친을 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물어 보지도 않고 화친을 청하고 나서 나중에 그들이 진멸 받아야 할 가나안 거민임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하였기에 살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아브라함의 할례의 언약을 가지고 남을 살해하는 일에 사용한 것은 잘못입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야곱 때문이며 바로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가를 벧엘로 가라는 말씀이 떨어지는 때가 언제 입니까?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이는 것입니다. 장인에게서, 형 에서에게서, 이제는 이방인들에게서 죽음의 위협속에서 벧엘로 한 걸음식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순종하면 그것이 인생의 복이며 생명의 길인데도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치열한지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도록 얼마나 많이 방해를 합니까? 그러나 그 모든 장애보다 하나님의 열심히 더 지극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이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아픔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하고 그로인하여 아들들이 살인을 하고 이제 그 부족사람들이 알고서 죽이러 올텐데 얼마나 놀랍고 두렵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왜 택하시고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으시면 생명의 길로 가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에 다른 나라보다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탁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강물에 뛰어 내리면 하필 물이 얕아서 다리만 부러지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여도 약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신세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너희의 살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고집을 부리고 주님께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야곱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국가의 모습입니다.
이사야 1:2-9절입니다. “봉독” 돌아오라는 외치심이 너무 많아서 다 찾아볼려면 몇날 몇일이 걸려도 다 보지 못합니다. 온갖 상처투성이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은 흔적뿐인데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리시는 이유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매를 들고서 우시는 것입니다. 야! 이 녀석아 잘못했다고 빌어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여라 이런 심정으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를 하지요. 다음에 비록 또 그렇게 할지라도 비는 데에 장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매를 드는데도 버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를 꼭 깨물고 내가 무얼 잘못하였는데 그러느냐고 버티면 때로 무섭기까지 하지요. 그런 아이들은 사실 매를 더 맞습니다. 얼마나 더 맞으려고 그러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는 마음입니다.
이사야 몇 곳을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 9:13, 치시는 이유는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라. 돌아오지 않으니 더 맞음. 이사야 31:6-9절을 봅니다. 거역하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 돌아오면서 무엇을 던져 버리고 오는 것입니까? 그들이 의지하고 범죄하던 은우상 금우상을 던져버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적군이 사람의 칼로 하지 않았는데 다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사건 이후에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돌아오라고 매를 드시는 것이지 버린 자식 같으면 팔 아프시게 매를 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버립니까? 은우상 금우상을 버립니다. 자기들이 의지하던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니 오히려 적들이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개인적인 싸움이든 아니면 교회의 싸움이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무엇을 던져버려야 합니까?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힘을, 사람의 수를, 부동산과 동산을 의지하면 그런 것들을 던져 버려야 적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것이 힘인양 가지고 있을수록 적들이 그것을 공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면 죽는 것입니다.
창세기 35:1절 이하를 이제 다시 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네가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그때 벧엘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이 거기서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도망간 지가 2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왜 벧엘입니까? 창세기 28장 15절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이 네게 이곳에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 때문에 야곱은 죽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 야곱의 운명입니다.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위와 같습니다. 하늘나라를 약속으로 받아 놓았다면 그 하늘나라를 좋아할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환난과 고난을 통과하여도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늘나라가 정말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가면서 전에는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버릴 것을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 버리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방 신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바꾸어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상을 의지하였지만 이제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의 식솔들이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들을 빼어 야곱에게 주자 야곱이 그런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고 벧엘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라헬의 드라빔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에게서 훔쳐온 드라빔. 자기를 지켜주리라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옷을 바꾸어 입고서 버릴 것을 버리고 벧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환난을 당하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고 땅에 묻어 버리고 벧엘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거울 정도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그네는 짐이 가벼운 법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순례하는 나그네는 더더구나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지켜주리라 여겼던 우상들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들까지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고 나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35:5절입니다. 하나님이 사방의 고을들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야곱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벧엘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엘 벧엘이라고 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떠나라는 곳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버리라는 것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죽음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으셔서라도 떠나게 하시고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벧엘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아모스 4:6-11절 재앙의 이유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 돌아오라고 하는 사인임.)
