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봄이고, 또 꽃이다.
매년 반복되는 만남이지만 싫증나기는커녕 더욱 기다려지고 반갑다. 지금 '봄맞이 강' 섬진강 주변이 한껏 달아올랐다.
꽃샘추위가 제법 매웠건만 봄꽃은 예년에 비해 일찍 화사하게 피어났다.
하늘하늘 순백의 매화, 병아리보다 부드러운 산수유꽃이 섬진강에 꽃그늘을 드리우며 봄을 열기 시작했다.
■ '꽃절' 선암사, 대각암의 한적한 꽃구경
남녘 첫 봄꽃여행 행선지는 전남 순천의 '꽃절' 선암사다.조계산 자락에 자리한 태고총림의 사찰이다.
승선교와 강선루를 지나는 고즈넉한 절길을 올라 만난 선암사.
백매와 산수유는 화사하게 피어났지만 각황전 돌담가의 토종 매화 선암매는 짙은 분홍의 꽃망울만 몽글몽글했다.
수백년 된 늙은 매화나무가 맺은 꽃이건만 손끝에 느껴지는 꽃망울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곧 터질 꽃폭죽의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중창불사가 한창인 선암사 경내를 벗어난 발길은 굴목이재길로 향했다. 선암사에 속한 암자 대각암으로 이르는 길이다.
오솔길을 조금 올랐을까, 길 옆에서 예쁘장한 바위 부처를 만났다.
고려 중후기 것으로 추정되는 선암사 마애여래입상이다. 부처를 새긴 고운 선이 오랫동안 시선을 잡아 끌었다.
방금 전까지 바위를 쪼다 잠시 정을 내려놓은 듯 그 선이 선명하고 날카롭다.
한 굽이 대숲을 돌아드니 대각암을 품은 너른 공간이 열렸다.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암자다. 넓게 만든 못 위편으로 단청 벗은 맨 얼굴의 누각, 대선루가 자리했고 그 위에 최근에 지어진 듯한
인법당이 들어섰다. 대숲의 초록바람이 뻗어 매화와 산수유의 꽃그림자를 일렁이더니 법당의 풍경을 두들겨댄다.
절 마당 한쪽에는 오래된 문 하나가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기둥은 비쩍 말랐고, 다 삭아가는 문짝은 무거운 돌에 받쳐져
활짝 열려 있다. 흙더미 드러난 지붕은 깨진 기왓장이 볼품없이 덮고 있다.
그 고독한 문으로 사람 대신 봄바람만 드나들고 있다.
■ 하동 먹점마을의 매화
순천 땅을 떠나 찾아간 곳은 섬진강 너머 경남의 하동. 끼니 때가 넘었길래 재첩국 한 그릇으로 시장기와 전날 밤의 숙취를
달래볼 요량으로 찾은 길이다. 진한 재첩국으로 배를 불리고 나서 섬진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청매실농원이 자리잡은 광양시 다압면 풍경이 강물과 함께 한눈에 들어왔다. 흐드러진 매화꽃이 안개처럼 자욱했지만
원경의 매화 군락이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섬진강변 백운산 자락 대부분이 온통 벌거벗었다. 매화가 돈이 좀 된다 하니 죄다 산을 깎아 매화밭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리캉을 댄 듯 깎여 나간 맨살의 산자락이 꽃구경에 흥이 난 춘심에 휑하니 찬바람을 불어댔다.
다압의 매화밭으로 꽃구경을 가려던 계획을 접고 대신 하동의 매화마을을 찾아 올랐다.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이 새 목적지다. 지리산 자락에 숨은 산 속 오지 마을이다.
섬진강변의 아랫마을 흥룡마을에서 급경사의 좁은 농로를 힘겹게 1.5km 가량 올라가면 먹점마을을 만난다.
협곡이 열리며 갑자기 펼쳐지는 드넓은 공간. 시야가 터지며 거대한 설치작품 같은 층층의 다락논이 시선을 빼앗는다.
그 계단식 논두렁 밭두렁과 산비탈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매화나무들이다.
30여 가구 대부분 매실 농사를 짓는, 하동서 가장 큰 매화마을이다.
아랫마을인 흥룡마을도 먹점 못지않게 매화로 가득하다. 산비탈서 바라보는 매화의 꽃물결이 마을을 덮고 섬진강을 건너
광양 다압면까지 이어졌다. 흥룡마을의 매화나무 밑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제 막 돋기 시작한 쑥을 캐며 봄을 맞고 있었다.
건너편 산자락 산길에선 허리 굽은 어르신 한 분이 지게를 지고 나무둥치를 나르고 있다. 힘에 부치는 듯 몇 번을 쉬어가며
발을 옮기는 모습이 고단해 보이면서도, 그 배경이 온통 새하얀 매화꽃이다 보니 어르신께는 죄송스럽지만
마냥 평화롭고 아늑하게만 느껴진다.
■ 구례 산동의 산수유마을
지리산 만복대 아래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일대는 산수유 마을이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명실공히 최대
산수유 산지다. 상위, 현천, 원촌 마을 등 30여 부락이 산수유를 키우고 있다.
섬진강변이 하얀 매화 안개로 자욱하다면 지리산 자락 산동은 노란 구름이 내려앉은 듯한 동화 속 세상이다. 냇물과 돌담,
너른 바위 위에 가지를 드리운 산수유 나무가 부수수 노란 빛을 흩뿌리고 있다.
산동의 산수유마을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맨 윗동네인 상위마을. 고샅의 이끼 두껍게 내려앉은 돌담과 어우러진 노란
산수유꽃이 매력적이다. 지난 가을 다 떨구지 못한 빨간 산수유 열매가 새 봄꽃과 함께 매달려 있기도 하다. 꽃과 열매가
한 가지에 달려 서로의 과거와 미래를 나누고 있다.
19번 국도 건너편 현천마을은 산수유가 가장 밀집해 피는 마을이다. 상위마을 등이 관광객으로 넘쳐날 때도 이곳은 알음알음
사진작가만 찾아오던 한적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 '산수유 테마마을'이란 간판이 내걸렸고, 관광객을 위한 주차 공간도 마련해 놓았다. 동네 위쪽엔 마을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갖추었다.
상위마을 아래 반곡, 대음마을도 노란 산수유 풍경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곳이다. 이 두 마을도 변화 중이다. 내를 건너던
허름한 다리는 그새 헐렸는지 튼튼한 새 다리가 대신 서 있다. 마을엔 물길을 따라 산책로 나무데크 공사가 한창 벌어져
소음으로 가득했다. 곧 열릴 산수유축제를 위한 공사란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던 산수유가 인공의 멋을 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에 괜히 맛을 더한다고 넣은
인공조미료의 씁쓸한 맛을 느끼는 기분이랄까.
해서 또 다른 산수유 마을로 차를 달렸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지리산 구룡계곡 입구의 용궁마을이다. 행정구역으론 도(道)를
달리하는 곳이지만 구례 산동면과는 고개 하나만 건너면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도 대규모 산수유 군락지가 있다. 마을의 산수유 나무는 1,000그루가 넘는다. 그 중 마을 한복판에는 과수원처럼
수백 그루의 산수유나무가 밀집해 있다.
고개 하나 차이인데도 아직 봄기운이 덜 미쳤는지 꽃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참이다. 관광지가 아닌 탓에 마을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나뭇가지엔 비닐 조각이 매달려 펄럭이고, 찬바람에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간사한 마음은 그새 구례 산동의 산수유마을을 다시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노란 동화 속 세상을.