52. 창세기 35:9-15 “ 야곱의 허리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느냐고 말라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였다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다른 나라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여도 저렇게 나라가 잘되고 강하게 되는데 우리는 꼴이 이게 무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써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 아닌가 하는 항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남이지만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고생을 합니까? 야곱이 훨씬 더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고생하게 된 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고난의 길입니다. 그의 생애가 얼마나 고생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잠시만 한번 더 살펴봅시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을 하던 때가 나이 70입니다. 그리고 객지에서 비록 아내와 자녀와 재산을 얻게 되지만 장인이며 외삼촌인 라반에게서 죽을 고생을 하고 나중에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살아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 뿐입니까?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합니다. 자기의 큰 아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이런 일이 다 일어납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요셉이 형들의 시기에 의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실신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노년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것이 어찌 평안한 여행이겠습니까? 자기가 살던 땅에 흉년이 들어서 남의 나라에 목숨 살리기 위하여 가는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나이 우리의 조상들보다는 적지만 그러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한마디로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험악한 인생을 보내게 된 야곱을 보고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하시고서 무엇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야곱이 당하는 이러한 환난과 고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이곤 교수의 구약의 고난신학이라는 논문에서 보면 성경에는 고난의 기원에는 별로 말하지 않고서 고난의 원인과 그 목적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고난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 활동 양식.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고난이 왔고 그러므로 인간의 고난이 죄스러운 인간의 현실을 제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준 것이지만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죄에 대한 보응적인 차원에서의 고난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을 거시는 것으로서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요셉같은 경우에는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계론적으로 죄에 대한 응보의 고난만이 아니라 고난을 자유롭게 이용하시는 역사의 유일한 주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 고난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교육 또는 하나님의 훈련수단.
아모스에서 보면 고난의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재앙이 나타나고 그로 인한 고난이 점철되는 것은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돌이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사야서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어찌 더 맞으려고 거듭 거듭 반역하느냐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한 곳을 보고자 합니다. 호세아 2:6-7절입니다. “봉독”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는데 이 여인이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살다가도 가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인을 다시 값을 주고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가시로 길을 막고 담으로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가시와 담이란 고난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비록 아내가 바람을 피울지라도 그 아내를 다시 돌이켜 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그냥 너 갈 데로 가라 이혼 해 주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값을 주고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바람피우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왜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가시와 담으로 막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 7:1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시는 언약의 내용입니다. 너의 자녀에게 내가 아비가 되어서 범죄를 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는 하겠지만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고난이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여 매를 드는 그런 고난입니다.
3) 동족이 받을 징벌을 대신하여 받는 속량적 고난.
예를 들어 모세를 본다면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시고 다시 만들어 내시겠다고 하시자 자기의 생명을 걸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면 저의 이름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족의 범죄로 인하여 받을 징벌을 대신 감당하고자 하는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고난은 어떤 의미로 보입니까? 2번으로 보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인과응보적인 고난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기에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에서 고난을 주시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훈련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는 것은 우리가 꼭 죄를 지어서 그 죄의 결과로만 고난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를 볼 때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보응하시거나 정죄의 차원이 아니라 야곱에게 나타나실 때 마다 야곱의 죄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너가 가야할 곳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고난이 많았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가지 않으니 훈련의 강도가 더 세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가게 됨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여름방학 때 마다 대학생을 모집하여 국토순례를 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어느 제약회사가 지원하고 대학생을 모집하는데 부산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걸어가는 것입니다. 590킬로미터를 걸어가는데 21일 만에 걸어갑니다. 마침 그때에 비가 한참 올 때여서 비를 맞고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이 물에 불어터서 껍질이 발바닥만 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약 150여명이 출발하여 완주한 학생이 140여명인가 하였는데 그런데 중간에 실신하여 쓰러지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앰블런스에 실어서 가긴 하는데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함께 합류하여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걸음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쓰러진 곳까지 차로 싣고 와서 혼자서 다시 출발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도 걸어서 가야만 완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 프로를 보다가 우리의 훈련도 저렇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하나님의 나라고 바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걸음으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 쓸데없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정말 생명이 좋은 것이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좋은 것이구나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훈련에 부름 받은 자는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포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국토 순례에서는 정 안되면 탈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반드시 완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발에 붕대를 감고서 절둑거리며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와 매 맞은 흔적의 절둑거림이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절정이 야곱의 허리가 위골되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것입니다. 35:11절입니다. “봉독” 밧단 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오자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내용이 11절입니다. 우선 9절에 보시면 “다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내용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전능을 아시겠습니까? 야곱이 아무리 도망가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 놓고야 마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리고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고 하십니다. 지금 야곱의 허리는 부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부러진 허리로부터 어떻게 열왕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물론 지금까지 낳은 자녀들이 있으니 그들로부터 많은 후손이 나오지 않는가 하시겠지만 그러나 성경이 그러한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부러진 허리로부터 열왕들이 나온다는 것은 단지 야곱의 개인의 훈련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하나님은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고서 이삭을 낳듯이 그렇게 자기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그 이름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들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골된 허리, 불구가 된 그 허리를 통하여 열왕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라헬이 모두 자녀를 생산치 못하는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나왔다는 것을 이제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위골된 허리는 개인적인 훈련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만들어 내실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골된 허리에서 나오는 백성이란 바로 새롭게 창조 되어야 나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법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흔히 하는 말이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직 더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복음성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더 부셔져야 하리 깨져야 하리 더 깨져야 하리”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오는 후손들은 깨어진 허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인생입니다. 그 열왕들의 결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깨어짐, 그 십자가의 버려짐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는 대속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고난에는 야곱을 훈련시키시는 내용도 있지만 그러나 부러진 허리로부터 열왕들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창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상의 깨어짐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마치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열왕들이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의 고난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시고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려 내시는 길은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도 야곱처럼 꺾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꺾어짐을 당하여 깨어짐을 통하여 우리가 원래부터 목이 곧은 백성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기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고 나니 그 위골된 허리로 인하여 자랑은커녕 절뚝거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위골된 그 허리, 부러진 그 허리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복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깨어진 모습들이 있습니까? 많이 깨어질수록 주님의 은혜는 더욱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현장에서 주님은 11-12절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열왕이 허리로 많은 민족이 야곱의 허리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약속의 땅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서 깨어지면 무슨 땅을 주시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자꾸만 눈에 보이는 땅을 원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은 야곱의 복을 우리도 받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열왕이 나오게 된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 앞에서 많이 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은혜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이 깨어지고 우리의 쓸데없는 고집이 깨어지고 나의 나됨을 나의 것인 양 인정하려한 것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러한 은혜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5절 “봉독”
53. 창세기 35:9-15 “ 야곱의 복 “
지난주에 이 본문으로 야곱의 허리에서 열왕이 나오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고 하시는 이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복의 개념이 성경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혼동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무엇이 복인지를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만 오늘은 야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서 우리도 그러한 복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오늘 본분에서 무엇을 복이라고 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자 다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야곱에게 약속하시는 복은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고 이삭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후손과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야곱이 부자냐 아니냐 그런 것은 하나님의 약속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봅니다. 창세기 12:1절에서 3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주시고 저주하면 저주를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 내신는지를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1-7절입니다. “봉독” 15:16 “봉독” 땅의 약속.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어떤 복을 허락하시는가 하면 후손과 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손과 땅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복이며 그 후손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복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후손이라고 하여 출세하는 그런 후손이 아니고, 땅이라고 하여 이 세상의 부동산이 늘어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미 후손과 땅의 약속을 하시면서 어떤 후손과 땅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땅부터 봅니다. 창세기 15:16-21절입니다. “봉독” 부동산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의 싸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지는 것과 그 죄악된 땅을 정복하는 차원에서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동산의 확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감당할 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 후손이란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말씀하신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치신다는 차원의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획득할 자는 죄악을 물리치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을 말하는 후손이란 창세기 22:17절입니다. “봉독”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레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후손이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복이란 아브라함의 후손이 전쟁을 하여 땅을 차지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언약하신 그 분위기를 보니 이미 전쟁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이제 야곱에게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야곱을 하나님이 이미 복중에 있을 때 선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어떠한 선한 행위가 없을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식으로 말하자면 창세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의 전제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복이란 하나님의 선택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인생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는 일에 사용되어지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기에 야곱은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아무리 자기의 수단과 꾀를 동원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고자 하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나님이 하시면서 야곱의 죄와 허물을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그러한 간사한 꾀와 속임수를 하나님이 한번도 책망을 하시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 선택하시고 나서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가는 때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속임수로 받아내어도 하나님은 그냥 계셨습니다. 그런데 속일대로 속이고 도망가는 중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벧엘입니다. 창세기 28:13-15절입니다. “봉독” 자주 본 말씀이라서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이 언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땅과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야곱에게는 처음 나타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물을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 왜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속였느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네가 그런줄 알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코 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이란 야곱이 직접 받은 것이 아니니 지금부터 그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책망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마다 비록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을 지라도 야곱에게 책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언약만을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고생을 하고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하고 세겜성의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러나 혼자의 두려움이고 오히려 세겜의 사람들이 두려워 한 것입니다.
31:3절입니다. 라반에게서 20년이 지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벧엘로 올라가라. 그런데 책망의 말씀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32:29-30절입니다. “봉독” 역시 여기서도 책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지만 오히려 야곱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지으면서 야곱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고서 살자가 없는데 자신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이 바로 야곱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서도 죽지 않은 이 복이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이란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은 감히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지를 못합니다.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우리는 발음을 합니다만 유대인들은 감히 부르지 못하여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 부르거나 거룩한 네 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고서 살 자가 없음을 출애굽기를 통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신 모습을 통하여 더욱 각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도 살아난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으니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천사를 보내어 만나게 하시는 것은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같은 경우도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죽지 않았다고 하여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 평강입니다. 유대인의 인사말인데 우리식으로 하면 안녕하십니까 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안녕이란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이 샬롬이며 평강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는 자의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허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책망을 받지 않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개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국가를 한 인격체로 보면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를 행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 있으면 그 죄들을 하나님이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안에 있으면 허물을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란 결국 언약의 후손이 와서 그 땅을 차지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을 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내용을 이제 때가 차매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복을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개념으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으로 진군을 하여 들어오는데 모압왕 발락이 겁이 나서 이들을 막아보려고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저주를 퍼붓게 합니다. 그러나 저주를 하려고 입을 열면 주의 신이 임하여서 저주 대신 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내용을 봅니다. 민수기 23:7-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저주치 않은 자를 내 어찌 저주하리요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3:19-2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저주라도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힘입고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이들의 허물을 하나님이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복이며 이스라엘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24:9절입니다. “봉독” 누구에게 하신 언약입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힘입고 있으면 어떠한 저주가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치는 것입니다. 민수기 24:7절입니다. “봉독” 야곱에게서 한 홀이 나와서 적을 다 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후손이 와서 적을 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복으로 다가 왔습니까? 그 후손이란 여럿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손에 대하여는 분명하여졌습니다. 야곱의 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허물의 가리움을 받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구약에서의 땅은 가나안땅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땅이 그 기능을 다하였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성지가 아닙니다. 성지순례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성지가 아닙니다. 이미 그 기능이 끝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의 땅이 하나님의 언약의 땅으로 자리잡고 있으려면 그 땅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냥 세월이 지나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없어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그 성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할하실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땅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후손의 복과 땅의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 언약안에 있는 자는 이제 어떤 복을 누리는 것입니까?
그 허물의 가리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사랑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바로 아들의 피로 세워진 아들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복입니다.
히브리서 11:8-12절을 봅니다. 후손과 땅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손이란 이미 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땅이란 가나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된 상태에서의 복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도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허물과 죄사함을 알고 그의 지으실 터가 가나안땅이 아니라 영원한 주님의 나라임을 내다본 것이 복이라고 하는데 오늘 이 언약의 이루어짐을 보면서 아직도 이 세상의 없어질 것들을 복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야곱의 복이 무엇인지를 통하여 오늘 우리의 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확인하시고 세상의 것들에 기죽지 마시고 담대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54. 창세기 35:16-29 “ 라헬의 묘 “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였던 라헬이 죽습니다. 네 명의 아내 중에 가장 사랑한 라헬이 가장 먼저 죽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라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후대 사람들도 그 무덤을 보고서 라헬의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장남 르우벤이 그의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배신 분노 애증 추함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택하시고 부르시고 자기의 언약의 백성으로 편입시키시는지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죽음입니다. 이삭의 나이 128세로 죽게 되는데 그 장사를 이삭과 에서가 함께 지내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을 향하여 복수의 칼날을 간 것은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언약을 야곱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곱과 에서가 함께 아버지를 장사하고서는 서로 따로 살게 됩니다. 창세기 36:6-7절을 봅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갑니다. 소유 재산이 너무 많아서 야곱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가 다른 곳으로 가고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하던 곳에서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남인 에서가 아버지 이삭이 살던 곳에서 거하지 않고 에서가 떠남으로 야곱이 아버지의 살던 곳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연결이 됩니다. 이는 언약의 흐름입니다. 이삭은 죽었지만 그러나 그 언약은 야곱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서는 자연히 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라헬의 죽음과 그 라헬의 무덤과 그의 통곡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라헬의 전체 생애를 한번 조망하여 보자면 라헬은 야곱의 눈에 띄었고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것 외에 라헬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였다던가 마음씨가 고왔다던가 하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의 신랑을 두고서 무섭게 질투하면서 야곱을 독차지 하려고 하였던 라헬이면 남편을 조르던 그런 라헬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남편을 따라 도망을 칠 때도 드라빔을 훔쳐서 떠나는 라헬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이 앞섰던 그런 여인입니다. 우상 드라빔을 훔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그침 없이 거짓말을 하는 라헬입니다. 이러한 여인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생산되는 것이 이러한 인간들의 질투와 시기 속에서 생산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라헬이 하나님의 언약속에 들어가게 되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 물론 직접적인 자기 몸으로 나은 자는 요셉과 베냐민 이지만 라헬과 레아를 함께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어머니로 보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 단지 야곱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입니다. 야곱의 눈에 뜨이고 야곱이 사랑하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위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 언약 외에 또 다른 복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통하여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들에게 붙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기존의 여인들 보다 더 욕심과 시기와 질투가 많은 자로 볼 수가 있습니다. 자녀가 없었기에 더욱 더 집착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인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머니로 복을 빌어 줄 때 불리우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룻기서 4:10-11절을 봅니다. “봉독” 보아스가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내용입니다. 보아스 보다도 룻과 더 가까운 친족이 있어서 그에게 나오미의 남편의 유업을 이어 주겠느냐고 하자 거절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 일을 합니다. 보아스가 이일을 다 마치고서 이 일에 너희가 증인이라고 하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 일에 자신들이 증인이 된다고 하면서 보아스를 축복하는데 어떤 축복을 합니까?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룻이지요. 이스라엘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자로 불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롯을 축복하는데 이러한 복을 빌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땅 모압의 여인이 라헬과 레아의 복을 이어 받아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들이 야곱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야곱 자신도 얼마나 욕심꾸러기 이고 교묘하며 속임수의 사람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그러한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이 우리가 바로 모든 언약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을 놓치면 기독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죽는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그 산고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라헬이 산고로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자 아들이다 라는 말을 듣고 슬픔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 이름을 바꾸어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지어버립니다. 그렇게 하여 라헬은 고통 중에 베냐민을 해산하고서 죽게 됩니다.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어서 고통 하였고 그리고 겨우 두 번 째 아들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자 야곱이 라헬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데 후대에도 이 라헬의 무덤을 사람들이 기억하였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사울이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서 사울이 왕으로 부름 받은 징조를 말하면서 라헬의 무덤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라고 합니다. 이를 보건데 수백 년이 지난때 에도 라헬의 무덤이 그대로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은 자녀가 없어서 통곡한 여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지만 그 자녀를 낳기 전까지 통곡하였습니다. 창세기 30:1,22절을 봅니다. 내가 죽겠노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라헬을 들으시고 자녀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라헬의 고통을 예레미야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15-17절입니다. “봉독”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입니다. 라헬이 애곡한 것을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많이 죽고 또 포로로 잡혀 가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서에서 본대로 이스라엘을 세운 라헬과 레아라고 하였듯이 라헬의 통곡은 이스라엘이 자녀를 잃고서 통곡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의 자녀가 요셉과 베냐민인데 요셉이 두 지파로 되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가 되고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쪽에 절반은 북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남쪽 유다에 속하여 집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자녀가 남북으로 다 나누어져 있는데 이 라헬의 묘가 있는 곳이 남북의 경계선이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라마에서 라헬이 통곡한다는 것은 이미 죽은 라헬이 무엇을 통곡합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 갔기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비참함과 그 고통을 라헬의 통곡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애곡 속에서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예레미야 31장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새 언약을 말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통곡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잃고서 울부짖는 자들의 소리가 있게 된다는 이 예언을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성취가 되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6-18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박 박사들이 헤롯의 궁으로 들어가서 왕의 나심을 묻게 됩니다. 그러자 소동이 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으니 정확하게 유대땅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자기도 그 왕에게 경배하도록 찾거든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박사들에게 현몽하여 다른 곳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제서야 헤롯왕이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서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자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자식까지 죽이는 그런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태어났다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어린 아이를 죽였으니 그 아이의 죽임을 본 어머니들의 통곡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이 통곡의 사건을 예레미야 31장의 라마에서 라헬의 통곡이 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죽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의 슬픔의 고통을 지금은 헤롯 시대에 영아의 학살로 인하여 울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 세상의 세력이 야곱의 후손을 미워한 것처럼 그러한 세력이 헤롯을 통하여 야곱과 라헬의 자손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표출이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세력이 이 세상의 세력임을 보이는 사건이 영아의 살해입니다.
시편 2편 1-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세상의 열왕들이 모여서 분노하는 것은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적의 한 형태가 라마의 통곡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웃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그들에게 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무슨 싸움에 휘말려 있는 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15절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요한 계시록에 잘 나타납니다.
계시록 12:1-17절입니다. “봉독” 용이 해산하는 여인의 아이를 삼키고자 하나 그러나 그 아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으려고 용이 싸움을 거는 과정에서 라헬의 통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장권세로 다스릴 자가 시편 2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땅으로 내어 ?기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12:17절입니다. 용이 누구를 대적합니까?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싸움의 대상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방법이 계시록 13장에서 보면 짐승에게 절하고 표를 받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짐승에게 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름으로 오는 고난을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에 절함으로 세상적인 편안을 누리며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결코 세상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흔들어 내시고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가 세상에 닥치는 환난으로 인하여 애곡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 빼았겼다고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싸움이 있습니까? 라헬의 애통이 있습니까? 라헬은 그 고통이 너무나 크기에 위로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 위로가 예레미야 31:16-17절입니다.
이러한 위로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위로도 진정한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